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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공원에서 청춘을 보내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14
한자 -公園-靑春-
영어의미역 Spending youth in the Garden of Eden
이칭/별칭 에덴 공원 터줏대감 백광덕의 인생 이야기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장소 에덴 공원 -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지도보기

[프롤로그: 청춘과 추억의 대명사, 에덴 공원]

“강변, 강촌 등 지금은 거의 이름을 잊었지만, 맥주는 엄두도 못 내고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갈 차비만 남기고 양심껏 주머니를 털어 노가리·오뎅[어묵]과 함께 막걸리를 시켜 마셨습니다. 계절은 지금쯤, 맵싸한 모깃불 연기에 가끔 눈물을 흘리며 ‘request music’으로 젊음을 함께 태웁니다. 「고래 사냥」, 「왜 불러」, 「화」, 「바다의 여인」, 「가을 편지」, 「listen to the music」, 「rain and tears」, 「the boxer」……. 똥다리에서 뱃사공이 젓는 배를 타고 낙동강 삼각주 갈대밭으로 들어갑니다. 『메밀꽃 필 무렵』보다 더한 아스라한 마음 냄새가 어우러지면서 가슴은 뛰고 …….”[afr56님의 글: 피플475 게시판, 2000. 8. 2]

“당시 호수와 갈대숲으로 둘러싸인 에덴 공원은 젊은이의 쉼터가 되었고, 동동주에 조롱박을 띄운 토속적인 간이주점들은 통행금지에도 아랑곳없는 청춘들의 광장이었다. ……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사이로 황금빛 노을이 저물고, 강변 카페 창가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며 꾸르몽의 「낙엽」을 읊고, 존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를 불러 주던 그녀와의 추억…….”[Daum: 박재영의 블로그, 2012. 6. 25]

1970년·1980년대 부산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낸 ‘과거의 청년’들은 ‘청춘들의 광장’으로 빠짐없이 에덴 공원을 꼽는다. 군사 정부 아래 ‘규격’과 ‘건설’ 등의 합리적·진취적 슬로건에 압사 당하던 그 시절 청춘들에게 간이주점과 막걸리, 음악과 황홀한 풍경이 어우러지던 그곳은 말 그대로 ‘해방구’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억담에는 으레 도심의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린 상전벽해(桑田碧海)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뒤따른다. 한때 청춘의 상징적 장소였던 에덴 공원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쩌다 빛바랜 추억이 되었나. 에덴 공원의 청년 문화를 낳은 주역 백광덕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잃어버린 7080세대의 낭만을 찾아 떠나본다.

[에덴 공원이란 이름의 내막]

에덴 공원은 하단에 있는 하구언 북쪽 산으로, 본래 이름은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곳이라는 의미의 ‘강선대(降仙臺)’였다. 이 강선대 동쪽 맞은편 산은 동아대학교 하단캠퍼스가 자리 잡은 승학산(乘鶴山)이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말기 무학 대사(無學大師)[1327~1405]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피다가 이곳에 이르러 산을 보니 마치 학이 웅비하는 것 같다 해서 승학산이라 했고,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온 곳이라 하여 강선대라 불렀다고 한다.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와 함께 부산의 팔선대(八仙臺) 중 하나로 예부터 명승지였던 이곳은,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군 고사포 진지가 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여기서 김해 공항 터에 있었던 일본군 비행 부대가 지척이고, 이곳만큼 적기의 내습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지금도 에덴 공원 일대에 참호 터로 남아 있다.

에덴 공원이라는 이름은 해방 이후 대청동 부산중앙교회 백준호 장로에게서 비롯되었다. 백준호는 겨울철 사냥을 위해 몇 차례 이곳에 왔다가 그 경관에 반하여 1953년 어머니의 묘를 썼고, 1956년 현재의 에덴 공원 일대 99,000㎡[3만 평]을 구화 3백만 원에 모두 매입하였다. 당시의 이곳 모습을 아들 백광덕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당시 전부 갈대밭이었고, 동아대학교 맞은편에 초가집이 열 몇 채……, 그러니까 여기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그냥 재첩이나 캐서 연명하는 그런 분들이 있었고, 토지가 좋아서 농사를 많이 짓고 그런 곳도 아니었어. 아주 빈촌이었던 거라. 그 대신에 갈대밭 천지라 저녁노을 하나는 기가 막혔지.”

이때 백준호는 『구약 성서』 ‘창세기’ 속 아담과 이브의 낙원인 ‘에덴동산’을 표방하여 ‘에덴원(苑)’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후 인근까지 운행하던 노선버스가 종점을 ‘에덴 공원’으로 표기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 곡절이야 어떠하든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곳 에덴 공원 역시 이웃한 시온섬, 을숙도와 함께 부산의 대표적 데이트 장소, 젊음과 낭만의 이상향이 되었는데, 이에는 그의 아들의 몫이 컸다. 즉, 에덴 공원의 터를 닦은 사람이 백준호 장로였다면, 이 일대를 온통 음악과 청춘의 상징적 장소로 만든 것은 그의 둘째 아들 백광덕이었다.

[에덴동산을 꿈꾸었던 아버지]

백광덕은 1935년생으로, 본래 고향은 김해군 대저면[현재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이었다. 염소를 키워 젖을 짜고 양계를 하며 머슴을 여러 명 데리고 있었을 정도로 큰 농장을 경영하였던 부농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채소 조합을 만들어 조합원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부산으로 가지고 나와 옛 현대 극장 자리에 있었던 청과 조합에 주로 판매하셨다. 이때 중앙동의 한 여관에서 주로 머물게 되었는데, 일본인 여관 주인과 친분이 생겨서 해방되기 1, 2년 전 본국으로 귀환하는 집주인으로부터 그 집을 정식으로 매입하였다. 아마 아버지도 자녀 교육 등의 문제로 부산으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족 전체가 중앙동으로 이주한 것은 해방 직후였고, 그는 영주동 봉래국민[초등]학교에서 몇 개월 다니다가 대청동동광국민학교[현재 광일초등학교로 통합]가 생겨 옮겼다.

