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동강 하구 삼각주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하중도(河中島) 명지동[면적 15.45㎢, 인구 9,034명(2008)], 명지는 ‘명지도(鳴旨島)’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명지도’는 자연 재해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섬의 어딘가에서 먼저 변(變)을 예고하는 북소리, 종소리 같은 소리가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는 데서 나왔다. 명지는 강서구의 동남쪽에 있으며 북쪽은 대저동, 서...
-
정원규 옹의 하루는 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450-28번지]의 사무실에서 시작한다. 11년째 동래기영회의 사무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정원규는 매일 오전 10시면 사무실에 마련된 자신의 책상 앞에 앉는다. “동래기영회 가입한 게 2004년인가? 하여간 지금 11년이거든. 와 가지고 바로 이거 뭐 사무국장을 맡았으니까 국장을 한 게 10년이 조금 넘...
-
‘가덕도 숭어들이’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외양포 마을에서 행하는 160년 전통 방식의 숭어 잡이다. 가덕도 앞바다는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가덕 수로’라 하여 이곳에서 잡은 고기를 최상품으로 쳐 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덕도 숭어는 봄이 제철인데, 육질이 부드럽고 향긋한 단맛이 일품이어서 임금님 수라상에도 진상되었다고 한다. 겨울 동안...
-
좁고 긴 복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 퀴퀴한 다다미 냄새, 가파른 2층 계단, 검은색 함석지붕, 나무판자로 덧댄 외벽……, 주위의 집들에 비해 약간은 기괴한 이들 목조 2층집들을 우리는 ‘적산 가옥’이라 부른다. ‘적산(敵産)’의 사전적 의미는 ‘한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인]의 재산’이니, 우리에게 ‘적산 가옥(敵産家屋)’이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
감천동은 천마산(天馬山)과 아미산(蛾眉山) 사이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986년 발간된 『사하지』에 따르면 감천(甘川)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라고 하였다. 감(甘)은 검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신(神)’을 뜻한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 감내가 ‘검내’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기와 조각과 고려 청자 편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는 요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다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일본인들이 떠난 도시 부산 광복동에서는 그 황량함을 허름한 다방 한편의 예술혼이 채웠다. 8·15 광복 직후, 모든 것이 열악한 신생 조국에서 다방은 유학파 예술인들에게 소중한 만남의 장이었고, 저마다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안식처였다. 6·25 전쟁 발발...
-
현재 부산 사하구 괴정동은 괴정 시장과 지하철 1호선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사하 지역에서 가장 인파가 많은 곳이며 사하구에 살면 이곳 근처를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괴정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이며, 인구가 많은 사하구의 중심 지역이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괴정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에...
-
제면기 모터 굉음이 가득한 수화기 너머 곽 사장의 목소리는 이내 묻혀 버렸다. 그 흔한 와이파이(Wifi)가 터지지 않는 핸드폰 주인에게 국수 공장을 찾아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처음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 유명한 구포 국수 아닌가? 그것도 구포 유일의 국수 공장을 이곳 사람 절반은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수소문할 인적 하나 없는 철길 뒷골목을 지나 비슷비...
-
2013년 5월 23일 아침 6시. 수온이 상당히 낮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운대 백사장 너머에서 한 남자가 바다 수영을 즐기고 있다. 동백섬 조선 비치 호텔 앞에서 미포까지 수 킬로미터를 왕복하고서도 그는 그다지 지친 기색이 없다. 수영을 마친 그는 해운대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신축 아파트 36층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70여 평에 이르는 집 안에 들어서니 마치 바다 위에 서...
-
시장은 흥미로운 곳이다. 다양한 물건이 거래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우리네 시장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 모습도 많이 변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서린 온갖 삶의 애환은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지워지거나 변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융합하는 국제 시장. 국제 시장은 이제 부산을 찾는 여행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이자 부산 사람...
-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의 종전과 함께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부산은 극심한 인구 이동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특히 부산은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의 가장 크고, 중요한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다. 해방 직전 까지 많은 수의 일본인이 부산에 거주하였고, 대규모 인적, 물적 이동이 가능한 통로였다. 따라서 해방 직후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
막 걸러서 만든다고 이름조차 막걸리가 된 술. 전통주 가운데 가장 서민적인 술 막걸리는 농가에서 만들어 농주(農酒)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탁한 색깔 때문에 탁주(濁酒)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하였다. 청주와 같은 고급술에 비하여 맛은 떨어지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영양이 풍부한 탓에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술이었다. 그러나 주식이던 쌀이 부족하던 196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쌀을 원...
