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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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紡- |
영어의미역 | Entering Jobang is a near-impossible project |
이칭/별칭 | 부산 대표 근대 공장 조선방직 노동자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병욱 |
[매축지 마을 복술이 할머니]
조선방직주식회사[이하 조방]는 1917년 11월 범일동 700번지에 창립되어, 1919년 완공되었으며, 1968년 4월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시로 넘어가더니 결국 5월 1일에 이르러 철거되었다. 이로써 부산의 대표적 ‘근대 공장’ 조방은 ‘조방 앞’이라는 지명만 남겨 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면방직 공장인 조방은 공칭 자본금 500만 원, 공장 부지 13만 2,000㎡[4만 평, 1968년 해체 때에는 26만 4,000㎡이었음], 건물 54동, 종업원 2,000~3,200여 명에다 공장 내에 병원과 기숙사까지 갖추어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또한 조방은 1930년 1월 살인적 노동 환경에 항거하며 일제와 자본 권력에 맞선 여공들의 단식 투쟁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는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자들의 대표적 투쟁이었다.
이렇게 조방은 항상 ‘최대’, ‘최고’라는 수식어가 함께 했지만,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는 혼란기에 공장을 접수한 정권 측근의 탐욕과 독재, 무능력은 조방 50년 역사를 마감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낙하산 사장’ 강일매의 퇴진을 주장하며 시작된 1951년 12월의 ‘조방 파업’은 4개월을 이어 갔으나, 결국 이승만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어 좌절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 한국 노동 운동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 5동 ‘매축지 마을’의 우리 동네 사랑방 ‘마실’에서 만난 복술이[한국헬프에이지 산하 부산범일노인참여나눔터 부회장] 할머니는 1951년부터 1964년까지 ‘조방의 격동기’를 함께한 여성 노동자 출신이다. 필자가 할머니를 찾은 것은 부산의 대표적인 근대 공장 조방이 시골 출신의 여성 노동자를 얼마나 ‘근대인’으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하여 듣기 위해서다. 말단 여공이었던 할머니가 들려주는 조방 이야기는 ‘낙하산 사장 강일매’도, ‘이승만’도, ‘조방 사건’도, ‘조방 파업’도 아닌 조방이라는 거대한 근대 공장과 노동자의 소소한 일상이었다. 말단 여공의 눈으로 ‘격동의 조방’을 조망하다보니 간혹 시각이 좁은 부분도 있지만, 이 역시 당대 노동자들의 눈높이라 생각하고 충실히 옮겨 썼다.
할머니가 사시는 매축지 마을은 흔히 부산의 마지막 남은 매축지라 불린다. 일제 강점기 해안 매립으로 탄생한 이곳은 해방 후 귀환 동포와 6·25 전쟁 피난민, 산업화 시절 이향민들의 터전이었다. 현재의 매축지 마을에서는 힘겨운 삶을 이어 온 노인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황혼을 즐기고 있다. 복술이 할머니는 조방과 지척인 이곳에 살았던 조방 노동자들을 추억하면서 인생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조방 다닌 사람이 지금도 몇이 있을 끼구만. 옛날에는 많이 살았지. 조방이나 국제고무 공장 다니는 아가씨들이 여기 마이[많이] 살았지. 처이[처녀] 때 다들 그리 했으니까 결혼하고 딴 데로 가고, 결혼해도 여기 사는 사람도 있고, 연세가 많다 보니까 돌아가시고……, 남아 있는 사람이 인자 얼마 없지.”
[열여섯 살에 ‘광목 공장’이라고 들어갔던 조방]
복술이 할머니는 1936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고향 김천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탓에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고, 읽고 쓰기조차 힘들어 시골 초등학교를 겨우겨우 졸업했다. 얼마 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갔다가 다시 김천으로 가보니 집이 다 타고 없어, 당분간 남의 집을 빌려 살았다. 할머니가 조방과 인연을 맺은 것은 부산의 작은집 사촌 언니를 통해서였다. 말로만 듣던 광목 공장을 꼭 가고 싶어서 작은 아버지 부부를 조르고 또 졸랐다.
“우리 작은집이 여기 부산에 있었는기라. 우리 사촌 언니가 조방에 다니고 했었거든. 시골에서는 조방인지 뭔지 모르자나? 광목을 짜니까 그냥 쉬운 말로 광목 공장이라 했거든. 광목 공장에 좀 넣어 주라, 좀 넣어 주라 카믄서 작은아버지, 작은엄마가 오셨길래 붙어가지고 부탁을 했어. 그래 가지고 나를 데리고 와가꼬 있다가 조방에 넣었는기라.”
