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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말은 부산 지역에서 사용되는 말을 가리킨다. 이는 특정 언어 집단과 다른 집단의 언어 체계의 차이를 바탕으로 구분되는 방언 구획에 따른 분류가 아닌, 언어 체계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라는 의미의 부산말을 가리킨다. 물론 방언권의 분류에 따르면 부산말은 동남 방언권의 경상남도 방언에 속한다. 따라서 부산말은 이들 방언권에 속하는 말들이 가진 특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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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강인 압록강[790㎞] 다음으로 큰 하천인 낙동강[522㎞]은 태백 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방[경상남도·경상북도]을 흘러가면서 영남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가꾸어 주고 있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시작해 남으로 흐르며 경상북도 봉화·안동·예천·상주·구미·칠곡·고령을 지나, 경상남도에서는 밀양과 김해를 거치고 부산으로 내려와 남해로 유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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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다리에서 주워 왔어.”, “말 안 들으면 다리에 도로 갖다 버린다?” 부산 사람은 어린 시절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여기서 말하는 다리는 다름 아닌 영도 다리이다. 지금은 볼품없이 늙어서 할아버지가 다 된 이 다리가 대체 뭐였길래 어린아이들의 영혼까지 상처를 입히는 말버릇으로 쓰였을까. 다리 아래 푸른 갯물이 흐른 지 80여 년, 영도 다리는 그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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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은 곡선이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해안의 선에는 원래 직선이 없었다. 넘실대는 파도, 백사장의 모래 언덕도, 이를 둘러싼 산과 구름도 모두 곡선이다. 해안선은 물과 땅이 만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깎이고 때로는 퇴적하면서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아름답고도 미묘한 곡선을 이었다. 인간은 그 선을 모방할 수 없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인간은 이들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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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란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형, 무형의 소산들을 말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문화재의 범주가 매우 좁았으나 전후에는 미술 공예품, 건조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민속자료, 무형 문화재 등으로 대상을 구분하여 국가적으로 보호 육성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문화재는 지정 유무에 따라 지정 문화재와 비지정 문화재로, 존재 형태에 따라 유형 문화재와 무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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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유신 독재에 반대한 민주화 운동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일어나자 시민들도 적극 호응하여 가세한 대규모 반독재 민주 항쟁이었다. 부산에서는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지속되다가 18일에 계엄령의 발령과 함께 계엄군이 진주하면서 진압되었고, 마산에서는 18일부터 20일까지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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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낙동강(洛東江)을 민족의 젖줄이라 부른다. 강원도 태백산 줄기에서 발원하여 부산 명지, 하단포에 이르기까지 늠실늠실 유장하게 흐르며 많은 생명들을 잉태하고 살찌우기에 그렇다. 낙동강의 풍부한 수원으로 다양한 ‘강 것’들을 기르고, 비옥한 토지에서 풍성한 ‘먹거리’들을 생산해 사람들을 먹인다. 물줄기 곳곳에 마을을 만들고 너른 평야를 통해 오곡백과 풍요로운 곡창 지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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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며 변치 않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이 거주한다는 행위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건축함은 본래 거주함이고, 거주함은 인간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거주함은 울타리로 둘러싼 채 머물러 (또는 체류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거주함의 근본 특성은 보살핌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衣食住)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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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는 국내 최초의 팀인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황성YMCA야구단]이 창설된 1905년을 야구사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한국인에게 처음 야구를 본격적으로 가르친 사람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필립 질레트 선교사였다. 필립 질레트는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한국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애초에는 야구라는 서양 운동을 신기하게 생각한 젊은이들이 짚신을 신은 채 공을 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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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부산시 인구는 28만 1,160명이었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우리나라의 무역 및 상공업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 인구가 증가세를 거듭한 덕분이다. 그리고 67년이 흐른 2012년 말 부산시 인구는 329만 2,373명이 불어 357만 3,533명이다. 그 이면에는 일제 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 압축 근대화와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가 흐르고, 그 세월을 살아낸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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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지역적으로 구분하면 전라도 음식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편이다. 경상도 음식, 특히나 역사가 짧고 전통이 없는 부산의 음식은 국밥 종류 말고는 먹을 게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다. 