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룻배도 사공도 없지만, 추억은 남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27
한자 -沙工-追憶-
영어의미역 Memory still remains, though without a ferryboat or a boatman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병욱

[경로당, 그리고 나루터]

칠월 하고도 중순, 한여름 오후 2시 경로당의 풍경은 차라리 적막함이다. 그나마 쉴 새 없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텔레비전 속 궁중 사극이 아니었다면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데워 밀어 올리기에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죽림 마을 경로당 문을 조심스레 여니 노인 세 분이 각기 방향을 달리하고 옅은 잠을 청하고 계신다. 여름날 청춘의 생기보다 여기, 경로당에서의 나른한 오후의 휴식이 어쩌면 오늘 찾아 나선 사라진 나루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언뜻 스친다. 인기척을 느끼고 어르신 한 분이 자리를 고쳐 앉으신다. 서소곤[76] 옹, 오늘 내게 옛 나루터의 전설로 인도해 주실 분이다.

“여서 나 가지고 여서 큰 사람은 몇 없다. 내가 2~3등 간다.”

더 연세가 있어 뵈는 곁에 계신 할아버지도 왠지 수긍하는 분위기. 알고 보니 더 위 연배이시지만, 이 동네 출신이 아니라 하신다. 그럼에도 무언가 첨언을 하고 바로잡아 주기도 하시는 것을 봤을 때, 두 분은 같은 시기에 함께 이 마을에서 자랐음이 분명한데, 나름 ‘정통’을 따지는 것인지 나의 요청에 자꾸만 손사래를 치신다.

여기 죽림 마을은 학창 시절 반드시 거쳐야 하였던 통학 길로 익숙한 동네다. 그래도 여태껏 버스 차창으로 낙동강 경치와 가을날 물안개에만 감탄하였지 이곳이 꽤 유명한 나루터였는지는 몰랐다. 죽림에서 태어나 죽림에서 자란 ‘정통’의 토박이만이 안내할 수 있는 것이니,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 나루터의 사연을 알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나룻배도 뱃사공도 없지만, 쉼 없는 낙동강처럼 누군가에게는 추억으로 오롯이 남아 있을 터. 이 글은 바로 그 토박이의 추억에 관한 헌사요, 나와 같이 스쳐가는 이방인에 대한 작은 안내서다.

[죽림 마을과 해창 나루]

1989년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편입된 가락동[행정동] 내에는 봉림동·식만동·죽동동·죽림동 등 4개의 법정동과 17개의 자연 마을이 있다. 그중 죽림동에는 고정·용등·죽림 마을 등 3개의 자연 마을이 속한다. 죽림동가락동의 중심이며, 그중 핵심은 역시 17개 자연 마을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죽림 마을이다.

죽림은 오봉산을 등지고 서낙동강과 접해 있다. 옛날 서낙동강 일대가 점점이 섬이었을 때, 대밭이 무성하여 오봉산을 ‘죽도(竹島)’라고 한 데서 그 이름이 연유한다. 조선 전기까지 오봉산 일대는 전답도 민가도 없는 무인도였으나, 조선 후기 전선 및 군기를 만드는 대변청(待變廳)과 세곡을 수납하는 해창(海倉)이 설치되면서 군사·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이어서 해창과 불암 조창을 연결하는 산태방(山汰防) 둑을 축조함으로써 일대의 저습지 갈대밭이 농토로 바뀌며 번영의 기틀이 닦였다. 정미업이 성행하고, 객주와 여각이 즐비하였다. 이렇게 오봉산 자락의 죽림은 수로와 육로 교통에서 김해의 관문이자, 인근 지역 경제의 중추적 구실을 맡았다. 물산이 모이는 곳에 문화도 꽃피어 오일장마다 연희되던 「가락 오광대」 놀이는 이 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정취 가운데 하나였다.

오랜 역사의 무대에 자리한 죽림 해창 나루는 사투리로 ‘해창 나릿가’, 혹은 지명을 붙여 ‘죽림 나루’라고도 불렸다. 나룻배는 반대편 강서구 강동동 덕포 마을을 오갔다. 과거 강서구 대저동강동동까지 모두 김해군이던 시절, 해창 나루를 비롯하여 강서구 대저 1동 출두리북구 구포동을 연결하던 출두 나루[대저 나루], 김해시 불암동강서구 강동동 대사 1구를 연결하던 대사 나루[선암 나루] 등 동서 낙동강을 통틀어 3개의 큰 나루가 있었다. 이들 중 출두 나루와 대사 나루는 1933년 낙동 장교[구포 다리]와 1935년 김해교가 각각 가설되면서 이미 일제 강점기에 기능을 잃은 반면, 해창 나루는 광복 후까지 존속하였다.

