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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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影島-開通-風景 |
영어의미역 | The landscape of the opening of the Yeongdo Bridg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교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지영 |
[끓어오르는 축하의 감격]
온 하늘을 닦아 놓은 듯 쾌청한 날씨에 바람까지 고요해서 따뜻하기까지 한 11월의 어느 초겨울 아침. 말끔하게 단장된 부산의 남쪽 해안가에는 근래 보기 드물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부산 15만 부민들이 기다리고 바라던 환희의 날이 결국 왔다. 걱정해 온 부산 대교의 도초식(渡初式)과 간선 도로[중심 도로], 선류 정리(船溜整理) 공사의 준공식이 거행되던 날, 하늘을 높이 가르며 위세 등등하게 휘날리는 폭죽 연기가 먼저 그레이트 부산(Great Busan)[일명 대부산]의 건설을 축복하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만국기와 히노마루[日ノ丸: 일장기(日章旗)], 제등(提燈)[들고 다니는 등 기구]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부산 대교와 간선 도로를 중심으로 한 거리에는 3대 사업의 준공을 축복하고 구가하는 부민들과 가깝고 먼 곳에서 몰려온 관람객의 조류로 가득하였고, 신설된 선류(船溜)에 계류된 범선과 발동기선[모터보트]도, 탄탄한 새 간선 도로를 질주하는 전차도, 집도, 사람도, 일장기를 내세우며 비약하는 대부산의 앞날을 축하했다.”
“당일에는 목도(牧島)[영도의 옛 지명] 부산 간의 부산 대교라는 거대한 다리의 초도식을 구경하려고 부산부(釜山府) 및 각 군에서 무려 7~8만의 관중이 집합하여 18간 대로가 비좁게 들어차서 교통이 두절 상태에 이르렀다.”
1934년 11월 23일 부산 남포동과 영도 대교동을 잇는 영도 다리가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에는 부산 대교로 불렸다. 영도 다리의 준공식을 보기 위하여 부산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7~8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의 부산 나들이도 줄을 이었다. 양편 다리목을 에워싼 인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이지 않았고, 몰려온 사람들이 너무 많이 지금의 동광동과 남포동 사이를 운행하던 전차는 정차할 형편이었다고 하니 그 시끌벅적한 풍경은 얼마나 볼만 했을까. 영도 다리는 상판의 일부를 들어 올려서 열리게 하는 도개 장치를 갖춘 다리인데, 당시 구경 나온 사람들은 다리가 정말 들리는 지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동양 제일을 자랑하던 영도 다리의 도개 장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생 처음 큰 다리의 상판이 올라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영도 다리가 올라가는 것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긴 사이렌 소리를 신호로 다리가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가는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왁-!’ 하고 나온 함성은 섬 전체를 흔들 정도로 굉장했다고 한다.
[영도, 나룻배로 왕래하다]
영도는 부산의 동남쪽 바다에 자리 잡은 섬이다. 원래 이름은 절영도로, 해방 후 행정 구역을 정비하면서 줄여서 영도로 부르게 되었다. 영도는 오래 전부터 목장이 있어 말을 방목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영도라는 지명도 이곳 국마장(國馬場)에서 기른 말이 하도 빠르게 내달려 말 그림자가 땅에 비치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개항 이후 얼마 동안은 대청동과 남포동 일대의 일본인 시가지로부터 밀려난 조선인들이 주로 이주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본인의 토지 매입이 늘어나고 조선소, 도자기 공장 등이 등장하면서 일본인들의 이주도 증가하였다.
영도 다리가 건설되기 전 부산과 영도는 도선(渡船)[나룻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876년 무렵부터 조선인이 운항하는 작은 거룻배[돛이 없는 작은 배] 1척이 현 롯데 백화점 광복점 남쪽 해안가와 영도 대교동 사이를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일본인의 왕래가 늘어나면서 일본인 도선업자가 생겼고, 도선 수도 5척으로 늘었다. 남포동 자갈치 시장과 영도 대평동을 잇는 노선도 추가되었다. 1900년 무렵 사람이 노를 저어 운항하던 거룻배는 동력의 힘으로 움직이는 발동기선으로 바뀌었다. 1919년에는 부산부에서 이를 인수해 부영(府營)으로 운항하기 시작하였다.
