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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에 자리한 자연 마을. 20세기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한 부산 지역에는 전형적인 도시 경관을 자랑하는 시가지와 함께 강서구와 기장군 일대 농촌 경관이 혼재되어 있다. 급격히 늘어난 인구와 도시 기능을 부산 지역 내에 수용하기 위해 공간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무분별한 확산을 막으려고 외곽 지역 토지 이용을 조절하는 정책에 의해 발생한 경관의 혼재이다. 이러한 부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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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에 있는 벽화로 장식된 마을. 벽화 마을은 보통 오지 마을이나 산동네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의 벽화 마을도 산동네 아니면 도심 속의 오지라고 하는 낙후된 곳에 형성되었다. 부산에는 6·25 전쟁으로 밀려드는 실향민들을 위한 집이 매우 부족하였다. 잠 잘 곳을 찾아 산으로 올라가서 무허가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무허가로 출발한 곳이기에 관공서의 손길이 미치지 못...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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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 지명의 유래가 된 검정 다리는 보수천 중류에 설치되어 중구 보수동과 서구 동대신동을 연결하였다. 검정 다리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하는데, 하나는 개항기 설치된 통나무 다리의 부식을 막으려고 까맣게 그을려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다음으로는 다리 인근 부산 형무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수의가 검정색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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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있는 자연 마을. 청관(淸館)이란 이름은 마을에 청국영사관과 청국 전관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붙여졌다. 1884년(고종 21) 청관 마을이 있던 지역에 청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청국영사관이 설치되고 청국 전관 조계지를 설치하였다. 청관이 들어선 이후 그 주위로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점포[상해로부터 가져온 각종 비단과 포목, 꽃신,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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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화교 2세들이 외지에 살면서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수시로 마을을 찾는다 하여 충효촌(忠孝村)이라 불렀다. 충효촌은 6·25 전쟁 때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화교들의 임시 수용소가 집단 거주지로 정착되며 형성된 마을이다. 당시 이 지역은 청관 조계지로 비탈진 공동묘지였으며, 이 지역에...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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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에 있는 자연 마을. 고분도리는 마을에서 대티 고개에 이르는 길이 꼬불꼬불하여 ‘고불거리는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고분도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 후기 서대신동에서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거주 지역에 자리하며, 「부산 고분도리 걸립」[부산광역시 지정 문화재로 정월에 행하던 세시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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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에 있는 자연 마을. 구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주변에 자라는 야생화를 꺾어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76년(고종 13) 부산항의 개항으로 일본인 전관 거류지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군 수송로를 조성하려고 초량 왜관에서부터 구덕 고개를 넘어 구포까지 연결되는 도로[임진왜란 때부터 사용했던 길]를 개수하였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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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에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밭[楮田]이 있어 닥박골 마을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닥밭골 또는 딱밭골로도 불렀다. 닥박골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 후기 서대신동에서 인가가 있던 지역과 인접해 있다. 일제 강점기 부산위생병원 인근에 닥박골로 불린 조선인 거주 지역이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이 속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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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동산리(東山里)는 동대신동 동쪽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전하는 바가 없지만, 마을이 속한 지역이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인가가 없던 지역이어서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고지대에 영세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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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 앞 포구인 모지포(毛知浦)에서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모짓개라고도 불렀다. 한편 몰치포(沒稚浦)로도 표기하는데, 마을 앞바다에 숭어 어장이 형성되어 ‘모찌’[숭어 새끼의 일본식 명칭]가 지천으로 잡히는 포구라 하여 모찌포로 부르고 몰치포로 표기하였다고 전한다. 모지포 마을은 신석기 시대 유적인 암남동 패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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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신동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북산리(北山里)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전하는 바가 없지만, 조선 후기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살았던 곳으로 전한다. 마을은 조선 후기 동래부 사하면 대치리에 속하였으며, 1866년(고종 3) 사하면 부촌리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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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에 있는 자연 마을. 송림이 우거져 송도(松島)로 불렀다. 송도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송도 해수욕장은 우리나라 제1호 해수욕장으로 개항 이후 일본인 거주자가 증가하자, 1910년 송도유원주식회사(松島遊園株式會社)를 설립하고, 1913년 거북섬[송도 해수욕장의 동쪽에 있는 섬으로 현재는 송림 공원과 연결된 다리가...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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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4동에 있던 자연 마을. 감골 마을이란 이름은 감 고개에 자리하고 있어 유래하였다. 감 고개는 감나무가 많아 붙여졌다. 감골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까지는 마을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1900년대 이후 빈민들이 정착하며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6·25 전쟁을 겪으며 피난민 판자촌이 형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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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2동에 있던 자연 마을. 고관(古館) 마을이란 이름은 마을에 있던 두모포 왜관이 폐쇄되고 초량 왜관으로 이설된 후 왜관이 있던 지역에 형성된 마을이라 붙여졌다. 구관(舊館) 마을로 불리다가 고관 마을로 변하였다고 한다. 고관 마을은 1678년 이곳에 설치된 두모포 왜관이 초량 왜관으로 옮긴 후 왜관이 있던 자리에 형성되었다.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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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 1동에 있던 자연 마을. 널박 마을은 마을 근처에 넓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다른 설로는 밀집된 민가의 모습이 바짝 붙어 있는 형태라서 널박으로 불렸다고도 하며, 마을이 남동향의 양지쪽이며 앞에 있는 바닷물이 반사되어 늘 밝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널박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이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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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 3동에 있던 자연 마을. 노하(路下) 마을은 부산포 왜관과 조선인 거주 지역을 잇던 길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노하 마을은 1407년(태종 7) 부산포 왜관이 설치되며 왜관의 무역을 담당하고 생필품 판매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왜관은 고려 말부터 남해안 일대에 약탈을 일삼던 왜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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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좌천 4동에 있던 자연 마을. 능풍장(陵風莊) 마을이란 이름은 일제 강점기에 오이카와 지로[及川民次郞]의 능풍장이라는 별장이 있어 붙여졌다. 능풍장 마을은 명칭 유래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이후 형성된 마을로 추정할 수 있다. 경부선 공사 때 철로가 영가대(永嘉臺)[일본에 파견하는 조선 통신사가 출발하고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를 지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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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던 자연 마을. 대지막거리 마을은 돼지를 기르는 움막이 있는 거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지막거리 마을의 형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마을 이름에서 추정할 수 있다. 개항기 일본의 침략으로 동구 일원 해안의 매립 공사가 시작되면서 동원된 인부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에 돼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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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자연 마을. 1913년부터 1938년까지 일제는 동구 수정동·범일동 일대와 중구의 중앙동 일부, 남구의 우암동 일부에 이르는 해안을 매립하여 방대한 매축지(埋築地)를 조성하였다. 이 공사로 초량동·수정동·범일동을 거쳐 우암·적기까지 150만 5884.3㎡가 매축되었다. 이 중 초량천 하구에 형성된 마을을 매축지 마을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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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던 자연 마을. 범내골 마을[범일동]은 마을에 범내골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범내는 한자로 표기하면 호천(虎川) 또는 범천(凡川)이 된다. 유역의 골짜기를 일컫는다.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범내골 마을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동평면에 범천(凡川) 1리·범천 2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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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좌천 1동에 있던 자연 마을. 사도촌(沙道村) 마을의 ‘사도’는 모랫길이라는 뜻으로 동천과 좌천에서 떠내려온 모래와 바닷물에 실려 온 모래가 쌓여서 넓은 모래톱이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또한 신라 시대 사도성이 있어 사도촌 마을로 불렸다고도 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사도촌 마을 은 동천과 좌천에서 운반된 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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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초량 3동에 있던 자연 마을. 사량(沙梁)은 ‘모래 다리’를 뜻하는 것으로 강이나 바닷가에 생긴 모래톱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후 초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초(草)는 ‘억새’, ‘갈대’라는 뜻으로 갈대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사량 마을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 3동을 중심으로 지금의 초량동 대부분에 해당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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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초량 6동에 있던 자연 마을. 산막(山幕) 마을[초량동]은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때 벌채를 위한 임시 주거지인 산막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산막 마을은 1900년대 초 일제가 경부선 철도를 부설할 때, 이곳의 우거진 나무를 베어 침목으로 쓰기 위해 인부들의 산막을 만들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막이 모여들며 형성되었다. 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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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 5동에 있던 자연 마을. 소금을 굽던 마을이라 하여 소금 마을이라 불렀고, 이후 소고 마을로 변하였다고 전한다. 소고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이 있던 지역에 조선 후기 증발식 제염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상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 이곳에 소금막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본격적인 염전이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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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던 자연 마을. 연동개(蓮東開)는 마을 서쪽 소(沼)에 피어난 연꽃이 동쪽을 향하여 피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동개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자성대에서 흘러드는 지류와 동천 사이 땅에 있던 마을로 전한다. 마을은 조선 후기 동래부 동평면에 속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지류와 동천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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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 속했던 자연 마을. 오바골 마을의 명칭에 대해서는 명확한 유래가 없다. 알려진 여러 이야기 중 하나는, 원래 이곳은 원정 골짜기로 불렸는데, 이 골짜기에서 마을 아낙들이 빨래를 주로 해 옷을 빠는 곳이라 하여 오바골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하나는 이곳 언덕에 호박을 많이 심어 호박골 마을로 불렀고, 이후 오바골 마을이 되었다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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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자진내 마을 이름은 좌천의 ‘좌(佐)’와 부산진의 ‘진(鎭)’이 합쳐서 좌진이 되었다가 자진내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진내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이 속한 지역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곳으로 전한다. 조선 후기에는 개운포로 불리며 왜관이 설치되어 있어 민가가 있기는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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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있좌천(佐川) 마을[좌천동]은 좌천을 따라 해안까지 길게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좌천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좌자천[좌천]은 동래부에서 20리에 있고 좌자천리(佐自川里)는 동래부에서 21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오랜 역사를 알게 한다. 1904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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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 1동과 부산진구 범천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산속의 좁은 분지에 자리 잡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창 마을로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안창 마을은 6·25 전쟁 때 모여든 피난민들의 무허가 판자촌으로 형성되었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 부산시 초량출장소, 1957년 부산시 동구 범일동, 1963년 부산직할시 동구 범일동에 속하였다. 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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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초량 2동과 초량 4동에 있던 자연 마을. 연화동(蓮化洞) 마을은 마을에 연꽃이 피는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화동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로 왜군을 맞아 순절한 정발(鄭發) 장군이 마을의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전해져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이 속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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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4동에 있던 자연 마을. 외솔배기 마을은 마을에 큰 노송(老松)이 홀로 서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외솔배기 마을은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6·25 전쟁 이전까지 이 지역이 묘지였으며 외솔이 무덤 가운데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에 수정동의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 당시 피난민 촌으로 형성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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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초량 1동에 있던 자연 마을. 죽림동(竹林洞) 마을은 마을 가까이에 대나무 숲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죽림동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어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일제 강점기 부산부 초량동에 속하였다. 1949년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편되었고, 1951년 부산시 초량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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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5동과 좌천 4동에 있던 자연 마을. 화장막(火葬幕) 마을은 마을 주변에 화장막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화장막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의 지명 유래가 된 화장막은 가건물의 형태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마을은 명칭을 통해 볼 때 화장막 건립 이후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영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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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에 있던 자연 마을. 포구의 안쪽, 곧 개[浦]의 안쪽 마을이라 하여 개안[浦內] 마을이라고 이름 붙였다. 개안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기록에서 확인되는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00년대 초반만 해도 마을로서의 형태가 뚜렷하게 전하지 않다가 1910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부산부 사중면 영선리가 되었다. 1925년 영선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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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에 있던 자연 마을. 곡수 마을이 있던 지역은 해군 전용의 연료 보급용 저탄장(貯炭場)[석탄 저장 창고]이 있어 석탄고 마을로도 불렸다. 곡수라는 명칭은 코크스[석탄의 한 종류]를 콕스로, 이후 곡수로 차음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한다. 곡수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1885년(고종 22) 일본인들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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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영도와 육지를 잇는 나루터 주변에 있던 마을이라 하여 나릿가 마을, 나루 마을, 진변 마을이라 불렀다. 영도 다리가 가설되기 전에는 뭍[중구 지역]과 절영도를 잇는 구실을 나룻배가 담당하였고 그 나룻배가 닿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절영도에 나룻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0년(고종 27)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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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동에 있던 자연 마을. 청학동 동쪽 바닷가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 면적이 쌀 넉 섬을 쌓아 올릴 만큼 넓고 크다고 하여 쌀가마 단위를 넣어 ‘넉섬 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넘바우, 섬바우[바위], 넘섬 바우[바위]라고도 불렀는데, 이 바위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넉섬 바우 마을로 불렸다. 한자로 광암(廣巖) 마을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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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동에 있던 자연 마을. 대풍포(大風浦)는 대평동 끝자락과 남항동 사이에 있어서 동·서·남의 3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호안으로 지형상 풍랑에 대피하기 좋은 포구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풍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두모포 왜관이 설치될 때까지 임시 왜관[1601년(선조 34)부터 1607년(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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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에 있던 자연 마을. 석말추(石末楸)는 바닷가에 있는 큰 돌이 밀물 때는 보이지 않으나 썰물 때 돌 끝[石末]이 조금 보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지역민들은 석말치·성말치 또는 성돌추로 불렀다고 한다. 석말추 마을이 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기록상에서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남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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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던 자연 마을. 배[船]가 드나드는 마을이라고 해서 선덤[선듬] 마을이라고 이름 붙였다. 선덤[선듬] 마을은 동삼동과 청학동으로 가는 해안가 포구에 자리 잡았던 마을로,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나 전하는 바가 없다. 거주 역사를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18세기 말 공식적 동명을 부여받은 영도의 특성으로 볼 때 이 지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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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에 있던 자연 마을. 전하는 말에 따르면, 현재 영선동에 있는 농협 영도지점 부근을 성발추로 불렀다고 하는데, 영선 2동 복천사에서 제2 송도 마을로 흐르는 물이 고인 샘을 성발추 샘이라 불렀다는 것으로 미루어 마을 명칭은 확인할 수 있으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성발추는 주변에 있던 성과 관련한 이름으로 추정되지만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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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던 자연 마을. 아치섬은 부산의 북항 입구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한국해양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아치섬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고지도(古智島) 또는 동백도(冬柏島)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쪽 해안에 떠오르는 아침 해의 아름다움이 부산에서는 제일이라 하여 조도(朝島)로도 불린다. 아치섬에서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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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세칭 제2 송도(第二松島) 마을은 서쪽 바다 건너 서구 암남동 송도의 해송 군락과 아름다운 해안 절경이 한눈에 보여, 그 아름다운 바다 경치 절경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제2 송도 마을은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몰려들며, 피난민 판자촌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1951년에는 부산시 영도출장소 영선동에 속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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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동에 있던 자연 마을. 한반도에서 최초로 고구마가 들어와 재배된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 재배되던 고구마를 조내기 고구마라고 불렀다. 영도의 조내기 고구마는 약간 작으면서도 밤 맛과 흡사하여 인기가 높았다고 하나 현재는 종자가 없어졌다. 조내기 마을은 조내기 고구마가 처음 재배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도에 고구마가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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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동에 있던 자연 마을. 조락(潮落) 마을은 해안의 수심이 얕고 개펄이 많아 썰물이 되면 조수가 내려 바닥이 드러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부에선 조내기 마을로도 불렸다고 하지만, 조내기라는 이름은 청학동 전체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국지적 지명인 조락 마을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조락 마을은 청학동 해안가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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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중리에 있던 자연 마을. 1881년(고종 18)부터 1895년(고종 32)까지 15년간 절영도진 첨절제사영이 설치되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진내(鎭內) 마을이라 불렀다. 진내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881년 절영도진 첨절제사영이 설치되었다가 1895년 폐지된 이후 진터에 있던 민가를 합쳐 진내 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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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동에 있는 자연 마을. 봉래산의 동쪽 사면에 위치하여 해돋이를 볼 수 있고, 피난민촌으로 형성되어 잘 사는 동네가 되어 보자는 의미를 결합하여 해돋이 마을이라 불렀다. 해돋이 마을은 본래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로, 6·25 전쟁으로 유입된 피난민 판자촌 5~6채가 있었는데, 이후 난민 수용소가 조성되며 인구가 늘어났다. 당시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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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던 자연 마을. 봉래산의 남동쪽 산기슭의 크고 검은 바위 인근에 있어 흑암(黑岩) 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흑암 마을은 동삼동 중리와 하리에서 육지로 나가기 위해 넘던 아리랑 고개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이다. 인근 지역의 고로(高老)들이 동삼동의 검은 바위 인근에 5~6가구가 있었다고 기억하는 것으로 볼 때 오랜 거주 역...
부산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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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 4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의 이름이 가마물[釜水]·가마천[釜川]이다가 감물천(甘勿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감물천 부근에 있다 하여 감물리(甘勿里)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감물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감물리는 동평면에 속해 있었고, 관문(官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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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이 언덕처럼 높은 곳에 위치한다고 하여 고대(古垈) 마을이라고 불렀다. 한자 지명은 고대리(古代里), 고대리(古垈里)를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고대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고대리(古代里)는 동평면(東平面)에 속하고, 관문(官門)에서 15리 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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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 3동에 있던 자연 마을. 1825년 세운 당집인 영숙사(永肅祠)가 마을에 있어 당리(堂里) 마을이라 하였다. 당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1904]에 동래군 동평면(東平面) 관내에 당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복 당시 당리 마을에는 50여 호로 파평 윤씨(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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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 2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에 말발굽을 만들고 박던 곳이 있어 마철리(馬鐵里)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마철리 마을은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마을 북쪽에 철도 조차장[현 한국 철도 차량 관리단]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10여 가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철도 조차장이 들어오면서 일본인들의 마구간과 철도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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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 1동에 있던 자연 마을. 전포천이 흐르는 갯가에 위치한 황령산(荒領山) 서쪽 비탈면은 논밭[田畓]이 많다 하여 밭개라고 하였다. 밭개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밭개 마을, 또는 밭채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전포(田浦) 마을이다. 밭개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마을이 속한 지역은 『동래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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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 2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이 위치한 지역은 주변 산의 산세가 험하고 삼림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 하여 범내골[凡川谷]이라 하였다. 범내골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범내골 마을은 형성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으나, 마을이 속한 지역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동평면 소속에 범천(凡川) 1·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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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개금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옛날 서면에서 사상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삼거리(三距里)가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거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동래군 동평면 미요리(尾要里)에서 부산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서면 개금동이 되었다.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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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 4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에 장군새미[將軍井]라는 우물이 있다고 하여 새미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군새미는 1989년 당감 4동 동장을 지낸 윤죽수(尹竹秀)에 의해 보존되었다. 새미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동래군 동평면에서 부산부로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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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에 있던 자연 마을. 백양산 동쪽 사면에 있는 선암사[신라 때 창건] 경내에 수십 길 되는 절벽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이를 신선암이라 한다. 신선암 인근에 있다 하여 선암(仙岩) 마을이라고 불렀다. 선암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신라 선덕 여왕 때 창건되어 1483년(성종 14) 중수하였다고 전하는 선암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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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 4동에 있던 자연 마을. 성안 마을은 동평성(東平城)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성내 마을이라고도 하였다. 진씨가 동족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하여 진씨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성안 마을은 신라 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평성 내에 있는 마을이라고 전하는 것으로 볼 때, 신라 때부터 존재한 마을로 추정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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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 1동에 있던 자연 마을.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는 좌수영은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이 감만이포로 옮겨졌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설하며 신좌수영(新左水營)이라고도 불렸다. 신좌수영으로 가는 어귀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신좌수영 마을이라고 불렀다. 신좌수영 마을은 형성 시기에 대해 알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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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개금 3동에 있던 자연 마을. 개금동에서 가장 오래되고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안동네[內洞]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본동 마을이라고도 하였다. 안동네 마을의 형성 시기는 문헌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당산이나 당산 나무를 통하여 약 5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을에는 은진 송씨(恩津宋氏)가 주를 이루고 경주 최씨(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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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황령산 서쪽 기슭 오수골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오수골 또는 오술골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수골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오수골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동래군 서면 전포리에서 부산부 서면 전포리로 개편되었다.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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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 1동에 있던 자연 마을. 지역에 동래 정씨(東萊鄭氏) 사당인 추원사가 있어 인근을 지날 때는 예(禮)를 표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야 하였기 때문에 하마정(下馬停)으로 불렀다. 마을 이름은 하마정 부근에 있어 비롯되었다. 하마정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하마정이 고려 때부터 있었고 1413년(태종 13) 하마비(下...