할머니가 조방에 입사한 것은 16살 때였다. 6·25 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갔다가 다시 돌아온 후라고 하였으니, 1951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당시에는 묵고 살기가 어려워 놓으니까 거기 드갈라 카믄 하늘의 별따기라. 어디 부탁할라 카믄 공짜는 안 되고 돈을 얼마라도 줘야 들어가지. 아는 사람 중에 높은 사람이라도 있으믄, 밑에 사람은 안 되고 ……, 돈 좀 줘 갖고 기다리고 있으라 카믄 기다리고 있다가, 언제부터 일하러 오시오 캐가 그래가꼬 가는기라.”
할머니도 물론 ‘하늘의 별’을 따기 위해 뒷돈을 썼을 것이다. 다만, 어디다 선을 댔는지는 알지 못한다.
[졸병부터 최고참이 되기까지]
“나는 실 빼는데 있었거든. 10년 넘게 있었지. 16살에 들어와 가지고 29살까지 있었으니 14년 다녔지. 거기도 계급이 있거든. 졸병으로 들어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거, 또 조금 더 높은 거, 더 높은 거, 더 높은 거 이리 착착 올라가니라.”
복술이 할머니가 조방에서 담당한 일은 여러 공정 중 목화솜에서 실을 뽑는 방적 과정이었다. 방적 공정을 알 리 없는 필자에게 할머니가 상세히 설명하신다. 처음 목화솜을 부두에 내릴 때는 이불보다 더 큰 단단한 솜뭉치 상태다. 이것을 열차로, 혹은 차로 실어서 조방으로 가져온다. 그러면 곧 솜을 타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실을 굵게 뽑다가, 가늘게 뽑는 과정으로 넘어간다. 할머니는 바로 실을 가늘게 뽑는 과정에 계셨다.
“옛날 사람들 물레로 실 빼는 절차와 한 가지인기라. 실 빼는 기계 길이가 엄청나게 크거든. 벨트가 돌아가면서 가락을 돌리고, 위에서 솜뭉치가 돌아가면서 실을 빼게 되는기라. 그 과정에서 실이 끊어지면 목화로 그냥 날리는기라. 그럼 어서 가서 그거를 이어 줘야 되거든. 그래야 실이 쿠리[실패]에 뱅뱅뱅 감기지.”
기계 1대에 딸린 솜뭉치가 총 400개 정도 되었다. 이들 모두를 노동자 1명이 담당해야 했으므로, 노동 현장은 굉장히 분주했다. 솜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 주면서 실을 뽑는 일인데, 노즐을 교환해가면서 여러 가지 종류별로 뽑았다.
“솜뭉치가 이쪽에 200개, 저쪽에 200개, 합 400개를 한 사람이 왔다갔다 하믄서 기계를 봐야 되는기라. 이 실 빼는 것도 여러 질[종류]이라. 골뗀[코르덴] 짜는 실은 좀 굻게 빼야 되고, 또 뽀뿌린[포플린] 짜는 거는 더 고와야[가늘어야] 돼. 광목, 골뗀, 뽀뿌린 …… 그렇게 몇 가지 질로 실을 빼거든.”
방적 다음은 세탁 과정인데, 광목은 누런 색 그대로 두지만, 포플린은 가공과로 가서 하얗게 세탁을 한다. 이어서 염색과 나염, 피복의 공정을 거친 후 곱게 다려서 완제품 베로 출고된다. 그런데, 각각의 공정이 나름의 전문성이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을 기준으로 공정을 바꾸어서 투입되거나, 직급이 올라가면서 담당하는 공정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처음 입사할 때 맡았던 공정이 퇴사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처음 실 빼는데 들어가면 내내 거기 있어야 되고, 베 짜는데 가면 첨부터 끝까지 베 짜는 데 있어야 되고. 서로 부속마다 기술이 다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 가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전부 배워야 돼. 나는 실 잇는 것을 배웠고. 기계가 자꾸 돌아가니까, 실이 떨어진다고 기계를 못 잠그거든. 기계 한 대가 앞뒤로 돌아가니까 400대나 되는데, 실 하나 떨어진다고 기계 잠그면 일이 안되잖아.”
400개의 솜뭉치와 실패를 노동자 한 명이 감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 뛰어다니다 보면 실이 끊어지는 일도 있기 마련인데, 이럴 때는 ‘완장’이 인근의 다른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처리했다.
“쿠리가 400개가 돌아가는 거를 내 혼자 볼라하믄 실이 그게 연방연방 떨어지거든. 그래가 미처 못 이으면 솜이 한 가득 감겨서 나오믄 빨간 띠 두 개짜리 완장을 찬 사람이 손가락을 입에 넣어가 휘파람을 휘익 분다고. 그라믄 4~5명이 와서 엉망이 된 그 실을 다 이어 주는기라.”