도선은 고토부키마루[壽丸]와 도키와마루[常盤丸], 마츠시마마루[松島丸], 마키노시마마루[牧島丸], 스사키마루[洲岬丸]의 10여 톤급의 발동기선 5척으로,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부산과 영도 사이를 왕복하였다. 영도에서 부산으로 오는 사람, 부산에서 영도로 가는 사람은 누구든 뱃삯으로 5전만 내면 탈 수가 있었다. 도선을 이용하는 선객은 하루에 평균 1만 명으로, 32명의 선원은 날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선객들을 날라야 했다. 하루 1만 명이면 1년이면 360만 명이다. 작은 거룻배를 운항하던 시절에는 이용객이 적었지만 부산부에서 운항한 이후로는 매우 많아져서 땅땅 치는 신호 소리와 함께 출렁거리는 물살을 가르며 왔다 갔다 한 사람 수가 15년 동안 5,200만 명 남짓에 달했다.
승객의 증가에 따라 도선 수를 5척으로 늘렸지만 늘어만 가는 승객은 5척으로도 모두 수용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영도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 자산가들의 입김도 작용하여 다리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과 영도를 오가던 도선은 부산 대교가 개통되던 날 오전 11시 영원히 안녕을 고하며 폐지되었다. 자갈치 시장과 대평동을 잇는 도선만 지역 주민의 열망으로 민영으로 유지하게 되었는데, 옛 항구의 정서인 통통배의 모습은 이것으로 일부나마 남게 되었다. 오랜 세월 묵묵히 지속되던 발착 신호도, 하얀 고리의 연기를 토하며 푸른 물결을 차내며 달리던 모습도 아련한 추억으로만 기억되게 되었다.
“이렇게 많이 왕래하던 도선객은 이제야말로 세계에서 둘째간다는 부산 대교의 화려한 아스팔트 위로 자동차로 전차로 도보로 자유로이 왔다 갔다 하게 발전되었으니, 50년 전의 작은 목선으로 노 젖던 일을 생각하면 옛일이 새로워진다.”
[영도 다리 건설을 둘러싼 논의]
영도 다리가 개통되던 날 사람들은 한결같이 “꿈의 부교(浮橋)로 조소되었던 계획이 현실화되었다.”며 감격을 금하지 못했다. 거액의 공사비를 들이고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야 했던 긴 공정에 어떤 우여곡절이 없었겠냐마는 영도 다리는 가설 계획 단계에서부터 쉽사리 진행되지 못했다.
영도 다리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무렵이다. 영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공장이 많이 들어서면서 도선만으로는 영도를 오가는 사람과 물자를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한 번 배를 타면 1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는 데다, 내리고 타는 일은 번거로웠다. 파랑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위험해서 결국에는 배가 운행되지 않는 날이 많아 이용하는 데에 불편함도 컸다. 또한 조선소 등을 지어 영도를 군수기지로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일제도 배로는 물자를 원활하게 수송하는 데 큰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영도 다리 건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영도 주민은 영도가 크게 발전할 것이라며 다리 건설을 반겼다. 부산 시가지 쪽에서도 부족한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만큼 장래를 위해 섬과의 완전한 연락은 필요하였다. 하지만 부산항을 드나들던 해운업자들은 배가 다니는 길에 다리를 놓으면 어떻게 하냐며 강력히 항의하고 나섰다. 부산과 영도 사이를 왕래하던 도선업자들은 다리가 개통되면 당장 문을 닫게 된다는 그들대로의 위기감에 영도 다리 건설을 반대하였다. 막대한 비용이 예상되는 만큼 부산부회 의원들 사이에서도 영도 다리 건설에 대한 찬반 주장으로 시끄러웠다.
나름의 입장으로 논란이 가열되는 가운데 어떠한 형태의 다리를 건설할 것인지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었다. 그 절충안이 ‘도진교’이다. 다리의 상판 일부분을 전동기로 들어 올려 선박이 출입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때문에 설계자가 직접 부협의회에 나서 구체적인 설명을 해야 하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1930년 9월 15일 드디어 영도 다리 가설이 부협의회를 통과하였다. 간선 도로와 선류 정리 공사를 포함한 총 공사비는 360만 엔으로 책정되었다. 당시 현장 인부의 하루 임금이 2엔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실로 엄청난 금액의 공사였다. 공사는 ‘토목계의 패왕(覇王)’으로 불리던 오바야시쿠미[大林組]에게 낙찰되었다.
