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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010
한자 單純化-海岸線-自然-曲線-
영어의미역 The Simplified Coastal Line Shows the Extinction of the Natural Curved Lin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혁

[해안의 선-곡선과 직선]

자연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은 곡선이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해안의 선에는 원래 직선이 없었다. 넘실대는 파도, 백사장의 모래 언덕도, 이를 둘러싼 산과 구름도 모두 곡선이다. 해안선은 물과 땅이 만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깎이고 때로는 퇴적하면서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아름답고도 미묘한 곡선을 이었다. 인간은 그 선을 모방할 수 없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인간은 이들 곡선의 틈새 속에 직선을 긋기 시작하였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바다는 인간에게 두려움과 경외감을 주면서 동시에 생활공간이었다. 물고기를 잡으면서 단백질이 풍부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때로는 놀이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해안에 연한 얕은 바다는 바닷물이 밀려 나가면 어린아이도 조개를 채취할 수 있었다. 얕은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들어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고기를 잡으면서 바다는 어장(漁場)이 되었고, 미지의 세계로 가는 장애물 없는 교통로로 이용되면서 사람들은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땅과 물이 힘의 균형을 이루던 이전의 해안선 모습은 바다로 진출하려는 인간이 개입하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

항구는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이자 동시에 다른 세계와 만나는 결절지다. 해안선의 변화는 항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의 항구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선박도 소규모고 물자의 지역 간 교역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적인 곡선의 해안선을 이용한 항구로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산업 혁명 이후 증기선이 등장하면서 선박의 규모가 커졌다. 20세기 들어 유조선·컨테이너선 등이 건조되어 이를 위한 대규모 부두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해안선의 모습은 직선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항구의 성장과 함께 이루어진 도시 규모의 확대는 해안선의 변화를 가속화하였다. 바다에 연한 도시는 내륙 도시에 비해 성장 속도가 빨랐다. 제조업과 수산 가공업이 해안가에 입지하면서 공업 용지가 마련되었고, 도시인에게 주거지를 제공하기 위해 주택 지구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해양과 대륙 문화가 섞이면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면서며 휴양 도시로서 변모하며 사람들을 더욱 불러 모았다.

도시 해안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밀집도는 높아지고, 해안에 연한 바다는 토지 자본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공유 수면이 매립되면서 바다는 육지로 변하였고, 그곳에 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이제 해안가 대도시에서는 자연이 내려준 곡선의 해안선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부산포, 곡선의 해안을 간직했던 곳]

부산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강렬한 갯내음이다. 바다에서 어선이 들어와 부두에 내려놓는 고기 상자의 비린내는 역겨움보다 정다움을 느끼게 한다. 겨울 바다의 검푸른 바다색도 때로는 정겹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름철 바다에서 불어오는 몬순(monsoon)은 사람들의 숨을 막히게 한다. 여름과 가을에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인명을 앗아가는 태풍은 가히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간 곳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함을 되찾으며 때로는 두려워했던 태풍을 기다리게도 한다. 이 때문에 부산 사람들은 동아시아의 험난한 바다에 대해 순종적이었으며, 동시에 바다를 건너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부산의 바다는 두려움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옛 지도에서 바다의 모습이 험난하게 그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부산포 해안선은 곡선이었다. 당시 부산포의 중심지는 부산진성이었다. 성곽은 지금보다 훨씬 산지 쪽에 있었다. 평야가 거의 없었으며 자성대를 쌓고 첨영사(僉使營)을 두었다. 부근에 있는 영가대(永嘉臺)는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의 배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기원하던 곳이었다. 부산진에서는 매 4일·9일에 장시가 열렸으며, 쌀·보리·콩·삼베·무명 등 일상용품이 거래되면서 부산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어촌이 자리 잡았으며, 지금의 여느 한적한 해안에서 볼 수 있는 포구와 다르지 않았다. 해안의 조그만 어촌인 용호, 감만포, 우암동, 초량, 남천동 등은 조개나 미역을 채취하거나 연안 어업에 종사하는 어촌이었다. 지금의 용호동이던 분개[盆浦]에는 염전도 있었다. 절영도는 예부터 숲이 울창하였으며 목장이 있었다. 국마를 검사하던 고리장[環場]이란 지명도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의 부평동인 오해야향에도 목장이 있었다. 당시에 초량 왜관이 있었던 지금의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의 용두산 부근도 한산한 어촌이었다.