40계단에서 내려오다 보면 만나는 전찻길의 모서리 지점, 옛 민주중보사 옆에 그의 집이 있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으로 귀환 동포와 피난민이 끝없이 밀려들던 시절. 주택난, 식수난, 구직난에 유엔탕, 꿀꿀이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했던 그 시절이지만 야시장, 아이스케키[아이스케이크] 가게[삼각당] 등 중앙동에 관한 즐거운 추억도 많다. 그러나 1953년 이른바 ‘부산역전 대화재’로 그리운 추억의 장소는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의 중구 메리놀병원 근처 판자촌에서 시작된 화재가 당시 중앙동에 있던 부산역까지 번졌을 정도이니 중구 일대가 온통 불바다였던 셈이다. 화재 후 아버지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토성동 한국전력 중부산지점 맞은편에 있는 ‘김해정미소’를 매입하였다. 철부지의 투정이지만, 토성동 시절은 중앙동에 비해 모든 것이 초라하였다.

“우리는 중앙동 큰 집에서 살다가, 그 집이 부끄러워서 못 들어가는 거야. 공설 운동장에서 출발한 전차가 대학병원 앞에서 돌아오고, 서면에서 출발한 거는 충무동으로 돌아 들어온다고. 그러면 나는 그게[전차] 지나가고 난 뒤에야 [집에] 쫓아 들어간다고.”

토성동에서의 불편하고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2년 후 하단으로의 이주는 어린 백광덕에게 그저 탈출의 홀가분함으로만 기억될 뿐, 에덴 공원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의식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묘를 쓴 것 외에도 농사를 짓고픈 바램도 있어, 1955년 에덴 공원 밑 본가를 매입하여 아버지가 먼저 와 계시다가, 1956년 에덴 공원 일대의 땅을 모두 매입하고 가족이 모두 이주하였다. 당시 아버지가 법원에 에덴원을 등록할 때 그 설립 목적으로 “첫째 유원지 조성 사업, 둘째 유휴지 개척 사업, 셋째 각종 초목 및 원예 사업, 넷째 가금·가축 사업, 다섯째 경로·육영 사업” 등을 내세웠던 것을 백광덕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목적에 맞게 아버지는 땔감용 벌목을 감시하고, 식목과 화초를 재배하였으며, 낙동강으로부터 수로를 연결하여 못을 만드는 등 정성껏 ‘에덴동산’을 가꾸셨다.

이렇듯 기독교 정신을 몸소 실천한 백 장로는 세 살 때 아버지[백광덕의 할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성장하여 자식 사랑이 극진하였다. 그는 자식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막거나 나무라시는 분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들 백광덕이 아버지의 ‘에덴동산’에서 벌이게 되는 ‘문화 사업’에 대해서도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레코드를 던지고 놀았던 어린 시절]

백광덕은 어린 시절 특별히 음악에 대한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거나 전문적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지금에서 돌이켜 보니 크게 두 번 음악과의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첫 번째 계기는 중앙동 집의 전 주인이었던 일본인이 대단한 클래식 음악광이었던 것. 데생 작업실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화가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전 집주인이 두고 간 레코드[SP음반]의 양이 실로 엄청나, 당시 학예회를 위하여 선생님이 왈츠 곡을 빌려갈 정도였다. 집이 워낙 크니까 여관과 식당을 겸업하였는데, 한쪽에 다방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먼 친척들이 큰 전축이 있고 레코드가 많으니 자연스럽게 음악을 틀어 어릴 때부터 음악을 늘 들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백광덕은 그 음반의 가치는 전혀 모른 채 동생들과 지붕 위에 올라가 레코드를 부메랑 삼아 던지며 노는 것이 그저 좋았다고 한다.

백광덕이 기억하는 또 한 번의 계기는 4·5학년 때의 동광국민학교 은사님에 관한 것이다.

“내가 볼 때는 그 선생님은 한이 맺혔던 것 같애. 안 그러면 해방이 갓 되었는데, [우리말] 동요를 그렇게 [많이] 알 수가 없다고. 「따오기」니 「동무 생각」이니 이런 노래들을 전부 그 선생님께 다 배운 거라고. 우리에게 동요를 얼마나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지금도 나는 그 선생님 존함을 안 잊어 버렸다고. 배상욱 선생님이시라고, 그분을 한 번 뵈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뵐 수가 없네.”

지금도 성함을 기억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당시 음악 선생님은 특별히 민족의식을 강조하지는 않으셨지만, 어쩌면 되찾은 우리의 정서를 노래를 통해 어린 제자들에게 심어 주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이때부터 백광덕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학예회에서 독창을 곧잘 하였다. 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6·25 전쟁 탓에 음악을 접할 여유가 없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합창반 활동을 하면서 음악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레코드를 접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학 진학 후였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탓에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하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전공인 신학 공부보다는 종교 음악에 심취하여 연세대학교 합창단 활동에 열중하였고, 고향에서 부쳐준 하숙비로 레코드를 사는 등의 탈선[?]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에덴 공원 청년 문화의 산실 ‘강변’]

대학 졸업 후 백광덕은 낙향하였다. 당시는 기업체가 없어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던 시대였다. 오죽하면 1960년대 인력 수출 시 독일 광부들 중에서도 대학 졸업자가 상당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1965년이나 1966년 즈음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에덴 공원 북단 갈대밭을 매축하여 그림 같은 외딴집을 짓고 느긋하게 클래식 음악이나 감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취미로 혼자 즐기려 시작한 것인데, 우연히 음악 소리를 듣게 된 여학생이 한두 명씩 놀러 와 고정적 감상자가 생겼고, 경치 좋은 갈밭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는 근황이 알려지자 각처에서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방을 하나씩 틔워 공간을 만들다 보니 급기야 집 전체가 음악 감상실이 되었다. ‘강변 밀크샵’이라는 그럴듯한 간판도 달고, 차도 팔았다. 무대를 만들어서 연주회도 하였다. 고전 음악 감상실 ‘강변’ 카페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탄생하였다.