-
부산광역시 기장군 중심부에서 꽤 멀리 들어가는 장안읍 좌천리의 어느 한적한 국도변에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자그마한 공방이 하나 자리를 잡고 있다. 시간마다 울리는 동해 남부선 열차의 소리를 들어가며 열심히 발 물레질을 하는 이는 이곳에서 ‘상주요’라는 도예 공방을 운영하며 기장 도자기의 옛 흔적을 찾아가는 도예 작가 효봉(孝峰) 김영길이다. 경상북도 문경...
-
유주열 어른과 대변항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은 새벽 3시, 도착하니 새벽 2시 50분이었다. 시간 간격으로 잠들고 깨기를 여러 번, 조업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4월도 벌써 중턱으로 달리는데 새벽 날씨는 여전히 겨울 언저리를 맴돌며 어색한 추위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항구의 차가운 기운을 담은 새벽하늘을 물들인 별빛, 달빛, 바다를 밝히...
-
칠월 하고도 중순, 한여름 오후 2시 경로당의 풍경은 차라리 적막함이다. 그나마 쉴 새 없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텔레비전 속 궁중 사극이 아니었다면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데워 밀어 올리기에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죽림 마을 경로당 문을 조심스레 여니 노인 세 분이 각기 방향을 달리하고 옅은 잠을 청하고 계신다. 여름날 청춘의 생기보다 여기, 경로당에서의 나른한 오후의 휴식이 어...
-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 마을이다. 항구인 대변항(大邊港)이 있으며 자연 마을에는 대변 마을, 무양(武陽) 마을, 흙구덩이 새마실 마을이 있다. 대변 마을은 조선 중기 때부터 사용된 이름인데 당시 김성련이란 선비가 적은 『병술 일기(丙戌日記)』에 ‘우기이대변포문생원가(又寄以大邊浦文生員家)’라는 기술이 있었고,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라는 긴 지명을 줄여 대변포라 부르다가 대변 마을이...
-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정식 명칭은 동래 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이며 동래 도호부, 즉 동래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정상의 통치를 책임지는 관원이다. 지방 관원은 고을의 수령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이기 때문에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리기도 하며, 관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통치 업무를 매일 수행하였다. 동래 도호부는 일반적인 지방의 한 고을 단위로서의 위치만이 아니라, 일...
-
“동래 온천이라면 금정산을 연상하고 금정산이라면 은꼬리 같은 그 반월을 연상한다. 금정산에 비치는 반달이 구부러져 그 그림자가 은수(銀繡)같이 흔들리는 곳에 동래 온천은 작은 아가씨같이 잠이 들었다. 이야말로 한 절의 고운 서사시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냐? 동래 온천이라면 거리가 깨끗하고 집들이 좋고 설비가 완전하다는 점에서 손을 꼽지만은 풍경이 좋고 아담하다는 점에서도...
-
부산의 동래에는 파전이라고 하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이 있다. 이름 하여 동래 파전이다. 쪽파라고 불리는 작은 파에 해물을 비롯한 갖가지 부재료를 더한 파전, 곧 파 지짐이다. 예부터 부산 지역은 음식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산물을 제외하고는 부산!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나 요리도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런 가운데 동래 파전은 이름부터 향토색이...
-
구도(球都) 부산, 그리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열정을 지닌 롯데 자이언츠 야구팬들. 그들은 이길 때나 질 때나 언제든지 「부산 갈매기」를 부르며 ‘신문지’를 흔들고 ‘봉다리’를 뒤집어쓴다. 야구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준해설사마냥 선수들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부산의 야구팬들, 롯데 관중들은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된다. 박수만 치거나 가만히...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은 낙동강 하구 삼각주의 최남단에 있다. 원래 경상남도 김해군이었는데, 1978년 부산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옛날에는 섬이라 ‘명지도(鳴旨島)’, 혹은 ‘명호도(鳴湖島)’라 하였다. 이는 큰 가뭄이나 큰비, 혹은 큰바람 등 천재지변이 있을 때 지천에 널린 갈대밭에서 북소리나 종소리가 울려 미리 알렸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부산에는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무덤 사이사이로 집을 만들어 삶터로 바꾼 마을들이 적지 않다.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돌산 마을로 불리는 곳도 그중 한 곳이다. 부산진구 전포동 방면에서 바라보면 황령산 방면으로 커다란 바위산이 보인다. ‘돌산’이라 한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전포동 방면에서 접근하기에는 급경사인 반면 문현동에서 접근하면 상대적으로 완만하다. 돌산 마을의 정확...