[개항, 근대 도시 그리고 해안의 선이 변하기 시작하다]

부산 절영도 밖의 하늘 밑까지 툭 터진 듯한 망망대해에 시커먼 연기를 무럭무럭 일으키며 부산항을 향하고 살같이 들어 닫는 것은 화륜선이다. “오륙도, 절영도 두 틈으로 두 좁은 어구로 들어오는데 반속력 배질을 하며 화통에는 소리가 하늘 당나귀가 내려와 우는지, 웅장한 그 소리 한마디에 부산 초량이 들썩 들썩한다.”[이인직, 「혈의 누」 하편, 1907]

조선 시대 부산포초량 왜관과 공존하면서 적당하게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한가하고 아름다운 포구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부산포는 일본의 대륙 진출 거점이 되었으며, 일본 증기선의 출현은 위와 같은 놀라움으로 묘사되었다. 부산은 이러한 모습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항구 도시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의 우리에게 부산은 바다로 가는 길목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아시아 대륙을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부산 땅을 밟으면서 대륙의 냄새를 처음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산에는 임진왜란 때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격렬히 저항했던 동래성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대륙 진출을 위한 항만 건설의 무대로 수영만 대신 초량 일대를 선택하면서 부산포를 중심으로 식민 항만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개항하면서 일본 전관 거류지가 설치되었고, 부산포는 이곳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일본은 자국민을 이주시키면서 토지를 점유하여, 개항 당시 36만 3636.36㎡[11만 평]에 불과했던 일본 조계지는 1905년(고종 42) 거의 50배로 확장하였다. 해안과 부민동 일대 도로망이 계획되고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영사관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경찰서, 은행, 병원, 상업 회의소, 전신국 등 공공건물을 배치, 건설하여 흡사 일본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중구 동광동과 광복동, 창선동, 신창동 등 부산의 중심지를 이루는 지역이다.

