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4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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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紡織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이근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었던 섬유 관련 제조업체.
[설립 목적]
조선방직(朝鮮紡織)은 면화의 재배 및 매매, 면사와 면포의 방직 및 판매, 동일 사업에 대한 투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17년 11월 10일 부산부 동구 범일정 700번지[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조선방직이 설립되었다. 1922년부터 조업을 개시하였다. 1923년 12월 화재로 주요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925년 5월 재준공되었고, 7월 15일 일부 조업을 개시하였으며, 10월 완전 복구되었다.
1926년 경상남도 지역 육지면 매수권 확보를 계기로 부산 공장에 설비 규모 40대의 조면 공장(繰綿工場)을 건설하였다. 1930년 1월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전개하였다. 1933년 조면 공장을 확장하였다.
1934년 만주 최초의 중국인 회사인 영구방직(營口紡織)에 대한 공동 경영을 개시하여 1935년에 영구방직의 경영권을 장악하였다. 1935년 8월 부산 공장에 인견(人絹) 직기 319대를 갖는 인견 공장 건설에 착수하여, 인견포(人絹布) 생산에 진출하였다. 1935년 조선 최초의 기계제 염색 공장을 건설하였다.
해방 이후 귀속 재산인 조선방직은 부산양조 대표 하원준이 초대 관리인으로 선임되면서 1945년 11월부터 재가동되었다. 1946년 2대 관리인으로 부임한 최사열은 조선방직에서 한일실업공사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1947년 3대 관리인으로 부임한 정명석이 다시 한일실업공사에서 조선방직공사로 개칭하였다. 1948년 4월 주식회사로 전환한 조선방직은 정호종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1951년 9월 강일매가 관리인으로 부임하였다. 1955년 8월 조선방직이 강일매에게 불하되었다.
1956년 정재호가 삼호방직[대구]·대전방직[대전]과 함께 조선방직을 인수하였다. 1968년 4월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직할시에 인수되었다. 1969년 7월 부산직할시가 법인 청산 절차를 밟아 조선방직을 공식 해산시켰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공칭 자본(公稱資本)[정관에 기재·등기한 자본 총액] 500만 원, 납입 자본(納入資本)[주주가 실제로 납입한 자본] 400만 원으로 설립되었다. 주식 수는 10만 주에 주주 수는 987명이었다. 대주주는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실업가 혹은 제국주의의 정상배(政商輩)로 알려진 산본조태랑(山本條太郞)[3,325주]과 상야행장(上野行藏)[2,519주]이었으며, 최창립, 방규환, 김용태 등 한국인도 대주주들로 참가하였다. 조선방직은 일본인이 부산에 6번째로 설립한 부산 최대의 공장이자 국내 최대의 기업이었다.
조업 개시 당시 조선방직은 정방기(精紡機) 1만 5200추, 직기(織機) 600대 규모의 한국 최초의 기계제 면 방적 회사였다. 그러나 조업 초기에는 경영이 부실하였다. 조업을 개시한 1922년에 20만 8812엔에 달하는 막대한 당기 손실을 계상(計上)하였다.
1925년 공장 부지는 약 13만 5078㎡, 공장 및 건물 54동, 방직기(紡織機) 3만 9376추, 방적기(紡績器) 1,132대를 설치하고 원동력은 스위스제 기관 및 발전기를 사용하였다. 생산 능력은 면포 5만, 면사 1만에 달하였다. 종업원은 3,200명으로 부산 지역에서 가장 컸다.
새로운 시설과 적극적인 제품 개량 및 상표 개발과 당시의 인지도 상승으로 1928년경에 이르러서는 한국 면사포 시장의 25%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장 점유율의 확대가 곧바로 수지 구조의 개선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조선방직은 1922년 상반기부터 1930년 하반기에 걸쳐 합계 40만 9348엔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1927년 말 정방기 8,400추 증설을 시작으로 1929년 정방기 8,000추, 직기 442대의 추가적인 설비 확장을 하여 1936년경에 이르러 총 설비 규모는 정방기 4만 추, 직기 1,214대로 증가하였다. 더욱이 조선방직은 당시 혁신적인 자동 직기인 풍전식(豊田式) 자동 직기 443대를 도입하여 생산비 저하의 경영 합리화를 전개하였다.
조선방직은 1931년 하반기 이후, 세계 대공황의 파급에 따른 심각한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수익 구조를 호전시켜, 매기 평균 25%에 육박하는 당기 수익률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경영의 호조는 무엇보다도 효율적이고 규모의 경제를 가져오는 설비의 증설 때문이었다.
1935년 말 조선방직이 경영권을 장악한 영구방직은 자본금 250만 엔으로 정방기 2만 760추, 직기 624대의 설비 규모로 모회사 조선방직을 상회하는 12%의 고율 배당이 가능하였다. 이후 영구방직은 설비 확장을 거듭하여, 1930년대 후반에는 모회사 조선방직에 근접하는 정방기 5,500추, 직기 1,700대의 설비 규모와 만주 펑톈[奉天] 지역에 염색 및 봉제 공장을 신설하여 당시 만주 방적업을 대표하는 대규모 면 방적 기업이 되었다.
해방 이후 귀속 재산 가운데 최대의 기업이었던 조선방직은 방적기 4만 720추, 연사기 6,760추, 면직기 1,232대, 인견 직기 319대, 모포 직기 25대 등의 설비와 전국 17개 지역에 설치한 조면 공장, 2차 가공 공장으로는 대구 메리야스 공장을 보유하였다. 조선방직은 원자재는 일본 수송로를 통해 수송해 왔지만 방적, 염색, 나염, 피복에 이르는 이른바 일관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방직은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의 제조업 시대를 연 선구자였다. 또한 일본인 회사 조선방직에 맞서 한국의 면직물 산업과 한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경성방직이 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조선방직이 번성하게 된 요인은 한국인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심야 노동과 노동 강화의 강제를 통한 비용 절감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