동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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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 동래 종합 사회 복지관 일원 골짜기는 저녁이 되면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였고, 주민들이 논이나 미나리꽝에서 개구리를 잡아 말려 약재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마을 이름을 개구리 마을이라고 하였다. 개구리 마을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온천 입구 사거리에서 시싯골을 지나 마안산 북쪽 고개를 넘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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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동래 향교(東萊鄕校) 주변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교리(校里)라고 불렀다. 동래 향교는 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의 교육 진흥책에 따라 각 지방에 향교를 세울 때 지금의 동래고등학교 주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함락과 함께 불탔으나 1605년(선조 38)에 다시 세워진 후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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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금산(金山) 마을은 금정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금산 마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동래부읍지』[1832] 방리조(坊里條)를 보면 서면 소속의 금산리가 관문에서 6리 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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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달북 마을은 서북쪽에 달배산 혹은 달빗골[月北谷]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이름을 달배 마을, 월북 마을, 달빗골 마을, 달비골 마을이라고도 하였다. 달북 마을의 형성 시기와 변화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와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99]뿐 아니라 『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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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담뱃대 마을은 담뱃대 생산으로 유명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담뱃대는 유기(鍮器)와 함께 조선 후기부터 동래의 명산물이었다. 담뱃대는 동래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모양·색깔·무늬 등에서 품질이 좋아 서울 양반들의 수요는 물론 진상 물품이 되었다고 한다. 동래 담뱃대가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담배가 임진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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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옛날부터 지금의 명륜동에서 온천 입구 사거리로 가는 길을 대낫드리라고 불렀다. 이 길에서는 조선 시대 동래 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나 새로 부임하여 올 때 동래부의 관리, 군졸, 백성들이 환송·환영식을 거행하였는데, 깃발·창검(槍劍)의 늠름한 행렬이 자못 장엄하여 ‘큰 나들이’라고 하였다. 이 큰 나들이의 ‘큰’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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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법륜사(法輪寺)[옛 학소대 자리] 아래에 있던 언덕에 주민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 도화원 또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불렀고, 이 주변에 있던 마을이라 하여 도화동 마을이라고 하였다. 마을 경치가 아름다워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하여 강선리(降仙里), 또는 강성리라고 불렀고, 또 다르게는 광성리라고도 하였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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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에 있던 자연 마을. 돌짝골 마을은 돌작골 마을로도 불리는데, 쇠미산 끝자락의 돌이 많은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금도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돌짝골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돌짝골 마을이라고 하였고, 계곡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돌짝골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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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동래 관내의 금정산 자락에 있다고 하여 동래 금정(東萊金井) 마을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오리 고기 먹거리 촌으로 유명해 금정오리 마을이라고도 한다. 동래 금정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산저(山底) 마을과 화촌 마을 인근 지역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다가 1973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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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에 있던 자연 마을. 쇠미산 기슭의 밭에서 농사를 짓던 마을이라 하여 딧밭등 마을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디밭등 마을 혹은 뒷밭동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딧밭등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딧밭등 마을은 1942년 10월 경상남도 부산부 동래출장소 사정(社町)에 속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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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암(馬岩) 마을은 마암, 즉 말 바위 주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암은 동래구 온천 1동 금강 공원 안 독진 대아문(獨鎭大衙門)[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호] 앞의 왼쪽에 말처럼 생긴 바위를 말하고, 이 주변 일원을 말바위골·말바우골이라 불렀다. 마암 마을은 뒷산에 차밭이 있어 차밭골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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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장(鳴藏)[명장(鳴莊)] 마을의 명칭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명편(鳴鞭)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명편은 옛날 의장(儀仗) 때 흔들어 소리를 내서 사람들을 정숙하게 하는 기구로, 정편(靜鞭)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후기 동래 부사는 동래 독진(東萊獨鎭)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동래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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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못안골 마을은 연못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밖에 있던 연못은 현재 동래 문화 회관의 서쪽 진입로와 인접한 동래 센트럴파크 하이츠 아파트 101동 앞쪽 부지 일원에 있었는데 1970년대에 없어졌다고 한다. 연못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산기슭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의 납골당(納骨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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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미남(美南) 마을의 명칭 유래는 알 수 없다. 미남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미남 마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32] 방리조(坊里條)에 서면 소속에 미남리(美南里)가 있고, 관문에서 6리 거리에 있다고 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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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에 있던 자연 마을. 동래읍성의 북문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전기 동래읍성은 지금의 동래 시장 본 상가 건물 일원을 중심으로 지름 400m 정도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허물어졌다. 이후 부분 보수되다가 1731년(영조 7) 동래 부사 정언섭(鄭彦燮)에 의해 지금 남아 있는 터와 비슷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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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금정산 자락에 있다 하여 산저(山底) 또는 산밑 마을이라고 한 것 같다. 또한 돌복숭아가 많이 재배되어 도화촌(桃花村)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산저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각면 각리 원근정도조(各面各里遠近程道條)’에 “산저리는 읍내면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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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 있던 자연 마을. 삼성대(三姓臺) 마을은 삼성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대는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고적조에 “동래부 서쪽 2리에 있는데, 이언(俚諺)에 전하기를 안(安), 송(宋), 옥(玉) 3 성씨의 시조가 살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실린 ‘동래부지 고적조’에는 “부(府)의 서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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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던 자연 마을. 서원(書院) 마을은 조선 후기 현재의 충렬사 안에 안락서원이 있었는데, 그 서원 일원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지명의 유래가 된 안락서원은 1652년 윤문거(尹文擧) 동래 부사가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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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에 있던 자연 마을. 석사(石寺) 마을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석사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각면 각리 원근정도조(各面各里遠近程道條)에 “석사리는 읍내면의 서쪽에 있는 서면에 속하며, 관문에서 6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사리는 『동래부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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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 있던 자연 마을. 시싯골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시싯골 마을이라고 불렀다. 시실골은 돌감나무가 많아서 시실골[柿實谷]·시시골·세실골 등으로도 불렀으며, 감나무골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시싯골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동래군 동래면 교동, 1942년 10월 부산부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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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에 있던 자연 마을. 여고(余古) 마을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여고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각면 각리 원근정도조(各面各里遠近程道條)에 “여고리는 읍내면의 서쪽에 있는 서면에 속해 관문에서 5리 거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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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옛날 이곳에 소금을 보관하는 창고인 염창(鹽倉)이 있어 마을 이름을 염창이라 불렀다고 전하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나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염창동(廉倉洞)으로 기록되어 있어 염창(廉倉)과 염창(鹽倉)을 혼칭한 것인지, 소금 창고와는 관련이 없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염창 마을이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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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온천(溫泉)이란 동래 온천 주변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래 온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온정(溫井)은 현(縣)의 북쪽 5리에 있다고 하고 그 열이 달걀을 익힐 만하고, 환자가 목욕을 하면 곧 나아 신라 때 왕이 여러 번 왔으며, 고려 시대 귀족·관료들도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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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에 있던 자연 마을. 조개무지 마을은 패총(貝塚), 즉 조개무지·조개 무덤·조개 묻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조개무지 마을은 ‘부산 동래 패총’[사적 제192호]이 있어 3~4세기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현재 바닷가로부터 약 6㎞ 떨어져 있지만, 조개무지[사람들이 조개 등을 먹고 껍데기를 버려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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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포전(浦田) 마을은 온천천 주변으로 습지가 형성되어 있고, 주변에 논밭이 많아 포전 마을 또는 개밭 마을, 개밭등 마을이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포전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42년 10월 경상남도 부산부 동래출장소 온천정(溫泉町)에, 1949년 8월에는 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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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던 자연 마을. 호현(狐峴)이란 이름은 여우가 많이 살고 있던 안락 고개 아래에 있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 호현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읍내면 동부에 호현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오랜 역사를 알게 한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도 읍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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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던 자연 마을. 화현(花峴) 마을은 마을 뒷산에 백일홍이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화현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나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32]뿐 아니라,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서도 동명을 확인할 수 없어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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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갓골 마을은 마을 중간에 있던 동뫼가 선비의 관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한자어로는 관곡(冠谷)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機張郡家戶案)』[1904]에 의하면 동래군 남하면(南下面) 용당동에 23호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때 갓골은 용당동에 편입되었으므로 그 이전부터 갓골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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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가난한 농민들이 지은 움막이 많은 곳이라고 하여 농막(農幕) 마을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지금의 문현동 안동네 야산에 들어와 살았는데, 광복 후부터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고동골 등에 들어와 움막을 짓고 농사를 짓거나 막노동을 하게 되면서 제법 큰 마을을 이루었다. 1919년 동래군 서면의 문현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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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과 용당동에 있는 자연 마을. 당곡(堂谷) 마을[대연동]은 동제(洞祭)를 지내는 당집이 있는 골짜기[谷]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다. 당곡 마을은 조선 후기부터 남평 문씨(南平文氏)·경주 최씨(慶州崔氏)·달성 서씨(達城徐氏)가 이주해 오며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 사분포 마을·용소 마을·석포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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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던 자연 마을. 못골 마을은 옛날부터 황령산 골짜기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커다란 못이 여러 곳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어로는 지곡(池谷)이라고도 불렀다. 못골 마을은 600여 년 전 죽산 박씨(竹山朴氏)가 아랫못에 이주해 오며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고동골 못 등에 논밭을 일구어 점차 마을이 커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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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던 자연 마을. 동쪽 해안 절경지의 바다에 흰 구름[白雲]이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백운포(白雲浦)라 불렀다고 한다. 개항기에 용호동의 분개(盆浦) 마을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여 백운포까지 거주지가 확대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은 처음에는 분개 마을 사패(四牌)[분개 마을을 4개로 나누며 네 번째라는 의미]로 불렸으나,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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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던 자연 마을. 염전[盆]이 있던 포구(浦口)라 하여 분포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지역 방언으로 ‘분깨’라는 명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분포(盆浦) 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염분(鹽盆)[바닷물을 가마솥에 붓고 끓여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 조성되면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당시 동래부에는 69좌(座)의 염분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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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던 자연 마을. 석포(石浦) 마을 등하천(嶝下川)에 돌 자갈이 많아 ‘돌개’라고 불렀는데, ‘돌 석(石)’과 ‘포구 포(浦)’ 자를 합하여 석포라고 하였다. 석포에 대한 기록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석포 목장이 있었으며, 말을 방목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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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는 자연 마을. 현재의 용호 선착장 주변에 해조류가 많았다는 데서 섭자리라는 이름이 유래한 듯하다. 섭자리는 표기상으로 섶자리라고 해야 옳은데, 섭자리란 섭이 있던 터 또는 자리를 의미한다. 섭은 작은 나무나 잎을 뜻하므로, 섭이라기보다 정확한 표기로 보면 섶이 맞다. 섭자리의 섭을 섶으로 바꾸면 섶자리 마을이 해안가 절벽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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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는 자연 마을. 1940년대 일제의 철거민 이주 정책에 의해 옮겨 온 조선인 이주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처음에는 신마치[新町]라 불렸고, 광복 이후 신정(新亭)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인근 산 이름이 천제등(天祭嶝)[부산공업고등학교 부근]인데, 외지인들은 이를 잘못 알고 천지동이라고도 불렀다. 1940년대 일제의 영주동·초량동·범일동·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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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에 있는 자연 마을. 현재의 문현 로터리 부근의 연못에 피는 연꽃이 늘 동쪽을 향해 피었다고 하여 연동개(蓮東開)라고 불렀으며, 그 마을을 연동(蓮東) 마을[문현동]이라고 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부근에 일본인이 대선양조 공장을 세운 후부터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주거지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마을은 대부분 문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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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던 마을. 마을에 있는 늪지의 모습이 용(龍)이 소(沼)에서 날아오르는 것과 같아서 용소(龍沼) 마을[대연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500년 전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380년 전 창녕 영산에서 금산 김씨(錦山金氏)가 이주해 왔다고 전한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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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던 자연 마을. 한센인들이 자립을 위해 운영한 농장이 위치한 곳이라 하여 용호 농장(龍湖農場) 마을이라 불렀다. 용호 농장 마을로 한센인이 이주한 때는 1946년 상애원[1911년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감만동의 한센 병원]의 한센인이 소록도로 강제 이주되면서 당시 소록도 이주를 거부한 전염성이 없는 음성 한센인이 용호동에 정착하면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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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에 있던 자연 마을. 골짜기 위의 산이 양쪽으로 겹쳐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모양이 마치 지게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지겟골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겟골 마을은 200여 년 전 영산 신씨(靈山辛氏)가 들어와 살면서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지겟골 마을이 속한 문현동은 기록상으로 『동래부지(東萊府誌)』[1...
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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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던 자연 마을. 조선 시대 동원진(東院津)의 역원(驛院), 수참(水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공창(公昌) 마을이라 불렀다. 공창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전하는 바가 없지만, 세조 때 동원 지역으로 수참이 옮겨지며 역리들의 집단 거주지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창 마을은 1831년(순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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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구포(龜浦)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구남(龜南)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구남 마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903년(고종 40) 경부선 구포역이 생기면서 역 건너편에 철도 관사가 들어서고 철도 굴다리 쪽에 인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06년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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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구명(龜明) 마을은 구포사립구명학교[1907년 10월 15일 개교]에서 따 온 이름이다. 「구포사립구명학교 취지서」에 보면 학교 이름의 연원을 “구명이라 함은 예로부터 거북은 신명(神明)의 후손이며 4대 신령스런 동물 중의 하나이다[龜者神明之族而四靈之一也]”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신령한 거북의 신명처럼 학교를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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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조선 시대 감동창(甘同倉)이 있던 곳을 구복포(龜伏浦)라고도 불렀는데, 이 구복포 인근 마을이라 하여 구복 마을이라 불렀다. 구복은 범방산의 형상이 거북[龜]이 강을 향해 엎드린[伏]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구복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 시대 삼세 조창(三稅漕倉)인 감동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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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기찰(譏察)은 왕래하는 통행자를 검문하는 한편, 상인들의 물품을 조사하는 검문소로, 기찰 마을은 조선 시대 이곳에 구법곡(仇法谷) 기찰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기찰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구법곡 기찰과 관련된 마을이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구법곡 기찰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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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구포 지역의 남쪽 강변에 날라리라는 들판이 있었는데, 서쪽 해[日]가 지는 아래[下] 들판[坪]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나리로 불렸다. 이곳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나나리 마을이라 하였다. 나나리 마을에 사람이 거주하고 마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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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이 백양산 주지봉의 남쪽 산줄기 아래에 있어, 남산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남산과 구포에서 동래로 가려면 넘어가는 만덕 고개 입구에 쉬어 가던 정자나무가 있어 정(亭) 자를 붙여 남산정(南山亭) 마을로 불렀다. 정자나무는 500여 년 된 미루나무였는데, 1959년 태풍 사라호 때 쓰러져 없어졌다. 남산정 마을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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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남창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창리(南倉里) 마을이라고 불렀다.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1786]에 “감동창(甘同倉), 일명 남창(南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감동창과 남창이 동일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자 지명으로 남창(南倉), 남창(南滄)을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남창리 마을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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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구포 지역의 본 마을로, 큰 마을이라고 하여 대리(大里) 마을[구포동]이라고 불렀다. 대리 마을은 구포 지역 본토박이들이 살아온 본 마을로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산 나무가 수령 500년 이상의 팽나무가 있고, 인접한 음정골에서 조개더미[貝塚]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오랜 거주 역사를 추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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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던 자연 마을. 금정산 상계봉 서남쪽에 있는 대장골 일대의 마을이라 하여 대장골[大莊谷] 마을이라 불렀다. 대장골은 큰 샘이 있다고 하여 대정골[大井谷]이라고도 불렸고, 옛날 큰 도적들이 살던 곳이라고 대적골[大賊谷]이라고도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뒤로는 상계봉이 올려다 보이고 앞으로는 낙동강의 흐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배산임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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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던 자연 마을. 금정산 고당봉 아래 북문 고개에서 발원한 물과 상계봉 줄기에서 발원한 물이 합류한 큰 냇물이 대천천(大川川)이다. 대천천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천리(大川里) 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대천리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척화신(斥和臣)인 성균관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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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던 자연 마을. 조선 시대 설치된 동원(東院) 역원이 있던 마을이어서 동원(東院) 마을이라고 불렀다. 동원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동원 역원 터 발굴 조사에서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복합 건물이 확인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양산군에 속한 동원진과 동원역에 대한 기록이 있어 오랜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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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에 있던 자연 마을. 고려 시대 때 창건한 만덕사지(萬德寺址) 부근에 있다고 하여 절터 마을, 즉 사기(寺基) 마을이라 불렀다. 사기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밀양 손씨(密陽孫氏) 탁자파 일족이 400여 년간 살고 있으며, 남원 양씨(南原梁氏) 문중도 사기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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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던 자연 마을. 금정산 상계봉에서 함박봉으로 뻗어 내린 언덕 위에 수령 500여 년 된 정자[포구]나무가 있고,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라 하여 수정(水亭)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정자나무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수정리(水亭里) 마을이라고 불렀다. 수정리 마을은 4세기 중엽의 가야 시대 고분 7기[수정천 인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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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숙등(淑嶝) 마을의 지명 유래에는 여러 가지가 전한다. 먼저 주지산[백양산의 한 봉우리] 북쪽 사면[嶝]에 쑥이 많아 쑥등이라 하다가 숙등이 되었다고도 하고, 숙등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숙동 마을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주지산 음정골에서 숙등 사이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숲등으로 부르다가 숙등이 되었다고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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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시랑골이란 이름은 가락국의 시랑(侍郞) 벼슬하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자 마을 입구 폭포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멀리 김해의 분산(盆山) 쪽을 쳐다보면서 지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시랑골 부근에 있어 시랑골[侍郞谷] 마을이라고 불렀다. 시랑골 마을은 가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명칭 유래로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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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구포장(龜浦場)[3일·8일] 부근에 있다고 해서 시장(市場) 마을이라 불렀다. 시장 마을[구포동]의 형성 시기는 구포장 이전 시기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구포장은 1932년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면서 구복 마을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 장터에는 함석 지붕을 한 목조 건물을 중심으로 노점상 쇠전[牛市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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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자연 마을. 연동 마을[구포동]은 연등개[連(土+登)] 나루 부근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양산군지(梁山郡誌)』[1899]에 “만덕계수(萬德溪水)[만덕천]와 대리천 물이 유입되는 감동진 입구에 주민들이 보를 쌓았다고 하며 이를 사동포(沙同浦)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의 샛강 양편에 모랫둑을 쌓아 모래 언덕을 연결한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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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던 자연 마을. 용(龍)이 길게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형과 돌팍골 앞의 호수에서 청룡과 황룡이 싸웠다는 전설과 관련하여 이곳 못을 용당(龍塘)이라 하였다. 이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용당리(龍塘里) 마을이라고 불렀다. 『고려사』지리지 양주조에 이곳이 나라에서 용왕제를 올리던 적석 용당이라는 기록이 있어 마을의 형성 시기를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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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던 자연 마을. 금정산 상계봉 서쪽 화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용(龍)이 살았다고 하여 용동골[龍洞谷]이라 불렀는데, 이 용동골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용동골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용동골 마을은 금정산성으로 오르는 입구 동네로서 장터껄이라는 지명이 전해 온다. 장터껄은 1809년(선조 9) 구포에 있던 감동장을 금정산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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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던 자연 마을. 이 지역은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골이라고 하였는데, 밤나무골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자로 ‘밤나무 율(栗)’ 자를 표기하여 율리(栗里) 마을[금곡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율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인근에서 신석기 유적지인 율리 패총에서 빗살무늬 토기 등과 청동기 시대로 이어지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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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음정골[陰井谷] 일대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음정골은 구포의 주산인 주지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영산으로 이어지는 말등 고개 북서쪽에 위치한 골짜기다. 음정골은 구포 지역에서 사람이 가장 먼저 살았던 곳으로, 조개 무더기도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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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신라 시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고 군사를 배치하였는데, 법흥왕 때 왜적이 쳐들어와 성주 황룡(黃龍) 장군과 군사 500여 명이 죽기를 각오하고 맞서 싸우다 전멸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나라를 위해 의로운 죽음을 택한 이들의 넋을 추모하는 뜻으로 이 성터를 의성(義城)으로 명명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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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 있던 자연 마을. 화명동의 주산인 화산(華山)의 봉우리[岑]란 뜻으로 화잠(華岑)이라 하였다. 화잠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화잠(華岑)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화잠 마을은 와석(臥石) 마을이라고 불렀는데, 화산 신선덤 봉우리가 신선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화잠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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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던 자연 마을. 꽃이 피고 정자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화정(花亭)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부산지방조달청 자리가 진등대로, 진달래가 유달리 많이 피어 진달래 구더기라고 불렀다. 또한 밸나무 등대[화정 마을 입구의 지명]에는 정자나무가 많고 언덕 위에 백일홍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화정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해운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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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던 자연 마을. 고기등(古器嶝)의 명확한 명칭 유래는 전하지 않으나, 마을이 있던 장소에서 옹기를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고구디 또는 고기둥 마을로도 부른다. 고기등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전해지지 않으나, 광복 전까지만 해도 밭농사를 하는 5~6호가 거주하던 한적한 마을이었다고 전한다.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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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에 있는 자연 마을. 구덕포(九德浦)에 자리한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덕포 마을은 약 300여 년 전 동래군 원남면(元南面)에 속하였던 포구에 함안 조씨(咸安趙氏) 일가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 기장현 남면 송정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80년(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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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있던 자연 마을. 대천(大川) 유역에 형성된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천은 춘천(春川)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하상이 넓어 큰내 또는 한내로 불렀다가 한자명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대천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마을 인근에서 구석기 시대 석기가 출토되어 오랜 거주 역사를 알 수 있다. 마을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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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에 있는 자연 마을. 뒷골 마을의 장산 서북쪽 기슭에 뒷골[後谷]·안골[內谷]·서당골[書堂谷]이 있었는데, 각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으로 부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세 계곡을 통칭하여 뒷골 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뒷골 마을은 임진왜란[1592] 때 충청도 회덕에서 피난 온 고씨가 15대째 살고 있으며, 서당골에는 송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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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못안[池內] 마을은 장지에 있는 저수지[현 해운대도서관 자리]를 경계로 안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저수지는 장산 선황봉(先篁峰) 계곡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하여 조성하였다. 장지 마을 위쪽에 있어 윗 마을로도 불린다. 못안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김해 김씨(金海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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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무정(舞亭) 마을은 무정이라는 정자 부근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정은 오지봉 기슭에 있던 정자로, 옛날 임금이 오면 춤을 추던 장소라고 전한다. 무정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며,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 동래부 동상면 관내에 무정동이 있어 11호가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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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무지개 마을은 철거민의 이주지로 조성된 연립 주택 단지에 구역별로 색색의 페인트칠을 해 멀리서 보면 무지개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새로 정착하는 이주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 주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무지개 마을은 1972년 9월 서구 구덕 수원지 수재민 165가구가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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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있는 자연 마을. 미포(尾浦)에 자리하고 있어 미포 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미포는 해운대 동북쪽에 자리 잡은 와우산(臥牛山)[높이 183m로 장산에서 내려다보면 소가 누워 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는 갯가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늘, 미암(尾巖)이라고도 불렀다. 미포 마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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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는 자연 마을. 반송(盤松)이란 이름은 운봉초등학교 앞에 서 있는 수령 200여 년이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반송 나무굴이라 칭하면서 비롯되었다. 반송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 하여 본동(本洞), 본리(本里) 마을 또는 웃반송이라고도 한다. 반송동은 옛날 기장현과 동래부의 경계를 이룬다 하여 지경리(地境里)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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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 4동에 있는 자연 마을. 삼어(三魚) 마을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마을에서 어사가 세 사람 나와 붙여진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 마을 내 어사탑[돌탑]이 강변 도시 고속 도로 쪽[탑거리로 불림]과 반여 아파트 안, 대우자동차 출고장 자리에 3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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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1동에 있는 자연 마을. 상리(上里) 마을[반여동]은 반여동의 자연 마을 중 가장 위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상리 마을은 4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동면 반여리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동래부 동면에 속하였다가 이후 동상면으로 분리되었으며, 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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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석대(石臺)[돌대라고도 함]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리(上里) 마을 또는 윗마을이라 불렀다. 석대는 추마산 기슭 대리골에서 흘러 온 하천이 석대천과 합류해 석대교[구 석대동사무소 앞]를 지나는 자리에 있는 바위[너럭바위, 넓고 평평한 바위]의 이름이다. 상리 마을[석대동]은 영양 천씨(穎陽千氏)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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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 청사포 마을에서 혼인을 하면 새로 살림을 내어 주던 곳이라서 신기(新基) 마을로 불렀다가 한글 지명으로 바꾸며 새터 마을이 되었다. 새터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청사포 마을에서 자식들이 혼인을 하면 살림을 내어 주던 곳으로 가구 수가 늘어나며 독립된 마을이 된 것으로 전한다. 마을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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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에 있던 자연 마을. 설분곡(雪粉谷) 마을은 설분곡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설분곡은 본래 인가(人家)가 없고 해운암(海雲庵)과 과수원이 있던 장소인데,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하나 둘 모여들며 판자촌 마을을 형성하였다. 인근에 부두가 있어 부두 노동자들의 거주지로 설분곡 마을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당시 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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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에 있는 자연 마을. 송정(松亭)은 본래 갈개 또는 가래포(加來浦), 가을포(加乙浦)라고 불렀다. 갈개는 갈대의 지방 방언으로 만입부에 갈대가 서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전하며, 가래포의 가래는 갈대의 사투리이다. 가을포는 가래포의 차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을포를 송정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이곳의 세거 씨족인 광주 노씨(光州盧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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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에 있던 자연 마을. 승당(僧堂) 마을은 승려가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내에 점쟁이가 많이 배출되어 근래에 와서 승당의 승(僧) 자를 승(勝) 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승당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명 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1544~1610]이 백산(白山)[수영구 민락동]의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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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신리(新里) 마을은 소리길[석대동 옹기골에서 고촌역으로 가는 소로(小路)를 일컫던 이름] 중간 지점에 주막이 생기면서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마을로도 부른다. 신리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반송동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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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신촌(新村)은 1960년대 후반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촌 마을[반여동]은 6·25 전쟁 이후 인근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며 인구가 늘어나자 1960년대 후반부터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당시 마을은 부산직할시 동래구 반여동에 속하였으며, 1978년 해운대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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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있던 자연 마을. 원래는 봉림(鳳林) 마을로 부르다가 이후 오산(梧山) 마을로 개칭되었다고 전한다. 오산 마을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하는데, 먼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 지형이 오동잎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오동나무가 많아서 머구실[오동나무를 뜻하는 사투리]로 불리다가 오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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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있는 자연 마을. 해운대 구남벌에서 온천이 솟아나며 형성된 마을이라서 온천(溫泉) 마을로 불렀다. 해운대 온천은 본래 구남벌에서 솟았다 하여 구남 온천(龜南溫泉)이라고도 하였다. 통일 신라의 진성 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이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았는데, 해운대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나았다는 전설이 있어 오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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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는 자연 마을. 운봉산[465m] 기슭에 자리 잡아 운봉(雲峰) 마을이라고 불렀다. 운봉산은 반송의 진산으로 옛날 옥황상제의 일곱 딸이 내려와 목욕을 하던 연못[운봉사 터가 본래 연못이 있던 자리로 전해짐]이 있었는데,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마다 구름이 산봉우리를 가리게 되어 운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비스러운 영산이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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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자연 마을. 운촌(雲村) 마을은 원래 해운대로 불려 왔는데 운촌으로 바뀌게 된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 후기 이 마을 출신인 김기원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갯가 마을 출신임을 숨기려고 해운대의 가운데 글자를 따 운촌으로 부른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운촌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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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에 있는 자연 마을. 장산(萇山) 마을은 장산 기슭에 자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산 마을은 1963년 장산 개척단[퇴역 장병 10여 명이 당시 원호청으로부터 정착 대부금을 받아 설립]에 의해 조성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산정(山頂)을 개간한 뒤 고랭지 채소를 가꾸며 생활 터전을 일구었다. 이후 부산시가 퇴역 장병들에게 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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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자연 마을. 장산의 장지봉(萇旨峰)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하여 장지(萇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못안 마을 위쪽에 자리 잡고 있어 웃마을로도 불렀다. 장지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장산 기슭에 농경지를 개간하며 형성되었다. 마을은 조선 후기에는 동래군 동하면(東下面)에 속하였고, 1914년 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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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에 있는 자연 마을. 재송(栽松) 마을은 재송포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포구에 소나무가 수만 그루 서 있다 하여 재송이란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재송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동하면(東下面)의 제일 큰 마을로 알려져 오랜 역사를 알게 한다. 마을이 속한 재송리는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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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에 있던 자연 마을. 좌동(佐洞) 마을은 장산에서 흘러내리는 춘천의 왼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좌(左)’ 자를 썼으나 지금은 ‘도울 좌(佐)’로 변경되었는데,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좌동 마을이 있던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긁개와 홈날, 몸돌, 대석 등이 출토]이 발굴되었으며, 79년(신라 탈해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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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자연 마을. 중리(中里)는 반여동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1700년경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살았다고 전하며, 이후 남평 문씨와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중리 마을 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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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있는 자연 마을. 청사포(靑蛇浦) 마을은 청사포[푸른 구렁이의 포구]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청사포는 골매기 할매의 전설과 관련된 지명이다. 새 신부였던 김씨 부인은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난파해 돌아오지 않자 매일 해안가의 바위에서 두 그루의 소나무[망부송(望夫松)으로 불림]를 심고 남편을 기다렸다. 수십 년을 하루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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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석대(石臺)[돌대라고도 함)의 아래쪽에 있어 하리(下里) 마을 또는 아랫 마을이라 불렀다. 석대는 추마산 기슭 대리골에서 흘러 온 하천이 석대천과 합류해 석대교[구 석대동사무소 앞]를 지나는 자리에 있는 바위[너럭바위]의 명칭이다. 하리 마을[석대동]은 영양 천씨(潁陽千氏) 집성촌으로 임진왜란[1592]...