일본은 조계지를 얻었으나 평지가 협소하여 해안 매립을 시도하였다. 부산항은 전면에 놓인 영도와 조도가 바깥 바다로부터 파도를 막아 주고, 수심이 깊어 항만으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대형 선박이 접안하고 대규모의 물류를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해안 매립을 통해 항만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철도 건설과 시가지를 조성하고 항만 시설을 확장하여 부산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부산항 매립은 일본인들 간에 이권(利權)의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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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이후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해안 매립의 주요 내용은 ˂표1˃ 및 ˂그림4˃와 같다. 일본에 의한 부산항의 매립은 처음에는 북항 매축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부산진, 남항, 적기만의 매축으로 전개되었다. 북빈(北濱) 매축 공사는 1897년(고종 34)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제1기[1902년 7월~1905년 12월]와 제2기[1907년 4월~1909년 8월]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북항 매축 이후 부산역, 세관, 잔교, 우체국 등이 세워졌는데, 이 중 잔교는 길이 200m, 폭 16m로 당시 부산의 유일한 부두 시설로 관부 연락선이 접안할 수 있었다. 1908년(순종 2)에는 경부선역의 출발지가 초량역[지금의 지하철 초량역 일대]에서 지금의 부산역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1909년(순종 3)부터 부산진과 초량 간에 영선산 착평 공사가 시작되어 양 지구가 연결되었다. 강점 이후 1911년부터 8개년 계속 사업으로 부산 축항 제1기 공사가 시작되어 지금의 제2 부두가 건설되면서 일본의 대륙 진출 거점이 되었다. 1919년부터는 9년간에 걸쳐 제2기 부산 축항 공사로서 제1 부두와 제2 부두를 확장하였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남항 매축 공사가 이루어졌다. 1928년부터 1931년 사이에 연안 시설 확장을 위해 영도 해안 매립 공사를 하였다.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인 1941년에는 제3 부두, 1943년에 제4 부두, 1944년에 중앙 부두를 축조하고 임해 철도가 부설되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영도에 있던 일제의 원유 저장 시설 이전을 위해 1937년 적기만 일대가 매립되기도 하였다. 적기만의 매립 사업은 군수 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계획된 감만동대연동 일대의 도시 시가지 개발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일제 강점기 초기에 부산항은 일본의 대륙 진출의 거점 구축을 위한 항만으로 건설되었으며, 후기에는 군사 시설 건설과 배후지의 도시 확대로 이어지면서 해안선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경제 개발, 변모를 거듭하는 항구와 해안선]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이 물러간 후 부산항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기존 부두 시설에 대한 부분적인 보수만 이루어졌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의 바다는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제1차 경제 개발 계획과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부산항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경제 개발이 수출 경제 주도로 이루어져 당시 전국 수출입 화물의 40% 이상을 담당했던 부산항은 해상 화물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부산의 바다는 미증유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60년대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제 성장에서 수출 부문이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동남 해안에 위치한 부산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인천 등 다른 항만에 비해 수출 화물의 비중이 높았던 부산은 육상 교통과 해상 교통의 결절지가 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특히 항만에서 처리해야 할 물동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이를 내륙과의 원활한 물동량 흐름을 위해 새로운 교통로 건설이 필수적이었다.

1970년대까지 서울과 부산은 잇는 축은 경부선 철도였다. 1962년 서울-부산 특급이 6시간 10분대로 운행을 시작하였고 1966년에는 특급 맹호가 5시간 45분대로 운행되었다. 1969년에는 서울-부산 간 초특급 관광호가 4시간 45분으로 운행되었다. 당시 경부 가도에 자동차와 화물차가 달리고 있었으나 소요 시간은 거의 하루 이상 소요되었기 때문에 철도에 대한 경쟁자는 없었다. 그러나 철도는 다른 운송 수단과 비교하여 다량의 여객과 화물 수송에는 유리하나 소단위 수송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단거리 화물 수송에는 화물 적환비의 비중이 높아 경쟁력이 떨어졌다.

1970년 경부 고속 도로 건설은 철도와 경쟁을 하면서 바다로 열려 있는 부산항을 바꾸어 놓았다. 고속 도로는 길의 역사에서 기술의 혁신(innovation)이었다. 독일의 히틀러(Hitler)가 “수레와 말에 의한 교통이 자신들을 위한 도로를 만들었듯이 기차는 자신을 위해 필요한 궤도 선로(軌道線路)를 만들었다. 따라서 자동차도 자신을 위한 전용 도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건설된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이 고속 도로의 효시이다. 이 용어는 차(auto)와 기차(bahn)를 합친 것으로 두 교통수단의 장점을 합친 새로운 개념의 도로였다. 1970년 7월 7일 경부 고속 도로가 완공되어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출발한 화물은 불과 5시간 만에 부산항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철도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부산항 바다에 화물을 적재할 수 있었다.