“해방되고 가락에는 여기 해창 나루 하고, 해포도에서 제도리 중곡 가는 거[계목 나루], 또 용등에서 상덕 가는 게 있었지. 해방되고 얼마 안 되어서 용등 나룻배가 제일 먼저 없어졌지, 타는 사람이 없어서. 녹산 조만포에도 나룻배가 있어서 녹산 갔다가 진해로 갈라카믄 여기 사람들은 전부 그리로 건넜는데, 그건 좀 강이 좁고. 제도 가는 게 강이 제일 너른데, 사람이 많이 안 살아서 적게 댕겼지. 사람은 여기가 제일 많이 댕겼어.”

아직 다리가 없어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편이던 시절, 서낙동강 가에 크고 작은 나루가 빼곡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해창 나루는 단연 번성한 곳이었다. 1973년 강동교가 가설되어 그 기능을 잃기 전까지는.

“요 다리를 놓으면서 없어졌는데, 처음에는 2차선이었거든. 옛날 공화당 시절에 김택수씨가 국회 의원이 되면서 다리를 놨는데, 그때만 해도 기술이 없어서 다리가 실하지를 못했다고. 뒤에 부산 편입되고 차가 계속 많아지고 하니까, 4차선으로 새로 했지.”

[한때는 광선이 드나들던 항구]

“70년 전만 해도 여기는 항구가 가당찮게 컸어. 낙동 여관, 강남 여관이라 카는 여관도 두 개나 있었는데……. 크고 좋은 집들은 전부 일본놈들 차지라. 지금은 다 뜯기고 없지만.”

조선 후기 서낙동강 해륙 교통의 요충지 해창 나루는 1934년 녹산 수문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바다와의 뱃길이 막혀 크게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인들의 기억 속 일제 강점기 말 해창 나루는 여전히 큰 항구였고, 일본인들이 활개 치던 제법 시끌벅적한 소읍이었다. 곡창 김해 평야의 농산물은 이곳 선창에서 광선(廣船)에 실어 부산으로 가져갔는데, 돛배를 사람들이 고딧줄을 당겨서 이동시켰다. ‘여기엿차 어기야’ 앞소리와 뒷소리가 어우러지는 고딧줄꾼의 소리로 고된 노동을 달래가면서.

“일본놈들 말 타고 큰 칼 차고 댕기고 할 때는 우리가 어렸는데, 여기가 선창이었거든. 큰 배들이 여기 와 가지고 김해 평야 농사지은 거 전부 실어서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지금 농협 앞이 배 대던 곳인데, 도로 만든다고 옛날 선창에 돌 쌓아 놓고 했던 걸 전부 없애 버렸어. 큰 배를 광선배라 캤지? 돛을 단 큰 배를 몇 명이 메고 땡기고 해가지고 댕깄다고.”

광복이 되고 몇 년 뒤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이곳은 후방이었지만 꽤나 어수선하였다. 전선이 낙동강에 고착된 다급한 시기인데다, 피난민과 민병대가 몰려들면서 원주민들의 삶도 흔들어 놓았다. 인근에서는 제법 큰 나루였기에 전황에 대한 갖가지 소문들이 횡행하였다.

“한참 전쟁 나고 했을 때, 보리 볶고 찹쌀 볶아서 미숫가리[미숫가루] 만들어서 피난 갈끼라고 삼베 쪼마이[주머니]에 넣어서 차고 집집마다 준비는 다했지. 그런데 가기는 어데로 가? 여서 더 갈 데가 어데 있노. 넘들 가믄 따라 갈라 캤지.”

죽림에는 창녕 사람들이 피난을 많이 왔다. 그들 역시 일정한 목적과 연고를 가지고 여기까지 몰려온 것은 아니고, 사람들을 따라 흘러오다 보니 오게 되었다 하였다. 이들을 보고 있자니 나루터 사람들도 불안하였고, 여차하면 따라나설 요량으로 비상식량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선이 북상하면서 피난 왔던 창녕 사람들도 한 달 정도 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핫바지 군인’이라 불린 민병대의 뒤치다꺼리도 주민들의 몫이었다. 핫바지 군인들은 하루 저녁만 재워 주면 다음 날 아침 날 새면 가 버렸다. 그러고는 며칠 뒤 또 다른 군인들이 왔다. 이들을 치러 내는 것도 농사지어서 밥이라도 한 끼 해 먹일 정도는 되어야지, 그마저도 형편이 어려우면 재워 주지도 못하였다.

“한참 밀려가 내려오고 할 때,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가 여기서 사무실을 채리 놓고 있었거든. 저기 향나무집이라고, 인자 하나 남은 큰 일본집에. 저녁에는 그 근방에 얼른거리지도 못했어. 군인들이 경호한다고. 며칠 있지는 않았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경남 지구 계엄 민사 부장 김종원이 전쟁 초기 한때 주둔하였다니, 여기 낙동강변의 나루터 마을도 전쟁 시국을 정녕 실감하였을 터이다. 이런 소읍에 유력 인사가 머물 곳은 과거 일인 부호들의 집, 적산 가옥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루터로 번성하였던 마을]

1950년대 이후 해창 나루에는 더 이상 광선이 드나들지 않았고, 고딧줄꾼의 고딧줄 당기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낙동강 맞은편 덕포를 오가는 나룻배로 비록 쇠락하였으나 영화롭던 과거의 명성을 이어갔다.