[영도 다리 기공식이 열리던 날]
1932년 4월 20일, 곡절 많았던 그간을 사연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이날은 햇빛이 쨍쨍 비쳤다 구름이 끼었다 하는 변덕스러운 하늘에 파도까지 높아 봄 날씨다운 따스함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숱한 논의 끝에 드디어 생명을 얻게 된 영도 다리. 바로 그 공사를 위한 첫 삽을 뜨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기공식은 영도의 새 매축지(埋築地)[바닷가나 강가를 메워서 뭍으로 만든 땅]에 설치된 식장에서 열렸다. 식장에는 신바[榛葉] 토목과장이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 총독을 대신하여 참석하였고, 오시마[大島] 부윤과 와타나베[渡邊] 도지사 등 관민 350여 명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이 굉장한 공사의 시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전 10시 30분, 천지를 울리는 첫째 폭죽을 신호로 다니구치[谷口] 재주(齋主)가 집전하는 신도식이 시작되었다. 일동 경례 후 우선 몸을 정화하는 의식인 수불식(修祓式)과 신을 부르는 강신식(降神式)이 거행되었다. 신에게 제물을 올린 재주는 낭랑한 목소리로 축사를 읊었고, 다마구시[옥환(玉串): 일본 신화에 나오는 신목(神木)인 비쭈기나무에 천이나 종이를 매달은 것]를 바쳤다. 다마구시는 신을 불러오는 역할을 하는 나무이다. 이어 오시마 부윤이 참석자 대표로 다마구시를 바쳤고, 신바 과장 이하 참석한 내빈이 차례로 다마구시를 바치고 경례하였다. 재주의 철찬(撤饌)[제사가 끝난 뒤에 제사 음식을 거두어 치움]과 승신식(昇神式)이 이어졌다.
이때 애국기(愛國機) ‘조선호(朝鮮號)’가 부산의 동북쪽 상공으로부터 날아와 2번 선회하고는 북쪽으로 기체를 돌려 사라졌다. 사사키[佐佐木] 헌병 분대장의 알선으로 특별히 날아온 것이라 한다. 이날의 기공식을 축하하는 동시에 부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듯한 ‘조선호’의 비행에 감격한 일동은 하염없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이어 오시마 부윤의 식사와 우가키 총독의 고사, 와타나베 도지사의 축사가 있었다.
오후 12시 30분, 둘째 폭죽을 신호로 영도 다리 교각 인근에서 침전(沈奠) 행사[공사의 안전을 기원하며 기석(基石)을 바다에 던져 넣는 일]가 이어졌다. 참석자는 앞바다에 뜬 잔반 위 식장으로 옮겼다. 재주의 엄숙한 수불에 이어 와타나베 도지사의 딸이 기석 제막에 나섰다. 세일즈 칼라의 검은색 플레어스커트를 차려 입고 나선 소녀가 홍백의 끈을 당기자 흰색의 천이 걷히면서 가로 세로 45㎝, 높이 75㎝의 기석[자연석]이 드러났다. 기석에는 우가키 총독이 직접 쓴 ‘진호(鎭護)’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공사의 안전을 기원한다는 의미다. ‘영원의 초석’인 봄의 양기가 가득한 가운데 기석이 교각이 세워져 있는 깊은 바닷물 속으로 ‘털-석’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하늘 높이 올랐고, 항구 내에 정박 중이던 선박은 일제히 기적 소리를 높였다.
식전에 이은 축하연은 식장에 이웃한 연회장에서 개최되었다. 부윤의 인사에 이어 바로 시작된 축하연에서는 맥주와 일본 술, 시트론 등 나름의 마실 것으로 입을 다신 사람들이 공사가 무사히 진척되기를 기원하고 또 축복했다. 이날 축하연에는 특별히 부산권번의 예기 60여 명이 나와서 술을 권하였다. 연무대(演武台)에서는 남빈권번의 무기(舞妓)들이 총출동하여 봄을 표현하는 춤을 열정적으로 추었고, 흥에 겨운 일동은 환성을 지르며 즐거워하였다.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된 축하연은 2시 반 무렵에 끝났다.
