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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 나루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3769
한자 竹林-
영어의미역 Jungnim Ferry
이칭/별칭 해창 나루터,죽림 도선장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죽림 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나루터
관련문헌 『김해읍지(金海邑誌)』
폐지 시기/일시 1973년 1월 1일연표보기 - 폐지
비정 지역 죽림 나루터 소재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죽림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있던 나루터.

[명칭 유래]

죽림(竹林) 마을은 지금의 강서구 가락동 1통 지역으로 오봉산 동쪽, 서낙동강[죽림강이라고도 함] 서쪽 연안에 일찍부터 자리한 죽림의 본 마을이다. 조선 시대 때 나라의 조곡(租穀)을 보관하던 해창(海倉)이 있던 죽림은 가락의 중심지로 옛날 오봉산이 하나의 섬이었을 때 대밭이 무성하여 큰 홍수가 나면 섬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대섬[竹島]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498년 간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죽도는 둘레가 2,375보(步)로 주위에는 바닷물이 연륙(連陸)한 무인도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형성 및 변천]

죽림 나루터(竹林渡船場)서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강서구 죽림동 죽림 마을강동동의 덕도 마을을 연결하던 나루터였다.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죽림 마을이 문헌에는 조선 전기에 등장하고 17세기에 분성 배씨(盆城裵氏)가 세거하고 있으므로 조선 시대에는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 본다.

또한 죽림 마을에 1646년(인조 24) 전함(戰艦)과 군비(軍備)를 비치한 대변청(待變廳)이 설치되었고, 1649년(효종 즉위년) 김해 부사 박경지(朴擎祉)가 이 대변청에 주둔하는 수군들의 군기(軍器)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만들었으며, 1778년(정조 2) 밀양부 삼랑진에 있는 조창(漕倉)을 이곳에 옮기자는 안(案)이 나왔고, 1798년(정조 22) 통제사 윤득규(尹得逵)가 김해의 전선(戰船)과 병선(兵船) 각 1척을 조창인 해창으로 옮기자고 진언하였으나 잘되지 못하고 삼랑진 조창의 이건(移建)도 끝내 중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859년(철종 10) 김해 부사 정재용(鄭在容)이 조창을 중수(重修)하였으나, 1896년(고종 33) 7월에 폐지되었다.

해창 터는 1800년대 중엽 「가락 오광대」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당시 김해 평야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가공하는 도정 공장이 처음으로 생기고 조세로 받은 곡물을 저장하는 집하장으로 번창하자 술집 및 숙박업이 성업을 이루었고, 각 도의 한량들과 보부상들이 모이는 등 흥청거리는 장소로 변하면서 「가락 오광대」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구경꾼과 굿패와 한량들로 한때 번화한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민족혼 말살 정책으로 「가락 오광대」는 소멸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죽림 나루터가 형성되었으리라 추측한다. 1973년 1월 1일 강동교가 가설되면서 죽림 나루터는 폐지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죽림 나루터가 있던 곳은 강서구 죽림동 가락농업협동조합 옆으로 비정된다.

[관련 기록]

『김해읍지(金海邑誌)』에 관련 기록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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