사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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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감천 문화 마을은 감천동의 마을 미술 프로젝트 사업이 명성을 얻으며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형성되던 시기에는 중구 보수동에 본부를 두었던 태극도(太極道) 교도가 집단 이주하며 형성된 마을이라 태극도 신앙촌으로 불렸다. 태극도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태극도 신앙촌 마을은 원래 천덕동 감내로, 195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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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에 있던 자연 마을. 고분도리라고도 한다. 고분도리의 ‘고블’과 ‘도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곳에 고리짝을 만드는 재료가 많아 고분들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분들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주변에서 괴정동 고분군[사하구 괴정동 1026-32번지 일대]이 발굴되어 오랜 거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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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자연 마을. 낫개는 나포(羅浦)의 우리말 표현이나 지명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낫개 마을은 낫개[다대만의 동쪽 해안 옛 지명]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낫개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인근에서 다대포 조개더미가 발굴되어 오랜 거주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경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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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에 있던 자연 마을. 사하구 괴정동에서 서구 서대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티[대치] 고개라고 한다. 이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티 마을 또는 대치(大峙) 마을이라 불렀다. 대티 마을은 1678년(숙종 4) 부산진에 있던 두모포 왜관[현 수정 시장 부근]을 초량 왜관[현 용두산 공원 일대]으로 옮길 때, 초량 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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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 동쪽에 있는 동매산[210m]을 독뫼[獨山], 동뫼, 비봉산이라고도 부른다. 이 동매산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매 마을이라 불렀다. ‘동매’라는 지명은 동쪽의 산[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동매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경상남도 동래군 사천면 서평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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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망후 마을의 지명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 온다. 하나는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살을 당하였을 때 임 장군의 조카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임중생이 의주에서 신평까지 피난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누가 자기를 잡으러 올까 보아 뒤를 돌아보았다 하여 망후촌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다대진(多大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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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에 있던 자연 마을. 모래구찌 마을은 마을 입구에 낙동강에서 유입된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입[口]을 의미하는 일본어 구찌(くち)가 첨가되어 만들어진 이름으로 추정되지만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모래구찌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지만, 이곳은 기원전 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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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에 있던 자연 마을. 조선 시대 동래군 사천면(沙川面)에 있던 목마장은 현재의 사하구 괴정동을 중심으로 당리동과 하단동까지 포함되었다. 목마장은 나라에 소요되는 군마(軍馬), 역마(驛馬), 사역마(使役馬), 승마(乘馬) 등을 길러 내는 국마장(國馬場)이었다. 목마장 인근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목마장(牧馬場) 마을이라 이름 붙였다. 목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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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이 배고개 부근에 있다고 하여 배고개 마을이라 불렀다. 배고개는 원래 밝고개라고 불렸으나, 밝[박]이 배로 전음(轉音)하여 배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또는 옛날 이곳 고개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배나무가 많아서 배고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배고개 마을은 정확한 형성 시기를 확인할 수 없지만, 하단장과 부산장(釜山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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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자연 마을. 새모기 마을은 주변 지형이 새의 목처럼 길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무기, 새목, 조항(鳥項)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새모기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다대진성과 인접해 있으며, 내만에 위치한 해안가 마을로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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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자연 마을. 윤씨(尹氏)네 마을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전한다. 먼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진 첨사 윤흥신(尹興信)과 군민을 모시기 위해 세운 윤공단(尹公壇)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음으로는 윤씨내라는 내가 있었는데, 인근에 윤씨(尹氏)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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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동에 있던 자연 마을. 낙동강 하구 바닷가에 있는 보덕포(補德浦) 부근에 자리하여 보덕포[또는 보덕포(保德浦)]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보득포 마을, 부득포 마을, 버득포 마을이라고도 불렸다. 보덕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보덕포와 안장림 사이의 강변 구릉지에 1세기경의 조개더미[貝塚]와 토기가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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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에 있던 자연 마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많은 전쟁고아가 생겨 구호 시설인 성화원(聖花院)이 설립됐는데, 이 성화원 부근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화원 마을의 형성은 성화원 설립과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성화원은 6·25 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을 위해 설립되었고, 이후 1960년대에는 기독교 출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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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 있던 자연 마을. 시천(矢川)은 승학산[696.3m] 서쪽 사면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으로, 신내라고도 불렀다. 시천 부근에 있어 시천 마을이라 불렀다. 신내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시천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경상남도 동래군 사천면 독지리에서 부산부로 편입되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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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이 감천항 안쪽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안골새 마을이라 불렀다. 안골새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에서 교인돌이 발굴되어 선사 시대부터 거주지로 활용되었음을 추정케 한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서면(西面) 감천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0년 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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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에 있던 자연 마을. 구덕산 서남쪽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하여 양지(陽地) 마을이라 불렀다. 양지 마을은 6·25 전쟁 때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과 1951년 용두산 대화재, 부산역전 대화재 등 큰 화재로 발생한 이재민들이 구덕산 서남쪽 양지바른 언덕에 모여들며 형성된 마을이다. 1957년 구제 실시로 서구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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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자연 마을. 아미산[234m] 서쪽 사면 능선에 무지개 고개[虹峙]가 있는데, 이 부근에 있어 홍티 마을이라고 불렀다. 홍치(虹峙) 마을, 무지개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홍티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경상남도 동래군 사천면 다대리에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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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에 있던 자연 마을. 1950년 6·25 전쟁 때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피난민의 바람을 담아 희망촌(希望村)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희망촌 마을은 1950년 6·25 전쟁 때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겨났다. 1957년 구제 실시로 서구 직할 사하출장소가 설치되며 그 관할이 되었다...
금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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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에 있는 자연 마을 공해(公廨)란 관가 건물의 총칭으로, 마을에 관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나, 이 마을에는 그런 유사한 흔적이 없다. 2004년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금성동 385번지[죽전 마을] 일대에 금정진 유구를 시굴 조사한 결과 금정진 자리로 확인하였다. 원래 국(鞠)씨와 두(杜)씨 성을 가진 두 가족이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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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 지형이 거문고같이 생겼다 하여 금단(琴丹)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금단 마을은 분통골에 사정(射亭)[활터]이 있어 영남 지방 선비들이 이곳에 와서 활쏘기를 하고, 금단 마을의 기생 술집에서 놀고 갔다는 구전이 있어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마을임을 추정하게 한다. 금단 마을의 지명은 『조선 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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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금양(錦陽) 마을의 옛 이름은 공수물 마을이다. 공수물이라는 이름은 동래부의 공수물을 조달하는 공수전(公須田)이 있었기에 붙여졌다. 대한제국 시기 행정 구역 개편 때 공수물을 금양동(錦陽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양지바른 곳에서 품질 좋은 누에고치로 비단을 생산하여 공물로 보냈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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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에 있는 정보화 마을. 금정산성 정보화 마을(金井山城 情報化 마을)은 2001년부터 실시된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의 정보화 마을 조성 사업에 의해 부산 지역에서 최초로 조성된 정보화 마을이다. 금성산성 정보화 마을은 금정산성에 있어 금정산성 마을, 산성 마을이라 불린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산성리(山城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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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기찰(譏察)은 기찰 포교(捕校)를 주재시켜 왕래하는 통행자의 증명서를 조사하여 외국 첩자나 수상한 사람들을 검문하는 한편 상인들의 물품을 조사하는 검문소이다. 기찰 마을은 조선 시대 이곳에 십휴정 기찰(十休亭譏察)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기찰 마을[부곡동]은 조선 시대 영남 대로 황산도의 경유지로서 십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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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노포(老圃)란 오래된 ‘채전[밭]’이란 뜻으로, 농사를 잘 짓는 농부 또는 경험이 많은 늙은 농부를 의미한다. 즉 농사가 잘되는 마을, 다른 곳에 비해 농토가 풍부한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노포 마을 뒤쪽 당산이 쥐가 채전에 먹이를 구하러 내려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 ‘늙을 노(老)’ 자와 ‘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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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녹동(鹿洞) 마을은 노루[鹿]가 자주 나타나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녹동 마을 뒷산인 녹제산이 사슴뿔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동래 부사 민영훈(閔永勳)[재임 1835~1837)이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녹동 마을은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마을이라고 전하나 정확한 형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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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 앞들에서 콩을 많이 재배하여 대두(大豆) 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대두 마을에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두구동 800번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청동기 시대부터 거주지로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구동(豆口洞)의 7개 마을 중 조리 마을과 함께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다. 대두 마을이 속한 두구동은 『동래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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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 뒷산인 계명산으로부터 큰 용이 내려와 앉은 형상을 하고 있어 대룡(大龍)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남원 양씨(南原梁氏) 집성촌인 대룡 마을은 1619년(광해군 11년) 양부하(梁敷河)[1580∼1676,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조선인 100여 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거쳐 동래 감만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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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에 있는 자연 마을. 두실(斗實) 마을은 구서 마을이 형성된 후 새로 생겼다고 하여 새마실·새마을이라 하였다. 두실이라는 지명은 전답이 비옥하여 항상 곡식이 가득하다고 붙여진 명칭으로 전해진다. 두실 마을은 구서 마을·금단 마을과 함께 구서동에 속한 자연 마을로, 250여 년 전 김씨가 입향하며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두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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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자연 마을. 범어사에 삼베를 공급하기 위하여 이곳에 마(麻)를 심어 처음에는 마지(麻旨)라고 하였는데, 마지 중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마(上麻) 또는 상마전이라 하였다. 상마(上麻) 마을이 속한 청룡동은 청룡 마을, 용승 마을, 마지 마을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마 마을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고, 상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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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에 있는 자연 마을. 정확한 유래는 알려진 바 없지만, 구전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이웃 마을에 거주한 현인(賢人)이 신선이 되었다고 하여 현리라 불렀으며, 현리 위에 있어 상현(上賢)이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웃 하현 마을이 삼국 시대부터 거주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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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서동에 있던 자연 마을. 섯골은 한자로 서곡(書谷)으로 표기한다. 동상서당(東上書堂)의 이름을 따서 섯골·서곡이라고 불렀다. 섯골은 서동에서 가장 큰 본동 마을로, 5세기경의 유적인 서동 토광묘(書洞土壙墓)가 있어 거주 역사가 오래된 지역임을 추정할 수 있으나 기록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섯골이 속한 서동(西洞)에 대한 기록은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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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자연 마을. 수내(藪內)는 ‘숲안’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마을이 공덕산(孔德山)과 마을 앞의 울창한 소나무 숲[松林]으로 둘러 싸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내 마을은 500년 전쯤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북면 두구리(豆口里)로 표기되었으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32]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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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신암(新岩) 마을의 옛 이름은 서검뜸이다. 1720년(숙종 46)경 동래 무청 교련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 초건(楚健)의 셋째 아들 준업공(俊業公)이 입향(入鄕)하여 서검 서당(書劍書堂)을 열었고, 이에 서검(書劍)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암 마을은 은진 송씨가 1720년경 입향하며 형성한 것으로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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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에 있는 자연 마을. 용두산(龍頭山)과 호두산(虎頭山) 사이의 골마이 골짜기에서 흘러 수영강에 합류하는 내(川)를 신천(伸川)이라고 하는데, 마을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선동 신천 고분군[5~6세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형성]이 있어 일찍부터 취락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천 마을이 속한 지역은 『동래부지(東萊府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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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신현(新賢) 마을은 상현 마을과 하현 마을로 이루어진 곳에서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현 마을은 1945년경 하현 마을 점터에 살았던 가구 중 일부가 분통골로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이후 1960년대 중반 2차 오륜대 저수지 확장 공사 때 수몰 예정지였던 점터에 살던 13가구 중에서 1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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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서동에 있는 자연 마을. 본동 마을인 섯골 마을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안골[內谷], 안마실이라고 하였다. 안골 마을은 섯골 마을과 함께 서동(西洞) 지역의 자연 마을이었다. 안골에 대한 기록은 전하는 바가 없으나,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서동에 송씨(宋氏) 1호, 이씨(李氏) 4호, 박씨(朴氏) 5호, 김씨(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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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오륜대(五倫臺) 마을은 오륜대에서 따온 지명이다. 오륜대의 지명 유래는 기록상에서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먼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고적 조에서는 “오륜대는 동래부의 동쪽 20리의 사천(絲川)이 있었는데, 대에서 4~5보가량으로 시내[溪]에 임하고 암석이 기이하여 구경할 만하다. 속전에(俗傳)에 이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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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부곡동에서 서동으로 가는 고개에 숲이 우거지고 까마귀가 매우 많아 이를 까막 고개 또는 오시게[오현(鳥峴)]라고 불렀는데, 그 주변에 있는 마을이어서 오시게 마을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오시’가 ‘작다’라는 뜻의 ‘앗[아시]’, ‘아차’에서 나온 것으로 ‘작은 고개’라는 뜻일 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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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자연 마을. 구전에 의하면 범어 폭포 아래 큰 웅덩이에서 용이 승천(昇天)하였다고 하여 용승(龍昇) 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용승 마을이 속한 청룡동은 청룡 마을, 용승 마을, 마지 마을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용승 마을은 한때 ‘용성(龍城)’으로 표기하였으나 공식적인 문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용승 마을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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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자연 마을. 임석(林石)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석리라고도 한다. 임석 마을은 삼국 시대인 5세기 말의 유적인 두구동 임석 고분군상에 위치해 있어 취락 형성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북면 두구리(豆口里)가 기록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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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의 지세가 까치 발바닥 모양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작장(鵲掌)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작장 마을은 노포동의 본동 마을로, 주변의 낮은 구릉지에서 노포동 고분군, 노포동 작장 고분군 등이 발견되어 청동기 시대부터 거주지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38년(영조 14) 공성재(孔聖載)의 준호구에서 작장리가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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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자연 마을. 조리(造里) 마을의 명칭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정착한 마을이라고 하여 조리(趙里)라고 하였다가 이름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동래군 북면 송정동(送亭洞)에 속하였으나, 1917년 이후에 조리천(造里川)을 경계로 현재의 두구동 조리(造里)와 기장군 철마면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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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에 화살을 만드는 재료인 대나무 밭이 있어 죽전(竹田)이라 불렀다. 죽전 마을[금성동]은 원효 대사(元曉大師)가 이름 붙인 미륵암과 통일 신라 때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678년(문무왕 18) 창건한 국청사, 1708년(숙종 34) 창건된 해월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부터 거주지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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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자연 마을. 이 마을은 공덕산(孔德山) 서쪽 기슭에 약 9,917.36㎡[3,000여 평] 규모의 대밭이 있어 죽전(竹田)이라 하였다. 대밭안[竹田內]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죽전 마을[두구동]은 500여 년 전 유씨(劉氏)와 조씨(趙氏)의 입향으로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죽전 마을이 속한 지역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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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에 있는 자연 마을. 금성동의 중간에, 그리고 금정산성의 중성문(中城門)에 위치하여 중리(中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중리 마을[금성동]은 통일 신라 때 창건한 미륵암·국청사·해월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부터 거주지로 이용되었으리라 추정되지만, 마을이 형성된 것은 금정산성의 축조[1703]와 함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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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두구동의 중간에 위치하여 중리(中里)라 하였다. 중리 마을[두구동]이 형성된 것은 두구동의 다른 마을과 비슷한 임진왜란 당시로 추정된다. 중리가 속한 두구동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북면 두구리(豆口里),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32]에는 두구리(杜邱里)로 한자명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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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자연 마을. 범어사에 삼베를 공급하기 위하여 이곳에 마(麻)를 심어 처음에는 마지(麻旨)라고 하였는데, 마지 중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마(下麻) 또는 하마전(下麻田)이라 하였다. 하마 마을이 속한 청룡동은 청룡 마을, 용승 마을, 마지 마을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마 마을이 속한 마지 마을에 대한 기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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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에 있는 자연 마을. 하정(河亭) 마을은 조선 시대에는 소산리라고 하였다. 소산리에 대한 명칭 유래는 소산(蘇山) 아래에 있다 하여 소산리라 하였다는 설과 소산 대사[범어사 승려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조그마한 집에 서기(瑞氣)가 돌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집에 들어서니 웅장한 소리를 내며 옥동자가 태어나, 산모에게 불가와 인연이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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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에 있던 자연 마을. 정확한 유래는 알려진 바 없지만, 구전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이곳에 거주한 한 현인(賢人)이 신선이 되었다고 하여 현리라 불렀다. 현리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하현(下賢)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청동기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형성된 오륜대 고분군은 하현 마을 수영강 변의 낮은 구릉 완만한 동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청...