영도 다리가 가설되기를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영도 주민들에게 이날의 기공식은 더욱 특별하였다. 오후 4시 새 매축지에 마련된 행사장에서는 영도 주민만의 성대한 축하회가 거행되었다. 7시부터는 지역민들이 대거 참여한 축하 대제등 행렬이 이어졌는데, 영도는 섬 전체가 완전한 불바다로 변했다. 이날 기공식을 보기 위하여 식장 주위로 몰려온 사람들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때문에 해안통은 일시 교통이 두절되면서 매우 복잡하였다.
[근대 과학미를 자랑하는 도진 도개교]
“문자 그대로 동양 제일의 인도 명물교(人道名物橋)가 출현하였다……. 더욱이 또한 저 위대한 도개교가 2분이라고 하는 단시간에 근소한 전력에 의하여 들려 올려지거나 하기 때문에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의 진보를 상징하는 하나의 명물로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1934년 11월 23일, 드디어 영도 다리가 완성되었다. 말 그대로 ‘동양 제일’을 자랑하는 부산의 명물이 탄생한 것이다. 설계자는 야마모토 우타로[山本卯太郞]이다. 1914년 나고야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가동교 설계·제작에 종사한 야마모토는 1919년 귀국하여 도쿄에서 가동교를 전문적으로 제작하였다. 그는 기존의 가동교에 비해 4~5배의 동력을 절감할 수 있는 이른바 야마모토식[山本式] 가동교라는 것을 개발하여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
영도 다리의 육교 부분은 공사 청부업자인 오바야시쿠미가 만들었지만 도개부는 설계자인 야마모토가 사장으로 있는 야마모토 공무소가 맡았다. 영도 다리의 중요한 부분인 도개부와 기계실은 오사카기차회사[大阪汽車会社]가 제작하였다.
완성된 영도 다리는 남빈정(南濱町) 입구의 공터, 지금의 롯데 백화점 광복점 앞 교차로에서 그 맞은편 바다 건너에 있는 영도 동부의 부산영도경찰서 앞을 지나도록 연결되었다. 총 길이 214.63m, 너비 18m, 면적 3,948.2㎡로 가설하였다. 이 공사를 수행하는 데 사용된 경비는 70만 8,000엔에 달했다.
북쪽인 영도 방향에는 갑문(閘門)이 있고, 남쪽인 남포동 방향에는 약 31m 가량을 도개하여 열리는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당시로서는 경이할 만한 ‘과학적인 진보’로 평가되었다. 중량 약 800톤의 도개교는 전기 장치에 의해 하루에 7회 도개하였다. 고속으로는 1분 30초, 저속으로는 4분 만에 80도 각도까지 용이하게 도개할 수 있었는데, 그 사이를 1,000톤급의 대형 선박이 자유롭게 항행하였다.
교량 뿐 아니라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을 쌓아 만든 교대(橋臺)와 교대 좌우측에 있는 화강석 계단, 교량 입구의 교문주(橋門柱)와 난간 등 영도 다리를 구성하는 건축물들의 건축학적 가치 또한 높았다. 특히 일반적인 도개교와는 달리 도개 장치가 안벽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도개 교량의 형식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모습이다.
[준공식, 꿈의 부교가 현실의 대교로]
영도 다리 준공식은 간선 도로와 선류 공사 준공식과 함께 거행되었다. 준공식은 북빈정(北濱町) 매립지에 신축한 중앙 도매 시장 앞 광장에 설치된 식장에서 열렸는데, 지금의 롯데 백화점 광복점 남쪽 해안가이다. 우가키 총독의 대리로 이케다[池田淸] 경무국장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은 엄숙하고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식이 거행될 때 간선 도로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 관람자가 10겹 20겹으로 울타리를 쌓았고, 용두산과 영도의 구릉, 높은 곳에서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훌륭하게 단장된 부산 대교와 간선 도로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흑산(黑山)과 같은 장관을 이루었다.
오전 10시 30분, 굉음과 함께 첫째 폭죽이 오르며 준공식이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이 착석한 가운데 수불식과 강신식이 거행되었다. 신에게 제물을 올린 재주는 축사를 읊고 다마구시를 바쳤다. 이어 스치야[土屋] 부윤과 이케다 경무국장, 코지[關水] 경상남도지사 등 준공식에 참석한 내빈이 차례로 다마구시를 봉헌하였다. 마지막으로 영도 다리를 도초할 아동 모두가 다마구시를 바쳤다. 재주는 신에게 올린 제물을 거두고 승신식을 행하였다.