“나루터는 다릿발[강동교] 밑인데, 옛날 나루터는 지금보다 한 10m 이상 더 [마을 쪽으로] 들어와 있었지. 옛날에는 더 안쪽인데, 새마을 사업하면서 동네에서 찌꺼기 같은 걸 자꾸 갖다 붓고 매립을 해서 그렇지, 옛날에는 지금 다리 밑 주차장 근처가 전부 강이라.”

맞은편 강동동 덕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돌을 넣어 메워서 강폭이 많이 좁아졌고, 제방을 쌓으면서 나루터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양측 모두 강이 현재의 마을 쪽으로 더 많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죽림은 지금의 강동교 밑에서 북쪽으로 10m 정도 올라간 지점이 나루터였고, 덕포 쪽은 ‘낙동강 오리알’ 식당이 그 위치였다.

“옛날에는 울만·평강리 안으로는 전부 가락면에 속했거든. 거기 사람들이 민원이 있으면 전부 여기 면사무소에 와야 했다고. 20리[약 7.85㎞] 밖의 이장들까지 다 와서 회의하면 여기서 점심 먹었지. 얼라들[아기들] 호적에 올리던가, 뭐 이런 거 전부 그때는 직접 안 오고 이장한테 부탁을 해 가지고 점심값만 주면 면사무소 오는 김에 대신해 주고 그랬거든. 그때만 해도 인구도 많고 진짜 살기가 좋았지.”

1978년 현재의 강서구 강동동이 부산시에 편입되기 이전 평강천 서쪽은 모두 가락면의 영역이었다. 즉, 현재의 강서구 가락동강동동이 과거에는 모두 가락면이었다. 면사무소는 물론, 파출소, 중학교 등 행정 기관과 학교, 상가 등이 밀집한 죽림 마을은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일단은 면사무소에 볼일 보러 오는 강동 사람들이 주로 나룻배를 이용하였다.

당시는 아직 문맹률이 높았고, 심하게는 몇 번씩 나룻배를 갈아타야 올 수 있던 면사무소였기에 이장에게 민원을 대행시키다 보면 부탁받은 아이 이름을 잊어 버려서 엉뚱한 이름으로 출생신고 되는 웃지 못 할 사태도 가끔 있었다. 홍진 때문에 영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 통상 세 살은 되어야 출생신고를 하였는데, 큰 놈과 작은 놈을 한꺼번에 호적에 얹다 보면 순서가 뒤바뀌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제는 정겹기까지 한 나룻배 타고 면사무소 가던 시절의 촌극이다.

“점방에 물건을 살라고 해도 나와야 되고, 교통이 나빠서 대저로는 못 가니까. 또 중학교가 있어서 학생들이 여기 많이 와. 강 건너는 전부 이리 다 왔거든. 그라고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날씨가 추버서 사람이 없어도 강이 얼까봐 배가 한 번씩 왔다 갔다 해야 되거든. 그래야 아침에 배가 댕기지.”

통학하는 학생들은 물론, 강동 사람들은 오일장에 물건을 사러 가거나 점방에서 일용품을 구입하더라도 꼭 나룻배를 타고 죽림까지 나와야 하였다. 겨울철에도 강이 꽁꽁 얼어서 걸어 건널 정도가 아니면 나룻배가 다녔기에, 계절에 상관없이 이용객이 많았다.

“마이[많이] 실을 때는 한 배에 서른 명씩 실었어. 아침에 일곱·여덟 번까지는 배가 꽉 찼지. 죽림으로 나가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들도 덕도초등학교 올라카믄 배 타고 와야 되니까.”

죽림 소재 가락중학교로 등교하는 학생들, 강동동 소재 덕도초등학교로 출근하는 교사들로 아침 시간의 나룻배는 언제나 만선이었다. 적정한 승선 인원은 서른 명 한참 미만이었나 보다. 서른 명이 무리였던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보면.

“나룻배가 하루 몇 번 건너야 된다는 건 없고, 사람만 차면 ‘바쁘요 빨리 오소’ 그라믄 또 건너가고. 하여튼 사람만 있으면 건너가고 사람 없으면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쉬고.”

승객이 많은 바쁜 시간 외에는 다급한 승객이 주막에 죽치고 앉은 사공에게 재촉해야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답만 뱃놈이다’는 이 지역 속담은 ‘간다’는 말만 하고 나타나지 않는 사공을 빗댄 것으로, 대답만 걱실걱실하고 동작은 느려터진 답답한 이에게 핀잔을 줄 때 쓰는 표현이다. 아예 사공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을 때는 급한 대로 승객이 노를 저어야 하였다. 하긴, 통학 시간 별난 놈들은 재미삼아 번갈아 가며 노를 젓고, 사공은 쉬면서 나룻배를 타고 가는 것도 그리 진풍경은 아니었다.