실이 다 감긴 실패를 새 실패로 교체할 때도 ‘완장’이 또 사람들을 불러서 기계를 정지시킨 후 교체하고, 다시 기계를 돌렸다. 다 감겨 교체된 실패는 자루에 부어서 모은다. 그러면 ‘아저씨’가 묶어서 다음 공정으로 운반한다. 이렇게 해서 할머니의 공정은 끝이 난다. 그런데, 말씀 중 ‘아저씨’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여성 노동자뿐인 줄 알았던 조방에 남성 노동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들은 마이 필요 없고, 어느 부속 같은데 필요한가 하면, 솜뭉치 큰 게 열차에 실려 오면 목도로 창고에 가져다 재는 일, 재어 놨다가 솜 타는 데로 구루마에 실어가 가져다주는 일, 실패 자루 묶어서 운반하는 일 ……, 이런 거는 남자들이 해야 되거든. 기계가 고장도 잘나니까 그거 고치는 것도 남자들이 해야 되고, 또 기계 부속 갈아 넣는 거, 스위치 퓨즈 터지믄 갈아 끼우는 것도 우리가 연락하면 남자들이 와 가지고 해주는 기라.”
각 공정의 핵심적 노동자는 여성이고, 남성은 자재 운반, 기계 부품 교체와 결함 수리 등 부차적 업무를 담당했던 것이다. 그 외에 조장 이상의 관리직과 부서장은 남성이 맡았고, 조장 아래 ‘완장’으로 표현된 현장 감독은 여성 노동자 중 고참이 담당했다. 그럼 직원 전체에서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남자는 몇 명 안 되지. 맨[온통] 여자지. 저녁에 나올 때 되면 [여자들이] 커다란 대문에 얼매나 너르고 빡빡하게 나온다고.”
1950년대라면 해방 후 십 년 남짓의 세월이라, 사회 곳곳에서 아직 일제의 잔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기였다. 특히 6·25 전쟁 후 잿더미 위에서 시작한 노동 현장에서는 일제 치하에 습득한 기술과 체험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그러니 분명 할머니가 일하던 당시 조방에도 일제 때부터 일하던 노동자가 있었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하신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동자들은 나이가 많으면 다들 공장을 그만두는 분위기였고,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들 역시 젊은 사람들뿐이라 했다.
그러나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왜정 시대 때부터 일하던 사람이 있을 거야. 남자들 중에, 있을 수 있어.” 하고 가능성을 열어 놓으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정과 노동 환경, 직책을 가리키는 모든 용어들이 거의 90% 이상 일본어의 향연이다. 그러나 열 살 때 해방을 맞아 귀국하신 할머니가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된다. 물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조방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완장’으로 표현되는 현장 감독은 누구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을까? 앞서 말했듯 여성 노동자 중 고참인 이들 ‘완장’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빨강색의 완장, 그리고 흰 완장에 빨간 줄 1개부터 3개까지, 이들 총 4단계의 현장 감독들은 조금씩 서로 겹치기도 하는 각자의 업무를 수행한다. 먼저 ‘빨간 완장’은 실패가 다 뭉쳐지면 교체하거나 노동자가 부족하면 보충 투입되며, ‘흰 바탕에 빨간 줄 한 개, 혹은 두 개’는 기계를 운전하고, 작업을 통제하며, 출근 및 근무 상태를 체크한다. ‘흰 바탕에 빨간 줄 세 개’는 출근 상태를 부장에게 보고하고, 결근자가 있을 경우 인원을 적절히 배분하여 보충 투입하며, 상부의 지시 사항을 수령하고 전파한다. 전파의 과정은 ‘빨간 줄 세 개’부터 ‘빨간 완장’까지 역순이다.
“여자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올라간 거지. 빨간 줄 세 개. [거기까지 하면 돈 많이 받습니까?] 마이 받지~”
할머니는 일반 여성 노동자로서의 마지막 단계인 ‘흰 바탕에 빨간 줄 세 개’의 완장까지 올라갔다가 퇴사하였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는 이제 세월 탓으로 기억하지 못하신다.
[일하러 들어가면 얘기할 여가도 없어]
조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주야간 2교대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할머니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총 12시간을 일했다. 그러다 약 4~5년 후부터 오전 5시 30분, 오후 1시 30분, 그리고 오후 9시 30분을 기점으로 하루 8시간씩 3교대로 근무했다. 3교대를 하면 개인당 급여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사생활의 여유가 생기니까 좋았다고 한다.