이어서 형의 삶을 동경하던 동생 성수가 나서 강변 곁에 ‘강촌’이라는 이름의 주점을 개업하였다. 강변과 강촌 모두 넓은 정원을 갖추고 있어 실내외에서 음악을 들으며 차나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으나, 클래식만을 고집하는 강변과 달리 강촌은 팝 음악을 틀었다. 강촌의 전략은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에덴 공원 남단에 ‘강나루’, ‘하늘 목장’, ‘대학촌’, ‘샘터’, ‘초원’, ‘너와 나’ 등 토속 주점이 20여 군데에 이르렀다.

에덴 공원의 주점들마다 젊은이들이 넘쳐 났다. 송창식 등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거리 가득 울려 퍼졌다. 도심에서는 음악을 크게 틀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는데, 에덴 공원에서는 아무리 크게 틀어도 방해받지 않았다. 현재의 부산대학교부경대학교 앞처럼 대학생들이 밀집할 만한 대학가가 아직 형성되지 못했고, 시내 남포동에도 청년들만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던 그 시절, 에덴 공원은 젊은이들이 모여 멋을 내고 낭만을 꽃피울 수 있었던 최초이자 유일한 청년 문화의 상징적 장소였던 것이다. 그 선두에 강변과 강촌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에덴 공원이 청춘의 집결지가 된 것은 술과 음악 이전에 낭만적 풍경 때문이었다. 특히 이웃한 시온섬이나 을숙도와 연계하여 1일 데이트 코스로 각광받았다. 에덴 공원 근처 하단 나루에서 출발하는 쪽닥배를 타고서 을숙도 갈대밭 샛길을 걷다가, 에덴 공원 주위 주점이나 카페에서 커피와 술을 마시며 사랑의 대화를 이어 가는 식이다.

“우리 집[강변]에서는 미팅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 저 쪽에 다른 업소들에서는 전부 미팅이라.”

당시 “에덴 공원이나 을숙도에 안 가본 연인은 연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백광덕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닌 셈이다. 다만 강변은 클래식을 취급했으니, 강촌이나 다른 주점들에 비해 미팅 등 단체 이벤트의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매출 역시 강변보다는 강촌이 월등하였다. 언론인 최화수는 ‘강촌 대 강변은 10:1’이라는 매출의 비교치를 제시하면서 두 카페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당시 에덴 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팝 음악 쪽을 더 좋아했어요. 강촌이 훨씬 사람이 많고, 강변은 순수파들, 클래식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았지요.”

당시 국제신문사에 기자로 근무하였던 최화수는 자칭 타칭 ‘에덴당’의 일원이었다. 윤준홍[전 『부산 매일 신문』 편집국장], 황동규[전 『국제 신문』 이사], 안병화, 변상홍, 최원행 등이 그 멤버로, 말 그대로 에덴 공원에 자주 출입해서 붙은 별칭인데, 처음부터 에덴당을 자처한 것은 아니고 주위에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자칭으로 발전한 것이다. 매일 저녁 간 것은 아니지만, 자주 갈 때는 일주일에 3, 4일 간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국제신문사가 옛 부산시청 근처 대교동에 위치했음을 생각해 볼 때 퇴근 후 버스로 에덴 공원까지 1주에 4회를 왔다는 것은 여간한 애정은 아니라 하겠다. 이렇듯 젊은 월급쟁이들에게도 에덴 공원은 부담 없는 모임 장소였다.

“음악도 있고 저렴하게 술도 한잔할 수 있고……, 다른 곳보다 많이 저렴했지, 안주도 저렴하고. 돈이 없으면 막걸리 한잔하고 강변 거닐기도 좋고.”

“젊은 언론인들이다보니 그날 신문 편집이나 어떤 사안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도 하고……, 건설적인 논쟁을 했어요, 비교적. 당수가 건전한 분이 되어가, 당수는 술을 많이 안 드시고 해서 중간에서 조금 과열되고 하면 브레이크를 걸어 주고.”

이렇게 에덴 공원을 즐겨 찾았던 에덴당이었지만, 일 년에 한 차례 방문이 뜸할 때도 있었다. 바로 장마철이었다.

“우리 집[강변]까지 오려면 흙이 질어서 못 와. 신 들고 와서 물가에서 발 씻고 우리 집에 들어오고, 나갈 때는 다시 신 들고 가서, 본가가 입구에 있었거든? 거기 새미[우물]에서 발 씻고 신 신고 가고 그랬다고.”

백광덕의 말처럼 길이 없어 맨발로 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청춘들은 에덴동산을 부지런히 찾았다. 그 시절의 숱한 아담과 이브에게 최화수가 전하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 한두 가지는 기본일 것이다.

“1960년대에는 하단으로 가는 버스가 지금 동아대학교 쪽으로는 운행을 안 했고 하단 나루로만 가는 버스가 있었는데, 하단에서 시내로 나오는 차는 9시만 되면 끊어졌어요. 데이트하는 사람들이, 주로 남자들 음흉한 놈들은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려 가지고 차가 끊어지면 ……. 그렇다고 거기에 여관이 있고 하는 요즘처럼 그런 것은 아니다 보니까 낭패를 당하지요. 그래서 대티 고개까지 걸어서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겠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믿거나 말거나 상당히 건전하였다.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방]

소박하게 시작했던 백광덕의 갈대밭 외딴집은 이후 클래식 전문 카페 강변으로 발전하여 에덴 공원 청년 문화를 선도했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고급문화의 수요자들이 주로 찾으면서 부산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소형 무대가 갖추어진 실내 음악실, 노송과 등나무가 늘어선 드넓은 정원에는 언제나 부산의 예술인들로 넘쳐 났다.