“여기 사람은요, 처이[처녀]고 머스마고 배 못 젓는 아가 없었소. 사공이 건네주는데, 사공이 없으믄 딸래미들도 노 저어가 건너가고…….”

덕포 마을과 이웃한 상덕 마을에서도 해창 나루 나룻배를 많이 이용하였는데, 신양자[70] 할머니의 말씀에 노인정 할머니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떡이시며 공감을 표한다. 사공이 없는 경우에야 직접 노를 저으면 되지만, 더욱 난감한 상황은 사공 몰래 나룻배가 강 반대편으로 가 있을 때이다.

“사공이 배를 여기[덕포] 대놨는데, 밤에 머스마들이 놀러갔다가 저기[죽림] 건너가서 대 놓아 뿐는기라. 아침에 배를 타고 이리로 와야 [죽림으로] 건너갈 낀데, 배가 없어가 ○○이는 옷을 할딱 벗고 짐을 머리에 이고 헤엄을 쳐가지고 건너갔는기라. 그 춥은데……. 하여튼 내가 별의별 놈 다 봤다.”

배 타고 건너오라고 강 건너를 향해 고함을 치고 욕을 하던 모습도 흔한 나루터 마을의 아침 풍경이었다.

[나룻배 입찰과 사공들]

해창 나루 나룻배는 입찰을 통해 사공을 정하였다. 이를 마을 사람들은 ‘나룻배 입찰 본다’고 하였다.

“면사무소에서 나룻배 입찰을 본다고. 그때 돈으로 1년에 몇 십만 원 아니었지? 입찰 가격이. 나룻배 보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경제적으로] 괜찮았어. 1년에 입찰을 한 번씩 보지만 2~3년씩 하는 사람도 있고, 더 오래 하는 사람도 있고. 나룻배 입찰 봐서 바뀐 사람만 해도 내가 아는 한 5~6명 넘게 됐어. 나룻배 하다가 사공이 죽은 경우도 있고, 몸이 안 좋으면 도중에 다른 사람이 하기도 하고, 1년 하다가 치우는 사람도 있고, 보통은 2~3년마다 한 번씩 바뀌었지. 오래 한 사람은 3~4년 정도도 했다.”

구체적인 입찰 방식은 서소곤 옹도 알지 못한다. 그때는 어렸고, 나룻배 입찰이란 어른들의 영역이었으니까. 사공이 몇 년마다 한 번씩 바뀌었다는 것은 응찰자가 그만큼 있었다는 것이고, 나름 수입이 쏠쏠하였다는 의미이다.

“입찰도 배에 소질 있는 사람이 하지 아무나 못하거든. 고기도 잡고 배도 좀 볼 줄 아는 사람이. 내가 알기는 2명, 아니면 3명이 내내 했지. 해 본 사람이 입찰을 보지 딴사람은 안 보거든.”

뱃사공은 주로 죽림 사람이 하였다. 입찰을 하더라도 과거 뱃사공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맡아 로테이션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많았다.

“염석배[재], 승철이 즈그 아버지 김이문이, 정소만이, 그 아들 정인식[석]이…… 아, 육술이도 있다. 하여튼 제법 많았는데, 인자 그런 사람들 다 죽어서 이름도 모르겠다. 아들 이름이나 알랑가.”

강동의 신양자 할머니는 또 다른 이름을 들먹이신다.

이병철이 하고, 이병철이 사촌 대사리 모씨 사위, 이름은 모르겠다. 그라고 염석만이가 끝에 조금하고, 나머지는 전부 가락[죽림] 사람이 했지.”

사실상의 로테이션이라 해도 거쳐 간 뱃사공은 여러 명이었나 보다. 뱃삯이 얼마였기에 사공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그래도 꾸준하였는가? 마을 사람들은 뱃삯을 ‘선개[船價]’라고 불렀다.

“선개는 1가구에 1년에 두 번. 봄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타작하면 쌀 한 말. 오봉산에 절이 2개나 있거든. 그 절에 시주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니까 [절에서는] 조금 더 내고, 또 학생 있는 집은 좀 많이 내고, 학생 없는 집은 적게 내고.”

돈이 아닌 현물로 내다 보니, 정확한 계산이 되기는 어려웠다. 조금 더 내고 덜 내고는 저마다의 염치와 양심에 맡길 뿐이었다. 아직 자본주의 경제관념이 뿌리내리기 이전 순박하던 우리네 고향 마을 인심을 여기서 본다. 그런데 뱃삯을 죽림 사람은 내지 않고 강동 사람만 냈다.