“노동조합에서 12시간 하면 안 된다 캐가지고 8시간 근무한 거지. 월급은 줄어도 작게 하는 게 좋지, 처이 때는, 놀러 다니고 할 수 있으니까.”
식사는 정해진 식사 시간에 식당에서 하고, 도시락 같은 것은 싸 다니지 않았다. 식사 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이때는 기계를 잠시 꺼 두었다. 그러나 간혹 ‘생산 강조 주간’이라도 걸리면 주어진 기간 내에 생산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교대로 식사를 하면서 점심시간도 없이 기계를 돌렸다. 노동자들은 저마다 고립된 채 높은 강도의 노동을 수행하느라 서로 얘기를 나눌 만한 여유도 없었다.
“바쁘지. 굉장히 바쁘게 설쳐야 돼. 일하러 들어가믄 얘기할 여가도 없어. 감독하는 책임자들이 가에서 몇 개 기계를 보거든, 왔다 갔다 하면서. 또 기계가 사람 키보다 높으니까, 연락을 하거나 다른 데는 어떤가 볼 수도 없어. 점심시간에나 만나서 친해지고, 한 시간 쉬니까 밥 먹고 와가지고 누워서 얘기도 하고 그라지.”
방적 작업의 특성상 솜과 먼지가 많이 날릴 수밖에 없는데, 바닥에 수북이 쌓이기 전에 실패를 교체하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쓸어 담고 대걸레질을 하는 등의 작업장 청소도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천장에 스팀이 드문드문 달려 있어 먼지를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지만, 기계 위에 쌓이는 먼지는 그대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솜이다 보니 먼지가 많이 나지. 솜이 막 나르잖아요? 몸에 안 좋지. 지금 같으면 그런 일 아무도 안 하지. 그렇다고 마스크를 쓰고 할 수도 없고. 먼지가 전부 위로 다 올라가서 쌓여가 있으믄 보기가 안 좋잖아? ‘할아버지’가 매일매일 부채 가지고 부치는 거야. 그러면 그 먼지가 어디가? 다 떨어지고 먹고 ……, 그러면서도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하는 거지.”
이렇게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도 폐병 환자 등 산업 재해의 사례를 보지는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할머니가 근무하던 ‘부속’에서는 신체가 다치고 부러질 만한 위험한 기계는 없었는데, 혹시 작업 중 다치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공장 내에 병원이 있어서 간단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무단결근은 문제가 되지만 병가는 진단서 등을 가져오면 인정되었다. 또 출근 후 갑자기 몸이 아프면,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배정해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같은 노동 강도와 환경을 16세의 청소년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일이 힘들지. 수월한 게 있나, 어데라도. 나이 어릴 때는 몸이 해깝고[가볍고] 하니까 발랑발랑 하지. 동작이 좀 느린 사람은 힘들고, 동작이 빨랑빨랑 하는 사람은 수월하고. 그래도 일 못한다고 쫓아내거나 그런 거는 없었고, 책임자가 불러 가지고, ‘일을 와 이래 하노, 빨리빨리 해라’ 하고 불러가 뭐라 하는 기라. 그거를 ‘바가치[바가지] 긁힌다’ 캤지.”
동작이 느려서 작업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거나, 일머리가 없어서 노동 시간에 비해 효율성이 없는 이도 있을 수 있다. 소위 ‘완장’이 골치 아파지는 경우다. 정 솜씨 없는 사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완장’은 같은 방적 공정이라도 좀 수월한 데로 이들을 보내는 유연한 방법을 썼다. 임의로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은 없었으니 그나마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고 할까?
그러나 노동 환경과 복지에 관한 복술이 할머니의 일부 긍정적인 평가들은 1950년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할 때 하층 노동자의 근시안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사내 병원의 이용과 병가 등은 형식적인 것일 뿐 원칙대로 활용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마찬가지로 ‘완장’ 급은 노동자의 해고에 관여할 직급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반 노동자들 간의 온정주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회사와 관련된 주요 정치·사회적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맹률도 높고 지금과 같이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 일반 노동자들은 각자의 작업장에 고립되어 출퇴근을 반복할 뿐 사태의 진실을 접할 길이 없었다. 할머니가 입사하던 1951년에는 김지태 등 조선방직 경영진이 대거 구속되고 이승만의 심복인 강일매가 경영권을 장악하는 사건인 ‘조방 사건’이 있었고, 1951~1952년 조선방직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강일매의 퇴진을 요구하는 ‘조방 파업’이 이어졌다. 그러나 복술이 할머니는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못했다. ‘데모’란 고참 노동자들의 몫이었고, ‘강일매’라는 이름만 들었을 뿐 그의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했다.