경부 고속 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화물들이 부산항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항구에 도착한 화물들은 태평양, 대서양을 넘나드는 선박 위에 지체 없이 선적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전의 화물의 재래식 처리 방법으로는 넘치는 화물을 감당 할 수 없었으며, 부두의 모습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전반에 2차에 걸친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조선 기술의 발달은 해운 기술에 큰 변화를 유발하였다. 이때 이루어진 해상 운송 기술의 변화는 조선 기술의 발달에 따른 선박의 대형화, 탱크와 전용선의 등장, 화물의 컨테이너화였다. 배의 대형화는 초기에는 주로 탱커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석유의 해상 수송이 급증하면서 전용선이 등장하였다가 이후 석탄 운임이 상승하면서 곡물, 목재, 철광석, 자동차 등의 전용선이 등장하였다. 이와 함께 일반 화물을 컨테이너 용기에 담아 싣는 컨테이너선이 1960년대 이후 운항하기 시작하면서 해상 운송에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66년 4월 북대서양 항로에 컨테이너선이 등장하였다. 일반 화물을 컨테이너 용기에 담아 싣는 이 해운 기술은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였으나 이는 해상 운송에 새로운 혁신을 야기하였다. 해상 컨테이너가 처음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의 기동력 강화를 위한 군사 수송부터다. 그러나 민간에서 이용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에서 철도로 이어지는 육상 일관 수송에서 시작되었다.

컨테이너선은 해운에서 필요한 고속화, 전용화, 대형화의 기술 혁신을 동시에 만족하는 기술 혁신이었다. 재래 정기선의 화물은 대부분 잡화로서 화물의 형태가 천태만상이다. 이 다양한 화물을 선박에 적재나 하적하는 데는 기계의 힘에 의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계화는 화물 크기의 표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화물의 포장, 중량, 규격이 같아야만 기계화가 가능하며 능률도 오른다. 그러나 화주의 화물을 규격화시키는 것을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큰 상자를 화물주의 공장 창고에 보내서 내부에 화물을 채우고, 거기서 세관원에 신고하고, 수출 통관에 맞춰 봉안하면, 거기서부터 도착지의 문전까지 상자째 운송되어 대량의 화물을 한 단위로 운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컨테이너 전용선이 운항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1월로, 호주의 국영해운공사(ANL)가 한국-필리핀-홍콩을 잇는 노선을 운항한 것이 효시다. 그러나 이것으로 화물 적체가 해결되지 않자 부산에 컨테이너 전용 부두를 건설하게 되었다. 컨테이너 전용 부두는 다른 재래 부두와는 다른 시설이 필요하다. 통제소(control tower), 대형 컨테이너 전용선이 접안할 수 있는 안벽 시설, 화물을 능률적으로 수송하기 위해 항구와 연결된 내륙 요지의 주요 공업 도시 주변에 설치한 공 컨테이너의 인수 및 인도 장소인 내륙 데포(inland deport) 등이 필수적으로 이는 종래와 다른 차원에서 해안선의 변화를 유발하게 되었다.

1978년에 제5 부두가 완공되었으나 급증하는 컨테이너 양을 충당하지 못하자 2단계 사업으로 제6 부두가 건설되었다. 1983년 이후 컨테이너 물동량은 더욱 증가하여 대형 선박에 대한 하역 장비의 대형화가 불가피해지면서 북외항에 컨테이너 전용 부두인 신선대 부두를 건설하여 5만 톤급 선박 3척이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인근의 감천항부산항의 보조항으로 개발되었다. 1995년부터 가덕도부산 신항만 건설이 추진되면서 부산 일대 해안 매립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 이후 부산 바다 일대의 해안 매립 내용은 ˂표2˃와 같다. 1945년 해방 이후 부산항은 시설 면에서 대규모 개발 사업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기존 시설에 대한 부분적인 보수만 이루어졌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본격적인 항만 개발 사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의 제1차 경제 개발 계획과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이 성공함에 따라 1970년대에는 해상 화물 수송 수요가 급증하면서 항만 시설 확충이 불가피하게 하였다. 특히 전국 수출입 화물의 40% 이상을 담당하는 국내 최대항인 부산항은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1974~1978년 5개년 계획으로 시작된 부산항 1단계 개발 사업으로 제5 부두, 제7부두, 제8 부두, 연안 여객 부두, 국제 여객 부두를 축조하였다.

