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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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致環 |
영어음역 | U Chiwhan |
이칭/별칭 | 청마(靑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훈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교육자.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청마(靑馬). 아버지는 유준수이고, 어머니는 박우수이다. 8남매 중 둘째로, 형은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이다.
[활동 사항]
유치환(柳致環)[1908~1967]은 통영 출신으로, 1922년 통영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풍산중학(豊山中學)에 진학하였다. 이때 박명국(朴明國), 김거주, 최두춘(崔杜春), 유치진 등과 문학 동인회 ‘토성’을 조직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년도 안 되어 중퇴하였다.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같은 해 시 동인지 『생리』의 발간을 주관하였다. 중국 동북[만주 지역]으로 옮겨 갈 때까지 부산 화신 연쇄점에서 근무하였다.
유치환은 1940년 가족을 데리고 만주 옌서우 현[煙首縣]으로 이주, 농장 관리인으로 일하다가 광복 직전 귀국하였다. 1945년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직후 생명에 대한 열애를 노래하여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문총구국대[종군 작가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후 경주고등학교, 경주여자중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7년 2월 13일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생명 시인으로 불린 유치환은 허무와 의지를 노래한 철학적인 시 외에 사회를 비판한 남성적인 시, 아름답고 서정적인 연시도 많이 썼다. 1931년 『문예 월간』 2월호에 「정적」을, 1934년 『신동아』에 「빌딩」 등 5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37년 첫 시집 『청마 시초』[청색지사, 1937]를 시작으로 『생명의 서』[행문사, 1947], 『울릉도』[행문사, 1948], 『청령 일기』[행문사, 1949], 『보병과 더불어』[문예사, 1951], 『청마 시집』[문성사, 1954], 『유치환 시선』[정음사, 1958],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동서문화사, 1960], 『미루나무와 남풍』[평화사, 1964], 시 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평화사, 1965] 등의 시집을 냈다.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산호장, 1953] 『동방의 느티』[신구문화사, 1959],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신흥출판사, 1960] 외에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평화당]와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 등이 있다. 『생리』[1937] 외에 『시와 시론』[1952], 『청맥』[1955] 등의 동인지도 발간하였다.
[묘소]
유치환의 묘는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지전당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47년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6년 3월 제1회 경상북도 문화상, 1958년 2월 아시아재단 자유 문화상, 1962년 7월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4년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부산 용두산 공원, 부산진역 앞 수정 가로 공원, 통영 남망산 조각 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