강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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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강가와 닿아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달 마을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가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삼국 시대 고분 유적인 생곡동 가달 고분군(生谷洞加達古墳群)[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3호]이 있어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달 마을은 조선 후기 김해군 태야면 생활리에 속하였으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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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강가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가동(佳洞)이라 이름 붙여졌다. 가동 마을은 그 형성 시기를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수가리[가동] 패총이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김해군 장유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경상남도 김해군 장유면 수가리의 가동 마을이 되었다. 마을은 본래 조만강 강가에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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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낙동강의 대홍수 등으로 쌓인 모래의 형상이 고래 등처럼 생겼다 하여 경등(鯨嶝)이라 이름 붙었다고 한다. 경등 마을은 본래 진목 염전의 서쪽에 있는 저습지로 갈대가 우겨져 있었으나, 60여 년 전 농경지로 개간하며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마을이 속한 지역은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면이었으나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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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에 있는 우물물의 양이 언제나 줄지 않고 그대로여서 고정(古井)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우물은 성(城) 밑에 있는 샘이라 하여 ‘여미새’라고도 불렀다. 고정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00년경 인근의 봉림(鳳林)·봉하(鳳下)·죽동(竹洞) 지역에 마을이 형성된 이후 강변 지역으로 거주지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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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구랑동에 있던 자연 마을. 동쪽의 봉화산에서 뻗은 줄기가 구절봉(九折峰)[아홉 개의 봉우리]을 형성해 구랑(九郞)이 되었다고 한다. 옛 기록에는 구랑촌(仇郞村)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신라 때 낭관(郞官)[화랑도] 벼슬을 한 아홉 명과 이들을 따르는 무리가 들어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후 한자 표기가 단순화된 것으로도 전한다. 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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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군라 마을은 군관청(軍官廳)과 황라도(黃羅島)가 합병하여 형성된 마을로, 두 곳의 이름 첫 자를 딴 이름이다. 군관청은 낙동강 하류를 지키는 군막(軍幕)이 있어 붙여졌고, 황라도는 황금빛이 펼쳐진 섬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군관청은 약 90여 년 전 개간으로 형성되었으며, 황라도는 낙동강 제방이 축조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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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 홍수로 들 전체에 물이 들어왔다 나가면서 들이 붉게 변해 쇳물처럼 붉은 내가 흐른다 하여 금천(金川)이 되었다고 한다. 쇠내 또는 세내로도 불리며, 금천방(金川坊)으로도 불렀다. 금천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45년 광복 이전까지는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으며 광복 이후부터 조금씩 개간이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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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금호 마을은 원래 주변의 뻘 못에 이심(泥心)이라는 전설 속의 물고기가 살았다고 하여 이지(泥池) 마을로 불렸다. 이후 어느 해 홍수로 비단같이 맑은 호수가 형성되어 비단 호수란 뜻의 금호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는 못의 흔적이 없는데, 큰 홍수가 나면서 맥도강에 합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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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에 있는 자연 마을. 내눌(內訥) 마을은 세바지 둑으로 가덕도 본섬과 연결되어 짤록한 부분의 목[項]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안목이라 하였는데, 소리 나는 대로 안모라고도 부른다. 한자 지명은 본섬인 가덕도(加德島)를 중심으로 해서 안쪽에 있는 마을, 곧 눌차도(訥次島)의 안쪽에 있다고 하여 내눌이라 하였다. 내눌 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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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는 자연 마을. 녹산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하는데, 첫째는 마을 북서쪽에 있는 봉화산(烽火山)의 산세가 굶주린 사슴이 먹이를 찾아 들판으로 내달리는 ‘기록주야(飢鹿走野)’ 형국이라서 ‘사슴 녹(鹿)’ 자를 딴 녹산(鹿山)이 되었다가 이후 녹산(菉山)으로 변하였다는 설이다. 다음으로는 마을 앞 바닷가에 녹도(菉島)[녹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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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일제 강점기 주민들이 땅을 개간하면서 큰 부자가 되려는 소원을 담아 대부방, 대부도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평위도 마을 자가농들이 집단으로 이주하며 형성된 마을이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이후 대사, 상덕, 북정, 제도리를 묶어 가락면에 편입하면서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 상덕리에 속하였다. 이후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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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서낙동강이 범람할 때마다 쌓인 모래가 형성한 큰 언덕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대사리(大沙里)라고 불렀다. 대사 마을은 대사 1구, 대사 2구, 대사 3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사 1구 마을은 본래 대사 마을로 불렸고, 2구 마을은 400~500년 전에는 늪지대로 황새가 많이 서식한다고 관마(鸛馬)라고 하였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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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저 신정(大渚新亭) 마을은 대지리(大地里)와 신정(新亭)을 합성하여 붙인 이름이다. 대지는 대저의 이칭이다. 대지리는 신정 마을이 속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삼각주 대저 평야의 넓은 땅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정은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 초정리 인근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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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지 동연정 마을은 대지리(大地里)와 동연정(東淵亭)을 합성하여 붙인 이름이다. 대지리는 동연정 마을이 속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삼각주 대저 평야의 넓은 땅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동연정은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기 이전에는 낙동강 홍수 때 형성된 큰 못이 있어 그 못가에 정자를 지어 연정(淵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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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지 상리(大地上里) 마을은 대지리(大地里)와 상리(上里)를 합성해 붙인 이름이다. 대지리는 상리 마을이 속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삼각주 대저 평야의 넓은 땅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상리는 대지리에 속하였던 7개 자연 마을[동연정 마을·서연정 마을·상리 마을·중촌 마을·중리 1구 마을·중리 2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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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지 서연정 마을은 대지리(大地里)와 서연정(西淵亭)을 합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지리는 서연정 마을이 속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삼각주 대저 평야의 넓은 땅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 낙동강 홍수 때 형성된 큰 못이 있어서 그 못가에 정자를 지어 연정(淵亭) 불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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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지 중리(大地中里) 마을은 대지리(大地里)와 중리(中里)를 합성해 붙인 이름이다. 대지리는 중리 마을이 속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삼각주 대저 평야의 넓은 땅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며, 중리는 상리(上里)와 하리(下里)의 중간쯤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한다. 대지 중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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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지 중촌(大地中村) 마을은 대지리(大地里)와 중촌(中村)을 합성해 붙인 이름이다. 대지리는 중촌 마을이 속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삼각주 대저 평야의 넓은 땅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며, 중촌은 대지리의 중간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한다. 마을이 옛 둑길을 따라 길게 뻗어 있어 막대기 형태라고 작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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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지 하리(大地下里) 마을은 대지리(大地里)와 하리(下里)를 합성해 붙인 이름이다. 대지리는 하리 마을이 속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 삼각주 대저 평야의 넓은 땅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며, 하리는 대지리 중 가장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대지리의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어 아래각단으로도 불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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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에 있는 자연 마을. 연대봉 기슭과 남쪽의 국수봉 기슭이 이어지는 목 부분에 있는 마을이라 대항(大項)이라 불렀다. 가덕도 남쪽에 있는 섬에서 가장 큰 목에 위치한다고 하여 큰목 마을, 한목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대항동의 본 마을로 음달 마을·양달 마을이라고도 한다.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천을 중심으로 연대봉 쪽으로 아침 해가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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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저습지가 개간되며 조성된 마을로, 주변 농경지가 커지면서 크게 일어난다는 의미로 대흥(大興)으로 이름 지었다. 큰 들이 있어 큰등[큰嶝]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대흥 마을은 1934년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며 저습지가 개간되어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지역이다. 처음 정착이 이루어질 때 이 지역은 김해군 가락면 봉림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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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강동동의 유일한 산인 덕도산의 동쪽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을 덕계라고 하였는데, 이 하천이 마을 인근을 지나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덕계 마을은 조선 철종 때 문씨가 처음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과거 주민의 80%가 문씨인 집성촌을 이룬 적도 있다. 1809년(순조 9) 김해군 덕도면에 속하였다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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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덕두 본리는 덕두리에서 가장 오래된 중심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덕두리(德斗里)는 본래 덕두리(德頭里)로 한자 표기가 달랐으며, 모래가 쌓인 언덕에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어 덕달로 부르다가 덕두로 바뀐 것으로 본다. 덕두 본리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그 명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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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과거 김해군 가락면 상덕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상덜리의 덕(德) 자와 포구의 포(浦) 자가 합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덕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곳은 조선 시대 적선포라는 포구가 있던 지역이다. 조선 후기 김해군 덕도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대사, 상덕, 북정, 제도리를 가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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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도도 본리는 도도리(挑島里)의 본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도도리는 작은 섬 또는 비교적 늦게 생긴 섬이란 뜻에서 붙여진 지명으로 전해진다. 도도 본리 마을은 약 120여 년 전 형성된 도도리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는 양산군 대하면에 속하였으며, 1906년 김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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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동덕(東德) 마을은 동쪽의 해를 맞는다는 의미에서 ‘동(東)’ 자를 쓰고 덕두리(德斗里)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덕두리는 모래가 쌓여 언덕 또는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이 된 둑이라는 의미이다. 동덕 마을은 1945년 8·15 해방으로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들이 현재의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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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동리(東里)는 조동 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동리의 남쪽으로 지대가 높은 곳에 묘지가 많아 ‘묘등’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 동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호구 총수(戶口總數)』[1789]에서 ‘동리’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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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동방(東方)은 덕두 본리의 동남쪽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방 마을은 1953년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 덕두 본리 마을의 동남쪽 30여 호가 분리되어 형성되었다. 1978년 부산직할시 북구로 편입되면서 대저면이 대저 1동과 대저 2동으로 분동되며 대저 2동 동방 마을이 되었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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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동선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동선(東仙) 마을은 가덕진성(加德鎭城)의 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하여 동문(東門) 마을로 불리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동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부산에 편입되기 이전 천가면 지역의 동쪽 선창 지역이어서 동선(東船)이라 부르다가 이후 동선(東仙)으로 한자명이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동선 마을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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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동선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동선 세바지에서 북쪽 눌차도로 뻗어 있는 사취[모래톱] 해안이 세바람[서남풍의 방언]을 많이 받는 곳이라 하여 세바지로 불리게 되면서 마을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눌차도의 외눌 마을로 들어가는 목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1959년 9월 태풍 사라호 때 이 목이 터져서 ‘터진목’이라고 한다. 이후 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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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동협 마을은 동자(東子) 마을과 장협(長峽) 마을이 합쳐지며 붙여진 이름이다. 동자마을은 낙동강 대홍수 때 ‘동자’가 떠내려 와서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전하며, 장협은 갈밭으로 된 길고 좁은 섬이란 뜻이다. 동협 마을은 본래 장협 마을과 동자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장협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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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성북동 장항 마을을 벗어나 백옥포 고개를 넘으면 자갈밭 해안이 있고, 이것이 망넘골짜기로 이어지는데, 숭어를 잡을 때 이곳에서 망을 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마을 앞바다에서 청어 등 생선이 많이 잡혀 한 마리씩 헤아리기가 시간이 걸리므로 말[斗]로 매매했다는 데서 두문(斗文)이라 불렀다고 하나, 실제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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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둔치도(屯致島)에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둔치도는 강어귀인 둔치에 생긴 섬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둔치도 마을은 100여 년 전 창원군 웅천에서 몇 가구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마을이 속한 지역은 김해군 가락면 봉림리였다. 1989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가락면이 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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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이웃한 득계 마을과 하천을 경계로 구분되어 광복 이전까지는 동내방이라고 불리다가 광복 이후 득천 마을로 불렸다. 두 마을 사이 하천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1879년(고종 16) 낙동강 대홍수로 피해가 극심하자 평강천에 제방을 쌓은 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는 김해군 덕도면에 속하였고, 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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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등구 마을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먼저 옛날 바다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거북이 가끔 기어올라 와서 등구막(登龜幕)이라 했다고도 하며, 등구 나무숲으로 둘러싸여 등구(登龜)라 불렀다고도 한다. 등구 마을은 약 200년 전 오씨(吳氏), 민씨(閔氏), 정씨(鄭氏) 등이 정착하여 형성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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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음(馬音)은 하늘 말[천마산]이 울부짖는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음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본래 이 마을에 거주하던 경주 최씨(慶州崔氏) 일가가 중곡 마을로 옮겨 가고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집성촌이 되었다고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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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에 있는 자연 마을. 남쪽에 자리한 명월산(明月山)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추정한다. 명동(明洞) 마을은 명확한 형성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명월산에 명월사(明月寺)와 진국사(鎭國寺)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허황옥(許黃玉)과 관련한 전설이 내려오는 것으로 볼 때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로 추정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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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옛 이름은 미음실(美音室) 또는 미음곡(美音谷)이었다. 미음은 풍상산(風裳山)의 전설과 관련된 지명이다.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성이 지극한 한 어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는데, 갑자기 세찬 바람과 뇌성이 일어 집에 와 보니 이미 노모는 없고 치맛자락만 나무에 걸려 바람에 펄럭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노모의 목소리가 풍악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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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있는 자연 마을. 방근 마을의 옛 이름은 마금당(魔禁堂)이다. 액막이를 하는 마금당사(魔禁堂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마을의 위치가 변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지명이 방근(防斤)으로 바뀌었다고 하나 정확한 명칭 유래와 개칭 이유는 확인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방근(芳根)으로 한자 표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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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에 있던 자연 마을. 범방(凡方)은 본래 범방(泛舫)으로, 금병산(錦屛山)의 지세가 배가 나아가는 행주형(行舟形)이라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범방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지역에 신석기 시대 패총이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마을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와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집성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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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본맥도의 지명은 맥도(麥島)에서 따왔다. 맥도는 그 모양이 보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본래 농업용수가 없어 보리농사만을 지을 수 있는 지역이라서 맥도로 불렀다고도 한다. 본맥도 마을은 조선 후기 외지인이 들어와 갈대밭을 개간하며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개간 초기에는 물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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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오봉산 아래 대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해 봉황[대나무 열매만 먹는다고 전해지는 영물]이 깃드는 마을이라 하여 봉림(鳳林)으로 불렀다. 봉림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702년(숙종 28)에 세워진 ‘유덕옥 애민선정비(柳德玉愛民善政碑)’를 통해 1700년경 마을이 속한 죽도 서편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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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봉하(鳳下)는 봉림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오봉산 아래 양지쪽에 자리 잡았다 하여 양전(陽田)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봉하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02년(숙종 28)에 세워진 ‘유덕옥 애민선정비(柳德玉愛民善政碑)’를 통해 1700년경 마을이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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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덕도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예부터 큰 정자가 있어 북정이라고 불렀다. 또한 큰 포구 나무가 있어 해통정(海通亭)이라고도 하였다. 북정 마을에는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초기 국가 시대까지의 기간 동안 생활 유적인 북정 패총과 상덕리 패총이 있고, 덕도산에는 고려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김원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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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있던 자연 마을. 분절 마을의 명칭은 옥녀봉과 관련된다. 옥녀봉에는 풍수적 형세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옥녀가 머리를 풀고 앉아 비단 병풍[금병산]을 치고 마을 앞 우물에 얼굴을 비추며 마을 건너 빗골[미음 마을 쪽 즐골]의 빗으로 머리를 빗는다는 것이다. 분절은 옥녀(玉女)가 머리를 빗질한다는 의미로 처음 한자로 표기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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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에 있는 자연 마을. 사구 마을의 옛 이름은 모래구지로, 조만강 강가에 모래가 쌓인 언덕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지명을 한자화하며 사구(沙邱) 마을이 되었다. 사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영월 엄씨(寧越嚴氏)의 집성촌이었으며, 조만강 강변의 조만포[1934년 녹산 수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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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사덕 상리(沙德上里) 마을은 사덕리(沙德里)와 상리(上里)의 합성 지명이다. 사덕리는 상리·신장로·신덕 3개 마을의 옛 지명으로 모래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상리는 사덕리에서 가장 위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명칭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정금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모래가 많은 포구라서 삿개[沙浦]로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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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사덕 신덕(沙德新德) 마을은 사덕리(沙德里)와 신덕(新德)의 합성 지명이다. 사덕리는 상리·신장로·신덕 3개 마을의 옛 지명으로 모래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신덕은 본래 신사덕(新沙德)으로 사덕리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평 문씨(南平文氏) 일가가 처음 정착해서 살았다 하여 문촌(文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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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사덕 신장로(沙德新長路) 마을은 사덕리(沙德里)와 신장로(新長路)를 합성한 지명이다. 사덕리는 상리·신장로·신덕 3개 마을의 옛 지명으로 모래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신장로는 마을 앞에 새로 만들어진 신작로의 변형이다. 사덕 신장로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일찍부터 사덕리의 일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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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사두 본리 마을은 사두리의 본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두 본리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에 ‘사두도는 칠점산 남쪽에 있으며 농지가 500여 경이 있고 백성 또한 많이 살고 있다[蛇頭島:則七點山南之有田五百如頃民居亦多]’고 기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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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화전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옛 이름은 니바우로 남쪽 해안에 큰 바위 네 개[선바우·탕건 바우·입바우·등잔 바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한자화하며 사암(四巖)이라고 하였다. 사암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400여 년 전쯤 밀양 박씨(密陽朴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남원 양씨(南原梁氏)가 들어와 형성된 마을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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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사취등은 낙동강의 모래가 홍수에 의해 쌓여 모래톱을 이룬 언덕으로, 마을이 큰 사취등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취등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전하는 바가 없으나, 청량사[1906년 변호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여 1958년에 개칭]의 경내에 300여 년 전부터 지역의 안녕과 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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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이 봉화산 남향 자락에 위치해 볕이 잘 드는 마을이라 하여 산양(山陽)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1485년(성종 15) 산양 마을 서쪽에 만들어진 군사용 목마장인 금단곶 보성 터[金丹串堡城址]가 있어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김해군 녹산면 녹산리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태야면을 병합해 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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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상곡은 제도리 8개 마을 중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황어도(黃魚島)란 섬이었으며, 황어도가 입으로 구전되면서 큰 섬이란 뜻에서 한섬으로도 불렀고, 배로 건너온다 하여 건널섬으로도 불렀다. 상곡 마을은 100여 년 전 낙동강 삼각주의 저습지가 개간될 당시 형성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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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상납청(上納廳)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지주가 농장을 개간해 마을을 이루며, 소작을 하는 주민에게 소작료를 받는 것이 마치 세곡을 상납받는 것처럼 군림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상납청 마을은 100여 년 전 몇몇 사람이 갈밭을 개간하여 정착한 곳으로, 국권 피탈 이후 일본인 중부기차랑(中部機次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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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덕도의 위쪽에 자리해서 상덕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옛 이름으로 보두막, 풍요곡, 해통곡이 전해지지만 유래는 알 수 없다. 상덕 마을에는 상덕리 패총이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알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에 덕도(德島)에는 전답과 민가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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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상방(上芳)의 옛 이름은 ‘상등’으로, 제일 높은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상방 마을은 그 연유는 알 수 없으나 1920년대에 형성된 마을로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에 속하였다. 1978년 부산직할시 북구로 편입되면서 대저면이 대저 1동과 대저 2동으로 분동되며 대저 2동 상방 마을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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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신전리의 세 마을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어 상신(上新)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전(新田)은 ‘새[억새풀] 밭에 형성된 마을’을 뜻한다. 상신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300여 년 전부터 뱀이 샘을 지킨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단물 새미를 식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져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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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낙동강 하구둑 건설 과정에서 이주민을 위해 새롭게 조성한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동네 마을은 1989년 명지동 신포 마을 3통 주민과 대저 2동 염막 마을 주민 일부가 이주하여 새로이 형성한 마을이다. 마을이 들어선 지역은 원래 갈대밭이었는데, 낙동강 하구둑을 만들면서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이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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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생곡 마을의 옛 이름은 생활리(生活里)로, 남쪽 봉화산의 본래 이름인 성화례산(省火禮山)에서 ‘성화례’가 음변해 ‘생활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중곡리와 병합하며 생곡리가 되고, 그 명칭을 따서 생곡 마을이 되었다. 생곡 마을은 본래 맞은편의 천마산[봉화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줄기로 생곡 마을 북서쪽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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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동선동에 있는 자연 마을. 향교(鄕校)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생교(生校) 마을 또는 교동(校洞)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생교 마을의 생(生)은 응봉산 밑의 골짜기에 맑고 깨끗한 물이 나는 생골에서 딴 글자로, 즉 생교는 생골과 교동의 합성어로 붙여진 지명이다. 생교 마을이 있는 가덕도 곳곳에 선사 시대 조개더미[貝塚]나 고분군 등이 발견되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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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 있는 자연 마을. 지금은 선창(先艙) 마을이라 부르지만, 원래의 한자 지명은 배를 고치고 건조하는 곳이라 하여 선창(船倉)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 가덕진(加德鎭)에 병기고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가야 시대 고분군인 성북 고분군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마을이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 가덕진과 천성 만호진(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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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의 본래 이름은 희만(憙滿)으로 늘 기쁨이 가득하다는 뜻이었는데, 눈이 한 번 올 때마다 적설량이 많아서 설만(雪滿)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설만 마을은 1614년(현종 14) 김녕 김씨(金寧金氏)가 정착하며 형성된 마을로 전한다. 본래 마을이 있던 자리에 1943년 일본 해군 비행장이 건설되며 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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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성북리의 동쪽 입구가 가덕진성(加德鎭城)의 북문이다. 가덕진성 북문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북문 마을이라고도 하고, 마을이 성 안쪽에 있어 성안 마을이라고도 불렀지만 통칭하여 성북(城北) 마을이라 부른다. 성북 마을이 있는 가덕도 곳곳에 선사 시대 조개더미[貝塚]와 고분군 등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마을이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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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성산(星山)의 옛 이름은 형산진(荊山津)이다. 형산이 성산[형님을 성님으로 부르는 언어 습관과 연결]으로 불렸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성산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1832]에 ‘형산진’이 기록되어 있어 지명이 확인된다. 200여 년 전부터 강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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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세바람[서남풍의 방언]을 받는 등받이라서 세바지(혹은 새바지)라 불렀다. 세바지 마을이 있는 가덕도 곳곳에 선사 시대 조개더미[貝塚]와 고분군 등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 가덕진(加德鎭)과 천성 만호진(天城萬戶鎭)이 설치되었고, 1906년 웅천군(熊天郡) 천성면과 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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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있는 자연 마을. 세산(細山)은 마을 가운데 독뫼인 서산(鼠山)과 관련된 지명이라고 한다. 서산은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늙은 쥐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밭을 향해 내려오는 형상]의 명당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명이 일제 강점기에 세산으로 개칭되었다고 전하지만,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1832]에 녹산면 세산리에 대한 기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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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소덕하리는 마을이 속한 옛 지명인 소덕리(小德里)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덕리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전하는 바가 없다. 