“요즘에는 학생들이나 예술인들이나 문화를 즐기는 분들이 갈 곳이 많지만, 그때는 웬만하면 군인들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부산의 예술인들이 갈 만한 곳이 없었다고. 그러니까 자연히 갈밭에 조그마한 음악실 같은 게 하나 생기니까 여기에 집결한다고. 여기서 부산사진협회에서는 촬영 대회도 하고, 부산문인협회에서는 모임도 하고, 사진작가들, 그림 그리는 분들, 부산의 예술인들의 집결 장소가 되어 버린 거지.”

백광덕의 말처럼 부산의 예술인들이 갈 곳이 마땅히 없었던 데는 당시 클래식을 취급하는 부산 시내의 음악다방이나 음악 감상실이 문을 닫아가는 추세였던 탓도 있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연유로 강변 카페에는 문인 신진·양왕용, 음악가 오태균(吳泰均)[1922-1995]·안일웅·곽근수, 화가 김종식(金種植)[1918~1988]·신창호(申昌鎬)[1928~2003]·송혜수(宋惠秀)[1913~2005], 연극 연출가 설상영(薛相英)[설령, [1934~2002], 사진작가 허종배 등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또 고전 음악 감상회와 연극 공연, 시화전, 사진전 등이 줄을 이어 열렸다. 부산의 예술인 중 강변에 신세지지 않은 이가 없다 할 만큼 백광덕은 술과 밥은 물론 거처 제공에 공연 티켓까지 많은 것을 끊임없이 베풀었다.

이러한 백광덕의 후한 인심 덕분에 서울에서도 에덴 공원은 몰라도 강변 음악실은 알았다. 오페라의 대모 소프라노 김자경(金慈璟)[1917~1999], 재미 피아니스트 윤기선(尹琦善),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정재동(鄭載東) 등 전국적 지명도의 유명 인사들도 부산에 오면 반드시 들러 며칠씩 신세를 지고 갔다.

1970년도 MBC 제작 부장이었던 설상영은 ‘독립 무대’라는 극단을 창단하여 강변에서 연극 공연을 했는데, 현재의 중견 탤런트 임혁, 전인택 등이 그 주축 멤버였다고 한다. 또 국제신문사에서는 매주 목요 음악 감상회를 곽근수의 해설로 개최하였고, 부산사진협회에서 촬영 대회와 사진전도 자주 열었다. 한편 단골손님이었던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1908~1996]은 서여자중학교 교가를 이곳에서 작사하기도 하였다. 시화전은 ‘전원문학회 시화전’이 최초인데, 이에 대해 최화수는 다음과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 동아대학교 신진 교수가 학생 때 전원문학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창립 시화전을 거기 강변 뜰에서 했어요. 뜰에 소나무가 많았는데 소나무에 시화를 매달아 놓았던 게 지금도 인상에 좋게 남아 있거든요. 소나무 아래에서 음악 들으면서 시화전을 관람했던 게 좋았던 거 같아요.”

강변이 이렇게 부산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되기까지는 백광덕의 인품에 기인한 바 큰데, 이를 입증해 줄 또 하나의 대표적 사례가 ‘유치환 시비(柳致環詩碑)’와 ‘오태균 음악비(吳泰均音樂碑)’를 에덴 공원에 유치한 일이라 하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하는 시 「행복」으로 유명한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은 강변에서 시화전을 하거나 한 인연은 없었지만, 백광덕의 형수님의 친정 아버지가 청마와 사촌 간이라는 다소 복잡한 혈연적 인연이 있다. 1967년 사망 후 시비를 세울 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 부산문인협회에서는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강변에서 개최하게 된 총회에 참석한 요산 김정한 선생에게 백광덕은 이를 에덴 공원에 유치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에 요산 선생이 크게 반가워하자 아버지 백 장로의 동의를 얻어, 1974년 청마 시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오태균 음악비’는 2001년 6월에 유치하였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초대 지휘자를 역임한 전 부산여자대학교 총장 오태균 선생은 강변 시절 연주회마다 참석하여 음악 해설을 맡는 등 인연이 깊었다. 1995년 사망 직후부터 음악비를 세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2001년 당시 부산음악협회 회장이었던 유호석 교수와 협의하여 그 뜻을 이루었다. 이렇듯 에덴 공원 한쪽에 잠든 듯 숨죽이고 있는 2개의 비는 문화 예술인들로 떠들썩했던 강변 카페의 전성기를 보여 주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자산이다.

[잊혀지지 않는 ‘강변’의 추억]

에덴 공원 청년 문화의 산실, 부산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방, 화려한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강변 카페에 백광덕은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어떤 여자 분인데, 그때는 아가씨였겠지? 한 스물 서넛 네댓 되었을까? 그분은 비만 오면 비닐우산 하나 들고 와서 창가에 앉아서 음악만 딱 듣는다고, 별 신청하는 음악도 없이. 그럼 나는 음악이 떨어지기 전에 하나씩 얹어 주고 대충 분위기 맞춰서 음악을 들려주면 적당히 듣다가 또 적당히 가신다고. 그러면 그분을 위해서 비가 오는 날은 내가 자리를 못 비운다고, 혹시 내가 없어서 음악을 못 듣고 가실까봐. 그러면 나는 비가 오면 그분을 위해서 난롯불을 지펴놓아야 하고…….”

이름도 사연도 묻지 않았던 그 여인도 세상 어디에서든 그 시절 강변 카페를 기억하고 있을지……. ‘추억 속의 여인’이란 멜로 요소가 등장하자, 결례를 무릅쓰고서 슬쩍 던져 본다. 선생님, 총각 때 인기가 많았겠습니다?

“여학생들 서울에서 음악 들으러 오면, 우리 집에서 돛단배가 출발하거든, 운하를 파놨으니까. 그래, 돛단배를 태워가지고 을숙도 갈밭으로, 저~ 다대포 앞 모래등으로 한 바퀴 돌아 주면 애들이 마 좋아서 죽는다고. 그러고 나면 서울에 돌아가서 고마운 마음에 엽서를 보내온다고. 그 엽서들이 한 장 한 장 모두 재미가 있었는데…….”