그러나 1단계 사업의 준공에도 급증하는 물동량에 시설이 충당하지 못하자 2단계 사업이 시작되었다. 제6 부두 건설과 제3 부두, 제4 부두, 중앙 부두 및 제5 물양장 개축 등으로 구성된 이 사업은 1983년에 준공되었다. 2단계 사업의 주목적은 급증하는 컨테이너 물동량을 원활히 처리하기 위한 제6 부두의 건설에 중점이 주어졌다. 1983년 이후 컨테이너 물동량은 더욱 증가되어 대형 선박의 하역 장비 대형화가 불가피해지면서 3단계 사업이 이어졌으며, 북외항에 신선대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완공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부산항의 물동량이 넘치면서 가덕도 일대에 부산 신항만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997년에 착공하여 2013년 현재 북컨테이너 부두는 운영 중이며 다른 부두는 건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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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정부 주도 개발 사업과 함께 민간 자본에 의해 해안 매립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1974년 용당동동명목재 부지가 매립되었고, 1975년에는 남부민동 신민학원 학교 부지로, 같은 해 4월에 극동석유 부지가 감만동에서 매립되었다. 1979년에는 감만동에 연합철강 부지를 매립하였고, 1980년에는 청학동에 대한준설공사와 대한조선공사가, 1982년에는 수산대학이 대연동에 학교 부지로, 1984년 부산시가 대연동에 컨테이너 적치용으로 매립하였다. 한편 1987년에는 88 서울 올림픽을 위한 요트 경기장을, 용호동에는 동국제강 부지를 매립하였다.

어항인 남항에서도 수산 가공업을 위해 대규모 부지가 매립되었다. 외지인이 많이 찾는 자갈치 시장은 원래 개항 당시의 자갈 해안으로서 거의 이용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개항 이후 인접한 동광동과 광복동이 일본인 거류지로 되면서 어민들이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생선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소규모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일본이 1910년 이곳에 부산 어시장을 설립하여 시장 기능을 흡수하려 하였으나 활어 유통 기능은 소형 선박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25년 매립 공사와 함께 항만 축조 공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의 충무동[당시는 소화통(昭和通)]이 형성되었고, 현재와 같은 해안선이 이루어졌다.

서구 남부민동에 위치한 부산 공동 어시장은 원래 부산 종합 어시장으로 1963년부터 지금의 제1 부두 자리에 있었다. 그 후 무역량의 증가하면서 1966년 부산항 정비 계획에 의해 남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매축지를 정비하고, 공유 수면을 매립하여 수산업 단지를 조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부산 해안선의 변화를 종합해 보면, 일제 강점기 해안선의 변화는 부산항 북항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1970년대 이후는 북항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걸쳐 매립이 이루어졌으며, 용도도 항만 건설 외에 철강 공업과 조선소 부지, 어항 부지를 마련하기 위한 매립 등 다양한 목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1970년대 남천동과 1980년대 후반의 민락동 앞바다 매립은 주택 지구 건설을 위한 것이었으며, 1987년 우동의 경우 88 올림픽 요트 경기장 건설을 위해 매립이었다. 남천동 매립지에 건설된 삼익 아파트는 해안에 건설한 아파트의 효시로, 이후 경관이 뛰어난 해안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단순화된 해안선]

해운대 해수욕장 백사장의 모래 유실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해운대구가 지난 1980년대 이후 해마다 줄고 있는 백사장의 보존책을 찾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 (중략) 이처럼 모래가 자꾸 없어지는 것은 해운대해수욕장에 모래를 공급하는 수영강 상류 지역에 최근 10여 년간 도시 개발과 하천 개수 공사가 잇따르면서 모래 유입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 또 부산 한국 콘도와 미포 사이 직립 호안에 파도가 부딪치면서 백사장 모래가 표사로 변해 해변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이에 따라 해운대구는 1994년부터 해수용장 개장 직전에 모래 4,000㎥씩을 백사장에 붓고 있다.’[『경향 신문』, 1997년 4월 22일]