소덕하리 마을은 약 200여 년 전에 형성된 김씨(金氏)와 이씨(李氏)의 집성촌으로 조선 후기에는 양산군 대하면 소덕리 하리 마을이었다. 1906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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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송백도(松栢島)라는 섬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백도는 섬 주위에 소나무가 울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백도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송백도라는 섬이 마을로 변한 점과 주변 지역의 형성을 통해 볼 때 1900년대를 전후해 낙동강 삼각주가 개간되며 형성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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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송백 마을은 옛날 대홍수로 대저 제방이 무너졌을 때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떠 내려와 이곳에 뿌리를 박고 자랐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백 마을은 1920년대 갈대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고 정착하였으나, 낙동강 대홍수로 폐허가 되었다가 1934년 대저 제방을 쌓으며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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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덕지도(德只島)였으나 명칭 유래는 전하지 않으며, 언젠가부터 송산(松山)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도로 옆에 독메[들판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만 산]가 있는데, 소나무가 많은 송산 주변 마을이라 하여 송산 마을이 되었다. 송산은 옛날에 독송산(獨松山)으로도 불렀다. 동메 마을, 독메 마을, 독뫼 마을이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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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있는 자연 마을. 바닷가에 송림(松林)이 우거져서 송정(松亭)이라 이름 붙였다. 송정 마을 북동쪽 구릉지에 고려 시대 분묘인 송정동 고분군이 있고, 남쪽 해안가에 조선 시대 만들어진 염전이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염전의 조성 시기는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 지명으로 확인되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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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수봉도(水鳳島)는 제도리(濟島里)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수봉도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50여 년 전부터 수봉도 마을에 당산이 있었다고 하며, 서쪽의 대저도 상납청 마을과 마주하여 앞나루가 있었던 점으로 볼 때 조선 후기부터 형성된 마을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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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개울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순기도(順基島) 마을과 서간도(西間島) 마을이 통합되며 두 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순서(順西)라 하였다. 순서 마을을 형성한 순기도 마을과 서간도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부터 갈밭을 개간하며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국권 피탈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본격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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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순아도(順牙島)의 명칭에 대해서는 정확히 전하는 바가 없으나, 「녹산의 순아도와 처녀골」에서 전하는 순아라는 처녀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지명으로 전한다. 순아도 마을은 본래 가락면 남쪽에 큰 포구가 있던 지역이었는데, 이 부근 갈대가 우거진 저습지를 일제 강점기 말 개간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각일 농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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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식만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시만(詩滿) 마을은 식만 마을에서 분리된 마을로, 명칭에 대해서는 특별한 유래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식만에서 분리되며 발음이 비슷한 시만으로 하였는데, 처음에는 숟가락 시(匙)를 쓴 시만(匙滿)으로 표기하였다가, 이후 기풍이 있는 글 시(詩) 자와 찰 만(滿) 자를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시만 마을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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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식만동에 있는 자연 마을. 이 지역 땅이 기름져 쌀의 생산량과 질이 좋아 밥맛이 좋고 밥그릇에 가득 찬다 하여 식만(食滿)으로 불렀다고 한다. ‘밥만개’라고도 불렀다. 가난한 사람도 이곳에 오면 먹는 것만큼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으로 추정한다. 식만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 낙동강 서안에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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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새터’로 불렀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신기(新基)’가 되었다. 신기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일찍부터 진양 하씨(晋陽河氏)가 정착해 거주한 집성촌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져 김해 평야의 수만 섬 벼를 도정하던 조선식량영단(朝鮮食糧營團)[1943년 전시 군량 확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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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갈밭을 개간해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 신(新)’ 자에 갈대밭을 뜻하는 노전(蘆田)을 덧붙여서 만든 이름이다. 신노전(新蘆田) 마을은 1934년 몇 가구가 들어와 갈밭을 개간하기 시작하였으며, 1935년 각일 농장(角一農場)이 개간되면서 일본인 농장의 소작농으로 이주민이 모여들며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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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서 ‘새 신(新)’ 자에 인근 상덕의 ‘덕(德)’ 자를 따서 신덕(新德) 마을로 불렀다. 땅이 비옥하여 생활이 풍족하다 하여 ‘남직이’로도 불렀다. 신덕 마을은 1930년대 낙동강 삼각주의 저습지가 개간되며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에 속하였으며,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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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에 있던 자연 마을. 150여 년 전 명동 마을 인근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명동 마을의 ‘명(明)’ 자에 ‘새로울 신(新)’ 자를 써 신명(新明)이 되었다고 한다. 옛 이름은 본동 마을의 도랑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다 하여 ‘저만’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명 마을은 150여 년 전 평산 신씨(平山申氏) 10여 호가 이주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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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1945년 8·15 해방 후 귀환 동포들이 정착하며 마을을 이루게 되자, 새로 이루어진 소덕리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소(新蘇)라고 부르게 되었다. 약 100여 년 전 갈밭을 개간하려고 2~3가구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김해 비행장이 건설될 때 노동자들의 숙소가 지어지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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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 본래 이름은 새마을로,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 일제 강점기 마을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며 신촌(新村)이 되었다. 신촌 마을[송정동]은 200여 년 전 해안가 쪽의 송정 마을과 방근 마을 사람들이 북쪽 들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한두 가구씩 옮겨 오며 형성되었다. 마을은 조선 후기 김해군 녹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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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신평(新平) 마을은 신흥(新興) 마을과 평소(平召) 마을이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평소 마을은 일제 강점기 말 일본군 비행장이 생기면서 본래 있던 마을이 철거되며 주민들이 흩어졌다가 1945년 8·15 해방 이후 다시 돌아와 형성된 마을이었으며, 신흥 마을은 해방 이후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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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1934년 부산~진해 간 국도 2호선이 개통되며, 그 동쪽의 맥도강과 평강천이 합류해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지점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서 ‘신포(新浦)’라고 불렀다. 신포 마을은 1934년 국도 2호선이 진목 마을을 중심으로 통과하며 그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형성 당시 마을이 속한 지역은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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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구랑동에 있던 자연 마을. 압곡(鴨谷)의 옛 이름은 압실(鴨室)로 주변 지세와 관련한 지명이다. 마을 주변의 산세가 ‘이끼 야(也)’ 자 형국으로, 보개산과 어산, 그리고 매봉산에 둘러싸여 ‘흰 오리가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모양[백압하가형(白鴨下架形)]이라 하여 ’오리 압(鴨)‘ 자를 써 압곡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는 백자천손(百子千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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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염막(簾幕)은 갈대발을 많이 생산하던 발막 섬과 염전이 있던 염밭 섬이 합해져 형성된 마을로, 두 지명을 합성한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발을 만드는 막사(幕舍)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염막 마을은 80여 년 전 갈대밭을 개간하고 갈대를 이용한 제품[발, 삿자리, 삿갓, 갈꽃 빗자루]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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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중리 마을 동쪽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한다고 하여, 옛날에는 이곳을 ‘동뭍’ 또는 ‘동문’이라고 하였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영원히 평안하게 해 달라는 뜻에서 영강(永康)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강 마을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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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옥포(玉圃) 마을은 가락국 허황옥(許黃玉)의 도래 전설과 연관된 ‘옥포(玉浦)’에서 지명이 유래한다. 옥포는 허황옥이 처음 배를 댄 갯머리란 의미다. 민족의 역사가 배인 지형이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지명의 훼손 과정에서 ‘포구 포(浦)’ 자가 ‘채전 포(圃)’ 자로 바뀌었다. 옥포 마을은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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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있던 자연 마을. 와룡(臥龍) 마을의 옛 이름은 이룡(二龍)으로, 산세와 관련된 이름이다. 이후 마을을 에워싼 산세가 꼭 용이 누워 있는 형국이라 와룡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와룡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경주 이씨(慶州李氏)와 함안 조씨(咸安趙氏), 거창 유씨(巨昌劉氏)가 모여 살던 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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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에 있는 자연 마을. 본섬인 가덕도와 이어진 눌차도에 있는 마을이다. 눌차도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외눌(外訥)이라고 하였다. 눌차도의 잘록한 부분 바깥쪽에 자리하여 밖목이라고도 하는데, 소리 나는 대로 반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외눌 마을이 있는 가덕도 곳곳에 선사 시대 조개더미[貝塚]와 고분군 등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마을이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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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항(大項)의 바깥쪽 목[項]으로 잘록한 포구라는 뜻에서 외항포(外項浦)라고 불렀다. 공식 지명은 외양포(外洋浦)이지만 바른 지명 표기는 외항포이다. 외양포 마을은 선사 시대 외양포 부은늘 조개더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 이곳에 가덕진(加德鎭)과 천성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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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의 위치가 용(龍)의 머리 형태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용두(龍頭) 마을은 일제 강점기 말 공군 비행장의 확장 공사로 사두 본리 마을 철거민 30여 호가 이주하며 형성되었고, 1945년 8·15 해방 이후 귀환 동포들이 정착하며 마을의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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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 용등(龍嶝) 마을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주변 지세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용등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일찍부터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전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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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월포(月浦) 마을은 맥도강(麥島江)을 따라 마치 반달처럼 생긴데다가 포구가 자리하고 이어 붙여진 이름이다. 100여 년 이전부터 몇 사람이 갈밭을 개간하며 정착해 왔으나, 국권 피탈 이후 일본 사람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간이 이루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시 마을이 속한 지역은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이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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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 있는 자연 마을. 밤나무가 많아서 밤꿈 마을 또는 밤골 마을이라 불렀다. 이를 한자로 ‘밤나무 율(栗)’ 자와 ‘마을 리(里)’ 자를 합쳐서 율리(栗里) 마을이라 한다. 율리 마을이 있는 가덕도 곳곳에 선사 시대 조개더미[貝塚]나 고분군 등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 가덕진(加德鎭)과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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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입소(立召) 마을은 입안청(立案廳) 마을과 소용포(召龍浦) 마을이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입안청 마을은 약 11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소용포 마을은 90여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마을이 합쳐져 입소 마을이 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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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용수로를 따라 길게 늘어진 작대기처럼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짝지로도 불렀다. 작지(作之)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약 100여 년 전부터 사람들이 정착하며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마을이 속한 지역은 김해군 대저면이었다. 1962년에 홍수로 일웅도(日雄島)에 거주하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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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에 있는 자연 마을. 봉화산 산줄기가 서낙동강과 만나며 바위 절벽을 만드는데, 옛날 노루가 달려오다가 절벽에서 강물에 떨어졌다고 해서 ‘노루 장(獐)’ 자에 ‘떨어질 낙(落)’ 자를 써 장락(獐落)이라 하였다. 이후 낙(落)이 낙(洛)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장락(獐洛)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청동기 시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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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에 있던 자연 마을. 기다란 밭이 있던 자리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장전(長田)으로 불렀다. 장전 마을은 약 200여 년 전 남양 홍씨(南陽洪氏)가 입향하며 형성된 마을로 전한다. 장전 마을은 조선 후기 김해군 태야면 탑동리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태야면이 녹산면에 병합되며 범방리에 속한 장전 마을이 되었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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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 지형이 노루목처럼 생긴데다 노루목 위치에 있어 노루의 목, 즉 장항(獐項)이라 불렀지만 한자식 표기는 ‘장항(長項)’으로 사용하고 있다. 장항 마을이 있는 가덕도 곳곳에 선사 시대 조개더미[貝塚]나 고분군 등이 발견되고 있어 마을이 일찍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 가덕진(加德鎭)과 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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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전등(田嶝)의 명칭에 대해서는 먼저 염전이 있는 등(嶝)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는 등(嶝)[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작은 언덕]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밭등으로도 부른다.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본래 조동 마을의 외곽에 속해 있다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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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전양(前洋)의 옛 이름은 앞등으로 평강천을 따라 2㎞가량의 길게 형성된 모래 언덕에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후 마을 앞으로 강물이 물결을 이루며 흐른다 하여 전양 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전양 마을은 1900년대 초반 사람들이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로 전한다. 당시 마을이 속한 지역은 경상남도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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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에 있는 자연 마을. 지형상으로 볼 때 진해시 용원과 녹산 국가 산업 단지 쪽은 파도가 높지 않고 웬만한 파도에도 위험하지 않으나, 동선동의 세바지 쪽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어로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곳이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배들이 바람이 심할 때는 이곳에 닻을 놓고 파도가 잠잠해 질 때까지 피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닻을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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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이 위치한 지역이 마치 솥뚜껑이나 갓 모양처럼 생겨서 정관도(鼎冠島)라 하였는데, 이후 ‘섬 도(島)’ 자를 빼고 정관(鼎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관 마을은 약 90여 년 전 지주 이상오(李相五)가 갈대밭을 개간하기 시작하며 외지인의 유입이 늘어나 형성되었다. 당시 마을은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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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조동(助東) 마을은 본래 조역리[이후 조동리로 개칭되었다가 명지동에 편입되며 사라진 지명]로 불렸는데, 이후 이 조역리의 조(助)와 동리의 동(東)을 합성해 조동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동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조역리(助役里)라는 지명이 확인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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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에 대나무가 많아 죽동(竹洞)으로 불렀다. 죽동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가락동[옛 가락면 지역으로 법정동인 죽림동·봉림동·식만동·죽동동을 관할] 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전한다.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1832]에는 이 지역에 임진왜란 때 왜적이 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근 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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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과거 오봉산이 섬이었을 때 대밭이 무성하여 큰 홍수가 나면 섬이 바닷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데서 죽림(竹林)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죽림 마을에는 신석기 시대의 조개무지[貝塚]가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점거해 죽도 왜성(竹島倭城)[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을 쌓았다고 한다. 1649년 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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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상곡 마을과 대부동 마을 중간 지점이라서 중곡(中谷)이라 이름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중곡 마을[강동동]은 약 100여 년 전 안씨(安氏) 성을 가진 사람이 제일 먼저 정착한 것으로 전한다. 초기에는 갈대밭을 개간하며 콩과 보리 등을 심었다고 전하는데, 이후 수리 시설이 확충되며 거주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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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에 있던 자연 마을. 중곡(中谷)은 동쪽의 가달 마을과 서쪽 미음 마을 사이의 천마산(天馬山)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곡 마을[생곡동]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수대에 걸쳐 살아온 집성촌으로 조선 후기에는 김해군 태야면 중곡리였다. 1914년 녹산면에 병합되며 생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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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대사 마을과 북정 마을 사이에 있어 중리(中里)로 불리다가, 의미가 좋은 ‘덕(德)’ 자를 붙여 중덕(中德)으로 개칭하였다. 중덕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개간되기 이전에 서낙동강 강변의 저습지에 자리한 것으로 미루어 인근 북정 마을이나 대사 마을과는 달리 1900년대 전후에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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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지면의 중간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하여 중리(中里)라고 불렀다. 중리 마을[명지동]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지동 지역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로 전한다. 마을의 명칭은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183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김해군 명지면에 속하였으며, 1978년 부산직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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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식만동에 있는 자연 마을. 중사도(中沙島)에 자리한 마을이라서 중사도 마을이 되었다. 중사도는 시만 마을과 식만 마을 동쪽 강 한가운데에 있는 하중도(河中島)로 ‘딴치’라고 불리던 모래톱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가운데에 있는 모래섬이라는 의미의 중사도로 개칭되었다. 중사도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초반으로,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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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신전리의 상신 마을과 하신 마을의 중간에 있어 중신(中新)이라 불렀다. 신전(新田)은 ‘새[억새풀] 밭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중신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전하는 바가 없으나, 명지동의 다른 마을과 같이 조선 후기부터 염전이 발달하였다. 마을에서 생산하는 소금이 많아서 낙동강 상류의 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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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에 있던 자연 마을.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 주변의 지세가 선비가 글을 읽는 ‘고사 독서 형국(高士讀書形局)’을 갖추고 있어 지사(智士)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지사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분성 배씨(盆城裵氏)의 집성촌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에 형성된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은 조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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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진동(鎭東) 마을의 명칭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마을 동쪽에 동강이라는 염전이 있어 관련성을 추정할 뿐이다.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전하는 바가 없으나, 동쪽에 동강(東江)이라는 염전이 있었고 명지동의 최남단 서쪽 모래톱에 해티 밭 염전 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소금을 생산하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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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에 참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여 진목(眞木)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지명의 유래가 된 참나무 숲은 현재는 사라지고 몇 그루만 남아 있다. 진목 마을은 약 3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전하는데,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1832]에 명지면의 진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부터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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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에 있는 자연 마을. 천성진성(天城鎭城)이 있어 천성(天城)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천성 마을은 마을 가운데 일자로 나 있는 선착장을 중심으로 나뉘는데, 서쪽에 형성된 마을이 서중 마을[가덕도동 8통]로 천성동의 중심이 되고, 남쪽에 형성된 마을은 남중 마을[가덕도동 9통]이라 한다. 또 천성 만호진의 성문지를 중심으로 서문 마을,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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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천자도(天字島)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이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먼저 이곳에 천자가 지나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마을의 형세가 ‘일천 천(千)’ 자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한 마을이 형성될 당시 주변 마을에서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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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출두 당리(出斗堂里) 마을은 출두리(出斗里)와 당리의 합성 지명이다. 과거 출두리는 당리 마을·번덕 마을·신촌 마을의 옛 지명으로 본래 출두도로 불렀다. 당리는 마을에 당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당말리(塘末里)라고도 불렀다. 출두 당리 마을의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이 속했던 출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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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출두 번덕(出斗蕃德) 마을은 출두리(出斗里)와 번덕의 합성 지명이다. 과거 출두리는 당리 마을·번덕 마을·신촌 마을의 옛 지명으로 본래 출두도로 불렀다. 번덕 마을이 자리한 대저 지역은 수해의 피해가 컸는데, 마을이 자리한 곳은 잔디가 잘 자라 피해가 적어 큰 덕을 입었다 하여 수덕(水德)이라 하였다가 번덕(蕃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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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출두 신촌(出斗新村) 마을은 출두리(出斗里)와 신촌의 합성 지명이다. 과거 출두리는 당리 마을·번덕 마을·신촌 마을의 옛 지명으로 본래 출두도로 불렀다. 신촌 마을은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을 때 둑 바깥쪽에 살던 사람들이 둑 안쪽으로 옮겨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출두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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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에 있던 자연 마을. 탑동(塔洞) 마을은 북쪽 금병산(錦屛山) 기슭에 범방동 삼층 석탑[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23호]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탑동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북쪽 금병산에 허왕후가 넘었다는 능현(綾峴)[허왕후가 자신이 입었던 비단 치마를 벗어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비단치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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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에 조선 시대 때 통제영(統制營)이 관리하던 땅이 있어 통전(統田)으로 불렀다가 마을 이름도 통전 마을이 되었다. 통전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 시대 통제영의 통전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오랜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마을은 조선 후기 김해군 가락면 봉림리에 속하였으며, 1934년 서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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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평강 대리(平江大里) 마을은 평강리(平江里)와 대리의 합성어이다. 평강리는 대리 마을이 속했던 옛 지명으로 평강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대리의 명칭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큰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옛날에는 길가에 포구 나무가 즐비하게 심어져 있어 포구 나무 각단 또는 포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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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평강 사리(平江沙里) 마을은 평강리(平江里)와 사리의 합성어이다. 평강리는 대리 마을이 속했던 옛 지명으로 평강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사리는 마을이 낙동강 토사가 퇴적된 모래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평강 모래 각단이라고도 불렀다. 평강 사리 마을은 19세기 초 홍수를 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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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평강 상리(平江上里) 마을은 평강리(平江里)와 상리의 합성어이다. 평강리는 대리 마을이 속했던 옛 지명으로 평강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상리는 평강리의 자연 마을들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뽕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상목리(桑木里)로 불리기도 하였다. 평강 상리 마을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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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는 자연 마을. 평강 칠점(平江七點) 마을은 평강리(平江里)와 칠점의 합성어이다. 평강리는 대리 마을이 속했던 옛 지명으로 평강천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칠점은 마을 인근의 칠점산(七點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칠점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서도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옛날 대저도가 바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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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에 있던 자연 마을. 평강 하리(平江下里) 마을은 평강리(平江里)와 하리의 합성어이다. 평강리는 대리 마을이 속했던 옛 지명으로 평강천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하리는 평강리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평강 하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마을이 속한 지역은 『여지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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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평성(平城) 마을의 옛 이름은 서리(西里)로, 명지면사무소의 서쪽 편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방조제가 바닷물을 막아 평안한 성(城)과 같이 안전한 지대가 되었다 하여 평성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또한 태평등(太平嶝)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지명들은 염전으로 생활이 안정되며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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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평야도(平野島)로 넓은 들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후 평강천이 마을 앞을 유유히 흐른다고 하여 평위도(平渭島)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평위도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전하는 바가 없으나, 150여 년 전부터 지내왔다고 전하는 용왕제가 행해지고, 1934년 낙동강 대홍수로 마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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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신전리의 세 마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어 하신(下新)이라 불렀다 한다. 신전(新田)은 ‘새[억새풀] 밭에 형성된 마을’을 뜻한다. 하신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전하는 바가 없으나, 옛날부터 신호리(新湖里)로 건너가는 신호 나루터가 있었고 거주 주민의 대부분이 3~4대째 살아가는 토박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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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목[項]이라는 말은 머리와 몸을 이은 잘록한 부분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는 중요한 길의 좁은 곳을 일컫기도 한다. 내눌과 외눌의 중간 지점이 잘록하여 목의 형태를 하고 있고, 마을로 들어갈 때는 이 목을 넘어가야 해서 항월(項越)이라 하였다. 항월 마을이 있는 가덕도 곳곳에 선사 시대 조개더미[貝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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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에는 갯마을이라는 뜻에서 ‘갯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접한 사취등 마을과 함께 바닷가에 형성된 모래등이었지만 명지동에서 지형이 제일 높은 지대라, 이곳에 올라서면 명지동 전역을 헤아려 가늠할 수 있다고 해서 ‘바다 해(海)’ 자와 ‘자 척(尺)’ 자를 합쳐 해척(海尺)이라고 붙였다. 해척은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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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는 자연 마을. 해포도(海浦島) 섬에 형성된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이름은 어부가 사는 마을이라는 뜻의 해부리(海夫里)였다. 해포도는 녹산 수문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만조 시 해수가 역류해 바다와 접해 있는 섬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포도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경상도 속찬 지리지(慶尙道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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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화전동에 있는 자연 마을. 화전(花田) 마을[화전동]의 옛 이름은 서구지이다. 금단곶(金丹串)의 서쪽에 있어 서곶이(西串伊)였는데 ‘곶’이 ‘고지’, ‘구지’로 변하였다고 한다. 1914년 마을 이름을 한자화하면서 ‘곶이’를 ‘꽃’으로 하여 ‘화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화전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약 30...