여든의 노인 얼굴이 부끄럼 많은 이십대 청년처럼 붉어진다. 따님의 추천인지, 본인의 선택인지 젊은 감각의 패딩 점퍼 안에 받쳐 입은 스웨터의 곰돌이 문양이 순간 유난히 돋보인다. 선생과 필자는 한바탕 크게 웃는다.

당시 강변에는 손님들의 낭만을 위해 배를 세 대 건조해 두고, 선생이 직접 노를 저어 몰았단다. 여학생들의 엽서처럼 카페 한쪽에 두었던 비망록에도 참 좋은 글귀들이 많았다. 그러나 1971년 1972년 즈음의 화재로 대학 때 사 모았던 레코드가 모두 소실되면서, 이런 추억의 소품들도 몽땅 사라지고 말았다. 레코드도 레코드지만 그 시절 손 편지나 비망록이 지금도 남아 있었더라면, 아마도 큰 추억의 보고가 될 뻔하였다. 감회에 젖은 선생의 추억담이 이어진다.

“강변의 낭만이란 건 말로 표현을 못해, 저녁노을 지면…….”

강변의 추억, 강변의 낭만! 이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갈대 못지않게 노을을 빠트릴 수 없다. 지금 하구언 다리는 본래 ‘똥다리’였다. 당시 서구사하구의 분기점인 대티 고개에 부산시 분뇨 처리장이 있었고, 하단 오거리 옛 사파이어 호텔[현재 본병원] 자리에 분뇨를 정제하기 위한 독이 여러 개 묻혀 있었는데, 여기서 발효된 분뇨는 관을 따라 하단포로 흘려보내졌다. 그러면 대저, 명지, 멀게는 삼랑진 등지로부터 작은 ‘똥배’들이 와 비료로 쓸려고 이를 받아 갔다. 그 관을 따라서 한 사람 걸을 만한 작은 길이 나 있었는데, 비록 똥다리지만 석양에 홀로 길게 늘어서 있는 다리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그 사연을 모르는 외지인들은 탄성을 연발하였다. 강변에서는 지금의 SK 아파트[을숙초등학교]까지 길을 만들어서 똥다리와 함께 산보 코스로 삼았다.

“그믐쯤 되면 명지 쪽에서 게 잡으러 온다고. 그걸 어떻게 잡냐면, 횃불을 만들고 깡통을 하나 차거든? 횃불을 들고 있으면 게들이 전부 갈대에 올라와 있다고. 그럼 갈대를 손으로 훑어서 통에 집어넣는다고. 그 밤경치라는 건 말로 못해. 횃불을 들고…….”

푸르게 성글은 갈대숲 속에서의 게 잡이 횃불이 여름 경치라면, 겨울에는 단연코 철새다.

“겨울 되면 갈대로 지붕도 엮고 한다고 갈대를 전부 베어 버린다고. 그럼 우리 에덴 공원에서나 강변 카페에서 백조나 오리 떼는 그냥 볼 수 있었지. 바로 창문 앞에 있었는데 뭘…….”

그러나 그 말로 표현 못하던 경치도, 강변의 낭만도 이제는 없다. 과거는 푸른 낙동강을 따라 흘러갔고, 추억은 회색빛 아파트 숲에 부딪혀 부서진다.

[강변에서 산정으로, ‘솔바람 음악당’]

1970년대 말이 되면 에덴 공원 주변이 도시 계획에 편입되면서 도로가 닦이고 주택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갈대밭이 매축되어 급기야 강변까지 뜯겨 나갔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5~6년간 숨죽이고 있던 백광덕은 1986년 에덴 공원 꼭대기에 있던 작은 매점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야외]고전 음악실 ‘솔바람 음악당’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갈대와 새들의 천국 강변을 거쳐 수풀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를 찾아 산정에서 ‘솔바람’을 맞게 된 것이다.

1986년 당시만 해도 에덴 공원 산상은 그야말로 우범 지대였다. 공원 밑은 카페와 토속 주점들이 있어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지만, 산 위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뿐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에덴 공원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 그대로 탈선의 장소였다. 백광덕은 일단 사하경찰서에서 설치한 우범 지대 푯말을 철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고사포 진지 터에 시멘트를 깨고 테라스를 만든 후 나무를 심어 야외 음악당으로 개축하였다.

처음 정착의 과정에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다소 과장된 표현 같지만 ‘깡패 새끼들’의 시비로 엄청난 시련의 시간이었다.

“본 에덴원은 공원이 아닌 유원지로 고시된 사유지입니다. 여기에 출입하시는 모든 분들께서는 불필요한 간섭이나 분명치 않은 내용으로 신고·고발 따위의 행위는 삼가십시오.”

지금도 등산로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빛바랜 알림판의 살벌한[?] 문구들은 다만 시련으로만 표현된 숱한 에피소드들의 소산일리라.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강변에서 쓰던 전축이 있을 끼고 판[음반]이 있을 거 아인가배? 스피커가 있을 거고……, 이놈들을 몽땅 가지고 일단 올라왔다고. 어디 놔 놓을 데가 없어서 그냥 스피커니 이런 거를 야외에 두고 음악만 틀고 앉았는 거라. 그러면서 인제 시설을 하는데, 지나가던 젊은 친구 하나가 갈 데가 없다면서 여기 있겠다고 하더라고. 그래 거기다 맡겨 놓고 나는 밑[에덴 공원 아래 본가]에 자러 내려갔다고. 갔다 오니까 스피커하고 앰프가 몽땅 없어졌 뿐는 기라. 그래 한때는 음악도 못 듣고 있었지, 일만 하고…….”

아끼던 장비를 모두 도둑맞았다면 경제적 손실이 엄청났을 텐데, 그 상황에서도 음악을 듣지 못했던 기억부터 떠올리다니, 이 정도면 단순한 취미 차원의 감상이 아닌 중독의 경지가 아닐까? 급기야 딸의 애장품으로 ‘긴급 수혈’을 한다.