해안은 육지와 바다가 서로 상호 작용하는 구역으로 육지 말단부의 지형학적인 운동과 해양의 파랑 운동, 연안류, 조류 등 해안과 관련한 모든 프로세스가 집합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매우 역동적이고 복잡한 동적인 환경(dynamic environment)이다. 우리가 해안에서 볼 수 있는 지형 경관들은 이러한 시스템의 요소들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우리가 본 시점에서의 평형 상태이다. 도시의 산업화로 해안 공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인간이 개입하여 자연 해안을 인공 해안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위의 기사 내용과 같이 종래의 자연 속에서의 평형을 깨뜨려 놓았다. 해안 매립은 연안 육역[만조 수위 선부터 500m 내, 항만, 어항, 산업 단지의 경우 1㎞ 내]뿐만 아니라 연안 해역[만조 수위 선부터 영해까지]까지 지역의 환경 변화를 유발한다. 일반적으로 해안의 인공 구조물은 항만 시설, 호안, 해안 도로, 건물 건축 및 침식 방지를 위해 설치된다.

부산의 해안선은 약 300㎞로 항만, 어항, 상업 지역, 친수 공간 등 다양한 형태로 이용되고 있다. 부산 북항과 가덕도 신항을 중심으로 공업[항만] 지역, 해운대·자갈치를 중심으로는 상업 지역 중심으로, 기장군·강서구·이기대·태종대 등은 녹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중 공업[항만] 지역은 대부분 매립에 의해 토지 수요를 충당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부산 연안의 공유 수면에서 총 137건 12.9㎢의 매립이 있었으며, 이는 영도구 행정 구역 면적인 14.1㎢와 비슷한 크기이다. 이는 부산항의 기능 확대를 위한 항만 용지의 확보와 신시가지 조성 등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백경훈, 2012]

부산에서 해안 매립의 가장 보편적인 목적은 항만 건설이다. 항만 시설을 위해서는 해안의 적절한 공간을 매립하여야 하고, 항구로서 기능하기 위해 부두, 방파제, 물양장, 호안 등 여러 부두 시설이 필요하다. 부두는 평행 안벽 부두와 돌제 부두로 구분된다. 부산 북항의 제1 부두, 제2 부두, 제3 부두, 제4 부두의 경우 돌제 부두에 해당되며, 중앙 부두는 평행 안벽 부두에 해당된다. 방파제로는 오륙도 방파제와 부산 북항 방파제가 있다. 방파제는 파랑으로부터 항만을 보호하거나 항만 내에 모래가 퇴적되어 수심이 얕아지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로 일반적으로 항만을 감싸고 1기 혹은 2기가 설치된다.

부두의 이와 같은 시설물들은 연안류가 방파제의 말단 근처에서 외해 쪽으로 확산되며 유속이 급격히 감소되기 때문에 항만 입구 방향으로 토사가 퇴적되어 사주가 형성되기도 한다. 방파제가 외해 쪽으로 연장되면 하류부의 해안선이 변하며, 항만의 입구 위치나 폭이 방파제 연장으로 변하여 항만 내 퇴적 향상이 변하기도 한다. 또한 항만 내 매립과 외항 방파제로 인해 조류의 흐름이 약해지면서 해수 교환이 억제되는데, 부산항의 경우 북항의 해수 교환 체류 시간이 1945년 1,647일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2,631일로 984일 증가하였다.

부산의 경우 도시화가 가속화하면서 해안 지역 개발도 가속화하였다. 해운대지역을 중심으로 고밀도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인공적 시설물의 해안 근접 현상이 가속화한 것이다. 이외에 거의 전 해안에 걸쳐 해안 도로가 건설되었고, 상업 및 주거 시설이 입지하며 인공 해안이 만들어졌다.