-
지역 사회의 정체성은 주민과 자연, 그리고 문화의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며, 양자는 표리의 관계에 있다. 주민이 없는 지역 사회가 존재할 수 없듯이 지역 문화 없는 지역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산’이라는 지역적 정체성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명백한데, 그것은 ‘바다’이다. 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은 원래 상리 마을, 중리 마을, 무정리 마을, 삼어리 마을 등 네 개의 자연 마을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행정 단위였다. 그러던 것이 1973년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분동되기 시작해 2014년 현재는 4개의 행정동으로 나뉘었다. 이들 자연 마을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무렵에는 현 아시아 선수촌 자리에 포로...
-
고만고만한 승용차들 사이에 집채만 한 버스가 시원스레 내달린다. 버스 안에는 뛰어난 운전 솜씨를 뽐내는 운전사 말고도 또 다른 한 사람이 탑승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버스 안내양이라고 부르는 여자 차장들이다. 서울 거리에 나타난 여차장들은 다리가 반쯤 드러나는 신식 양장의 유니폼을 입고 앞에는 표 가방을 둘러맨 채 표를 찍어 주며 낭랑한 목소리로 ‘오라잇’, ‘스톱’ 하고 미소를...
-
6·25 전쟁과 부산의 임시 수도를 빼고 보수동 책방 골목의 형성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30~40만 명의 민간인뿐 아니라 정부의 모든 기관이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전쟁 전에 비해 인구가 거의 2배가 된 셈이다. 피난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 집과 생계 수단이었다. 피난민들은 부산항과 부산역 등을 통해 들어와 산비탈이며 다리며 가릴 것 없이 어디든 일단 가족이 살 자...
-
부산은 골목의 도시이다. 동서로 길게 뻗은 형상에,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며 급격히 늘어난 인구 탓에 부산에는 다양한 형태의 좁다란 골목이 도시 지형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는 중구 일대 원도심에 두드러지는데, 이런 지형을 따라 형성된 보수동 책방 골목은 부산의 독특한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가의 대...
-
묘지는 볕바른 평평한 산정이었다. 묘혈(墓穴) 테두리는 단단하고 반들반들한 돌로 만든 석곽이었다. 보습과 도끼를 맞은 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돌은 두루뭉술하였다. 인부들은 줄로 엮은 덩이쇠 조각을 깬 돌 위에 깔고 그 위로 갈대를 푸짐하게 깔았다. 시신의 머리맡에는 철재로 만든 비늘갑옷 목가리개, 팔뚝가리개 투구와 삼지창, 금동관을 놓았다. 묘혈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과 대저 2동은 본래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으로, 1978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면서 분동되었다. 낙동강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인 이곳은 토질이 비옥하고 기온의 연교차가 적으며, 강수량도 비교적 풍부하여 농업에 매우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이러한 까닭에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인에 의해 개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산업적인 의미의 농업이...
-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은 매일 저녁 8시, 부산항 국제 터미널에서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로 향하는 카페리 성희호가 출항한다. 일본 쪽 카페리는 시모노세키 항에서 저녁 7시 출항하는 하마유(はまゆ)호다. 운항 소요 시간은 8시간. 1905년 9월 최초의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또는 부관 연락선] 이키마루[壹岐丸]가 취항한 이래 이 뱃길은 많은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해왔다. 일제...
-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는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유신 반대 가두 시위가 벌어졌다. 저녁이 되면서 시위 양상은 폭력화되어 남포파출소를 비롯한 도심 일원의 파출소와 방송국과 언론사가 습격당했으며, 시위는 통금 시간인 자정을 넘기며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이는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유신 체제하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저항이었으며,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구호를...