부산 음식은 지역 차별에 시달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 음식의 특성으로는 짜다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향토 음식’편에 “남부 지방으로 갈수록 음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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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얼까? 아마 항구 도시 부산, 야구 도시 부산 이런 것들이 아닐까? 국제도시 부산이라는 단어를 쉽게 떠올리는 사람은 아직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산의 국제성은 요모조모 들여다보면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산은 한반도를 통해 대륙으로 들어가는 첫 대문이자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가는 첫 현관이다. 글로벌 인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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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열리면서 도시로서 부산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근대적 교통으로서 경부선이라는 철길과 부관 연락선이라는 바닷길이 서로 뚫리면서 동래가 아닌 부산이 도시로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부산이 근대적 도시로 형성되기 이전부터 부산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시대 전국의 주요 도로로서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한 아홉 개 대로가 있었다. 그중 부산은 영남 대로로 한양과 이어졌다. 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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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이 되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장소가 있으니, 그곳은 바로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이다. 모래사장에는 파라솔이 줄지어 서 있고, 바다에는 물 반 사람 반이다. 모래사장과 바다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부산 이외의 지방에서 피서를 온 사람이다. 한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부산 사람들이 광안리나 해운대에서 해수욕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실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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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완벽을 추구하는 첨단 미래 도시를 꿈꾸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수영 2호교를 건너 해운대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센텀 시티(Centum City)를 만나게 된다. 수영강과 해운대 바다, APEC 나루 공원 뒤로 펼쳐진 한국 최고의 마천루(摩天樓) 센텀 시티, 그 거대한 빌딩숲을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센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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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해양 문화는 해양이 생활 양식 전반에 끼친 영향이 재현된 도시 공간, 문학예술, 지역 축제와 이벤트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문화는 수준 높은 정신 활동뿐만 아니라 삶의 양식과 사회적 행위와 의미의 소통을 모두 포괄한다. 또한 문화는 과거로부터 잔존하는 양식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사회적 토대 위에서 부상하는 양식도 있다. 부산의 해양 문화는 문학예술을 통한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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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사 기관에 의하면 “부산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라는 질문에 단연 물리적 경관으로 해운대가 가장 높은 응답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성향이나 속성에 대해서는 개방적이라는 응답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부산 이미지에 관한 조사 연구』, 부산발전연구원, 2009] 개방성이니 혼종성이니 하는 것은 부산이 놓여 있는 지리적 조건과 개항, 이주 등의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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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뜨거운 도시다. 도시 이름에서부터 ‘가마 부(釜)’자를 사용하는 도시다. 한국학 거장인 고 김열규 교수는 “떠돌이 모래알들이 찰흙으로 변함으로써 영광된 떠돌이[노마드]의 도시를 이룩한 곳이 부산”이라고 일찍이 말하였다. 떠돌이들이 ‘뜨거운 가마’ 부산으로 유입한 최대 계기는 광복과 6·25 전쟁이었다. 귀환 동포들과 피난민들이 대거 부산으로 흘러들어 왔던 그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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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산동네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결코 사람이 살 만할 것 같지 않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곳.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집마저 불법으로 지어야 할 만큼 만만치 않던 인생들이 몰려들었다 쫓겨나기도 했던 곳, 산동네.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부산에서, 토박이가 드물 정도로 외지 사람들이 많았던 부산의 역사에서, 산동네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살아봤던 경험이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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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영광을 누리고 있는 기업의 이면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 기업들이 있다. 몰락한 기업의 기록을 찾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성장이나 몰락 과정은 한 인간의 성장과 영락만큼이나 다양한 스토리와 교훈이 담겨 있다. 1980년 6월 도산한 동명목재상사를 주축으로 한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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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한국 제2의 도시라 불리는 부산의 새로운 랜드 마크로 각광받는 광안 대교를 타고 시원하게 바다 위를 달리다 보면 마치 미래 도시에라도 온 듯 착각을 일으키는 거대하고도 화려한 마천루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광안 대교에서 바라다 보이는 해운대와 센텀 지구는 세계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듯 이국적이기 그지없는데 특히 독일의 세계적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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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편지가 참 많이 왔군요. 