“그러다 인제 우리 딸내미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 내가 기념으로 사준 인켈 전축 조그마한 게 하나 있었어. 그걸 들고 와서 음악을 듣는 거라. [웃음] 듣고 있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음악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내가 제법 좋은 걸 구했지. 그래 가지고 인제 정기적으로 음악 감상회도 하고, 연주회도 하고…….”

[솔바람의 전성기]

백광덕이 에덴 공원 위로 터전을 옮기면서까지 음악 감상실을 지키고자 한 이유는 문화의 불모지인 사하 지역에 클래식을 보급하고자 한 강변의 취지를 이어가고, 나아가 주위 학교 학생들을 위해 학습의 연장으로 음악도 듣고 자연과 벗하는 낭만을 일깨우려 함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음악 감상의 취미를 이어가고자 하는 뜻도 컸다.

“여기 부근이 학교 마을이라. 그래서 이제 대학생들을 위해 음악도 들려주고, 중·고등학생들이 너무 클래식이나 우리 가곡 등 음악을 모르니까, 학생들을 위하여 음악을 들려 줄려는 게 첫 번째 목적이었지.”

1975년 서대신동에서 하단동으로 부산여자고등학교가 옮겨 왔고, 1983년에는 건국고등학교영주동에서 이전하였다. 또 1985년 동아대학교 하단캠퍼스가 문을 여는 등 그 즈음 솔바람의 설립 목적을 실현할 만한 외부적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입시 교육에 급급한 당시 교육 현실은 클래식 음악이나 낭만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인근 학교들의 첫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그럼에도 혼자 음악을 들어가면서 음악 감상회나 연주회 등 행사를 꾸준히 꾸려 나갔다. 그러자 엄궁의 모 여중과 동주여자중학교가 이곳에서 매주 음악 특활 수업을 하고, 동아대학교 영문과·불문과·국문과 교수들은 야외 강의 장소로 이용하는 등 서서히 주위의 호응을 얻어 갔다. 동아대학교 체육학과 하형주(河亨柱) 교수는 유도부를 데리고 음악으로 순화되는 유도 특강을 펼쳐 학생들에게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또 1986년 10월 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이 야외 시화전을 여는 등 문화 예술인의 사랑방 역할도 묵묵히 이어 갔다.

여러모로 솔바람은 강변의 명성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있었다. 특히 숱하게 개최했던 연주회들이 그랬다. 연주회 얘기로 옮겨 가자 백광덕은 낡은 앨범 하나를 찾아온다.

“우리 ‘러시아 민속 음악회’도 하였다, 1993년도에. 그 담에 러시안 하바로프스키 심포니 지휘자·첼로·바이올린·피아노 우리 집에 와 가지고 이틀간 연주하고, 바이올린하고 첼로는 한 열흘간 무료로 레슨해 주고 갔다고, 여기서.”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롭다.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야~ 우리 연주회 참 많이 하였다……. 김해문화원에서도 와 가지고 연주회 하고, ‘부산 시민을 위한 음악회’도 하고 ……, 많이 했어, 연주회.”

연주회가 거듭될수록 강변이 아니라 이젠 솔바람이 에덴 공원의 문화로 서서히 자리 잡혀 갔다. 솔바람에서 만난 사람들은 ‘솔바람음악동호회’를 만들었고, 임무웅·전두안·김수용·안봉룡 등 강변 시절부터의 친구들은 ‘강변음악동호회’를 만들어 1993년부터 ‘솔바람 가을 연주회’를 열었다. 바야흐로 솔바람의 전성기였다. 백광덕이 소중히 간직해 온 연주회 팸플릿, 사진 등은 2003년까지 이어진다.

[상전벽해, 청춘의 낭만은 어디로]

2013년 3월 어느 일요일 필자가 늦잠을 즐기고 있던 오전 9시 침묵을 깨는 전화벨이 울린다. 에덴 공원의 백광덕 선생이다. 어제 못다 한 얘기가 있으니 다시 한 번 볼 수 있겠냐고. 그러마고 약속을 드리고 당장 다음날 오후 석양 무렵 길을 나섰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서 에덴 공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가락타운 101동 옆 작은 체육공원 앞에 멈춘다. ‘학사 주점 나그네’, 강변과 솔바람의 전성기에 에덴 공원 주위 숱한 토속 주점 중에서 이제 하나 남은 마지막 학사 주점이다.

필자의 대학 시절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초원’, ‘나그네’, ‘강나루’ 세 군데가 영업 중이었는데, 먼저 초원이 없어지고, 강나루도 2008년 2월 화재로 사라진 후 그 시절 추억은 이제 나그네만 오롯이 남아 있다. 1980년대 후반 학번의 전설 같은 선배들을 통해 1970년·1980년대 대학 문화를 귀와 머리로만 배운 1990년대 중후반 학번인 필자도 네댓 번 저 학사 주점에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제멋대로 생긴 나무 테이블, 촛불과 피아노, 장작 난로, 구석구석 빼곡한 방명록 ……, 빛바랜 나무판자에 ‘학사 나그네’라 손으로 쓴 간판이 걸린 주점의 입구는 차라리 푸른 사철나무가 빽빽이 둘러 있어 초라함을 면하였다. 이제 갈대도, 철새도, 낙동강과 석양도 직접 볼 수 없는 도심 속의 섬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어쩌면 여기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강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아닐까 싶다.