-
부산 국제 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인 김지석을 만나기 위해 영화의 전당을 찾았다. 미리 전화 통화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기는 하였지만 막상 거대한 건물 안에서 국제 영화제의 실무자들이 일하는 공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물 안에서 십여 분 정도 헤매다가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 대해서, 그리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듣기 전에 김지석이...
-
1970~1980년대 부산 경제의 중추였던 신발 공장에서 근무한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 주말 저녁 모처럼 조윤자는 친구들은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부산진구 초읍동에 사는 조윤자는 1955년 3월 11일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좌삼리에서 태어났다. 전후의 우리나라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소말리아보다도 못한 상황이었다지만, 그녀가 나고 자란 마을은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그녀가...
-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인 송도에서 1960~1980년대 해수욕을 즐기고 해상다이빙, 케이블카, 구름다리, 포장 유선(包裝遊船)[양쪽을 하얀 포장 천막을 씌운 놀잇배] 등의 놀이 문화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추억담이다. 2013년 8월 7일 절기상 오늘은 가을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추(立秋)이다. 하지만 연일 밤낮으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맞아 사...
-
작고 한적한 바닷가, 봄이면 멸치 축제로 들썩이는 은빛 항구에 횟집과 어물전이 즐비하다. 항구 옆 죽 늘어선 가게들 사이 빛바랜 간판의 약국이 하나 있다. 여닫이문의 드르륵 소리에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10여 년이 넘도록 이곳을 지키고 있는 약사 선생님. 대변항 어물전에서는 그저 ‘약국 언니야’로 불리는 그녀가 이곳으로 온 것은 1999년 즈음이다. 원래 해운대 큰 병원...
-
부산항은 한국 최초의 무역항이다. 먼저 자연 지리적인 조건을 보면 항구 전면에 영도(影島)와 조도(朝島)가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항만으로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항만법상 부산항의 지리적인 범위는 남서쪽 몰운말 남단을 기점으로 하여 서도 남단, 두도(頭島), 생도 남단, 오륙도 남단, 동백섬 산정을 이은 내해로서 북항·남항·감천항·다대포항 등으로 구성되어...
-
세계 속의 중국인은 1,800여 만 명으로 90% 이상이 동남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집단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차이나타운의 형성이다. 그 속에서 이민자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중국인의 모습은 세계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 즉 중국인 이민자로서 그들의 국적을 유지한 채 전통...
-
부산의 옛길을 더듬기 위해서는 까마득한 옛날인 구석기, 신석기, 철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 옛길의 자취를 확인하고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애환을 더듬기 위해서는 근세, 근대의 족적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옛길은 역사와 문화의 보고이다. 지역사의 절반 이상이 길에 녹아 있다. 옛길에 길이 있는 것이다. 나라의 동남쪽 변방이자, 대일 외교 및 교류의 거점이...
-
1887년 만주 땅 우장(牛莊),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사 존 로스의 손에는 조선인 세례 교인들이 한국어로 번역한 『예수 셩교 전셔』가 들려 있다. 일본에서 인쇄한 이 6,000권의 성경을 어떻게 조선으로 반입할 것인가를 고민한 로스 목사는 세관 책임자 묄렌도르프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하지만 이 소문은 조선 정부에 흘러들어갔고 관련자를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엄명이 떨어진다....
-
부산시립교향악단 비올라 단원 김상철씨는 큰 키에 활짝 웃는 모습이 멋진 청년이다. 밝은 목소리와 친절한 행동에서 그늘진 곳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김상철씨를 본 사람이라면 그가 흔하지 않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제가 부산시립교향악단 단원이긴 하지만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일반적인 삶이 아닐지도 몰라...
-
1. 청춘, 부산 아줌마에 반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는 뭐가 좋으세요? 커피도 있고, 녹차도 있고……. 그럼, 재스민 차로 합시다. 오키나와[沖縄]에서는 재스민 차 많이 먹어요. 저는 오키나와 사람입니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죠?” 신라대학교 국제관광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인 미야기 케이나[宮城佳奈, 38세]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여러 번...