“죽림 사람은 건너갈 일이 잘 없거든. 같이 죽림에서 나룻배를 타더라도 외지 사람은 선개를 내야 되지만, 우리 죽림 동네 사람은 안 내. 소 한 마리 실으면 사람보다 많이 줘야 되고. 아무튼 하루에 사람이 많이 건너다니니까, 선개가 몇 닢 안 되도 그걸 받으면 하루 일당은 나오거든. 그러니까 그거 보고 사람들이 서로 할라꼬 달라드는 기라. 농사짓는 거보다는 나으니까.”

[나루터에서 배 타고 녹산장까지 가고]

지금처럼 동네 골목마다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없던 시절, 간단한 생필품부터 일상의 주식과 부식까지 오일장을 가야 사고팔 수 있었다. 그 이동의 거점 역시 해창 나루였다.

“여기는 5일마다 장이 또 섰거든. 4일, 9일. 파출소 앞이 옛날 가락 장터지. 그때 되면 강 건너 사람들이 5일 동안 묵을 거 다 사 가고 그랬지. 해방되고도 내도록[내내] 있었지. 여기 다리 놓고, 한 80년대부터 없어졌는갑다. 교통이 좋으니까 김해로 많이 가고, 그때부터 없어졌다.”

해창 나루는 가락장은 물론, 김해장이나 녹산장으로도 가는 관문이었다. 강동 사람들은 해창 나루로 나와야 김해장이나 녹산장으로 갈 수 있었다.

“김해장 말고도 녹산 수문 밑에 녹산장[성산장]이 컸다고. 주로 곡식 같은 거, 쌀이나 보리 농사지은 사람들이 거기에 싣고 가서 많이 팔고, 소금 같은 거나 고기 같은 먹을 거 사 가지고 오고. 여기 들 복판에 있는 사람들은 곡식을 녹산장에 가서 다 냈거든. 그때는 구루마[소달구지]밖에 없고 길도 안 좋으니까, 전부 배로 녹산 갔지.”

김해장이 더 커도 강서구 가락동·강동동 사람들은 녹산장을 더 많이 갔다. 도로 사정이 좋아지고 버스가 생기면서부터 김해장을 다녔다. 그 전에는 읍내를 가려면 마차나 소달구지를 타야 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녹산장은 배 타고 낙동강 따라 내려가면 바로 장터 어귀에 닿았기에 이동이 훨씬 편하였다. 게다가 우시장까지 녹산장에는 웬만한 건 다 있었다.

“김해장 다음으로 녹산장이 컸지. 애나[차라리] 쌀·보리 같은 곡식은 녹산장이 김해장 배로 컸지. 주로 부산서 녹산장에 와 가지고 곡식 같은걸 다 사갔거든, 배로 싣고 가고. 그때만 해도 장날 되면 배가 40~50대, 배 댈 데가 없을 정도지. 하여튼 가락, 장유 사람은 전부 녹산장이라.”

1960년대까지의 얘기다. 당시 죽림 사람이나 강동 사람이나 녹산장에 가려면 모두 해창 나루에서 출발하는 개인 배를 배 삯을 내고 타야 하였다. 장날마다 장꾼들을 태우려고 지금의 택시처럼 배가 영업용으로 나루터에 대기하였다.

“여기서 녹산장에 가려면 쌀 한 가마니에 얼마, 사람은 얼마 선개를 내고 갔다. 나룻배는 면사무소에서 주관하고, 녹산장에 가는 배는 선주가 선개를 얼마씩 받고 실어 주는 거지. 염석배 큰 배를 타고 많이 갔다. 그거는 발동기고, 김이문이 배는 노 젓는 거고. 장날마다 사람을 모아 가지고 3~4대씩 내려갔다고.”

녹산장 근처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다소 과장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장날 배 타고 오는 장꾼들의 흰옷 때문에 낙동강이 하얗다 하였다. 그러던 녹산장도 1980년대를 지나면서 기울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 중반 이후는 명맥만 유지하던 옷 가게, 생선 가게 장사치들도 더 이상 전(廛)을 펴지 않았다. 가락 사람들도, 장유 사람들도 녹산장을 찾지 않았다. 설·추석이나 되어야 장에 가서 옷 한 벌 얻어 입던 세대의 막내인 내 눈으로 지켜본 녹산장의 성쇠다.

[나룻배로 건너서 학교 댕긴다꼬 얼매나 고생이 많았더노]

낙동강을 나룻배로 건너서 학교 다닌 덕도·제도 아들아[애들아]! 그 멀리 20리 길을 걷고 배를 타고 또 걸어서 학교 댕긴 녹산 아들아!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나, 또 매서운 겨울 찬바람 맞으며 3년간 느그들 학교 댕긴다꼬 그 얼매나 고생이 많았더노?”

1968년 가락중학교 19기의 졸업식 날 어느 수학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 송별사에 여기저기서 울음이 시작되더니 졸업식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고, 나중에 보니 녹산 ‘머스마’들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던 동창들의 추억담이다.