연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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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 뒤쪽으로 낮은 산 두 개가 있는데, 그 골짜기 부근에 위치하였다고 곡리(谷里) 마을이라 불렀다. 곡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곡리 마을이 속하였던 연산리는 1910년경 조사한 『조선 지지 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 처음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 지명의 유래가 된 마을 뒤 야산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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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남문구(南門口) 마을은 동래읍성(東萊邑城) 남문(南門)[현 동래경찰서 부근]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문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남문구 마을이 속한 지역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대조리(大鳥里)로 서면 관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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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는 자연 마을. 물만골은 황령산(荒嶺山)[427.6m] 북쪽 골짜기로, 맑은 물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수량이 풍부하게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물만골에 위치하고 있어 물만골 마을이라 불렀다. 수만곡(水滿谷) 마을이라고도 한다. 물만골 마을은 6·25 전쟁 당시 군사 기지용 도로 개설과 1953년 농장[방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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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온천천이 흘러가면서 만든 모래벌 위에 솟아 있는 언덕이 마치 섬처럼 보였다고 하여 섬안 마을이라고 불렀다. 또한 온천천 가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독도(獨島)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섬안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1151년(의종 5) 정서(鄭敍)가 동래로 귀향 와 정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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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하여 솔동네 마을이라 불렀다. 송리(松里)라고도 하였다. 솔동네 마을의 정확한 위치와 형성 시기, 변화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동래군 서면에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읍내면 연산동에 속하였다.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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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금리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금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동래군 서면에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읍내면 연산동에 속하였다. 194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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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황령산(荒嶺山)[427.6m] 북쪽 사면 끝자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신리(新里) 마을이라 불렀다. 신리 마을[연산동]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읍내면 연산동에 편입되었다. 1942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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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에 있던 자연 마을. 거제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고 하여 안동네 마을[거제동]이라고 불렀다. 본동네, 본동 마을이라고도 한다. 안동네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시된 바가 없으나, 거벌리의 본동 마을에 해당하며 남원 양씨(南原梁氏)가 오래전부터 들어와 살았다. 『남원 양씨 대동보(南原梁氏大同譜)』[1979] 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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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는 정보화 마을. 연제 토곡빌(蓮堤 土谷빌)은 2001년부터 실시된 행정안전부[현 안전행벙부]의 정보화 마을 조성 사업과 관련하여 부산광역시 연제구가 자체 조성한 정보화 마을이다. 연산동의 ‘토곡(土谷)’이라는 명칭은 과거에 존재했던 토곡 마을이라는 자연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다. 토곡은 연산 9동에서 망미동 쪽으로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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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에서 금부처가 나왔다고 하여 이불(二佛) 마을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이불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10년 동래군 서면에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읍내면 연산동에 속하였다. 1942년 10월 부산부 동래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6년 연산동이 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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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금련산 북쪽 사면 마하사(摩訶寺)골 아래쪽 사면에 밭이 많이 있다고 하여 전리(田里) 마을이라 불렀다. 전리 마을 남쪽 산지에 있는 마하사가 1,500여 년 전인 통일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오랜 거주 역사를 추정할 수 있지만,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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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연산동에서 수영구 망미동으로 넘어가는 토곡 고개 부근에 위치한다고 하여 토곡(土谷) 마을이라 불렀다. 토고개, 톳고개, 톳곡, 토골, 토현(土峴)이라고도 한다. 토곡 마을은 조선 시대 동래읍성에서 이섭교[1694년 건립]를 지나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던 자연 마을이다. 위치적 특성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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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동래구 낙민동과 연제구 연산 1동을 연결했던 이섭교(利涉橋)를 한다리라 하였는데, 이 다리 인근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하여 한다리 마을로 불렀다. 큰다리 마을이라고도 하였다. 한다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지만, 1694년(숙종 20) 이섭교[온천천에 홍수가 나면 자주 떠내려가는 등 개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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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에 있는 자연 마을. 한새벌 마을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전한다. 먼저 십자산(十字山)[46m] 일대에 황새가 많이 날아와 알을 낳았다 하여 한새벌[황새알]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십자산에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의 모습이 황새의 알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학란(鶴卵), 황새알, 한새알,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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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에 있던 자연 마을. 동래 부사가 부산진으로 시찰을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면 횃불을 들고 마중 나간 곳이라 하여 홰바지 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또는 이른 아침 부산장으로 장을 보러 가면 동쪽에 있는 장산 때문에 해가 가려져 이 지역에 도착해야 해를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해받이, 해바지, 해맞이, 해마지, 홰받이, 거점(炬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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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던 자연 마을. 배산(盃山)[255m]의 뒤쪽 넓은 들판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후리(後里) 마을이라 불렀다. 뒷거블, 뒷거불, 뒷거벌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후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동래군 서면에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수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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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옛날 수영강변에 모래가 많아 수많은 갈매기[鷗]들이 날아와 즐겁게[樂] 놀았다고 하여 구락리(鷗樂里)라 불렀다고 한다.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71] 등의 기록에는 ‘구락리(求樂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1740년(영조 16) 이전 구락리의 원래 이름은 숭정리(崇亭里)였으나, 1895년경 동래부 남촌면(南村面)의 구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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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던 자연 마을. 남수(南壽) 마을은 남수(南藪) 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좌수영성 남쪽에 있는 숲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1740년(영조 16)경에 동래부 남촌면 동부리·서부리가 존재하였다. 1756년(영조 32) 동부리를 동일패동(東一牌洞)·동이패동(東二牌洞)·동삼패동(東三牌洞)으로, 서부리를 서일패동(西一牌洞)·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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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는 자연 마을. 널구지는 평평하고 넓다는 의미[板]와 육지가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반도보다 작은 지형[串]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산 남쪽으로 나아가 바다로 평평한 지형이므로 널구지라 불렀다. 조선 후기 숙종 연간[1675~1720]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경상 좌수영 영지 도형(慶尙左水營營地圖形)』에 대백산(大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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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남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큰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큰 대(大)’, ‘마을 리(里)’ 자를 써서 대리(大里) 마을이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 동래부에서 나온 읍지(邑誌)에는 대리라는 동리(洞里)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남천동에 동래부 남촌면 소속의 남천리라는 이름이 보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남천리 대신 동래군 용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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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자연 마을.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무억 마을은 원래 무덤동이라 불렀다. 옥성골의 감옥에서 죽은 죄수를 묻은 곳이라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전하는데, 이 이름을 피하여 무억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전기 동래현 치소가 동래 고읍성에서 동래읍성으로 옮겨간 뒤, 무덤이 있었던 곳에 빈민들이 모여 살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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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는 자연 마을. 백산(白山)이란 민락동 중심에 있는 백산[129.5m]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후기부터 백산 마을 주변에는 보리진 마을·널구지 마을·본동 마을 등이 있었다. 주변 마을이 대부분 어촌이었으나 백산 마을은 산지를 끼고 있는 농촌 마을이었다. 백산 마을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70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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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는 자연 마을. 조선 후기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 관하의 만호영 중 하나인 포이포 만호영(包伊浦萬戶營)에서 보리진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일설에는 보리를 팔던 가게[廛]들이 있어 보리전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보리진이란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1652년(효종 3)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과 함께 옮겨 온 포이포 만호영은 백산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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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는 자연 마을. 민락동의 중심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본동(本洞) 마을이라 불렀다. 1652년(효종 3) 지금의 본동 마을 자리에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이후 관하의 감포 만호영이 있었다. 매년 첫 어로 작업을 하는 날에는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가 진조말산(眞潮末山) 아래 의자처럼 생긴 진조암에 앉아 수군들을 독려하고 어부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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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자연 마을.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의 북문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북문외리(北門外里)라 불렀다. 1652년(효종 3)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남촌으로 옮겨지고 좌수영성이 축조되었는데, 북문 바깥쪽에 수군(水軍) 가족들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04년(고종 41) 행정 명칭이 변경되어 동래부 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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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던 자연 마을. 조선 시대에 사당이 있어 사당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사당골의 음이 변하여 서당골·새양골·시양골 등으로 불렀다. 서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고려 전기의 관인 정서(鄭敍)가 지은 정과정(鄭瓜亭)을 말하는 것이다. 구락리 마을 북쪽의 옥봉산[117m, 중군산] 자락에 정과정이 있었고, 그 주위에 한적한 농촌 마을이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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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각단은 특정한 야산이나 강을 경계로 아래위로 각각 몇 집씩 드문드문 모여 있는 마을을 뜻하며, 깍단·뜸 등으로도 불렀다. 좌수영성 남쪽의 망경대(望鏡臺)[또는 望景臺] 부근 아래쪽에 있었다고 하여 아랫각단이라 불렀다. 1740년(영조 16) 이전 광안동에는 동래부 남촌면 소속의 남문외리만 있었으며, 1904년(고종 41)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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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자연 마을. 고려 시대에 동래현 읍성의 옥사(獄舍)가 있었다고 전해져 옥성골[獄城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동래현 치소가 동래 고읍성에서 동래읍성으로 옮겨 가 감옥이 사라진 뒤 빈민들이 모여 살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남쪽의 망미동에 편입되었고, 1942년에는 부산부 수영출장소 수영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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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에 있는 자연 마을. 각단은 특정한 야산이나 강을 경계로 아래위로 각각 몇 집씩 드문드문 모여 있는 마을을 뜻하며, 깍단·뜸 등으로도 불렀다. 좌수영성 남쪽 망경대(望鏡臺)[또는 망경대(望景臺)] 부근 위쪽에 있었다고 하여 윗각단이라 하였다. 1740년(영조 16) 이전 광안동에는 동래부 남촌면 소속의 남문외리만 있었는데, 1904년(고종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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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에 있는 자연 마을. 장대골이란 1652년(효종 3)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이후 이곳에 경상 좌수영의 어구정(禦寇亭)과 장대(將臺)[적의 침략을 살피는 군사 시설]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대골 마을은 1652년(효종 3)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되면서 현재의 수영중학교 뒤편에 장대가 들어서면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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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에 음식물을 조리하던 장소라고 하여 조치막(調治幕)이라 불렀으며, 조니골, 조니곡(調泥谷)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인근 지역으로, 마을 남쪽 금련산 자락의 어구정(御寇亭)과 장대(將臺) 등에서 훈련하던 병사들의 음식을 조리하여 제공하였던 곳이었다. 1894년(고종 31)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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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 뒷산인 금련산[415m] 중턱에 범의 모양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길을 가던 나그네가 이 바위를 보고 호랑이인 줄 알고 놀라 기절하여 마을이 떠들썩하였다고 해서 호암(虎岩) 마을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범바위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호암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04년(고종 40)에 편찬한...
사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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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 있던 자연 마을. 하중도로서 개[포(浦)의 뜻으로 ‘개’가 있는데, 이는 강이나 내해(內海)에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을 가리킨다]라는 의미이다. 갯가의 포구라 부른 것이 것이 가포라고 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邊]의 뜻에서 가포라 한 것을 한자로 가포(駕浦)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사육신의 후손이 역적의 멍에를 지고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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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에 있던 자연 마을. 감동(甘洞)이라는 명칭은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마을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감동리(甘洞里) 이전에는 괘내리(掛乃里)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낙동강 동쪽 샛강의 제일 안쪽에 있는 감동리와 서쪽의 서전리(西田里)가 병합되어 감전리로 행정 개편된 이후 동감(東甘)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 무문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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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던 자연 마을. 골짜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골새 마을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골새란 골짜기 사이라는 준말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가 골새 마을에 들어온 곳이 임진왜란 이후이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다양한 성씨가 들어와 세거한 것으로 보아 마을의 성세를 짐작할 수 있다. 『동래부지(東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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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에 있는 자연 마을. 괘내리(掛乃里) 마을은 원래 마을 앞 나루터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냇물이 괴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괸내’라 부르던 것이 괘내가 되었다고 한다. 혹은 일찍이 사상 일대의 중심 구실을 하여 깃대를 걸던 냇가 동네라고 하여 ‘걸 괘(掛)’ 자에 내(乃) 자를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마을 서쪽으로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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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에 있던 자연 마을. 옛날 이곳에 아홉 집이 살았다고 해서 구덕리(九德里)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구덕산에 명당(明堂) 자리가 아홉 곳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집안이 크게 번성한다고 하여 구덕이란 지명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구덕은 전해 내려오는 ‘구덩[굴]’, ‘구덩이[坑]’, ‘구지기(久至岐)’, ‘구덕기(九德岐)’에서 ‘구덩이 골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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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에 있던 자연 마을. 국매섬은 감전동 서쪽 강변에 있던 소요저도와 유도에 이어진 섬으로서, 오복섬이라고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곳에 목장을 설치하였다고 하여 군마도(軍馬島), 국마도(國馬島)로도 불렀다고 하지만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이곳을 개간하여 본격적으로 밀을 재배하며 보리농사도 함께 지은 곳이라고 국맥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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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던 자연 마을. 주례동에는 동천과 남천이 흘러와 주례의 본 동네 앞에서 이 물길이 합쳐졌다. 이곳을 냇바닥이라고 불렀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주례의 동천이 내려오다 서천과 합류하여 모래가 쌓이고 하천 바닥과 둑이 사장(沙場)으로 변하여 20세기 초에 형성된 곳이 냇바닥 마을이라고 한다. 1914년 일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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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는 자연 마을. 냉정(冷井)이라는 우물이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여진 마을이다. 냉정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냉정이라는 샘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천면 고문서(沙川面 古文書)인 「사천면 전답 재결영정책(沙川面田畓災結永頉冊)」[1775]에는 사천면에서 재해를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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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적포는 옛날 서쪽 유두 강변에 있던 포구에서 유래한다. 덕포상리(德浦上里) 마을은 덕포동의 위쪽에 있는 마을로 윗덕포 마을, 웃각단이라고도 한다. 덕포상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을이 자리한 지역이 사람이 거주하기 좋은 위치여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지명은 『동래부지(東萊府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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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던 자연 마을. 덕포하리(德浦下里) 마을은 덕포동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아랫덕포 마을, 아랫각단이라고도 한다. 덕포하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을이 자리한 지역이 사람이 거주하기 좋은 위치여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특히 인근의 덕천동에서 발견된 고분군의 조성 시기가 삼국 시대부터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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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던 자연 마을. 몰랑등은 산등성·산마루·산자락을 가리키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언(方言)이자 언문(諺文)이다. 1900년대 초 경부선 철로 부설 공사 당시 이웃 엄골 마을 집들이 철거되자 가까운 산등성이를 개발하여 몰랑등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가 되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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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엄궁동에 있던 자연 마을. 산동네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산동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민들이 두레에 의해 마을 우물인 장군샘을 먼저 개발하고,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동래도호부 관할의 사천면 상단에 엄광리가 나타나며,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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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에 있던 자연 마을. 1980년에 편찬한 『한국 지명 총람』에 보면, “서감 마을은 감전동의 으뜸 마을로 서촌(西村)이라고 불렀으며, 동감 마을은 서감 마을 동쪽에 있어 동감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전동의 서쪽 강변에 강물에 의해 실려 내려 온 모래 퇴적과 괘내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흙모래가 쌓여 모래톱이 생성되는 등 변동이 많았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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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던 자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소당골 소당자리라 하였다. 한글학회에서 1980년 편찬한 『한국 지명 총람』10권인 부산·경남 편에 소당나래 마을 이름이 나타나 있다. 이곳에 소남(召南) 나루가 있었는데, 당시 이곳 주민들은 소람나래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변용되어 소당나래라고 되었다고 추측된다. 소당나래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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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 있는 자연 마을. 소요리(所要里)라는 이름은 소요저도(所要渚道)에서 비롯되었다. 소요저도는 조선 시대 낙동강 삼차수(三叉水)의 한 줄기인 유두강이 구포 쪽에서 소요저도의 동쪽, 즉 사상 쪽으로 흘렀다는 기록에서 물길이 갈라지는 중요한 요지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소요리 마을은 하중도(河中島)인 소요저도에 있던 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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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에 있던 자연 마을. 수참(水站) 마을은 속칭으로 시치메라고 불렀다. 시찌메 또는 시치메는 수참(水站)이 변음(變音)된 말이다. 마을의 고로들에 따르면, 이곳에 집이 일곱 채 있어 일본말로 ‘시찌메’라고 불렀다고도 하지만 근거가 불분명하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마을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오래전부터 있었던 나루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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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에 있던 자연 마을. 경부선 철로가 마을을 가로지르면서 철로 아래 운수천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아랫마을이라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아랫각단이라고도 한다. 사상구 모라동은 지형상으로 산기슭의 고지대와 그 아래 저지대, 그리고 서쪽 끝자락의 저습지로 구분되어 있다. 고지대 쪽에는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운수천이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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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에 있던 자연 마을. 1910년경 일제가 조사한 『조선 지지 자료』에는 원곡(院谷)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원(院)이 있던 골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원은 고려 시대부터 지나가는 과객의 숙박지였다. 한글학회에서 1980년 편찬한 『한국 지명 총람』10권인 부산·경남 편에 엄골 마을 이름이 나타나 있다. 이곳 주민들은 마을 지명을 원곡(院谷)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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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엄궁동에 있던 자연 마을. 엄광포(嚴光浦) 마을은 엄광포라는 지명에서 따 왔다. 엄광포는 지금의 엄궁동 앞 낙동강변에 있었던 포구를 이른다. 엄광포의 엄광은 그 주변의 엄광산에서 온 것이다. 엄광산은 엄비치산으로 해가 서쪽으로 질 때라야 해가 비치는 산이라는 뜻이다. 엄광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의 문헌 기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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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에 있던 자연 마을. 경부선 철로가 마을을 가로지르면서 철로 아래 운수천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을 윗마을이라고 하였다. 윗각단, 또는 동리(東里) 마을이라고도 한다. 사상구 모라동의 고지대 쪽에 있던 고동 바윗골 일대에 일찍이 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 모라 조개더미가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바다와 하천을 낀 야산 지대로, 물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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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 있던 자연 마을. 유도(柳島)라는 이름은 예전 섬 주위에 많이 심어져 있던 왕버드나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두리(柳頭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유도리(柳島里)는 소요리(所要里)와 함께 조선 시대 양산군 좌이면에 속하였을 때의 공식 지명이다. 조선 시대 낙동강 하구 지역의 하중도(河中島)인 소요저도와 유도, 국매섬은 구포의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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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에 있던 자연 마을. 장문리(場門里) 마을 지명은 옛날 이 지역에 장터가 있어서 붙여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이 지역에 있던 목장성과 관련된 지명으로 전해진다. 사상 지역에서 전해 오는 고문서인 「사상면 우세답 개량안(沙上面牛稅畓改量案)」[1842년]의 전답(田畓) 지명에 장문리 서수장원(西守場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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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에 있던 자연 마을. 운수사(雲水寺)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절골[寺谷]이라고 붙여졌다. 절골 마을 인근에 운수사가 있는데, 사찰의 창건 연대가 가락국 또는 신라 법흥왕 대이므로 절골 마을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오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래군 사상면 모라리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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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엄궁동에 있던 자연 마을. 한글학회에서 1980년 편찬한 『한국 지명 총람』10권인 부산·경남 편에 지불 마을이 소개되어 있다. 옛날부터 ‘지이불’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지불에 대한 뜻과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정월 대보름날에 쥐불놀이를 하던 곳으로, 또는 자기 이불만 챙기는 말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지불 마을의 형성 시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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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에 있던 자연 마을. 창법 마을의 이름은 창진리(倉津里)에서 유래한다. 창진(倉津)이란 지명은 이곳에 있던 사창(社倉)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경상도 지도(慶尙道地圖)』에 사상면 사창(社倉)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사창은 조선 시대 한 마을을 이룬 공동체로 하여금 창(倉)을 설치하여 곡물(穀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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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에 있던 자연 마을. 포푸라마치 마을은 포플러[미루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일제 강점기 주막거리를 형성한 이곳을 찾아온 일본 사람들이 서천둑[西提堰]에 포플러가 많은 것을 보고 포푸라마치[町], 뽀뿌라미찌, 포푸라[포프라], 포플러마치[마찌]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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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에 있던 자연 마을. 학성(鶴城)이란 이름은 엄광산 기슭에 위치한 학성[고려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조성된 성으로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성을 후에 목장성으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에서 유래하였다. 학성의 명칭은 이 일대 모래펄에 학이 모여드는 풍경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한편 엄궁동 쪽에서 주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인 ‘두루재’를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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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에 있던 자연 마을. 한글학회에서 1980년 편찬한 『한국 지명 총람』 10권인 부산·경남 편에 홍개(洪介) 마을 이름이 나타나 있다. 지금의 학장초등학교 뒤편 일대를 홍개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다. 한자로 ‘홍개(洪介)’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홍개의 ‘개’는 포구 또는 바다를 의미한다. 즉 홍개는 홍포(洪浦)로 넓은 갯벌을 의미한다...