-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기 힘든 바닷가 외딴 섬에 등대가 홀로 서 있다. 처음 등대가 세워졌을 백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발길을 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절벽 위에서 망부석처럼 망망대해를 비추며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다. 지금은 외항선이나 컨테이너 선박이 등대 앞을 분주히 드나들고, 공간에 따라서는 복합 문화 공간,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쉽...
-
부산진 시장의 역사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의 문물을 일본으로 전파하는 조선 통신사가 지금의 자성대 공원에 위치한 영가대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고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바로 부산진 시장의 시작이다. 이후 1913년 오일장으로 개장하면서 현재의 시장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
고대 팔레스타인(Palestine) 민족 중에 ‘블레셋(Philistia)’이라는 해양 국가가 있었다. 일찍 철기 문화에 눈뜬 블레셋은 인근 국가인 이스라엘과 달리 야금술(冶金術)에 능하였고,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농기구를 얻어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무기를 가진 블레셋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블레셋의 전사 골리앗(Goliath)이었다...
-
1997년 말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체제는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백화점들을 자금난으로 몰아갔다. 여기에 재벌 유통업체들의 공세가 이어지자 부산의 향토 백화점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쓰러지고 말았다. 1997년 3월 유나 백화점의 폐업을 시작으로, 태화 백화점[6월], 미화당 백화점[10월], 세원·신세화 백화점[11월]이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여자중학교 인근 주택에 거주하고 계시는 박원호 어르신은 1933년 구미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좌우익의 대립, 6·25 전쟁을 몸소 겪으신 분이다. 특히 6·25 전쟁 자원입대로 참전하여 북한군과의 전투 도중 큰 부상을 입으시고 부산에 있는 후송 병원에서 1950년대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분의 삶을 뒤돌...
-
서동은 부산광역시 금정구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뒤로는 윤산, 앞으로는 중군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동쪽으로는 사천을 경계로 해운대구 석대동과 접하고 서쪽은 고개 너머 부곡동, 북쪽은 회동동, 남쪽은 동래구 명장동과 접한다. 1740년(영조 16)의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동면 서동으로 나온다. 훗날 동면이 동상면과 동하면으로 분리되면서 동상면에 속하였다. 191...
-
해동씨가 성창기업에 입사한 해는 1966년이다. 1947년생인 그는 대구농림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5년에 실습생으로 처음 이곳에 왔다. 청송에서 사과 과수원을 하는 집의 4남 4녀 중 장남인 그는 홀로 대구까지 유학을 왔다가 실습을 하러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성창기업의 회장님이 대구농림고등학교 선배라고 하셨다. 농림고 학생이니 나무에 대해서는 이미...
-
지금도 부산의 번화가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도심의 중심가로 다시 부흥하고 있는 광복동 거리는 개항 전후 부산으로 몰려든 일본인에 의하여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광복로라는 명칭은 해방과 동시에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았다[光復]’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전까지는 일본인들이 ‘긴 길’이라는 의미의 장수통(長手通)이라 부르던 거리였다. 개항 이전의...
-
까치 고개는 부산광역시 서구 천마산과 아미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서구와 사하구를 잇는 우회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87번 버스를 타고 까치 고개를 오르다 천주교 아파트 앞에서 내려서 감천 고개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오르다 보면 계단 형태의 주택가를 만날 수 있다. 경사가 너무 급해서 오르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들지만 한참을 올라 한숨 돌리고 뒤를 돌아다보면 용두산...
-
부산 동구 범일 4동과 부산진구 범천 2동에 걸쳐 있는 마을. 골짜기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안창 마을’이라 부른다. 지금도 마을을 따라 흐르고 있는 내를 ‘범내’라고 부르는데, 옛날 이 냇가에 호랑이가 나타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내를 범내 혹은 호천, 호계천이라고 부르며 아직도 호랑이 이야기를 한다. 6·25 전쟁 당시 살...
-
롯데 이야기지만 해태 김응룡(金應龍) 감독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특이한 음색 덕분에 한때 개그맨 김현철이 당신의 성대모사로 대박을 날렸다. “응~~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본인이 밝힌 바로는 1997년 우승 이후 일본 프로 야구팀 주니치 드래건스로 트레이드 된 두 선수를 아쉬워 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고 한다. 실재로 김 감독은 그 후로 해태를 떠날 때까지...