덕도면은 강서구 강동동의 옛 명칭이다. 1914년 가락면에 통합되면서 덕도면은 사라졌지만, 그 지명만은 오랫동안 남아 사용되었다. 그러다 1978년 부산에 편입되면서 다시 가락면으로부터 독립한 셈인데, 덕도면 내에서도 제도리는 가장 남쪽의 섬들이었다. 섬에서 섬을 건너 나룻배를 갈아타고서 등교한 현재의 강동동 출신 학생들이나, 역시 조만포에서 나룻배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야 하였던 이웃 녹산면 출신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앞 송별사가 어찌 감격스럽지 않았으랴. 이렇게 졸업생들은 학창 시절을 추억할 때 언제나 나룻배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아마 12월 겨울방학 직전이었겠지?

강이 꽁꽁 얼어 나룻배로 학교 갈 수 없는 상황이라서, 나루터에서 서성이면서 일부 별난 머스마들은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는 폼을 잡기도 하고.

그때 강 건너에서 어느 선생님이[멀어서 얼굴은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린다]

“야들아! 다들 집에 돌아가거라! 오늘 학교 안 와도 결석 안 한다.”

그러면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만세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죽림 친구들은 너무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했었지, 아마.

여름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2학년 여름날 폭풍우로 배를 건너지 못하고 나루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어쩐 일인지 강 건너에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호가 없었다. [요즘이면 휴대 전화로 확인하면 되는데, 그땐 방법이 없었다.]

그때 규율 부장이던 3학년 인섭이 선배가 연락이 없으니 오늘은 집에 가지 말고 무조건 학교 가야 한다며 후배들을 끌고 선암 다리를 건너 20리 길을 걸어서 거의 점심때나 되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정말 대단한 규율 부장이 아닌가?

학교에 가니 공부하고 있던 죽림 친구들이, “야! 느그들 우리 놀릴 일 있나? 이거 미친놈들 아이가?”

평소 한 번도 이런 행운을 누려 보질 못한 죽림 등지의 친구들이 분통을 터뜨렸지.

가락중학교 19기 동창 카페에 실린 한 동창생의 나룻배에 얽힌 추억담이다. 실제로 강동 출신 학생들은 한꺼번에 나룻배로 건너오니까 지각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룻배가 못 뜨면 학교에 공식적으로 못 가는 것이니, 1년에 꼭 몇 번씩은 ‘공인된 땡땡이’의 혜택을 누렸던 것은 어쩌면 고생스런 통학 길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을까?

[덕도 사람이 가락 사람 먹여 살렸다]

나루터 정취라면 주막을 빼 놓을 수 없을 터이다.

“주막이 왜 없어? 전부 점방이고, 국밥집이고 그랬지. 그때는 여관뿐 아니라, 술집도 많았고, 색시집도 많았어. 길가에 정종 데워 주는 술집, 그런 데는 다들 색시들 데리고 있었다. 부산 편입되고 나서는 영 여기가 죽었지. 돈을 저짝[강동] 사람들이 와서 쓰고 가야 되는데, 돈 쓸 사람이 없으니까 장사도 안 돼. 대저나 강동 대사리 다 가뿌고. 전부 강동 사람들 보고 장사했는데, 다리 놓고 부산 편입되고 나서는 완전히 남의 동네 됐다 아이가.”

그 시절 주막은 모두 사라졌지만, 지금도 강동교 근처에는 과거 주막이었음직한 낡은 집들이 집단 주거를 이루고 있어 한창 번성하였을 시절의 해창 나루를 짐작케 한다. 주요 소비자는 주로 강동 사람들이었는데, 하다 못 해 마을 이장들이라도 회의를 마치고 나면 돈을 쓰고 가니 가계에 보탬이 되었다. 형편이야 농촌 사람들이 다들 마찬가지지만,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경제 구조라 워낙 돈 구경하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강동 사람들이 잘살아서 그런 게 아니라, 워낙 많이 오니까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면 그게 돈이 되는 거지. 여기 민물 장어가 억수로 마이 잡혔거든. 강남 여관 같은 데서는 그거 잡아서 양념 해가 굽어 묵고, 장엇국이나 메기국도 끓이고.”

시끌벅적한 나루터에는 술꾼들의 술타령에 추문도 많았을 터. 그러나 도회지는 아니어서인지 크게 문제 될 만한 사건 사고는 없었다 한다.

“짜다라 술 묵고 싸우고 그런 거는 없었는데…… 나루터 색시 집 아가씨들한테 빠져 가지고 해운대 호텔 처음 지었을 때, 아가씨들 목걸이하고 팔찌 해 주고 동네 농자금 빌린 거 빵꾸 낸 이장들 한두 명 된다. 그때 200만 원이면, 지금으로 치면 한 2억 돈 된다. 정부에서 농자금 빌렸으믄 비료도 사고 하구로 농민들 줘야 되는데, 아가씨들하고 어불리가 하토[화투] 치고 노름하고……. 그 사람들 은자 다 죽었지. 그 외에는 흥청망청 문제가 될 만한 거는 없었어.”

