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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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倉里- |
영어의미역 | Namchangri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남창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표용수 |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남창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창리(南倉里) 마을이라고 불렀다.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1786]에 “감동창(甘同倉), 일명 남창(南倉)”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감동창과 남창이 동일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자 지명으로 남창(南倉), 남창(南滄)을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형성 및 변천]
남창리 마을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는지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마을의 지명 유래가 된 감동창[남창]은 1610년(광해군 2)에 기록상에서 처음 확인되어 형성 시기를 짐작하게 한다. 18세기 초에는 감동창 주변으로 감동장이 형성되었는데 1809년(순조 9) 양산 군수 이유하(李遊夏)가 감영에 올린 방보장(防報狀)에 “감동장은 대강수(大江水) 수구(水口)에 있어 강변에 설치한 지가 자못 100년에 가깝도록 오래되었으므로 선박들의 요충지요, 전곡(錢穀)이 모이는 곳이며, 생리(生利)가 조금 넉넉한 고로 사방에서 이(利)를 찾는 생민(生民)들이 해를 거듭하여 모여드니 민호(民戶)의 총수가 무릇 300호요, 군포(軍布)가 나오는 것이 또한 200필이나 되어 단연 동남의 도회이외다.”라고 기록하여 당시의 마을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1800년대 당시 남창리에는 300여 가옥이 운집하였고, 조운선·상선·어선·나룻배 등이 장날이면 하류에 100여 척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또한 장터에는 강 건너 김해군의 상동면·하동면과 대저·명지, 동래의 북면·서면·사상면·사하면, 양산군의 동면과 좌이면, 강 서남쪽 소요리·유두리 등 사방에서 교역하는 백성이 많이 모여 들어 번창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06년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 남창리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개편되었고, 1910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면서 수운 기능이 약화되었으나, 인근 구포장이 이전해 가면서 남창리 마을은 강변에 대형 정비 공장이 들어서서 다시 번성하였으나, 광복 후 거의 문을 닫게 된다. 1943년 구포면이 구포읍으로 승격하여 동래군 구포읍 구포리가 되었다가 1963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부산진구 구포출장소 구포동이 되었다. 1978년 2월 구포출장소가 북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 8월 구포동이 구포 1동, 구포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94년 7월 구포 1동이 구포 1동, 구포 3동으로 분동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남창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남창리 마을 서쪽은 낙동강이 흐르는 강변 마을로, 1930년대 제방이 축조되기 이전까지는 나루터가 있었다. 현재는 낙동강 제방 축조 이후 강변 옆의 마을로 남아 있다.
[현황]
남창리 마을은 현재의 도시 철도 3호선 구포역 북쪽에 있던 자연 마을이다. 강변대로와 낙동로로 편입되고 도시 철도 3호선이 지나가며 일부 주택만 남아 있고, 감동창 자리에는 40층 이상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