이를 위해 해안에는 인위적으로 호안(護岸)을 쌓고 구릉을 절개하면서 도로가 만들어졌다. 해안 도로는 해안의 접근 향상을 위해 꾸준히 건설되었으며, 해안 지역으로 점점 더 밀착하였다. 지반이 약하고 파랑에 대비하기 위해 직립 호안을 함께 설치하였으며,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인공 해안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호안벽의 경우는 연안 육역을 해안 침식과 월파(越波) 피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으나 파랑이 호안 벽에 가하는 압력이 증가하여 기저부를 세굴(細屈)할 수 있고 해안의 안정성을 약화시킨다. 또한 육지로부터 공급되는 모래 퇴적물의 이동을 제한하기 때문에 해안의 침식을 가속화시킨다.

단순화된 해안선은 육지로부터는 인간의 접근을, 바다로부터는 배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해안에 인접하여 주택 지구가 형성되면서 오염된 생활수가 정화되지 않고 바다로 유입하면서 연안 생태계의 건강성을 악화시켜 다양한 생물 서식지가 파괴되기도 한다. 항만 개발로 부산 연안에는 연간 13만 척의 선박이 출입하고 있다. 이들 선박에 의한 폐유와 오염 물질 방기는 해양 오염을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곡선을 찾아서]

20세기 부산의 바다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부산항은 우리 근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 광복, 6·25 전쟁을 거치면서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의 눈물이 녹아 있으며, 탄식과 환호의 순간들을 수없이 겪었다. 북항은 세계를 향한 희망의 출구였고, 산업화 시대에는 수출 상품을 싣고 뱃고동을 연신 울려 대던 희망의 항구였다.

지금 부산항 야적장에는 컨테이너 박스가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찼다.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해 부산의 바다는 자연이 내린 아름다운 곡선을 포기하고 정서가 메마른 직선을 받아들였다. 자갈 소리가 나는 해안선 대신에 회색의 콘크리트 부두가 들어섰다. 대구와 청어가 잡히고 미역과 패류를 채취하던 곳이었으나 작은 섬만큼 큰 배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입항하는 선박의 규모가 늘어날수록 해안선은 점점 직선으로 되어 갔다. 아파트 부지 마련을 위해 감추어져 있던 풍치 좋은 해안도 이제 직선이 되어 갔다. 사람들은 해안의 작은 바위틈으로 자꾸 숨어 들어가 낚시를 하면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꿈을 키우던 호기로움을 잊어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경제 성장 제일주의에 의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고 있다. 거대해진 선박의 규모에 맞추기 위해 부산항의 규모도 키우면서 그만큼 자연의 선을 잃어 갔다. 직선의 해안선을 보는 우리의 사고도 단순화되어 갔다.

해안선의 변화는 단순히 선의 변화가 아니라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곳의 모든 것이 단순화되고 직선화된다. 해안은 직선 만능주의에 젖은 인간들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1990년에는 영도와 송도의 남항에 면적 6.12㎢[185만 평]의 인공섬 건설과 관련된 기사 내용이다.

‘인공 섬 계획에 찬성하는 관계자들은 앞으로 5년 동안 도시 개발에 필요한 재원 6조원을 마련하는 데 필수적인 사업이라 주장하나 반대론을 펴는 사람들은 △부산항의 항만 기능 상실 △계획 추진 과정의 비민주성 △환경 파괴 △적지 선정 여부 △투기성 우려 등을 제기하고 있다.’[『한겨레 신문』, 1990년 11월 6일]

이 인공섬 건설 계획은 결국 시민과 학계의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21세기 들어 항만 기능이 가덕도 신항만으로 옮겨 간 부산 북항은 문화 공간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연안 및 국제 여객 부두와 제1~4 부두를 중심으로 친수 공간으로 재구성하여 종래의 산업 코드를 문화 코드로 바꾸려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곡선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에게 곡선을 돌려주어야 하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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