“노동조합이 있기로. 월매나[얼마나] 인원이 많은데, 몇 천 명인데 ……, 인원이 확실한 거는 몰라도 사천 명 종업원이니 이래 쌌거든. 그때 우리들이 고참이 되고 하니까 월급 올려내라고 사장실 앞에 가가 데모도 하고 그랬거든. 당시 사장 이름이 강일매라. 그런데 사장 구경도 못해, 우리는. 데모도 졸병들은 안하고, 계급이 좀 있는 사람들이 하는기라.”
할머니도 ‘데모’를 하다가 부산동부경찰서까지 잡혀간 일이 있다. ‘데모’는 여러 번했지만, 경찰서까지 간 것은 그 한 번 뿐이었다. 몇 년도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죄가 없으니까 경찰들도 뭐라 카겠노? 그대로 의자에 앉혀 놓는 기라. 월급 올려달라고 데모 한긴데, 뭐 우짜겠노. 거기서[경찰에서] 밥을 시켜 주는 기라. 여기서[회사에서] 연락이 갔겠지, 밥 시켜 주라고. 그래도 이런 밥 안 묵는다 카고, 조합원들이 밥을 다라이[대아]에다가 해가지고 와서 그걸 먹었지. 거기서 밤을 새지는 않았고, 아침에 잽히 갔다가 저녁에 나왔다.”
노동조합에는 입사와 동시에 자동 가입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데모’ 할 때도 회사 업무에 최대한 지장을 주는 일이 없도록 “졸병들, 일하는 사람은 놔 놓고, 퇴근해가 오는 사람들, 특히 계급 좀 있는 사람들 쑤셔 가지고” 하거나, “점심시간에 밥 묵고 나서” 했다.
노동자들이 퇴근 시 생산품 등 회사의 물품을 반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회사에서는 몸수색을 매일 행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도 종종 사회 문제가 되었던 성추행의 여지는 할머니가 알고 있는 한 없었다고 한다. 여성 노동자는 항상 여성 경비가 수색했기 때문이다.
“경비들이 문 앞에 몇이 서 있다고. 인원이 워낙 많으니까, 나올 때 줄을 어데까지[멀리까지] 서 있다. 여자는 여자 경비가 항상 검신을 하는 기라. 저녁에 퇴근할 때 뭐 가져가나 보따리 풀어 보고, 몸도 수색하고. 걸리면 안에 데리고 들어가서 물건 뺐기고 이름 적히고, 크게 하면 모간지 짤리고. 그래도 갖고 나오는 사람은 다 갖고 나와. 경비들 하고 언제쯤 나간다고 짜가지고, 나중에 그 줄에 서서 통과하는 거지.”
[고무 공장 댁이는 묵고 조지고, 조방 댁이는 입고 조진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0년·1960년대 당시 조방은 뇌물로 청탁을 해야 입사할 수 있었을 만큼 당대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금이야 직종과 직장이 다양하지만, 당시 부산에서 여성들이 일할 만한 곳은 조방과 국제고무 두 군데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조방의 여성 노동자들은 돈 잘 쓰고 사치하는 멋쟁이로 소문이 났을 만큼 상대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었다.
“당시에 사람들이 말이 있었잖아. 고무 공장 댁이는 묵고 조지고, 조방 댁이는 입고 조진다 카는기라. 고무 공장 댕기는 사람은 돈 받으믄 억수로 묵거든. 아무데나 입고, 도시락을 두 개, 세 개씩 싸가지고 댕기고 그랬거든. 우리 조방에 다니는 사람은 사묵고 그라는 건 없어. 수준이 높은 기라, 고무 공장 카마[보다], 우리는 부산진 시장이 조방 앞에 있으니까, 단골 베전에 가는 기라. 월급 받으믄 야간하고 나가서 부산진 시장 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시 조방의 여성 노동자들의 월급으로는 현찰로 제값 주고 옷을 해 입을 수는 없었고, 월급날 지난 달 외상을 갚으면서 새 옷감을 다시 외상 거래로 뜨는 식이었다. 때문에 상인들이 조방 월급날을 알았다. 비록 치마저고리에 고무신 신던 시절이었지만, 흰 고무신 하나라도 조방의 노동자들은 달랐다.
“고무신도 조방에 다니는 사람은 얼마나 깨끗이 씻어가 신는다고.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 다 되어 가면 수돗가에 가가지고 막 씻거든. 고무신이 뽀~얗다. 국제고무 공장 다니는 사람들은 좀 추즙게 해가 댕기고, 고무풀 같은 게 막 묻어가 있어도 씻는 게 없는데, 우리 조방 댕기는 사람은 깔끔했어. 한마디로 말하면 멋쟁이인 택이지.”