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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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가보들골로, 첫 자인 가를 따고, 골[고을]을 차훈한 동(洞)을 붙여 가동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가보들골이란 갓보들골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데, 갓은 산(山)을 말하며, 보는 논에 물을 대는 보(洑), 들은 평(坪), 골은 동(洞)으로, 가보들골을 한자로 표기하면 산보평동(山洑坪洞)이 되어 산동(山洞)으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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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달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강변(江邊) 마을은 좌광천 가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명칭이라는 설과 본동인 달산 마을의 강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설이 있다. 옛 이름은 새각단 또는 떡곡 마을이라고도 한다. 새각단은 달산 마을에서 주민들이 이주해 와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는 뜻이며, 떡곡은 마을 인근의 야트막한 고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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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오리에 있는 자연 마을. 개천(開川) 마을의 옛 이름은 개내로, 한자로 표기하면 계천(鷄川), 계내(鷄內), 또는 개내(介內)였다. 하천의 안쪽이라는 뜻인데, 방언 때문에 개와 계의 발음이 구분되지 않아 개천으로 불렸다고 한다. 개천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개천 마을이 속한 오리는 1599년(선조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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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석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송정천 강변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갱빈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갱빈 마실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마을이 속한 지역은 조선후기 기장현 남면 석산리였다가 1895년(고종 32) 동래부 기장군 남면 석산동이 되었다. 1914년에는 동래군으로 귀속되며 기장면 석산리가 되었고,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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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동리에 있는 자연 마을. 건네 마을은 좌동 마을 동쪽 하천가에 있어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고 불리다가 줄여서 건네말이 되었다. 동편(東便)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중북면 덕산동이 되었다가,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기장군 중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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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 있는 자연 마을. 시랑산의 서쪽에 있는 고래개안골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래개안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고 지명에 대한 기록도 확인할 수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기장현 남면 비옥포로 나타나며, 1895년(고종 32) 기장군 남면 동암동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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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반룡리에 있는 자연 마을. 고무(古武) 마을의 명칭 유래는 다음과 같다. 먼저 반룡리 고무골이라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구전에 주변의 지형 조건이 무예(武藝)를 연마하기에 적합하여 많은 무인이 찾아들던 장소여서 ‘옛 고(古)’ 자에 ‘무사 무(武)’ 자를 써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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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길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고원(古原) 마을은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형성된 마을로 원자핵의 ‘핵(核)’과 빛 ‘광(光)’ 자를 따서 핵광 마을로 부르다가, 고리 원자력 발전소 때문에 생겨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고원 마을로 개명하였다. 고원 마을은 1970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원자력 발전소가 고리에 건설되자 건설 기술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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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에 있는 자연 마을. 고촌(古村)은 오래된 마을이라는 뜻도 있지만 고촌리의 옛 이름인 돋골 마을의 본 마을, 큰 마을이란 뜻도 들어 있다. 돋골은 구곡(丘谷), 대곡(大谷)을 의미한다. 한편 마을 동쪽에 위치한 행주산(行舟山)이 배가 떠나가는 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을 그 배의 돛으로 삼기 위해 범곡 마을로 불렀다고도 한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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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 있는 자연 마을. 조선 시대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시대에 각 관청의 건물 수선과 중앙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관리의 숙박이나 접대 등에 드는 경비를 쓰기 위해서 주(州), 현(縣), 역(驛), 관(館)에 공수전이란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공수(公須) 마을은 조선 시대 공수전이 있었던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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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 뒷산에 미역 바위라고 불리는 각이 진 바위가 있어 곽암(藿岩)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각암(角岩)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차성가(車城歌)」에 “공곡(空谷)의 저 백구(白駒)를 곽암(藿岩)에 메엿[매었]도다.”라고 하여 곽암이란 지명이 나온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을미개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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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있는 자연 마을. 광산(鑛山) 마을은 일제 강점기 일광 광산[달음산에 위치]이 개발되며 형성된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산 마을은 1930년 3월 11일부터 달음산에서 일광 광산[구리광]을 개발하며 형성되었다. 당시 광산 입구 실개천에 교량을 설치하고, 개천 가장자리에 석축을 쌓아 터를 조성하여 사무실과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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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고성리(古城里)로, 기장의 고읍성이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이다. 향교(鄕校)가 있는 마을이라 교리(校理)라고 불렀다. 교동(校洞)이라고도 부른다. 교리 마을[교리]은 기장읍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 마을로, 1356년(공민왕 5) 현재의 기장 읍성이 축조되어 옮겨 가기 전까지는 기장의 중심 지역이었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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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반룡리에 있는 자연 마을. 구기(舊基) 마을은 원래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구터’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마을 북동쪽 펑퍼짐한 곳에 서당이 있었는데, 이 서당이 폐쇄되면서 ‘구서당 터’라고 불리다가 줄여서 ‘구터’가 되었다고도 한다. 구터가 한자명으로 바뀌며 ‘오랠 구(舊)’ 자와 ‘터 기(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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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에 있는 자연 마을. 구노실(龜老室)이란 이름은 마을 안에 있던 구노곡(龜老谷)에서 나왔다. 또는 거북 바위가 있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구노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시대 역사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어 조선 시대부터는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차성가(車城歌)」에 “구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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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에 있는 자연 마을. 원래 옻나무가 많아서 옻밭골[漆田谷]이라 하였다. 옻은 한자로 ‘옻 칠(漆)’ 자를 쓴다. 큰 옻나무 아홉 그루가 있어서 구칠(九漆)이라 하였다고 한다. 옻나무가 언덕 위에 자생하여서 구칠(邱漆)이라 하기도 하였다. 옻은 사람에게 옻독을 입히는 원수 같은 나무라 하여 ‘원수 구(仇)’ 저를 써서 구칠(仇漆)이라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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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기룡리에 있는 자연 마을. 기룡(寄龍) 마을의 기(寄)는 ‘키’, ‘크’의 차음 표기로 ‘크다’라는 의미이다. ‘룡’ 자는 ‘미리’로서 머리의 의미로 두 글자를 합하면 큰 머리를 뜻한다. 장안천 변의 마을 이름은 모두 용(龍) 자와 건(乾) 자가 들어가는데, 기룡 마을은 장안천 변의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기룡 마을은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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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길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길천(吉川) 마을은 질고지[마을 북쪽의 들]와 질곶이천[들을 흐르는 소하천]과 연관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질’은 ‘길’의 사투리이기 때문에 길(吉)이 되었고, ‘천’은 소리 나는 대로 차음하여 천(川)자를 따서 길천이라 불렀다. 길천 마을은 임진왜란 때 박씨·이씨·윤씨·서씨가 피난을 와서 정착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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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에 있던 자연 마을. 기장 읍성 안쪽과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문안[南門안]은 남문내리(南門內里)로, 남문밖[南門밖]은 남문외리 또는 남바께, 남밖, 남밖에라고도 불린다. 남문안, 남문밖 마을은 고려 후기인 1356년(공민왕 5) 기장 읍성을 축성하면서 형성된 자연 마을이다. 마을의 지명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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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덕선리에 있는 자연 마을. 내덕 마을은 덕산의 안[內]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기장 향토지에 의하면 산기슭의 둔덕을 둔덕뫼(산) 또는 둔덕밭으로 부르며, 마을이 있으면 앞글자인 둔 자를 빼고 덕뫼나 덕밭 마을로 불렀다고 한다. 내덕 마을은 둔덕산 기슭에 있어 덕뫼, 한자로는 덕산(德山)이 되는데, 인근 좌동리에 덕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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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에 있는 자연 마을. 내동(內洞) 마을은 옛날에 안골 마을 또는 안골아리라고 하였다. ‘안 내(內)’ 자에 ‘고을 동(洞)’ 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내동은 내리의 중심 마을이었다. 내동 마을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지만, 마을이 속한 지역은 원효 대사에 의해 창건(661)된 안적사가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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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달산리에 있던 자연 마을. 달산(達山)이란 지명은 마을의 남쪽에 있는 달음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달산 마을은 조선 전기에도 형성된 마을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이후 김해 허씨(金海許氏)가 처음 정착하고, 이어서 밀양 박씨(密陽朴氏), 은진 송씨(恩津宋氏)가 들어와 마을이 다시 형성되었다고 한다. 달산 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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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화전리에 있는 자연 마을. 당곡(堂谷) 마을[화전리]의 옛 이름은 당골이었다. 마을에 수호신에게 제를 올리는 당사(堂祠)와 당목(堂木)이 있었는데, 이에 당곡 또는 골메기 집[당사를 이르는 명칭]이라고 하였다. 당골, 당미기, 당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곡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옛날 이 지역에 당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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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당사리에 있는 자연 마을. 당사(堂社)는 당사(堂祀)라고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곳에 있던 당집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전한다. 당사는 토지나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이 있는 곳을 말한다. 대개 노거수 밑에 당집이라고 부르는 신당이 있었다.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을 당산이라 하며, 지금도 오래된 당산나무[소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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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장전리에 있는 자연 마을. 대곡(大谷)은 한실이라고도 불린다. 한실 마을의 한은 크다[大], 실은 골[谷]의 뜻이므로 대곡 마을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차성가(車城歌)」에 “대곡(大谷)의 소순[솟은] 구름 운봉(雲峯)을 지엇도다.”라고 하여 대곡이란 지명이 나온다. 1895년(고종 32) 동래부 기장군 상서면 장전동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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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오리에 있는 자연 마을. 대룡(大龍) 마을의 명칭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다. 첫째는 마을 남쪽의 큰 바위가 용처럼 생겨 대룡암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둘째는 마을 뒤쪽 계곡에서 큰 용이 승천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셋째는 대룡 마을의 산세를 내룡(來龍)으로 보고, 물이 풍부해 큰 들이 있다 하여 붙여진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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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대리(大里) 마을의 옛 이름은 큰마을이다. 용천리의 큰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마을 이름이 한자로 바뀌면서 대리가 되었다. 대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대리 마을이 속한 지역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기장현 동면 용천리(龍川里)로 확인된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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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있는 자연 마을. 대명(大鳴)은 큰 명례(鳴禮)를 뜻한다. 옛 이름은 ‘큰울례’ 또는 ‘큰울리’였다. 울이 뜻을 빌려 울 명(鳴) 자로, 예의 음을 빌려 례(禮)가 되었다. 울은 울타리를 뜻한다. 예[禮]는 ‘나’, ‘라’로 발음되는 마을, 곧 촌을 뜻한다. 즉 울타리가 있는 큰 마을을 의미한다. 울타리는 방어 시설을 의미하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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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 있는 자연 마을. 대변(大邊) 마을은 조선 시대에 대변포(大邊浦)라 부르던 곳이다. 이곳에 대동고(大同庫)가 있어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로 부르다가 줄여서 ‘대변’이라고 부른 것이다. 대변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인근 무양 마을의 남산 봉수대가 985년(성종 4)에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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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달산리에 있던 자연 마을. 옛 이름은 한밭으로, 좌광천을 끼고 넓은 농경지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본다. 한밭을 한자로 표기하여 대전(大田)이 되었다. 대전 마을은 조선 전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전란이 끝난 후 사람들이 재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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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떳불 또는 덕불이라 하였다. 마을 인근 들판이 청강천변을 따라 허리띠처럼 길게 이어져 있어 띠벌이라고도 불렀다. 띠벌이 나중에 띳불, 떳불, 떡발, 덕발로 발음되었다고 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차음하여 덕발(德發)이 되었다고 본다. 덕발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마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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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동리에 있는 자연 마을. 덕산(德山) 마을의 명칭은 먼저 이 지역에서는 넓은 들의 언덕진 곳을 둔덕산·둔덕뫼라고 부르는데 마을의 이러한 위치 때문에 덕산[둔덕산을 줄여 부름]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다음으로는 옛날 덕대사(德大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절터는 전답으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되며 덕대사에서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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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방곡리에 있는 자연 마을. 덕산(德山)은 둔덕산의 기슭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낮은 언덕이나 야산을 흔히 둔덕(屯德) 또는 둔덕산이라고 부른다. 둔덕산의 첫 자인 ‘둔’ 자를 빼고, 큰 덕(德) 자, 뫼 산(山) 자를 써서 ‘큰 덕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붙였다고 본다. 덕산 마을[방곡리]은 원래 방곡 마을에 속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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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이 좌광천변 들판의 낮은 둔덕[언덕의 방언]에 위치해 있어 둔덕밭 마을 또는 언덕밭 마을이라 하였고, 이후 첫 글자를 빼고 덕밭이라 하여 한자로 큰 덕(德)자와 밭 전(田) 자를 써 덕전(德田)이라 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옛날에는 아랫들밭 또는 하평전(下坪田)이라고도 하였는데, 평전 마을 아래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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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있는 자연 마을. 도야(島野) 마을의 옛 이름은 ‘섬들’이다. 마을 앞의 큰들 가운데 작은 숲이 있어 마치 들 가운데 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을 한자화하며 섬 도(島) 자와 들 야(野) 자를 써서 도야라고 불렀다. 도야 마을은 명례리를 이루는 3개 자연 마을 가운데 하나로, 기록에서 나타나는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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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달산리에 있던 자연 마을. 독점[陶店] 마을은 옹기를 파는 가게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도공들이 옹기를 만들어 장사꾼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한자 그대로 읽으면 도점이 되지만 현재도 독점으로 불리고 있다. 독점이라는 지명은 오래되었지만, 강변 마을에 속해 있던 마을로 전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895년(고종 32) 기장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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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동리에 있던 자연 마을. 장안읍 좌천리에 속한 좌천 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동리 마을이라 불렀다. 마을의 형성 시기를 확인할 수 없다.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리 마을이 속한 지역이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중북면 덕산동이 되었다가,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기장군 중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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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자연 마을. 기장읍성 동문 안쪽과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문밖 마을은 동문외, 동바께, 동문밖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동문안, 동문밖 마을은 1356년(공민왕 5)에 기장현청이 건립된 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읍내면에 해당하는데, 『호구총수(戶口總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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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동리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 인근의 지형이 산이 움푹하게 파여서 독 모양을 이룬다. 마을이 그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동밋등 마을이라고 불렀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며,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중북면 덕산동이 되었다가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기장군 중북면 좌동동과 덕산동이 합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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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동백리에 있는 자연 마을. 동백 마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서 확인되는 동백포(冬栢浦)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로는 동백(冬栢)이 아닌 동백(冬栢)이다. 동백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에 송씨(宋氏), 남씨(南氏)가 정착하여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동백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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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자연 마을. 동부(東部)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 이곳에 있던 ‘동부방(東部坊)’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기장초등학교 자리인 동헌(東軒)에서 남문 방향으로 주도로를 만들고 길의 동쪽은 동부방(東部坊), 서쪽은 서부방(西部坊)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동부 마을은 옛날 기장현청인 동헌 동쪽에 있던 성내 마을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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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있는 자연 마을. 동서(東西) 마을은 만화리의 본 마을로 만화동이라고도 불렸고, 만화리 내에서 높은 지대에 있다고 하여 상리(上里) 또는 상동(上洞)으로도 불렸다. 마을이 들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눠 있다고 해서 언젠가부터 동서 마을로 불리게 된다. 동서 마을의 형성 시기나 변화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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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 있는 자연 마을. 동암(東岩)은 동쪽 바다에 바위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이름은 대내(臺內)였는데, 시랑대와 오랑대 두 대의 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암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공수포에 대한 기록이 있어 오랜 역사를 짐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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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자연 마을. 두호(豆湖)는 두모포 앞바다의 별칭으로 「차성가(車城歌)」[1800년경]에서도 “두호에 닻을 놓고 왜선창에 줄을 맨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명칭이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두호 마을이 속한 지역은 두모포(豆毛浦)로, 연해 방어를 위한 군사 요충지였다. 이 지역에 오래된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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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있는 자연 마을. 두화(斗禾) 마을의 옛 이름은 두배실이다. 두배실은 마을 앞에 있던 오래된 저수지인 박곡제(朴谷堤)와 관련된 명칭이다. 박곡제가 있는 곳을 박실(朴室)이라 하였고, 마을은 박실 뒤에 있어 두배실이 되었다고 한다. ‘두’는 뒤의 옛말이고 ‘배’는 박과 같이 밝다는 뜻이다. 이후 마을 뒷산인 새터산이 말과 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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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 마을에 삼밭이 있어서 마지(麻旨)의 마(麻)는 삼, 지(旨)는 재[치(峙), 고개]라는 뜻이다. 삼티가 삼지로 바뀌면서 마지로 변한 듯하다. 한편, 말이 머무는 곳인 말터[馬趾]가 있었는데, 마지(麻旨)로 잘못 쓰였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후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먼저 정착하고, 후에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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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에 있는 자연 마을. 매곡(梅谷)은 매남 방우골을 줄인 말로 매남 방우와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매남 방우는 마을의 남서쪽 매남산에 있는 바위로 매가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소학대(巢鶴臺)라고도 불렀다. 매곡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매곡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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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에 있는 자연 마을. 매바위골 밑에 있는 마을이라서 매박골 또는 매바골이라 불렀다. 응암곡(鷹岩谷) 마을이라고도 한다. 매박골 마을은 매박골에 인접하여 붙여진 이름인지 마을이 있어 붙여진 골짜기 이름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할 만큼 형성 시기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앵림산 깊은 계곡 안쪽에 위치한 내동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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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모전리에 있던 자연 마을. 옛 이름은 띠밭으로, 띠[억새]가 많이 자생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띠밭을 한자화하며 ‘띠 모(茅)’ 자에 ‘밭 전(田)’ 자로 표기해 모전(茅田)이 되었다. 모전 마을은 옛날에 청주 한씨(淸州韓氏), 영주 이씨가 띠밭을 개간하여 먼저 정착하였고, 이후 남평 문씨(南平文氏), 동래 정씨(東萊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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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에 있는 자연 마을. 무곡(武谷)의 옛 이름은 무실(武室)이다. 무실은 무곡과 같은 한자 표기이다. 지명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고, 오히려 무실이라는 지명에서 이곳에 무영(武營)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곡 마을은 인근에 고분군이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지닌 마을임을 알 수 있으나, 그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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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 있는 자연 마을. 무양(武陽)은 옛날 남산 봉수대 봉군(烽軍)들의 무영(武營)이 있었던 곳이다. 이 무영을 남바오, 남바우, 남바위, 나암바, 남바라고 불렀다. 남바오의 남은 남쪽, 바오는 무영으로 남산 봉수대 봉화군의 무영을 의미하는 남무영(南武營)이다. 이 남무영을 줄여서 무영이라 하다가 오기로 무양이 되었으며, 소리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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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문동리에 있는 자연 마을. 문동(文東) 마을의 명칭 유래는 먼저 마을 뒷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마을 뒷산을 옛날에는 민둥산[禿伊山]으로 불렀는데, 어감이 좋지 않아 발음이 비슷한 문동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문산의 동쪽에 있어 문동으로 불렀다고도 전한다. 문동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한씨(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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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문동리, 문중리, 칠암리, 신평리, 동백리 해안가에 자리한 다섯 개 마을을 묶어서 부르는 이름. 문오동(文五洞)은 기장군 일광면 지역 중 중북면에 속하였던 문동, 문상[해창 마을], 문중, 문하[칠암 마을], 문서[동면 동백 마을] 등 마을 이름 앞 글자에 ‘문(文)’ 자가 들어간 다섯 개 마을이라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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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문중리에 있는 자연 마을. 문오동(文五洞)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문중(文中)으로 불렸다. 문오동은 중북면의 문동, 문상[해창 마을], 문중, 문하[칠암 마을]와 문서[신평 마을]를 이른다. 문중 마을은 옛날 국씨(鞠氏), 손씨(孫氏)가 문동 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개천 변에 정착하여 형성되었다고 전해져, 문동 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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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고사리 밭, 즉 미전(薇田)이라 하였다. 옛날 이 마을에서는 부뚜막에서도 고사리가 난다고 할 만큼 고사리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한다. 미동(薇洞)은 고사리 골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이후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처음 정착한 후, 김해 김씨(金海金氏), 박씨(朴氏)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조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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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에 있던 자연 마을. 박곡(朴谷) 마을은 박씨(朴氏)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실(朴室)이라고도 하였다. 박곡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부산~울산 간 고속 도로 공사 중에 고려·조선 시대 기와 가마터와 고분군, 돌방무덤 등이 발굴되어 오랜 역사를 지닌 거주지였음을 짐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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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반룡리에 있는 자연 마을. 장안천은 옛날에 ‘건천(乾川)’, ‘용천(龍川)’이라 하였다. ‘건천’은 ‘마르내’이고, ‘용천’은 ‘미리내’이다. 모두 큰내 또는 으뜸가는 내라는 뜻이다. 장안천[龍川]의 굴곡(屈曲) 지점에 위치하여 ‘선회할 반(盤)’ 자와 ‘용 룡(龍)’ 자를 써서 반룡(盤龍) 마을이라 불렀다. 꼬불꼬불 반곡(盤曲)된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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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방곡리에 있던 자연 마을. 방곡(芳谷) 마을의 지명은 주변 야산 곳곳에 솟은 바위에서 유래하였다. 방(芳)은 바위를 뜻하는 지역 방언인 방우의 차음 표기이며, 여기에 고을이라는 뜻의 곡(谷)이 붙은 것이다. 방우골을 한자명으로 표기하면 암곡(岩谷)이 되는데, 발음이 좋지 않아 방우를 방(芳)으로 차음하여 방곡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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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백길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박길리(朴吉里)이다. 박(朴)은 박실[朴谷]·배미산·배산·바리산 등의 예와 관련된 ‘밝다’의 옛 말이고, 길(吉)은 ‘길 영(永)’ 자의 뜻을 받아 ‘밝은 고개의 긴 안쪽’, 즉 양지 안쪽 마을이란 의미가 된다고 본다. 실제 백길리는 와여리에서 웅천리로 통하는 긴 협곡의 안쪽에 위치한 양달 골짜기에 있다.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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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에 있던 자연 마을. 백동 마을의 명칭은 ‘잣나무 백(柏)’ 자가 들어간 백동(柏洞)이다. 잣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해석도 있으나 이 골짜기에는 잣나무가 없다. 마을이 있는 깊숙한 골짜기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 아침에 해가 뜨면 이곳을 먼저 비춘다. 예로부터 이런 골짜기를 박골, 볕골, 백골로 불렀다. 잣나무는 양지에 자생하고 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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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병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비단골로, 아름다운 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 쳐놓은 모습 때문에 병산(屛山)이라고 하였다. 병산 마을은 조선 시대로 추정되는 병산리 백자 요지(屛山里白磁窯址)가 있어 오랜 거주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마을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으나, 마을이 속한 병산리는 조선 후기 기장현 하북면 산막방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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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에 있는 자연 마을. 보림(普林) 마을은 ‘넓을 보(普)’ 자와 ‘수풀 림(林)’ 자를 써서 넓은 숲을 뜻한다. 보림이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보림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기장현 상서면 연구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1895년(고종 32) 동래부 기장군 상서면 연구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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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에 있는 자연 마을. 사라(士羅)의 옛 이름은 사날이다. 사라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산알에서 나온 말로, 산은 얼과 같이 선(仙)·성(聖)의 뜻이며, 알은 광명을 나타내는 말로 성스러운 광명의 의미라는 것이다. 둘째, 사라(沙羅)와 같은 어원으로 성을 뜻하는 옛말로 성촌을 뜻하며, 마을 뒤의 성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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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는 자연 마을. 산막(山幕)은 산 속에 임시로 천막같이 지은 집들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산막 마을[용수리]은 용수리의 4개 마을 가운데 가장 위쪽 산간에 위치한다. 지싯골 소류지[제석보(帝釋洑)라고도 한다]를 건설하며 동원된 인부가 산기슭에 임시 막사를 짓고 살다가, 공사가 끝난 후 그대로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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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산수곡(山水谷) 마을은 화전리의 당곡 마을 동쪽에 있는데, 이 위치가 당곡 마을을 지나면 있었다고 전하는 목너머 마을과 일치하여 화전리와 용천리 주민들은 이 두 마을을 동일한 마을로 본다. 마을의 옛 이름은 뫼물골이며, 현재는 물만골이라고도 한다. 용천[일광천]의 상류가 되는 산골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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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삼덕(三德) 마을은 천주교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3가지 덕목인 믿음[信], 소망[望], 사랑[愛]이라는 뜻에서 이름 지어져 ‘신망애(信望愛)’라는 석 자로 요약된다. 삼덕 마을은 1961년 2월 5일 국립용호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음성 한센인의 자립촌으로 조성되었다. 음성 한센인의 자립을 위해 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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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에 있는 자연 마을. 삼성(三聖)이란 이름은 삼성대(三聖臺)에서 유래하였다. 삼성대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양산군지』[1989]에는 신라의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 세 성인이 다녀가 삼성대라 하였다고도 한다. 또 『구 기장군 향토지』[1992]에는 샘섟대라는 옛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샘은 남쪽의 약수샘, 섟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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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웃골이다. 용천리의 위쪽 산골짜기에 있다 하여 상곡(上谷)이라고도 하며, 용천리의 대리[큰마을] 위쪽에 있어 상리 또는 웃각단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상곡 마을[용천리]의 형성 시기와 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대리 마을의 웃각단이라는 명칭에서 대리 마을보다 형성 시기가 늦은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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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웃골[윗골]로 주변보다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명칭이다. 