이어진 스치야 부산 부윤의 식사(式辭)는 준공식에 임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산 간선 도로와 도진교 및 선류 정리 공사의 준공식을 거행하고 아울러 부산 대교 도초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조야 귀빈들께서 참석해 주셔서 영광스럽고 환희를 참을 수 없다……. 도진교 가설은 부산항과 남빈 간 해상 교통을 보전하기 위해 그 가형(架桁)에 당국의 절대적인 고심이 있었는데, 경제 공법의 한도에서 형하(桁下)와 수면의 높이를 최대한으로 고려하고 더해서 그 일부에 도개 시설을 갖추는 등 해륙 교통의 조절을 도모하였다……. 이것으로 대부산 건설의 기초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신의 가호 덕택으로 감격을 참을 수 없다.”
이어 이케다 경무국장이 우가키 총독의 고사(告辭)를 대독하였다.
“무릇 부산항은 조선 반도의 인후(咽喉)[목구멍]이자 구아(歐亞)[구라파와 아시아] 연락의 현관으로 교통 무역상 매우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 만주국이 건국된 이후로 그 중요성은 한층 더하여졌다. 지금까지 부산항은 그 해면의 광활함에 비해 육지의 토지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아 교통에 장해로 되는 것이 매우 컸다……. 지금 부산은 그 면목을 일신하여 장래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지방 관민이 잘 협동하여 본 시설의 취지를 잘 알고 갱생의 의기로써 교통, 산업, 경제 모든 부분에서 국운의 융창에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일반 부민 대표로 준공식에 참석하여 축사에 나선 카시이[香椎] 상공회의소 의장은 특유의 호방한 어조로 영도 다리의 준공을 축하하였다.
“부산부 궁민 구제 사업으로 무려 360만 엔의 거액에 4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여 준공하게 된 이들 여러 시설은 부산이 개항한 이후의 해륙 설비가 바로 구태(舊態)를 벗어나 신기원의 활동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으로, 이 획기적 시설이 장래 부산의 상공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다대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학생들의 첫 도교로 시작된 도초식]
오전 10시 50분, 둘째 폭죽이 하늘 높이 올랐다. 영도 다리로 첫 발을 내딛는 도초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영도 다리 도초식은 ‘순진한’ 소학교 아동이 처음 건너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그 지역에서 최고령자가 완공된 다리를 가장 먼저 건너는 우리나라의 초도(初渡) 관습과는 다른 것이다. 각 소학교 3, 4학년 학생들 가운데서 선발된 280명의 아동은 부산과 영도 양쪽에서 교차해 영도 다리를 건넜다. 이어 참석한 관민 유력자 500여 명이 다리를 건넜는데, 신관이 앞장서 인솔하였다.
이어 부내 각 소학교와 보통학교에서 선발된 1,300여 학생들이 영도 다리의 준공을 축하하는 기행렬(旗行列)을 벌였다. 학생들은 일장기를 마구 흔들고 행진곡을 고창하면서 흥겹게 다리를 건넜다. 뒤따라 일반 부민이 다리를 건넜다. 7~8만 명의 관람객은 제각기 영도 다리를 먼저 건너보겠다는 생각에 양편 다리에 밀고 들어와 큰 혼잡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행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말을 타고서 질서 유지에 나섰던 순사들도 쇄도하는 사람들 틈에서 속수무책이었다. 18m라는 널찍한 부산 대교가 비좁아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정돈하는 순사의 고심도 여간 아니었다. 부산이 생기고 난 이후 처음 보이는 대성황이었다.
이날의 도초식에는 특별히 마츠다[松田] 훈도가 작사한 「축하 행진곡」을 소리 높여 합창하였다. 새로 만들어진 행진가를 목청껏 부르며 영도 다리를 건너는 행렬은 자못 대단하였다.
1. 부산 대교 공사가 완성되어 기쁨은 거리에 가득 넘쳐 나고
개통식이 행해지는 오늘같이 좋은 날을 자- 축하하네.