그러나 돈을 버는 죽림 사람은 관대해도 돈을 쓰는 강동 사람은 죽림의 주막이 미울 수밖에 없다. 특히,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남정네들 달래 가면서 농사짓고 자식 키워야 하였던 아낙들은 강 건너 나루터를 언제나 눈을 흘기고 쳐다보았다. 덕포 마을의 나루터에서 4년간 장사를 하였던 신양자 할머니가 성토하신다.

“농사지어 가꼬 가락 건너가가 술 받아 묵고, 여기 덕도 사람이 가락 사람 먹여 살렸다니까. 죽림에는 장사집이 많았지만, 강동에는 별로 없었어. 우리 집 말고 한 집이 더 있었나? 가락에서 술 먹고 와서 우리 집에서 술주정을 해대서 얼마나 힘들었는가 모른다.”

마을의 누구는 어느 해에 봉채 짊어져다 주고 나룻배로 건너오는데 사돈댁에서 술을 어찌나 많이 먹고 왔는지 나룻배 내리자마자 수로에 처박혀 마을 사람들이 구출하느라 출동한 일도 있었다. 신양자 할머니가 한마디로 총괄 평가를 하신다.

“그만큼 해창 나릿가가 밸난기라.”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기도]

죽림 마을이 곧 해창 나루일 정도로 마을 사람들에게서 나룻배가 차지하는 위상은 높았다. 나룻배로 벌어먹고 살았던 마을이었던 만큼 이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없었을까?

“사공 하나랑 여자 하나, 내가 알기로는 둘이 빠져 죽었다. 여자하고 사공하고 강 복판 즈음 가다가 친하니까 뱃머리에 앉아가 둘이 이야기를 한 모양이라. 그라다가 장난한다고 밀었던가, 한 사람이 빠지면서 다른 한 사람을 잡아가지고 둘이 같이 빠져 죽었다. 그 뒤로는 사고가 한 번도 없었지.”

의외로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은 파도가 높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크게 무리해서 운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는 학생들의 통학용이라는 나룻배의 성격도 한 몫 하였다. 그래도 위험에는 항시 노출되어 있었다. 죽림~덕포 구간이 강폭이 좁아 날씨가 좋아도 파도가 굉장히 세었다. 혹시 나룻배 한쪽에 물이 새기라도 하면 다른 한쪽에서 물을 퍼 가면서 건너가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버드나무 껍질 같은 것을 구겨 넣어서 물이 새지 않도록 임시 처방한 채 운항을 계속하였다. 배 한 대 건조하려면 당시 형편으로는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워낙 주먹구구식의 안전 불감증 시절이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이제 돌아보니 아찔하다. 어느 졸업생이 동창 카페에 남긴 회고처럼, 오순도순 한 이웃사촌들이라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룻배 타고 강을 건너던 시절,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인데 생각해 보면 아찔한 광경이다. 대형 사고가 나도 몇 번 났을 위험천만한 도선장, 모두 다 착한 사람들이라 하늘이 돌봤지.

[나루터 할배의 한평생]

서소곤 옹은 죽림 마을에서 태어나 해창 나루에서 총각 때부터 잡화 장사를 시작해서 그동안 식당 등 여러 장사를 하였다. 올해가 3년째 쉬는 거라 하니, 50년 동안 장사를 해 온 이곳 해창 나루 역사의 산증인이다. 본래 집은 나루터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 때문에 수용이 되면서 죽림 마을 안으로 이사하여 요즘은 농사짓고 편하게 살고 계신다 한다.

“내가 가락국민학교 나와 가지고 부산 남항동 철물점에 들어가서 심부름해 주고 그래 있다가, 사라호 태풍이 오고 난 뒤 돌아왔거든. 와 보니 강가에 부모가 집을 사 놨더라고. 그때만 해도 ‘다리모시’ 같은 거 마이 했거든. 요새 같으면 계(契). 다리모시 오야[계주] 하는 사람이 아버지 동서뻘 되는데, 우짜다가 다리모시가 부도가 나 가지고, 우리가 그 집을 [저당] 잡아 가지고 그 바람에 점방집이 되어서 내가 장사를 시작했지.”

비록 구멍가게지만 장사는 잘 되었다. 한창 나룻배 다니던 때는 밥 먹는데 손님이 물건 사러 오면 귀찮아서 일어나기 싫을 정도였다. 가게에는 만물 장사처럼 온갖 것이 다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점방이 몇 개 없었다고. 한창 때 2개나 3개나 있었나 모르겠다. 술집이나 국밥집은 많아도 점방은 별로 없었어. 당시 전부 초가집이라 문이 안 되어 있어서 점방 차릴 형편이 아니었거든. 우리 집은 일본놈 집이라 전부 현관에 유리문이 다 되어가 있으니까 가게를 했지.”