조방과 국제고무와의 노동자 문화의 차이를 복술이 할머니는 노동 강도에서 찾는다. 국제고무는 조방에 비해 훨씬 일이 고되고, 월급제가 아닌 실적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급여가 높아도 노동자들이 사생활을 즐길 심적·시간적 여유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노동자 문화의 차이로 인해 조방 노동자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물론 이는 논리적이라기보다 다분히 주관적 분석이지만, 당대 세간의 평가를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일로 치면 고무 공장은 순 노가다고, 여기는 사무 보는 사람 한가지인기라. 해가지고 다니는 거 자체도 틀리고. 고무 공장은 추즙고, 사치 같은 것도 모르는데, 여기 조방은 사치 밖에 모르는 기라.”
이미 오래전 일이라 할머니는 당시의 월급은 기억하지 못했다. 풍족하게는 못써도 그냥 한 가족이 밥은 먹고 지낼 정도였다. 또 광목이 한 달에 한 번씩 표로 배급되었는데, 이것을 제품으로 바꾸지 않고, 주로 공장 앞의 ‘표장사’들에게 팔아 가계에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넘겨진 광목은 부산진 시장에 되판다는 소문도 있었다. 가끔 광목 대신에 포플린이나 코르덴이 배급 나올 때도 있었다. 할머니는 광목을 고향 김천에 보내기도 했다.
“본래 딸만 다섯인데, 내 위로 언니 셋은 시집가고, 김천 식구들은 모두 넷이라. 우리 동상하고 엄마 아부지는 김천에 있고, 나는 작은집에서 다니다가 조방에 기숙사가 생겨서 거기에 있었지. 첨에는 없었는데 군부대가 나가면서 객지에서 온 아들[얘들]이 많으니까 기숙사를 맨들었는기라. 시골에 농사도 짓고 여기서 나도 써야 되니까 조금씩 돈을 부쳐 주고 그랬지. 시골에는 돈 보다도 광목을 주니까 제일 좋아하는 기라.”
여름철 광안리 해수욕장에서의 피서는 그 시절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조방은 노동자가 워낙 많다 보니, 광안리에 하계 휴양소를 운용했다. 조방에서 광안리까지 천막을 가린 군용 트럭이 통근 버스로 운행하면서 퇴근하는 직원들을 실어 날랐다.
“여름 되믄 조방에서 광안리에 텐트를 쳐놓고 샤워하는 데도 다 만들어 놨는기라. 한 시 반에 퇴근하고 통근 버스 타고 광안리에 해수욕 하러 가믄 우리 조방 댕기는 사람은 공짜인기라. 옷도 맡기고 샤워할 데도 있으니까 놀다가 집에 오고.”
하계 휴양소는 해수욕장 개장 기간 내내 운용되었지만, 할머니와 친구들은 기껏 한 차례씩 다녀올 뿐이었다. 더운 여름에 살갗이 데여서 땀을 많이 흘리는 일을 하다 보니 물집이 잡혀 터지고 껍질이 벗겨지는 등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철 휴가는 없었고, 매주 일요일은 휴일이었다. 그것도 다음 주부터 야간작업에 들어가는 사람은 오전에만 잠깐 쉬었다가, 오후부터는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노동 환경 상 ‘같은 부속’ 사람들 간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일요일이 다가오면 점심시간에 만나 놀러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일요일의 나들이도 간혹 있을까 말까한 일종의 일탈이지, 대부분은 미뤄 놓은 집안일을 하거나 정비의 시간을 가졌고, 야간작업에 투입되기에 촉박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미혼 여성들이 떼 지어 놀러 다닐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요일 날 같은 때는, 내일 삼일 극장에 머시[뭐가] 들어온단다 우리 영화 보러 가자, 임춘애·김영애 나오는 국악단 보러 가자……. 겨우 가까운 극장이나 가는 거지 어디 가겠노? 전차 타고 시내 용두산 같은 데는 가지도 않았고, 갈 시간도 없고, 집에서 작업복 씻고, 목욕하러 가고, 빨래하고 나믄 오후나 되어야 친구를 만나는 기라. 그래가 어뜩[빨리] 오고. 그것도 주간해야 만나지, 일요일 저녁에 야간 들어 가믄 못 만나는 기라. 또 우짜다가 놀러 가지 자주 나들어 싸믄 부모들이 머라 하잖아. 딸아들이 어데 자꾸 놀러 다니노 카고.”