2. 사람의 지혜를 극진하게 하면서 많은 돈을 재원으로 해서 만들어진
부산 대교의 위대한 모습을 그대는 보이지 않는가.
3. 해마다 매일 번성해 가는 항구 부산의 진운(進運)을 책임질 대교
기리고 칭찬하면서 오늘 비로소 용맹스럽게 건너게 되는구나.
[떠들썩한 축하회]
오후 12시 30분, 축하회 개시를 알리는 셋째 폭죽이 올랐다. 앞서 부산부 각 정동(町洞)의 대표들이 모여 부산대교개통축하협찬회를 만들었다. 이들 대표들은 각자의 생각대로 이 획기적 사업의 준공을 축하하기 위한 방법을 수시로 협의해 왔다. 진해 요항부로 교섭 중이던 해군기의 축하 비행은 군부의 사정으로 실현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협찬회에서는 이날 축하회를 위해 부산과 영도 2곳에 춤추는 무대를 설치하였다. 중앙 도매 시장 내에 설치된 무대에는 남빈권번과 봉래권번, 녹정 유곽에서 선발된 아름다운 기생들이 화려한 무용을 선보여 관람객들을 즐겁게 하였고, 거리에는 대기하고 있던 각 정의 축하 여흥대가 출동하여 흥을 더했다. 부산부 내 각 카페에서는 이 흥겨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여종업원들을 보냈다. 권하는 술 한 잔에도 알딸딸하게 오르는 취기,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영도 방면에도 춤추는 무대가 마련되었다. 기타 여흥과 기생들의 연주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층 흥취를 돋우었다. 특별히 영도의 조선인 유지 사이에서는 영도 다리의 개통과 영도의 발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백일장과 경로회를 개최했는데, 개최 전부터 무려 100여 명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며 기대되었다. 옛 방식대로 거행된 백일장에는 과연 1만 여 명의 관객이 참가하면서 성대하게 진행되었는데, 근래에 보기 드물게 인기를 끌며 대성황을 이루어 25일까지 3일간 계속 개최하였다.
영도 다리에서 시작된 환희의 소용돌이는 전 시가로 확대되어 이르는 곳마다 ‘그레이트 부산 건설’을 구가하는 감격의 기분이 넘쳐흘렀다. 언제부턴가 레코드판으로 재생된 선율 하나가 귓가를 맴돌았다. 영도 다리 가설을 축하하기 위하여 부산일보사에서 특별히 모집한 노래였다. 명랑한 리듬의 노래는 일제히 확성되어 울려 퍼졌고, 사람들의 흥얼거림으로 멀리멀리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번져 나갔다.
“하- 가설되었구나, 가설된 도진교, 동양 제일이야
좋구나 좋아 경사스럽게 만난 거기 거기 거기 목지도”
[제등 행렬로 불바다가 되다]
초겨울 어둠은 무척이나 일찍 찾아들었으나 영도 다리를 축하하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영도 다리 난간 위로 매달린 등불은 깊어 가는 어둠을 물리치며 오늘 완공된 영도 다리의 모습을 언제까지라도 보여 주려는 듯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꿈의 부교(浮橋)인 부산 대교에 등불이 켜지자 한여름 밤에 용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처럼 조류가 소용돌이치는 다리 아래로 떠내려간 다리의 등은 흑조(黑潮)의 물결로 변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파문을 만들어 갔다. 물의 도시 베니스의 아름다움과도 유사하여 곤돌라(gondola)가 다리 사이를 떠다니고, 기타의 선율이 묘하게 울리는 것 같다.”
부산대교개통축하협찬회에서는 부민 합동의 제등 행렬과 가장 행렬을 연출하여 항구 부산의 앞날을 축복하였다. 제등 행렬은 오후 7시 부산역 광장에 집합하였다. 3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는데, 각 부대는 협찬회 역원이 앞장서서 인솔하였다. 이에 앞서 오후 6시 영도에서 모여 출발한 부민은 새로 단장된 간선 도로를 따라 행진하여 이미 부산역 광장에 합류하였다.
제1 부대는 마치다[町田貞一]와 다케우리[竹內嘉四郞] 두 역원을 선두로 남포동과 충무동, 광복동, 초장동, 토성동, 아미동 방면의 부민으로 하였으며, 부산역 남쪽 광장에 집합하였다. 여기에 이마이[今井莊重]와 아라이[荒井彌一郞] 두 역원이 가세하였다.