물건은 부산 국제 시장에 가서 해 왔는데, 이를 위해서는 새벽부터 죽림에서 나서야 하였다. 서소곤 옹은 죽림에서 딸기를 제일 먼저 재배하였는데, 이를 수확하여 목재 생선 상자에 가득 담으면, 하루에 다섯 상자나 여섯 상자를 자전거에 실을 수 있었다. 그러면 우선 읍내 선암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국제 시장 근처 청과 조합에 가서 팔았다. 오후 1~2시 되면 열리는 경매에 딸기를 넘기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점방의 물건을 사 오는 식이었다. 도매상에서 직접 이렇게 물건을 사 가지고 오면 돈이 제법 남았다 한다.

“그때만 해도 농사도 마이 짓고 살기가 괜찮았는데, 한 20~30년 전부터는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논 한 도가리 팔고 두 도가리 팔고, 대학 졸업하고는 취직이 안 되서 사업한다고 자식 밑에 다 넣어 뿌고, 지금은 늙어서 부모도 고생 마이 하지.”

서소곤 옹은 나루터에서 잡화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고 그걸로 땅도 많이 사서 지금은 편하게 지낸다고 하셨지만, 주위 친구들의 안타까운 사연일까, 평범한 면소재지보다 못하게 쇠락한 나루터의 현재 모습을 보는 듯해 가슴 아프다.

“아무래도 옛날에는 누구 없이 다 고생했지. 요새는 우리 아들이라도 이런 말을 하면 곧이 안 듣고 세상이 바뀌었다 카고 우리말을 신용을 안 해. 우리들은 우쨌던가 좀 여물게 해서 돈 모아가 살라고 했지만,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일요일 되면 외식할라 카제 뭐 할라 카제…….”

딸기 한 상자 팔려고 멀리 부산 시내까지 자전거와 버스를 번갈아 가면서 매일 타고 다녔던 그 시절의 경제관념으로는 수입보다 카드 빚이 더 큰 요즘 젊은 사람들의 소비 행태가 이해가 되지 않으실 터이다. 어르신이 막내아들보다 한참 아래뻘인 나를 보고 허허 웃으신다. 어쩌랴, 낙동강이 흐르듯 시간도 흐르고 한 세상도 흘러갔다.

[동창 카페의 사진 한 장]

우리 집에 오래된 사진첩을 뒤져 보니 귀한 사진 몇 장이 있네. 추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는지. 지금처럼 사진기가 흔한 시절이 아니라서, 지금처럼 여유롭게 살던 시절이 아니라서, 빛바랜 흑백사진도 귀한 보물처럼 되었네. 1968년 여름 죽림 나루터에서 덕도 쪽을 배경으로 찍은 동창회 기념사진이다. 자세히 보니 뒤쪽에 노가 보이는 배가 당시 나룻배다. 이분들은 지금 모두 60대 초반이다.

가락중학교 21기 동창 카페에 실린 한 졸업생의 글이다. 흑백의 담박한 사진에는 당시 유행하였을 물방울무늬 원피스와 주름치마를 입고 다소곳이 나룻배에 걸터앉은 소녀들과 교모에 선글라스까지 쓴 소년들이 한껏 폼을 내며 둘러섰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도 있고, 맨 앞에 앉았어도 아예 얼굴을 가린 이도 있다. 뱃머리의 불청객 꼬마 둘도 자연스럽게 사진 한쪽을 차지하였다. 흑백사진이지만 강 건너 덕도산의 빼뺏쫑 빼뺏쫑 멧새 소리가 들릴 듯 푸르다. 전형적인 졸업 앨범 사진 같지만, 그 시절의 해창 나루 사람들처럼 참 풋풋하다고 하면, 이제 60대의 저 졸업생들께 실례일까. 사진 아래에 달린 댓글 역시 먼 나루터 여행에서 돌아오는 내게 묘한 여운을 남긴다.

“나도 저 나룻배를 타고 다녔단 사실이 감회가 새롭다. 풍랑이 심한 날에는 뱃사공 아저씨가 강기슭으로 노 저어 쭉 올라가서, 바람 타고 강을 아슬아슬하게 건너오던 기억도 나네. 봄날에는 배 난간에 앉아서 강물에 손 담그고 물장난하며 건너갔던 추억도. 하굣길에 배 기다리면서 만화방에 가서 만화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배를 놓치기가 부지기수였지. 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 그 시절 그리움이여…….”

[참고문헌]
  • 『강서구지』(강서구지편찬위원회, 1993)
  • 『부산의 자연 마을』2-강서구(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7)
  • 가락중학교 19회(http://cafe.daum.net/garak19)
  • 김해 가락중 21회 따스한 온돌방(http://cafe.daum.net/garak21)
  • 인터뷰(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주민 신양자, 70세, 여, 2013. 7. 16)
  • 인터뷰(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주민 서소곤, 76세, 남, 2013.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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