나그네에서 을숙도초등학교 방향으로 큰길을 따라 두 블록을 직진한 뒤 우회전 후 작은 삼거리 골목에서 다시 좌회전하면 길메리유치원이 보인다. 강변이 위치했던 곳이다. 다시 돌아서서 하신번영로 312번길을 만나 에덴 공원 입구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동생 백성수가 경영했던 강촌이 나온다. 그 옛날 그 자리, 그러나 지금은 인근의 유명 레스토랑이 되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레스토랑 한쪽에 갈대를 꺾어다 추억을 되살려 보고자 하지만, 소소한 재미에도 불구하고 어림없다. 다시 에덴 공원 산 밑을 따라서 걷는 길, 여기 어드메 즈음 팝 음악과 통기타 소리를 뿜어내던 주점이 즐비했을 테지만, 그 시절 낭만은 오간 데 없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말로 못하던’ 경치가 이렇듯 흔한 도시 변방의 후미진 골목으로 변해 가던 순간 그 상실감이 어떠했을까? 에덴 공원 터줏대감이 나지막이, “도리가 없는 기라, 도리가…….”라고 토하던 신음 같은 한숨이 발끝마다 채였다.

이른 봄꽃이 산책로마다 수줍게 맺혔지만 아직 피부에 와 닿는 바람 끝이 매서운 3월 초, 필자를 위해 어르신이 ‘솔바람 음악당’ 문 앞에 나와 계신다. 천박한 필자의 귀로 들어도 황홀했던 클래식 선율에 약속 시간을 살짝 넘긴 줄도 몰랐다. 필자와 선생의 두 번째 만남이다.

[이제야 돌아보는 청춘의 한 시절]

첫 만남에서 못다 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해 본다. 처음 뵈었을 때의 어색함이 한결 가셔서 대화는 일사천리로 추억 어드메 즈음을 헤맨다. 오늘은 지난번에 뵙지 못했던 사모님이 언뜻 보이길래 동석하시기를 몇 차례 권해도 한사코 거절하신다. 그 동안의 인생 이야기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던 사모님과의 연애담이 문득 궁금해진다. 저렇듯 음악을 좋아하고 한평생 낭만을 쫓으며 사셨으니, 연애 시절 근사한 사연 하나 없으실까.

“사모님은…… 마누라는 뭐, 얘기할 것도 없다. 은슨시럽다[지긋지긋하다] 칸다, 남애[남자]가 여서 음악 듣고 앉았으니까.”

조용하던 카페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마누라는 평양 출신의 피난민으로 밀양에서 컸으며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노라는 말씀만 하시고, 기대했던 근사한 연애담은 애초부터 여지없이 싹을 잘라 놓는다. 경상도 남자의 흔한 표현력 결핍, 그럼에도 두 분의 만남에 무언가 로맨틱한 구석은 없었을까? 필자의 집요함에 풀어놓은 결혼 과정은 이렇다. 해방 전 선생의 장모님이 일본 도시샤대학 재학 시절 조선인 교회 주일 학교 교사로 봉사했는데, 그 교회에 후일 대청동 중앙교회 목사가 되신 분이 계셨다. 그 인연으로 두 분이 알고 지내시다 해방 후 부산에 피난 와 계시던 장모님이 딸 결혼 문제를 목사님께 상의를 드렸고, 목사님의 추천으로 현재의 사모님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누라는 밀양 아랑아가씨 출신이라, [그럼 남원 춘향이랑 맞잽이 아입니까, 대개 미인이셨는갑다] 그래도 내보다 못해 허허.”

생업은 도외시하고 그저 음악을 듣고 함께 나누며 사는 것에만 몰두해 온 선생의 삶을 지금껏 곁에서 지켜보며 계셨던 사모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슬쩍 사모님과 딸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내비치신다.

“실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자식들이 고생이라. 딸내미 고등학교 댕길 때 공납금을 못내 가지고, 전기 요금 못내 가지고 전기 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래도 웃고 술 마시고 즐기는 거지 뭐.”

유복한 성장 환경 탓에 생활고를 겪었다는 말이 뜻밖이다. [그러면 생활은 사모님께서 다 하셨습니까? 여기 가게 경영해서?]

“아니 집사람 여기[솔바람 음악당] 온 건 몇 해 안 됐고, 그전에는 내가 동아대학교 학생을 아르바이트로 써서 다 했는데 뭐. 느그들 벌어가 쓸 만큼 가져가고 전기 요금·수도 요금 내고, 그러고도 몇 푼 남거든 아저씨 다오. 그라고 여기 모여서 매일 음악 감상하고 술 먹기 바쁘지, 돈 되는 일이 없다고.”

정글과도 같은 고도 자본주의의 생존 경쟁에 떠밀린 초라한 가장인 필자에게는 옛 시조나 수묵화에서나 보던 안빈낙도의 삶이 바로 이런 것인가 생경스럽기만 하다. 돈이 없어 그 아끼던 전축 팔아먹기도 일쑤, 전기 요금이나 등록금은 고사하고 한 끼의 밥값도 없어 소주로 달랠 때도, 음악만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비가 오던지 하면 뜨끈한 국밥 생각이 난다고. 돈 오천 원이면 국밥 한 그릇 묵는데, 솔직히 그게 없을 때가 있다고. 그럼 소주는 언제든지 있응께, 말러(Gustav Mahler) 한 곡조 트자 놓고 소주 한 병 비우고 나면 후련하고 이런 좋은 세상이 없다고.”

“여태까지 나는 예금 통장이라고는 없었어. 왜 없냐면, 예금할 게 있으면 친구들하고 나눠 쓰지. 내가 언제 예금 통장을 만들었냐면, 65세인가 몇 살 때부터 구청 통해서 교통비 주는 거, 그거 때문에 처음 통장 만들었지, 그전까지는 통장도 없었다니까.”

그래도 굶어본 적도 없고, 누구 아는 사람한테 술 한 잔 얻어 먹어본 일도 없다는 그는 언제나 베푸는 삶만을 살아왔다. 강변과 솔바람을 거쳐 간 그 많은 문화 예술인들을 불평 한마디 없이 먹이고 입히고 재웠던 것은 이러한 그의 확고한 인생철학 탓이다.

“친구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게 나에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안 돌아오면 섭섭해지니까. 있는 날까지 그냥 베푸는 거지.”