웃골을 한자화하며 상곡(上谷)이라 하였다. 상곡 마을[매학리]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기장현 하북면 상곡리로 명칭을 확인할 수 있으며, 1895년(고종 32) 동래부 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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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에는 웃골, 윗골이라 하였다. 임기 계곡의 가장 위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상곡(上谷)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등지에서 부상당한 군사들과 피난민들이 이곳에 피난하여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기장현 하서면에 속하였으나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는 마을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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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에 있는 자연 마을. 안평 마을 북쪽 위쪽 상달(上達)에 있는 마을이라서 상달이라 하였다. 상달에서 쌍다리로 바뀌어 쌍다리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쌍다리는 쌍교(雙橋)라고도 한다. 상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상달 마을과 안평 마을이 바로 인접하고 있어서 일찍부터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다만 상달 또는 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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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있는 자연 마을. 원리(院里)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리(上里)라고 하였다. 본래 이 지역에는 상리 마을, 중리 마을, 하리 마을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상리와 중하리[중리와 하리를 구분하지 않음]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이후 1950년대에 이르러 중하리가 분리되면서 중리 마을이 상리 마을에 포함되었다. 이에 현재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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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자연 마을. 상장안(上長安)은 마을 북동쪽 장안천 상류에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창건된 장안사(長安寺)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안사로 가는 길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장안,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하장안으로 불렀다. 장안사가 있기 이전부터 장안이라는 명칭이 쓰였다고도 하나 기록상 확인되지 않는다. 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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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문동리에 있는 자연 마을. 문동리의 북쪽 마을로, 마을의 끝이라 하여 새끝 마을이 되었다. ‘새끄테’라고도 부른다. 새끝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새끝 마을이 속한 문동리에 조선 시대 조곡(租穀)을 보관하던 해창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새끝 마을이 속한 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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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 있던 자연 마을. 새마실이란 이름은 흘구딩이 마을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전한다. 새마을의 방언으로 새마실, 새모실, 새바실이라고도 부른다. 흘구딩이 마을은 현재의 무양 마을 일부로 봉대산 기슭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새마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명칭으로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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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에 있는 자연 마을. 서부(西部) 마을은 조선 시대 기장 읍치의 읍성 서문 일대에 있어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동헌에서 남문에 이르던 길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서부리(西部里)는 옛날 기장현청인 동헌 서쪽으로 동부리와 더불어 성내(城內) 마을이다. 기장현청은 1356년(공민왕 5)에 건립되어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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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에 있는 자연 마을. 서암(西岩) 마을의 옛 이름은 여리개[여리포(餘里浦), 여이포(餘爾浦)]였다. ‘여(餘)’ 자는 남을 ‘여’ 자지만, 남어[넘어]의 뜻으로, 남[넘어]+리[이]+개가 합성된 ‘남이개’라는 마을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남이개는 언덕 너머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신암 마을에서 보면 언덕 너머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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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예림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예림 마을의 서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서편(西便) 마을은 형성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예림 마을의 서편이라 붙여진 지명을 통해 볼 때 늦게 형성되었거나 같은 마을이었다가 이후 분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림리는 조선 후기 기장현 하북면 예림방에 속하였으며, 『호구총수(戶口總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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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석길(石吉)의 석은 ‘돌 석(石)’이다. 돌[달]은 산, 또는 높다는 뜻이다. 길(吉)은 크다, 길다는 뜻이다. 와여리에서 길고 높은 협곡을 거쳐 안쪽 깊숙하게 위치한 마을이라 석길이라고 하였다. 한편, 마을에 돌이 너무 많아, 이 돌이 마을의 앞날을 길하게 할 것이라 하여 석길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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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석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석산(石山)은 ‘돌 석(石)’ 자에 ‘뫼 산(山)’ 자로 순 한글 지명은 ‘돌뫼’이다. 돌뫼의 돌은 ‘높다[高]’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높은 산이 된다. 석산리는 북동쪽의 연화봉[150m] 기슭에 자리 잡아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석산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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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덕선리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의 남쪽 산지에 선암(仙岩)[신선 바위]이라는 바위가 있어 선암(仙岩) 마을[덕선리]이라고 불렀다.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선암 마을이 속한 덕선리는 1599년(선조 32)에 기장현 중북면에서 울산군 하이면이 되었으며, 1681년(숙종 7) 기장현 하북면이 되었다. 1895년(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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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당사리에 있던 자연 마을. 마을 주변 지형이 소쿠리처럼 생겨서 소구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기록에서 지명을 확인할 수는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조선 후기 기장현 남면 당사리였고, 1895년(고종 32)에는 기장군 남면 당사동이었다. 1914년 기장군이 폐군되며 동래군 기장면 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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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에 있는 자연 마을. 소정(蘇亭) 마을은 마을과 논밭으로 개척되기 전에 해송이 우거져 있어 솔정이라 하였다. 소정의 소(蘇)는 소나무의 음사이고, 정(亭)은 평평할 정으로 소나무가 평지에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곳 방언으로 솔정을 소정이라 불렀으므로 그 소리대로 소정이라 한 것이다. 소정 마을의 형성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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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송정리에 있는 자연 마을. 송정(送亭) 마을[송정리]은 동래·양산·울산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데, 계곡의 노송과 팽나무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정자나무가 되고, 점차 정자나무 아래로 주막 등이 생겨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인접한 고을의 관원들이 이 정자나무까지 와 배웅을 하여서, ‘보낼 송(送)’에 ‘정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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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에 있는 자연 마을. 사등(俟嶝) 마을은 옛날에 숯골[탄곡(炭谷)]이라 하기도 하고, 사당골[사당곡(祠堂谷)]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 뒤에 있는 산등성이가 뱀처럼 생겨서 사등(巳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사등의 사는 ‘새’, 즉 동쪽을 의미하며, 동쪽 산등성이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서 사등이라는 설도 있다. 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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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좌천장이 서는 마을이라서 시장(市場) 마을이라고 부른다. 시장 마을은 본래 좌천 마을에 속하였는데, 좌광천과 덕선천이 합수되는 지점에서 열리던 좌천장이 이곳으로 옮겨와 분리되어 시장 마을이 되었다. 이전 시기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으나 일제 강점기 후반경인 1930년대로 전한다. 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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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오리에 있는 자연 마을. 장안 지역에는 400여 년 전 반룡·기룡·장안·명례 등에 여러 방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신리방(新里坊)[행정 지명]이 가장 늦게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여 생성된 이름인데, 이것이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남게 된 것이다. 신리(新里) 마을[오리]은 약 400년 전 진양 하씨(晉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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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에 있는 자연 마을.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신리(新里) 마을[구칠리]이라고 부른다. 상신리(上新里)와 하신리(下新里)로 나누어져 있다. 한편 동풍을 새파람이라 부르듯이 ‘새’는 동쪽을 뜻하므로, 신리는 동쪽에 있는 마을, 즉 동촌(東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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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있는 자연 마을. 신명(新鳴) 마을이 속한 명례리(鳴禮里)는 ‘울리’, ‘울례’라고 한다. 울이 뜻을 빌려 ‘울 명(鳴)’ 자로, 예의 음을 빌려 ‘례(禮)’로 되었다. 울은 울타리를 뜻한다. 예[禮]는 ‘나’, ‘라’로 발음되는 마을, 촌을 뜻한다. 즉 울타리가 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울타리는 방어 시설을 의미하므로 군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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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에 있는 자연 마을. 신암(新岩)의 옛 이름은 무재이다. 무재에서 ‘무’는 ‘물’의 고어이고, ‘재’는 ‘잣’이라고도 부르는데 ‘성(城)’의 고어로 수성(水城)으로 해석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포구에 수군영이 있어 새바오, 즉 ‘동영(東營)’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잘못 발음해 새바우가 되며 한자명으로 신암(新岩)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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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신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이 지역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소부리[쇠부리] 마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없어지고, 순흥 안씨(順興安氏)들이 정착하면서 새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여 새마슬 또는 신리(新里)로 불렀다고 한다. 이후 마을 앞에 하천이 있어 신천(新川) 마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신천 마을[신천리]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신천리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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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석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아릿마실은 석산리의 본동인 석산 마을 아래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마을 또는 하리라고도 불린다. 아릿마실은 형성 시기나 변천에 대해 전하는 바는 없지만, 석산 마을의 아래에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볼 때 이후에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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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 마을 앞에 신명역(新明驛)이 있어서 신명리촌이라 하였다. 신명역 안쪽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안평(安平)이라 불렀다. 안평은 안쪽에 있는 들이라는 뜻으로, 차운 표기를 하면 내평(內坪)이 된다. 이곳 주민들은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황씨(黃氏)가 처음 이 마을 온당곡에 정착하였다고 하여 신평(新坪)이라고 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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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석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야무라기 마을은 동쪽 산지에 야마사(耶摩寺)[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라기’는 산기슭의 방언이다. 야무라기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마을이 속한 지역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기장현 남면 석산리로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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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모전리에 있는 자연 마을. 양수(養樹) 마을의 명칭 유래는 여러 가지가 전한다. 먼저 주변에 수림(樹林)이 울창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마을이 정관의 서쪽 높은 곳에 위치하여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뜻에서 ‘볕 양(陽)’ 자에 ‘시작하다 시(始)’ 자를 합하여 양시동(陽始洞)이라 하였는데, 양수동으로 오기되며 현재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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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에 있는 자연 마을. 연구리는 연봉리에서 연(蓮) 자를 따고, 구림리에서 구(龜) 자를 따서 생긴 이름이다. 연구본동(蓮龜本洞)은 연구리의 본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 연구본동 마을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이 만발한 연못에 거북이 살고 있어 연구(蓮龜)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김씨, 오씨, 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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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예림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예림(禮林) 마을의 지명 유래는 명확하게 전하는 바가 없다. 먼저 좌천에서 큰 고개를 넘어 형성된 마을이라서 ‘큰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남아 마을’[너머 마을을 뜻하는 사투리]로 부르다가 마을의 규모가 커지며 남을 여(餘)에 마을 리(里)를 써서 여리(餘里)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지역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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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오신(梧新) 마을의 옛 이름은 오금(梧琴)이다. 내동천이 이곳에서 굴곡을 이루면서 팔오금처럼 굴곡져 오금골이라고 하였다. 오금골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 소리대로 오금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오신은 오금 새 마을[梧琴新里]을 줄여 부른 이름이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금골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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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동백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온정(溫井)은 마을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따뜻하며, 마을에 작은 공동 샘[공동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온정 마을은 1970년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건립되며 30여 가구의 이주민 집단촌으로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새마을[신리]이라 부르다가 온정 마을로 개칭되며 두 지명이 함께 사용되었으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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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애몰이며 이후 한자명으로 아여(阿餘)라 하였다. ‘애몰’의 ‘애’는 ‘작다’라는 뜻이며, ‘몰’은 ‘산마루’이니 작은 산마루로 해석할 수 있다. 한자명 아여[언덕 아(阿), 남을 여(餘)]는 현재도 쓰이는데, 이때 여(餘)는 건너갈 월(越)을 표기한 것으로 ‘언덕 너머’, 또는 ‘작은 산마루 너머’라는 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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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에 있는 자연 마을. 용소(龍沼)라는 지명은 소정천 곳곳에 작은 소(沼)가 있고, 이곳에 용이 살았다는 전설과 연관 지어 유래되었다고 한다. 용소 마을[내리]은 조선 후기에 작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차성가(車城歌)」에 용소동(龍沼洞)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어 조선 시대부터 존재하던 마을임은 알 수 있으나, 명확한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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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 있는 자연 마을. 용암동(龍岩洞)은 미리바윗골이라는 뜻으로 미리 용(龍)에 바위 암(岩)과 마을의 의미인 동(洞)을 써서 붙인 지명이다. 미리바윗골은 머리바오골의 옛말로 두무영(頭武營)·수무영(首武營)·본무영(本武營)을 뜻한다. 수군(水軍)의 무영(武營)이 있던 곳을 의미한다. 용암 마을은 인근 무양 마을의 남산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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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있는 자연 마을. 원당(院塘) 마을은 못골이라고도 한다. 원당은 으뜸 원(元), 못 당(塘)으로 원래 못이었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숙과정(橚菓亭)으로 불렸다. 이곳에 큰 정자나무[까질나무]가 있었고, 쉬어 가는 움막 몇 채가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원당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전 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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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에 있는 자연 마을. 원마(元麻)는 원래 마동(麻洞)이었다. 마동은 조선 시대 기장읍성 밖인 이곳에 삼밭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삼밭 마을이라고도 하였다. 이 명칭은 기장이란 이름이 풍수설의 옥녀직금설과 연관된다고 보아야 한다. 원마란 원래의 마동이란 뜻으로 쓰게 된 이름이다. 원마 마을에 인가가 형성된 시기는 확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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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자연 마을. 원죽(元竹) 마을의 옛 이름은 염분리(鹽盆里)이다. 소금을 생산하는 소금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소금밭이 없어지며 죽성(竹城)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 신라 시대 축조된 고성(古城)이 있는데 주변에 대[竹]가 많은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법정리인 죽성리와 구분하기 위해 마을이 ‘원래 죽성’이라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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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월내리에 있는 자연 마을. 월내(月內)의 옛 이름은 월래(月來)였다. 명칭의 유래는 여러 가지이다. 먼저, ‘월(月)’은 경주의 옛 이름인 월성과 같이 울타리 또는 성(城)을 의미하며, ‘래(來)’는 서라벌의 라(羅)와 마찬가지로 마을 또는 촌락을 의미하여 성책(城柵)을 가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본다. 다음으로는 마을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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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자연 마을. 월전(月田) 마을의 옛 이름은 달밭이고, 마을 앞 포구를 달밭개라고 불렀다. ‘달’은 높다, 또는 산이라는 뜻으로, 마을이 남산 기슭의 언덕을 개간하며 형성되어 경작지가 높은 곳에 있는 밭, 또는 산에 있는 밭이라는 뜻에서 달밭이라 하였다고 한다. 달밭을 한자명으로 하면 고산(高山) 또는 산전(山田)이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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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에 있는 자연 마을. 이곡리의 본 마을로 옛날에는 구실(龜室)이라 하였다. ‘구(龜)’ 자는 구 또는 귀로 읽는다. 그런데 귀실의 귀는 귀 이(耳)라는 한자음을 차용하여 이실(耳室)로도 불렸다. 또 귀(耳)는 크다[大]이고, 곡(谷)은 골의 뜻이므로 큰골[大谷]을 의미한다. 원래 이곳 주민들은 ‘구실’이라 불렀으나, 마을 뒷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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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에 있는 자연 마을. ‘이내’는 해질 무렵에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으로 산속에 생기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말한다. 마을에서 멀리 기장 앞바다가 흐릿하게 보인다고 해서 이내터 마을로 불렀다고 전한다. 이내터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마을에 대한 기록도 확인할 수가 없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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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이동(伊東) 마을은 이천리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동 마을의 옛 이름은 바둑개이다. 바둑돌이 갯가에 널려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기포(碁浦)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산천조(山川條)에 “검은 바둑돌이 산출된다 하여 기포(碁浦·棋浦)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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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이천동(伊川東) 마을은 1980년대에 이천 마을이 커지자 마을 가운데의 작은 개울을 경계로 분리되며 생겨난 이름이다.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천동 마을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이천 마을에 속하였다. 이천 마을의 옛 이름은 이을포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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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이천서(伊川西) 마을은 1980년대에 이천 마을이 커지자 마을 가운데의 작은 개울을 경계로 분리되며 생겨난 이름이다. 서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천서 마을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이천 마을에서 속하였다. 이천 마을의 옛 이름은 이을포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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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 이름은 숲터라고 하였다. 임기천 협곡이 이곳에 이르러 넓은 평지를 이루면서 숲이 우거진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입석 마을과 송정 마을이 번창하면서 이 숲을 농경지로 개간하였다고 전한다. 개간한 농경지를 숲터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수풀 임(林)’, ‘터 기(基)’ 자를 써서 임기(林基)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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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있는 자연 마을.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다. 임을랑이 임랑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에 숲이 우거지고 바다 물결이 아름다워, ‘수풀 림(林)’ 자와 ‘물결 랑(浪)’ 자를 따서 불렀다고 한다. 임랑 마을은 임진왜란 이후로 유씨(柳氏), 김씨(金氏), 박씨(朴氏), 정씨(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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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송정리에 있는 자연 마을. 기장의 산천 경계를 노래한 「차성가(車城歌)」의 하서면(下西面) 편에 “선여사 깊은 골에 고적을 찾아드니, 은은한 석경(石磬) 소리 망일암(望日庵)이 분명하다.”로 노래하고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선여사를 창건하며 그 배의 돛대로서 선돌[입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선돌의 높이는 3m 96㎝,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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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장전리에 있는 자연 마을. 옛날 역(驛)의 우두머리가 되는 역장의 공비(公費)에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된 토지를 장전(長田)이라 하는데, 속칭 장밭이라 하였다. 숙종 때 이곳에서 귀양살이하던 선비와 동행한 김해 김씨(金海金氏) 일족이 정착하여 전답을 개간하였는데, 그때 개간된 밭이랑이 길게 형성되었다고 하여 장밭, 곧 장전(長田)이라 하였다고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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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자연 마을. 장태는 장터, 제자 터, 저자 터의 의미로 기장 읍내장이 서는 장터 인근에 마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태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명칭 유래로 볼 때 읍내장과 관련된 마을로 볼 수 있다. 기장 읍내장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에 현성(縣城) 문안에서 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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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에 있는 자연 마을. 점티가 있어 이것의 한자어인 점현(店峴) 마을이 되었다. 옛 이름은 점터 마을 혹은 점티 마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기장군 상서면 구칠동이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되었다. 1973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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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동리에 있는 자연 마을. 좌동(佐東) 마을[좌동리]은 좌천 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고려 시대에 현풍 곽씨(玄風郭氏)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1599년 기장현 중북면(中北面) 좌동방(佐東傍)에서 울산군 하미면(下味面) 좌동이 되었다. 1684년 기장현 중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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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에 있던 자연 마을. 옛 이름은 좌촌(佐村) 또는 자천, 자촌이라고 불렀다. 좌천(佐川) 마을[좌천리]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먼저 좌천이 성내(城內)의 옛말인 ‘잣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음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으로, 마을이 좌광천과 인접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좌천 마을은 5~6세기 분묘군이 있어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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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웅천리(熊川里)의 중심지에 있다고 하여 중리(中里) 마을이라고 한다. 또 웅천리의 한자를 빌려 웅천[곰내] 마을이라고도 한다. 중리 마을[웅천리]은 임진왜란 이후 옥씨(玉氏)·정씨(丁氏)를 비롯하여 김해 김씨(金海金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집단으로 정착, 거주하면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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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신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치내 마을은 치내[聚川]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치내는 취천(聚川)이라고도 부른다. 치내는 제방을 쌓아서 범람하는 내를 고쳤다는 뜻으로, ‘다스릴 치(治)’ 자와 ‘내 천(川)’ 자를 써서 치내 또는 치천(治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치내 마을은 명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신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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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에 있는 자연 마을. 칠암(七岩) 마을 앞에는 검은 바위가 있는데, 이를 옻바위라고 한다. 옻바위가 한자로 칠암(漆岩)인데, 칠(漆) 자가 쓰기 어려워 ‘일곱 칠(七)’ 자로 바뀌었다고도 하고, 마을 앞에 7개의 검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칠암 마을 인근에 삼국 시대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일찍부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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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자연 마을. 통방(通房)은 조선 시대 지방 관아의 부속 건물로 관아의 통인이 있던 방(坊)을 말한다. 통방을 통인방(通引坊), 통방집, 통청(通廳)이라고도 일컫는다. 통방 마을은 통방 근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통방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지명의 유래가 된 통인방을 『기장현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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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오리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의 옛 지명은 ‘널실’로, 이를 한자화하여 판곡(板谷)이 되었다. 명칭 유래는 마을의 위치가 산골의 넓은 골짜기에 있다 하여 넓은 골로 불리다가 바뀐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피난 와서 정착하며 주변의 나무로 널을 만들어 팔았다고 하여 너실 또는 널실이라고 불렀다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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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는 자연 마을. 평전(平田) 마을은 넓은 평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웃들밭 또는 상평전(上平田)이라고도 하였는데, ‘위쪽에 있는 평탄한 논밭’이라는 뜻이다. 또한 정관읍 내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사방으로 뻗어 있어 평전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평전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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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학리에 있는 자연 마을. 풀막개 마을은 풀이 많은 갯가라는 의미이다. 본래 학리 마을 동남쪽 갯가에 발을 치고 고기를 잡는 발막개가 있었는데, 그 동남쪽에 풀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풀막이라고도 한다. 풀막개 마을은 지명을 통해 볼 때 학리 마을의 규모가 커지며 분리 독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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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기룡리에 있는 자연 마을. 하근(下根) 마을의 옛 이름은 건천(乾川)이다. 건천은 윗건천과 아랫건천으로 나누었는데, 아랫건천을 하건천으로 부르면서, 이를 하건(下乾)으로 칭하였다. 하건의 ‘건’자가 마르다는 뜻이어서 심한 가뭄 피해가 생기자, 1955년경에 발음이 비슷한 근자를 써서 ‘하근(下根)’으로 고쳤다고 한다. 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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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있는 자연 마을. 하리(下里) 마을[원리]은 원리(院里)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옛 이름은 아랫각단이다. 『구 기장군 향토지』[1992] 지명 유래 편에 “고을의 경계 지점에는 관원들의 숙박을 위한 원(院)이 설치되는 관행이 있으므로 울산과의 경계가 되는 이곳 수캐지[숙과지]에 원을 설치하려다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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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자연 마을. 하장안(下長安) 마을은 마을 북동쪽의 장안천 상류에 673년(문무왕 13) 창건된 장안사(長安寺)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안사로 가는 길 위쪽에 있는 마을은 상장안,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하장안으로 불렀다. 장안사가 있기 이전부터 장안이라는 명칭이 쓰였다고도 하나 기록상 확인되지 않는다. 상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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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학리에 있는 자연 마을. 학리(鶴里) 마을의 명칭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먼저 해안 지형이 황학(黃鶴)의 모습을 닮았다는 풍수설에 따라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과 마을 남쪽 메짠데기산에 있는 해송에 학이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학 마을로 불렸다고도 한다. 학리 마을은 500여 년 전 황씨, 구씨, 유씨가 정착하며 마을을 형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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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문동리에 있는 자연 마을. 해창(海倉) 마을은 조선 시대 조곡(租穀)을 보관하던 해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창밭[倉田] 마을[창 마을] 또는 버릿개라고도 불렀다. 버릿개는 해창 옆에 있는 선창(船艙)에 말뚝을 세워 배를 밧줄[버리]로 묶어 정박시키는 포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창 마을에는 1600년경 형성된 하납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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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에 있던 자연 마을. 홍문간(紅門間) 마을은 기장 향교 홍살문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문(紅門)은 능·원·묘·궁전·관아 등의 정면에 세운 붉은 칠을 한 문으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죽 박았기 때문에 홍살문이라고도 부른다. 홍문간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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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화전리에 있는 자연 마을. 화전(花田) 마을[화전리]의 명칭은 주변 땅의 형태에서 유래한다. 화전 마을이 있는 지역은 일광천 본류와 항새목[꼬지매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삼각형의 퇴적 지형을 만드는데, 그 모양이 곶(串)[물가 쪽으로 돌출된 지형]처럼 생겼다고 하여 곶밭[串田]이라고 하였다. 이후 곶은 ‘꽃 화(花)’ 자를 차음하여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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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에 있는 자연 마을. 후동(後洞) 마을은 기장 향교 뒤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후동은 우리말로 뒷동네 또는 뒷마을을 뜻한다. 후동 마을은 600여 년 전 청도 김씨(淸道金氏) 적산공파의 후손[신라 경순왕의 17세손 김지대(金之岱)의 후손]인 김시우(金時雨)가 정착하며 형성된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전쟁을 피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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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에 있는 자연 마을. 마을의 옛 이름은 돌룡골 또는 도룡골이었다. 돌룡골을 한자로 표기하면 회룡(回龍)이 된다. 지명 유래는 여러 가지가 전하는데, 먼저 용천강에서 등천하던 용이 여의주를 떨어트리는 바람에 되돌아 떨어진 곳[마을]이라 하여 돌룡골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돌룡골의 돌은 고어(古語)인 산(山) 또는 고(高)를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