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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468
한자 海倉
영어음역 Haech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광석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에 설치된 군수 물자와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

[제정 경위 및 목적]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죽림 마을에 1646년(인조 24) 전함(戰艦)과 군비(軍備)를 갖춘 대변청(待變廳)이 설치되었고, 여기에 주둔하는 수군들의 군기(軍器)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1649년(효종 즉위년) 김해 부사 박경지(朴擎祉)가 해창(海倉)을 세웠다.

[관련 기록]

『김해읍지(金海邑誌)』 창고조에 “해창은 김해부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진 군기(水陣軍器)조에는 “해창이라고 하여 이곳에 황자(黃子) 5호와 전선(戰船) 1척, 그 외의 다양한 무기를 보관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내용]

해창은 조선 후기까지 고을의 조세 현물을 수납하여 보관하였던 창고이다. 그러나 이곳은 서낙동강 물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있었고,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전선이 배치되고 지자총(地子銃)·장군전(將軍箭) 등도 구비되어 있는 수진(水陣)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수 물자도 함께 보관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김해교가 놓이기 전까지 해창 나루는 김해의 대사리에서 불암나루[선암 나루]로 연결되었다. 이곳은 김해로 들어가는 유일한 수로 교통의 어귀이었으며, 대저·구포·김해·가락을 연결하는 옛 서낙동강의 나루터 가운데 대표적인 하나로 손꼽혔다. 이곳 해창 나루에서 모인 세곡은 구포를 거슬러 창녕, 화원 및 지류인 밀양강 등의 조운로(漕運路)를 따라 물화 수송이 이루어졌다.

[변천]

1778년(정조 2) 밀양부 삼랑진에 있는 조창(漕倉)을 이곳에 옮기자는 안(案)이 나왔으며, 1798년(정조 22)에는 통제사 윤득규(尹得逵)가 김해의 전선과 병선(兵船) 각 1척을 해창으로 옮기자고 진언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삼랑진 조창의 이건(移建)도 끝내 중지되었다. 1859년(철종 10) 김해 부사 정재용(鄭在容)이 중수(重修)하였으나 1896년(고종 33) 7월에 폐지되었다.

이 해창 터는 1800년대 중엽 「가락 오광대」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당시 김해평야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가공하는 도정 공장이 처음으로 생기고, 이곳이 곡물 집하로 번창해지고 인적의 왕래가 많아지자 「가락 오광대」의 공연 장소가 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가락 오광대」 공연이 민족혼 말살 정책에 의해 폐지되었던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의의와 평가]

해창은 해로와 수로 사이에 물화 수송과 군사적 거점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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