-
“강변, 강촌 등 지금은 거의 이름을 잊었지만, 맥주는 엄두도 못 내고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갈 차비만 남기고 양심껏 주머니를 털어 노가리·오뎅[어묵]과 함께 막걸리를 시켜 마셨습니다. 계절은 지금쯤, 맵싸한 모깃불 연기에 가끔 눈물을 흘리며 ‘request music’으로 젊음을 함께 태웁니다. 「고래 사냥」, 「왜 불러」, 「화」, 「바다의 여인」, 「가을 편지」, 「listen...
-
온 하늘을 닦아 놓은 듯 쾌청한 날씨에 바람까지 고요해서 따뜻하기까지 한 11월의 어느 초겨울 아침. 말끔하게 단장된 부산의 남쪽 해안가에는 근래 보기 드물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부산 15만 부민들이 기다리고 바라던 환희의 날이 결국 왔다. 걱정해 온 부산 대교의 도초식(渡初式)과 간선 도로[중심 도로], 선류 정리(船溜整理) 공사의 준공식이 거행되던 날...
-
‘깡깡이 아지매’는 철로 만들어진 배의 노후를 방지하기 위해 2년여에 한 번씩 배 밑창이나 측면에 붙은 조개껍데기나 녹을 떨어내는 잡역부의 일을 하는 아낙들을 일컫는 말이다. “부산에 가서 깡깡이 질이나 하여 보세”란 노랫말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부산 영도에 나타난 것은 일제 강점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직업군을 이룬 것은 제3 공화국의 조선(造船) 장려 정책...
-
생각난다. 열 살 이전에 들락거렸던 영주동의 천보 극장. 그리고 초량 대도 극장. 둘 다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 극장이었고 2류, 3류 극장이었다. 화면은 자주 끊겼고 실내는 퀴퀴했다. 그러나 관객은 늘 붐볐고, 영화의 말미는 언제나 감동적이었다. 감동의 여운은 길고 짙어 막이 내려도 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또 생각난다.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영화 선전 차량. 앞이 뾰족하...
-
부산의 대표적인 유흥가 온천장, 지금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아 옛 명성을 잃어 가고 있지만, 중년을 넘긴 이들에게 온천장은 옛 추억을 되돌아보게 하는 곳이다. 온천장이 유명한 유원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온천이 가진 매력 때문이 아닐까. 부산의 여러 관광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곳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동래 온천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 사람...
-
왜관(倭館)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무역 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설물로, 1407년(태종 7)경부터 조성되었다. 1407년 부산 포구를 연 이래, 근대 개항이 되는 1876년(고종 13)까지 부산 사람들은 왜관을 이웃집처럼 두었다. 특히 왜관 일본인과 관계를 돈독히 하면 돈을 벌 기회도 많아져 왜관을 찾는 조선인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부산 사람도 있고, 타지 사람도 있다....
-
1980년대 후반 이후 외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구직을 목적으로 입국한 외국인이 증가하였으며, 국내에서 불법 취업하는 외국인 근로자의 수도 급속히 늘어났다. 국내 노동자의 임금 상승과 중소기업의 인력 부족 현상이 겹치면서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외국인 노동자의 수요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해외 노동력의 수입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1990년대에 들...
-
현재는 일본과 중국 등 외국 관광객과 타지 여행객 및 부산 사람들의 놀이공원과 여가 활용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용두산 공원은 여느 공원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용의 머리를 닮아 용두산이라 불렸던 이곳은 1678년(숙종 4) 왜관이 설치되어 번성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일본 전관 거류지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신사가 있었으며 8·15 광복을 맞으면서 신사가 헐리고...
-
우암동(牛岩洞)은 부산광역시 남구의 서쪽에 있으며, 동쪽은 대연동, 서쪽은 동구 범일동, 남쪽은 감만동, 북쪽은 문현동·대연동과 접해 있다. 예로부터 천연의 포구로 배가 정박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이 포구 안의 언덕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소와 같다고 하여 우암포(牛岩浦)라고 하였다. 이후 1930년대 적기만 매축 공사(赤崎灣埋築工事)[제7 부두 일대]로 이...