[기차 지붕에 앉아 가도 마냥 좋았던 명절 귀성길]
먼 타향에서 직장 생활 하느라 고향 김천까지는 명절이나 되어야 가볼 수 있었다. 설과 추석에는 각각 3일 간 휴일이 주어졌지만, 많은 귀성객들 틈에 기차표를 구하기 힘들었고, 근근이 표를 구해도 열차 내에 앉아 가지 못했다. 당시는 좌석 예매 제도가 없어 순서대로 좌석이든 입석이든 포화 상태까지 승객을 태웠고, 심지어 열차 지붕에 올라 앉아 가더라도 탈 수만 있다면 다행이었다. 물론, 입석 할인도 있을 리 만무했다.
“부산 50보급창에 다니던 우리 사촌 오빠하고 나하고 명절 되면 둘이서 고향에 가는데, 열차가 비잡아서[비좁아서] 안에 자리가 없어서 들어가지를 못해 가지고 기차 지붕 위에 올라타 가지고 간다. 그때 기차는 증기차, 굴속으로 가면 엎드려야 돼. 굴속을 지나니 새카맣는 기라. 사람 꼴이 말이 아니지. 그래도 우야겠노? 집 앞 개울에서 비누도 없이 그냥 맹물에 씻어 봐야 시커먼 게 옳게 지나? 그래가꼬 씻고 집에 들어가는 거야. 머리는 깜지도 못하고.”
열차는 완행뿐이라 김천까지 갈려면 오래 걸렸다. 아침에 타서 김천 도착하면 점심때가 지나 저녁이 되어 있었다. 이러니 평일에는 고향집에 가는 일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고, 명절에도 생고생해서 가봐야 올라간다고 하루, 명절 당일 놀고 나면 다음날 내려와야 했다. 그래도 좋다고, 그렇게 열차 지붕에 앉아 가도 좋다고 설레는 맘으로 고향으로 향했다. 어느 해부터인가는 정부의 강제로 양력설을 쇠게 되었는데, 시골에서는 계속 음력설을 쇠니 실제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설움도 겪었다.
귀성 선물로는 고향 김천에서 접하기 힘든 바닷물고기를 조방 매점에서 사 갔다. 추석에는 부패의 염려가 없도록 칡넝쿨로 열 마리씩 엮어 놓은 말린 명태 한 축을, 설에는 대구 한 마리를 샀다. 시골에서는 대처로 나간 자식들이 사 오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그야말로 별미였다.
“커다란 가마솥에 대구 한 마리 넣고 무 삐져 넣고 국 한 솥 끓여가꼬 이웃 어른들 오라 캐가지고 한 그릇씩, ‘아이고 우리 딸이 사왔는데, 우리 아들이 사왔는데 이거 한번 묵어 보게’ 카믄서 ……, 그 한 마리 가지고 물을 뭐 같이 부어 끓여도 맛있다고. 안그라믄 그 시골에서 대구를 못 사묵어요.”
[결혼과 퇴직, 그리고 조방의 폐업을 지켜보며]
조방에 다니다 27세에 결혼한 할머니는 29세에 첫아이를 낳고 퇴사를 했다. 곁에 있던 할머니는 29세에 막내를 낳았다 하고, 50~60대로 뵈는 또 다른 중년 아주머니는 25세에 결혼했다는데, 1960년대 초 27세 결혼은 여성으로는 상당히 늦은 셈이다.
“내가 스물일곱에 시집을 왔거든. 그때도 노처이들이 많이 있었어, 우리 조방에. 일하고 돈 번다고 시집 안 갈라 카고 그랬어. 처이 때가 좋지, 재미있고. 아무튼 결혼하고도 2년을 다녔어요. 그라다가 스물아홉에 첫째를 가졌거든? 그래가 [회사를] 안 갔어. 오래 다녀서 계급도 있고 해놓으니 마 그냥 다녔는데, 임신을 하니까 야간 같은 때 일하러 가믄 힘이 들더라고. 낮에는 살림 살아야 되니까 잠을 옳게 못자고, 그래가 저녁에 가니까 몸이 말을 안 들어. 이래가 안 되겠다 싶어서 고만뒀는기라.”
할아버지는 중매로 만났다. 작은집 사촌 남동생이 중매를 섰는데, 둘은 두 살 터울이지만 친구였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할머니는 결혼에 큰 뜻이 없었지만, 작은아버지의 독촉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시는 양친이 모두 사망한 상태라, 작은아버지의 명령은 부모의 명령과 마찬가지였다.