그중에 당신 편지가 두 통이나 있었습니다. 매주 받는 편지에 감사하는데, 무엇보다 당신이 보낸 편지에 감사하고, 또 기다려진답니다. 정말 이곳은 춥군요. 얼음이 얼고, 맑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날씨가 더 추워질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추운 날씨와 함께 외로움도 몰려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당신만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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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공간으로서의 동래는 근대 이전부터 전통적인 지방 행정 구역인 동래부에 속하였으며, 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읍내면이 군 관아를 통한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시대에도 존재하였던 대일 관계의 특수한 공간인 왜관도 지방 행정관인 동래 부사가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정적·공간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개항 이전 동래 지역에는 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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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부산은 ‘예민한’ 국경 도시였으나 큰 도시는 아니었다. 부산이 오늘과 같은 대도시로 성장한 것은 근현대의 두 가지 계기에 의해서였다. 첫 번째 계기는 개항이었고, 두 번째 계기는 6·25 전쟁이었다. 6·25 전쟁은 부산을 비약적으로 팽창시켰다. 당시 부산은 1차[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2차[1951년 1월 3일~1953년 8월 15일] 두 번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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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598년 전개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우리나라 역사상 많은 피해와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부산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 부산은 일본군의 첫 상륙 지점이 되면서 전쟁의 피해를 처음으로 직접 당하였으며, 이후 7년 동안 지속된 일본군의 주둔으로 오랫동안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때문에 일본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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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를 타고 등하교 했는데 먼저 표를 보여주고 전차에 오른 친구가 창을 통해 다른 친구에게 표를 건네 줘 타게 하는 등 변칙적인 무임승차를 했던 게 기억납니다.” 부산시 관광협회 김인남[60] 여행이용권 사업팀장의 회고다. 학생 때는 재미로 규정을 어기는 행동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악의 없이 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용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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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인이 장악했던 부산 경제 부산의 역사는 다른 도시에 비해 길지 않다. 부산은 1876년 개항으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 부산 지역의 중심이었던 동래를 대신하여 오늘날의 원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한 도시화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해외 특히 일본 세력의 이식에 의한 것이었다. 부산은 일본과 가장 가까워 일본인의 이주가 가장 먼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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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숙종 4)부터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이 될 때까지 부산에 있던 일본인 마을인 초량 왜관(草梁倭館)에서의 문화 교류와 조선인 및 일본인의 생활은 국가 관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지역 간의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이었다. 왜관(倭館)에서 생활하는 일본인과 왜관 주변의 조선인의 문화 및 생활상은 열린 도시 부산의 역사성을 찾는 실마리가 된다. 조선 후기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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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들이 6·25 전쟁을 기억하려는 이유는 뭘까. 6·25 전쟁기 임시 수도 부산은 약 1,000일 동안이지만 두 가지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중심이었다. 전쟁 중임에도 권력을 유지해야 했던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하는 사람들, 예술하는 사람들, 돈 자랑하는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부모 형제, 고향과 억지로 헤어져 갈 곳 없어 안전지대를 찾아 모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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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이방인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옛 하야리아 부대(Camp Hialeah)가 2014년 부산 시민 공원의 개장과 더불어 부산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구릉지가 많은 부산의 지형적 특성에 비해 비교적 평탄한 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이곳은 일찍부터 교통 요충지로서 토지의 이용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일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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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에서 탄생한 영화는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세계에 퍼져 나갔다. 불과 두 달 만에 영국에 상륙하였고, 10개월 안에 러시아, 미국, 인도, 중국까지 진출하였다. 일본에는 1897년 2월에 도착하였다. 1876년 개항한 부산은 다른 지역보다 외래문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영화도 일본을 거쳐 부산에 소개되면서 한국에 상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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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은 대한민국 모든 ‘항만의 항만’이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래 줄곧 그러한 역할을 해왔으며, 신항 개장 이후 역할이 더 커지고 있다. 세계 간선 항로상에 위치하며 전면에 영도와 조도가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항만으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항만법상 부산항의 지리적인 범위는 남서쪽 몰운말[몰운대] 남단을 기점으로 하여 서도 남단, 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