-
유배 생활, 곧 귀양살이라고 하면 어떤 상황을 떠올리게 될까? 우리는 조선 시대에 관료가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건에 얽혀서 귀양 가는 모습을 텔레비전 사극을 통해 자주 접한다. 이때 귀양 가는 사람은 한결같이 피 묻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오랏줄에 묶인 채 초췌한 모습으로 의금부 관원들의 엄중한 감시에 뭇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나무 창살로 만들어진 수레에 실려 가는 모습으로 그려진...
-
대천 마을은 양달, 음달, 용동이라는 3개 집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3년 7월 1일부터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 2동으로 되면서 사라진 옛 명칭이다. ‘애기소의 전설’을 지닌 대천(大川)이라는 커다란 내가 마을 한복판을 흐르고, 뒤쪽으로는 금정산 줄기의 화산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가에는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는...
-
작은 섬마을이었다. 일주 도로도 없고, 뭍을 오가는 연락선만이 유일한 세상과의 연결고리였던 섬에서도 마을은 북쪽 한 귀퉁이에 동그랗게 웅크려 있었다. 마을이 생긴 건 아주 먼 옛날, 그 내력만큼 크고 오래된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두 그루는 팽나무, 나머지 한 그루는 느티나무. 섬이 인근 대도시에 편입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주민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내심 좋았다. 우리도...
-
“옛날의 사하(沙下) 하면, 뭐 부산의 오지(奧地)였죠. 옛날에는 시내에 나가는 부산 사람에게 신평(新平)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은 잘 모를 만큼 낯설었고요. 신평, 장림(長林), 다대포(多大浦), 하단(下端)이 전부 그랬습니다. 대부분이 모래무지 또는 갈대밭이었으니까 기술적으로 소득원이라고 해봐야 어업이나 농업이 다였고요.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인구도 적...
-
시각이 끝난 변두리/ 헤어날 수 없는 색깔의 틈 속에서/ 솟구치는 빛/ 아무것도 나를 속이는 것은 없다/ 언제나 정해진 그 위치에서/ 나의 존재는/ 시나브로 화폭 위에 떨어진다. - 박병제, 1998년 개인전 팸플릿에 쓴 자작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갈매기가 힘차게 날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세련된 건물이 들어서 있는 자갈치 시장. 중구 남포동과 서구 충무동에 걸쳐 있는 부산...
-
불화(佛畵)는 불교의 종교적 이념을 표현한 그림으로 그 제작 형태에 따라 거는 그림인 탱화(幀畵)와 주로 종이에 그리는 경화(經畵), 그리고 벽에 그리는 벽화(壁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불화 제작을 담당하는 장인을 금어(金魚)·화승(畵僧)·화사(畵師)·화원(畵員)이라 부르기도 한다. 불화를 그리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왼손을 괴고 엎드려 작업해야 하기...
-
나라에 바쳤으매 몸을 어찌 아끼랴, 멀리 떠나매 어버이의 그리움이 절로 깊구나. 그대 한강 위의 눈물로써, 나의 떠날 때 마음을 알리라. 돌아가는 구름을 바람이 다함없고, 촌초(寸草)의 읊조림을 견딜 수 없구나. 임금의 은혜가 하늘처럼 크시니, 효도를 옮겨 충성을 삼아 조그마한 정성을 힘쓰련다. -남용익, 『부상록(扶桑錄)』 중 통신사(通信使)는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과...
-
사람들은 좋은 날씨가 좋은 기운을 부른다고 믿는다. 맑은 하늘이나 순풍은 모두 하늘에서 보여 주는 좋은 징조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흐린 날보다는 맑은 날에 장을 담고, 결혼을 하고, 또 자녀를 출산하기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기가 중요한 곳이 부산에도 한 군데 있다. 그날 잡힌 생선을 그날 구워 내는 식당을 만날 수 있는 매력. 갈치구이나 꼼장어구이를 주문하면 튀긴 생선이...
-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새벽 4시 무렵,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691-3번지에 있는 부산공동어시장 하성상회 96번 중도매인 김영수[남, 55세] 씨는 새벽의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일터로 출발한다. 경매를 시작하는 시간은 새벽 6시이다. 그러나 그 시간에 딱 맞춰 나올 수는 없다. 미리 나와서 밤새 배에서 내린 생선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잘 봐둬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경매...