제2 부대는 동광동과 중앙동, 대청동, 보수동, 부용동, 대신동, 부평동, 부민동 방면의 부민으로 하였고, 부산역 중앙 광장에 모였다. 니시오[西尾角藏]와 가쓰라[桂寬治] 두 역원이 지휘하였다.
제3 부대는 부산역에서 북쪽에 있는 영주동과 초량동, 수정동, 좌천동, 범일동의 부민으로 하였으며, 나가보[長保淸一]와 오오야[大矢音松] 두 역원의 지휘 하에 부산역 북부 광장에 모였다.
제등 행렬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영도의 부민을 선두로 해서 부산역 남쪽 광장에 모여 있던 제1 부대부터 제2 부대, 제3 부대 순으로 차례로 출발하였다. 부산역을 출발한 행렬은 대청동으로 방향을 잡아 스산한 초겨울의 대청로 밤거리를 환하게 밝혔다. 부평동 시장에 이르러 모퉁이를 돌아 와사전기(瓦斯電機)[주식회사] 앞까지 행진하였고, 이어 번화한 광복로를 걸어 영도 다리로 행진해 갔다. 지금의 롯데 백화점 광복점 앞 광장에 도착한 행렬은 감격스러운 영도 다리를 건너 영도를 일주한 후 다시 건너와 중앙 도매 시장에 마련된 준공식장 앞에 모여 해산하였다.
대제등 행렬은 부산의 가장 번화한 곳을 천천히 돌아다녀 실로 화룡(火龍)이 대행진하는 것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낮부터 밤까지 그레이트 부산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힘찬 환호의 목소리와 대부산 장래의 번영을 축하하는 환성으로 부산은 환락의 도가니였다.
[꿈의 대교와 영도, 그리고 부산 사람들]
이날 영도 다리를 건넌 사람은 8만 명에 이른다. 대부산 건설을 위한 첫걸음, 그 상징적인 공사였던 영도 다리다. 영도 다리는 도개교라는 근대 과학 기술의 우수함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훌륭하게 완성되었고, 시끌벅적했던 준공식으로 그 모습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영도 다리 건설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분야의 논란들도 이것으로 말끔하게 잠재웠다.
영도 다리의 개통으로 육지가 된 영도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그 변화는 영도 다리 인근 지역이 지금의 중앙동과 함께 대교통(大橋通)이라는 새 지명으로 명명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영도 주민들은 통통배가 다닐 때처럼 삯을 치르지 않고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도 편안하게 육지를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궂은 날씨에도 이제는 걱정이 없었다. 부산과의 왕래가 편리해지면서 영도에 둥지를 트는 사람들은 늘었고, 공장들도 많이 생겼다.
1935년 2월부터 운행된 영도선 전차는 영도 다리가 개통되지 않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극소수 상류층이 타고 다니던 승용차나 택시와 달리 전차는 대다수 영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갈 때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하지만 사라진 통통배가 향수로 남아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한 것처럼 부산의 도시화와 함께 만들어진 편리한 근대적 시설들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화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영도 다리의 화려한 모습은 더욱 큰 소외로 다가왔고, 여전히 고달프기만 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다리 밑으로 왔다가는 배들은 부산 대교의 웅장한 장치에 머리를 숙이지 아니할 수 없겠다. 그러고 고깃배를 타고도 건너가다가 세상이 귀찮아 투신자살자가 속출하던 물결 사나운 바다다. 굉장한 다리 위에서 시퍼런 물결을 내려다보고 죽음-삶에서 저주할 자는 몇이나 될 것이며 투신자살, 그중에도 미인의 투신자살의 사회면 기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일제 강점기 ‘동양 최대의 도진 도개교’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렸던 영도 다리는 6·25 전쟁과 함께 피난민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하였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하늘 높이 치솟던 영도 다리는 1966년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도개를 멈췄다. 교통 체증과 영도 지역의 급수가 문제였다. 다리의 노후화를 이유로 한때 철거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던 영도 다리는 부산 시민의 노력으로 옛 모습은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7월 복원 공사에 들어간 영도 다리는 2013년 11월 27일 옛 도개 기능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재탄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