“자꾸 가라카니까, ‘가믄 가고, 가 가지고도 마음에 안 들면 안 살지’ 이런 마음밖에 안 들더라고. 그래도 조방에 오래 다니고 했으니 개명한 거지. 그런데 또 일단 결혼하고 나니 그기 그래 안 되더라고. 좋고 안 좋고 부모가 맺어준 인연인데 우야겠노?”
할아버지는 연탄 장사를 했다. 슬하에 자녀는 2남 1녀, 아들 둘은 결혼했고, 딸은 미혼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14년 전 돌아가셨다. 지금은 혼자 매축지 마을에 사신다. 시집와서 50년이 넘도록 살았으니, 이 동네는 눈감고도 훤하다.
“그때 다 구식 결혼 할 때인데, 나는 신식으로 했어. 시부모님도 안 계셔서 시집살이도 안 해봤고. 우리 아저씨가 막내라 형수 밑에 있더라고. 나도 부모 없고 자기도 부모 없고, 그래서 만나갖고 같이 맞벌이하고 살았다. 나는 많이는 못 벌지만, 남편은 일이 검어서 그렇지 연탄 장사가 벌이가 괜찮더라고.”
신식 결혼식에 핵가족, 맞벌이 ……, 근대 공장 조선방직의 ‘개명한’ 여성 노동자의 결혼 생활은 1960년대 초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다. 이 모든 파격의 근원은 할머니의 말씀처럼 ‘조방에 오래 다닌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대학 보내기가 좀 애럽더라고. 대부분 고등학교만 근근이 졸업하고 그라는데, 우리는 지가 대학 갈라카니 보냈다. 묵고 사는 건 괜찮으니까, 돈 벌어가 시골에 집을 하나 샀거든. 여기 하꼬방[판잣집]도 사고. 지금은 이래도 옛날에는 다 좋다고 산거거든. 또 시골에 논 사서 양식을 다 갖다 먹었으니까, 옛날에 양식이 없어서 안남미하고 보리쌀 찧어가지고 섞어 먹을 때 우리는 그런 거 안 먹어 봤어.”
1964년 할머니의 퇴사 후에도 친구들은 계속 조방을 다녔다. 그러나 할머니가 계시던 방적 공정은 아가씨들을 쓰니까 한 둘씩 타 ‘부속’으로 보내졌고, 결국 모두 퇴사했다.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은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그러다 1968년 조방이 폐업하면서 청춘의 장소는 영원히 사라졌다. 폐업 소식이 아쉬웠냐는 물음에 그저 ‘그렇지’ 한마디만 하시는 할머니. 청춘과 청춘의 장소는 이미 감정의 저편 아래로 밀쳐진 것일까? 그래도 지금에 와서 예전 조방 다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좋았던 기억만 오롯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재미있었던 것 같애. 지금도 젊어서 그런데서 오라하믄 일하러 가고 싶다. 졸병 때는 고생이 되도, 계급이 자꾸 올라가니까.”
[다시 매축지 마을]
복술이 할머니를 만났던 날은 마침 초복과 중복 사이 한창 불볕더위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매축지 마을 사랑방이 복날 준비로 떠들썩하다. 삼계탕을 얼마나 넉넉히 끓이려는지 큰 가마솥을 챙긴다. 할머니들과 마을 사람들의 분주함이 흥겹다.
할머니는 사랑방에서 요즘 바쁘다. 디지털 카메라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또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책도 한 권 냈다. 번듯한 양장에 비싼 값 받고 파는 책은 아니지만, 할머니들의 소소한 인생사가 적이 눈물겹다.
책에서 한 할머니는 요즘 매축지 마을에서의 삶이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하다고 했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 무렵, 힘든 삶을 다 보내고 동네 친구들 찾아 놀러 다니는 지금, 마치 처녀 시절 호롱불 가에 친구들 모여서 십자수 놓던 그 시절이 다시 온 것만 같다고 한다.
복술이 할머니도 조방에 대한 추억이 즐겁다 했다. 청춘의 한 시절을 거기서 보내고, 평생 그 이웃에 살면서 추억을 곱씹었기 때문일까? 그 시절 조방의 너른 문 앞을 ‘빽빽하게’ 쏟아져 나왔던 이름 없는 노동자들에게 ‘부산 대표 근대 공장’ 조선방직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매축지 마을 한 할머니가 처녀 시절 즐겨 부르시던 노래처럼 ‘종달새 소리’나 ‘하모니카 소리’였으면 한다. ‘봄’과 ‘님’, 그리고 청춘의 한 시절을 떠올리는 이름으로.
“종달새 울면 봄 온줄 알고, 하모니카 부는 소리 들리면 님인 줄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