-
고향 마을 언덕에 한옥을 짓고 있는 A씨를 만난 것은 7월로 넘어가는 햇살이 제법 덥게 느껴지던 때였다. 신도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울을 오르내리며 배운 기술로 혼자서 한옥을 짓고 있는 A씨에게 고향 정관은 어떤 곳이었을까? “정관요? 정말 말 그대로 꽃 피는 산골이었어요. 울긋불긋 꽃 대궐, 그 말이 딱 맞았어요. 그때는 들판에, 산에 꽃이 정말 많았습니다. 진달래,...
-
100년 전만 해도 변방의 어촌 마을 부산이 이 정도 덩치를 불린 것은 개항, 전쟁, 산업화 물결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이주민의 역사가 부산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새삼 궁금해지는 질문 하나, 부산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을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출발은 부산의 대표적 신도시 해운대구 좌동과 우동의 구석기 유적에서 시작...
-
조선방직주식회사[이하 조방]는 1917년 11월 범일동 700번지에 창립되어, 1919년 완공되었으며, 1968년 4월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시로 넘어가더니 결국 5월 1일에 이르러 철거되었다. 이로써 부산의 대표적 ‘근대 공장’ 조방은 ‘조방 앞’이라는 지명만 남겨 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면방직 공장인 조방은 공칭 자본금 500...
-
‘토박이’란 대개 같은 지역에서 성인으로 3대가 연속해서 산 사람을 이르는 명칭이다. 중구는 2011년 6월 전국 최초로 「부산 중구 토박이 선정 및 예우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여 1945년 이전부터 중구에 살고 있는 주민[세대] 또는 이 지역에서 3대 이상 계속해서 거주하고 있는 주민[세대]을 중구 토박이로 명명하였다. 이들 토박이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근대사...
-
“책들의 집-당신의 삶을 건강하게 지켜주고, 아름답게 빛내주는, 책들이 살고 있는 집입니다.” “책들의 숲-작은 새 한 마리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울창한 숲과 같이, 우리의 생각을 소중하게 품어주는 책들의 숲입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동보서적 후문 입구에 붙어 있던 문구이다. 동보서적 후문에서 부전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거리 일대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동보서적에서...
-
삼일 극장[1944~2006년], 보림 극장[1955~2007년], 삼성 극장[1959~2011년]. 이들 극장은 동구 범일동에 위치한 이른바 ‘극장 트리오’, 한때 부산에서 잘나가던 극장들이었다. 이제 이 극장들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극장이 되었다. 이들 극장은 60년 가까운 세월을 영화의 바다, 부산을 지켜 왔다. 부산에서 학창...
-
조선 후기 부산에는 일본인[엄격히 말하자면 모두 대마도인]이 거주하는 왜관(倭館)이 존재하였다. 조선은 외교와 무역을 위하여 대마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에게 거주지를 마련하여 주었고, 그곳은 작은 일본인 마을이 되었다. 조선 후기 왜관에는 500명이 넘는 일본인이 거주하였다. 1678년(숙종 4) 4월 두모포 왜관에서 초량 왜관으로 이사를 갈 때 총 489명[454명이라고 쓴...
-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겨울 초입. 아직 몸과 마음이 다가오는 겨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따뜻한 무언가를 찾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한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 꽁꽁 언 몸을 뜨거운 온천물로 적실 때 그 짜릿하면서도 노곤한 기분에 우리들은 절로 콧노래가 나오며 살아 있는 보람을 느낀다. 일상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한 번에...
-
우리나라 최고의 피서지 해운대 해수욕장은 동백섬 입구 송림 공원에서 미포 앞까지 유연한 반달형 해안선을 가진 천혜의 관광지다. 여름철이면 전국에서 1,000여만 명의 피서객들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며, 주변 경관과 휴양 시설이 조화를 이루어 사시사철 바닷가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운대 백사장의 모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 다듬어진...
-
조선 시대 변방의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부산은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도시다. 개항 이후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은 전관 거류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도시를 만들어 나갔다. 도로망을 계획하고 관공서를 배치했으며 병원과 상점을 열었다. 해안을 매축하고 전차를 운행하여 시가지를 확장하여 나갔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부산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인도 이주해 왔다. 혹은 장사에 나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