그렇다고는 해도 그 오랜 시간 강변에서 솔바람까지 하나같이 이러한 삶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한 번이라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으로 수익을 남기는 안정적인 삶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딱 하나 사명감이나 의무감 같은 게 있어야 돼. 지금도 오다보면 길가에 음악 있지? 이거를 내가 새벽 6시만 되면 길가에 음악을 깔아 놓는다고. 그러면 어떤 분들은 산책하다가, 참 이상하다 이런 데에도 음악 나오는 데가 있구나 하고 가만히 음악을 듣고 계시는 것을 지나가다 보면 그것보다 흐뭇한 게 없다고.”

혹시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매일 같은 시간 음악을 들으며 운동하는 사람들이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될까봐 병원에 있을 때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자기 전까지는 꼭 음악을 틀어 놔라.” 가족들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을 정도로 그는 이러한 사명에 충실하였다. 따라서 그의 부재 시에도 결코 음악이 끊기는 적이 없었다. 이렇듯 한평생을 음악 속에 묻혀 그 아름다움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온 백광덕, 그에게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음악이나 음악가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음악이 좋다 꼭 못을 박을 수는 없어요. 이제는 소품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왜냐하면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언제는 대곡을 듣다가도 인제는 소품들을 들을 때 제일 마음이 편해. 처음 음악을 들을 때는 베토벤이니, 모차르트니 쭈욱 들어가다가 시벨리우스니 하면서 깊이 들어가다가, 다시 첫 음악 바하로 들어갔다가, 이제 대충 클래식 음악을 들을 만큼 들었다고 생각되면, 이제 각 나라의 민속 음악 안 있어? 우리나라로 치면 「아리랑」이나 「도라지」라든지, 그런 민속 음악으로 들어가지.”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 에덴 공원에 정착하여, 1960년대 중반 음악 감상실을 시작했고, 중간 휴식기도 있었지만 근 50년을 쉼 없이 이곳에서 음악과 함께 해왔다. 그에게 에덴 공원, 그리고 강변과 솔바람이란 어떤 의미일까?

“사하 문화의 시발지라고 보면 돼, 강변이. 왜냐하면 그때는 문화라는 것이 전혀 상상이 안 되던 곳이라. 그러니까 내가 클래식 음악을 보급하게 되면서 부산의 예술이 여기 다 모이니까, 당시는 서구출장소에 불과하던 볼품없던 이곳에서 내가 클래식 음악을 틀었으니까, 조금 돌은[미친] 사람이지. 허허”

[솔바람에 다시 바람이 불까]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솔바람 역시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하였다. 솔바람을 귀한 문화의 장으로 아껴 주었던 이들이 학교에서 떠나고, 세월에 따라 유행의 흐름도 바뀌었다. 또 무엇보다 항상 청년으로만 머물러 있을 것 같았던 선생의 건강이 예전만 같지 못하였다. 그는 몇 차례의 항암 치료와 척추 수술을 반복했는데, 평생 지켜 온 신앙의 힘과 함께 집에서 가져간 음반을 들으며 병마와 싸웠다.

“옛날에 가지고 있던 레코드들은 이제 몸이 안 좋아서 모두 정리하고 남 주고……. 나는 [몸이] 재생이 안 될 줄 알았어……, 큰 스피커도 다 정리해 버리고 이제 나 혼자 조용히 들으려고 옛날에 쓰던 전축 조그만 거 하나 닦아가지고 듣고. 그러자 주(경업) 선생님이 한 번 오셨는 거라. 왜 이러십니까 형님, 이 아까운 거를……, 이거 다시 한 번 살려 보입시다…….”

찬란했던 그 시절의 숱한 친구들 중 하나인 부산민학회의 주경업은 선생의 두 딸[백성혜·백성경]을 만나 솔바람을 반드시 살려보자고 약속하였다. 거기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의 호른 연주자 박의근이 의기투합하여 2012년 4월부터 11월까지 매달 1회, 혹은 2회 음악회를 진행하였다. 솔바람의 의미심장한 부활이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 2013년 10월에도 ‘제2회 고 오태균 추모 음악회’를 개최하려고 준비 중이다. 클레이 공예가인 작은 딸 백성경의 계획이 다부지다.

“아버님이 이제 연세가 있으시니까, 제가 아버님께서 일궈 놓으신 터전을 이어받아 여기 오시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면서, 아이들에게는 체험하는 공간으로 바꾸려고요. 에덴 공원하면 어른들은 음악도 듣고 차도 마시고, 애들은 뛰어놀고 체험하고, 그런 공간이다 하는 것을 심어 주고 싶습니다.”

현재 사하구에서도 나름의 여러 가지 계획이 있다. 2012년 11월에 발표된 계획에 의하면 ‘서부산권 문화 관광 거점화 사업’의 일환으로 에덴 공원을 ‘자연과 사람, 예술이 공존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에덴 공원의 의의를 살려 문화 예술과 청년 문화에 초점을 맞춘 여러 가지 부대시설과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라 하니 시들한 에덴 공원에 다시 르네상스가 도래할까 기대된다. 그러나 사하구에서는 사업 규모가 커 시비나 국비로 예산을 확보한다는 구상인데, 당초 계획이었던 2013년 착공, 2015년 준공은 이미 물 건너 간 상황이다. 이러한 장황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정작 백광덕 선생과 딸들은 그냥 이대로 아버지 백 장로와 당신이 가꾼 이 터전을 지키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내가 몇 년까지 더 견디고 있을지 모르겠지마는, 있는 날까지는 이래 음악이나 듣고 또 들려주고 이럴 거라. 또 주민들이 와서 운동이나 하고…….”

두 차례 두어 시간 동안의 대화를 통해 에덴 공원의 반백 년을 넘나든 필자 역시 어떤 식의 개발 계획이든 선생과 그 시절 청춘들의 소중한 추억의 장소를 가급적 지켜줄 수 있는 배려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9.04 불필요한 관련 링크 삭제 대저면 관련 링크 삭제
2017.05.08 인명 수정 주성혜 -> 백성혜. 주성경 -> 백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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