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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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廷漢 |
영어음역 | Gim Jeonghan |
이칭/별칭 | 요산(樂山),목원(牧園),목원생(牧原生),김추색(金秋色),이오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팔송로 56-5[남산동 663-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욱 |
[정의]
부산 출신으로 현대 시대의 질곡과 민중의 고통을 소설로 형상화한 민족 문학인.
[활동 사항]
김정한(金廷漢)[1908~1996]은 본관이 김해(金海)이며, 호는 요산(樂山)이다. 1908년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남산리[현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19년 사립 명정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1923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6개월 만에 부산의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동래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 휴학에 참가하면서 문학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1928년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으로 임용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0년에 와세다[早稻田]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시절 독서회에 가입하면서 이찬·안막·이원조 등과 어울리며 계급 사상을 자각하기 시작하였으며, 1931년 11월『동지사』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편집부 임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32년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하여 양산농민조합의 활성화를 위한 사업에 참가하였다가 피검되어 학업을 중단하였다.
이후 김정한은 1933년 9월~1940년 2월 남해공립보통학교와 남명심상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고, 1940년 『동아 일보』 동래 지국을 운영하는 한편 1940년 11월부터 광복 직전까지 경남도청 상공과 면포조합 서기로 일하였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산지부장과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1947년 이후 부산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0년 4월부터 1974년 2월까지 부산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부산대학교 교수 시절인 1954년 부산대학교 교수인 이종률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58년 『경남도지』 편찬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62~1964년에는 『부산 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1967년 이후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 1974년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 고문, 1976년 국제엠네스티한국위원회 고문, 1985년 5·7문학협의회 고문,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회장과 『한겨레 신문』 이사, 1994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예 회장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1928년 이후 김정한은 목원(牧園), 목원생(牧原生), 김추색(金秋色) 등의 필명으로 『조선 일보』, 『대조』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시와 시조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 『문학 건설』에 첫 작품으로 「그물(罠)」을 발표하면서 소설로 전환한 뒤 1936년 『조선 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사하촌」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섰다. 요산 문학은 작가의 삶과 긴밀하게 연관된 체험의 서사화, 곧 경험적 글쓰기가 핵심이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되살린 자전 소설 「농촌 세시기」, 1928년 울산 대현공립보통학교에서 조선인 교원 연맹 결성을 도모하다 피검된 사건을 소설화한 「어둠 속에서」, 1932년 양산 농민 봉기 사건의 체험을 토대로 한 「사하촌」, 1939년 남명보통학교에서 일본인 교장에 대한 불만을 비틀어 표현한 「낙일홍」, 1940년 『동아 일보』 동래 지국을 맡아 구독자를 모으다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된 일을 그린 「위치」, 해방 후 좌익계 사회 문화 단체에서 활동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옥중 회갑」과 「설날」, 6·25 전쟁 직후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한 체험에 바탕을 둔 「슬픈 해후」, 4·19 혁명 이후의 강연 활동과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피검의 경험을 녹여 낸 「과정」 등이 김정한의 삶과 함께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절필기로 규정한 일제 강점기 말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도 첫 소설집 『낙일홍』[1956]을 펴낼 만큼 문학적 열정이 컸을 뿐만 아니라 창작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특히 4·19 혁명 시기에는 ‘이오산’이라는 필명으로 다수의 산문을 발표하여 국가 권력에 맞선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부산대학교 교수로 안착한 1965년 이후 창작 활동은 서사의 폭과 깊이를 더하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모래톱 이야기」, 「지옥변」, 「인간 단지」 등에서는 소외된 민중의 삶을 전경화하여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경계하였다. 그리고 민중의 힘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 낸 과정을 그린 장편 소설 『삼별초』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 시기 ‘오래도록 지조를 지키며 살아라’는 아호의 뜻처럼 분단 극복과 민주 회복을 위한 사회 실천에도 앞장섰다.
이처럼 요산 문학은 근대사의 질곡 속에서 국가 권력의 폭력에 신음하는 민중의 삶과 부당한 현실에 눈길을 두었던 만큼 민중에 대한 연민과 연대 의식이 잘 구현되어 있는 셈이다. 민족사의 질곡과 소외된 주변부 인간의 현실에 맞서 싸웠던 지식인이자 평생 지역에서 삶의 텃밭을 가꾸었던 요산 김정한, 그 또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1996년 11월 향년 89세로 사망하였다.
소설집으로는 『낙일홍』[세기문화사, 1956], 『인간 단지』[한얼문고, 1971], 문고판 『수라도·인간 단지』[삼성출판사, 1973], 『김정한 소설 선집』[창작과비평사, 1974], 문고판 『수라도』[삼중당, 1975], 『제3병동』[창작과비평사, 1976], 문고판 『모래톱 이야기』[범우사, 1976], 문고판 『사밧재』[동서문화사, 1977], 문고판 『인간 단지』[동서문화사, 1977], 증보판 『김정한 소설 선집』[창작과비평사, 1983], 자선 대표작 『낙동강』1·2, 『삼별초』[시와 사회사, 1994], 조갑상·황국명·이순욱 엮음, 『김정한 전집』1~5[작가마을, 2008], 최미진 엮음, 『사하촌』[현대문학, 2011]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는 『낙동강의 파숫군』[한길사, 1978], 『사람답게 살아가라』[동보서적, 1985] 등이 있다.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신불산 공원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36년 『조선 일보』 신춘문예에 「사하촌」이 당선되었다. 1959년 12월 제3회 부산시 문화상[문학상], 1969년 10월 중편 「수라도」로 제6회 한국 문학상, 1971년 6월 제13회 눌원 문화상, 1971년 11월 제3회 문화 예술상, 1976년 10월 은관 문화 훈장 등을 받았다. 이 외에 1978년 8월 ‘요산 김정한 문학비’[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성지곡 어린이 대공원]가 제막되었고, 1984년 10월 요산 문학상이 제정되었다[제1회 수상자 소설가 하근찬].
1994년 8월 심산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 8월 ‘김정한 문학비’[범어사 순환 도로]가 제막되었다. 1998년 10월 제1회 요산 문학제를 개최하였고, 2003년 6월 생가[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661-2번지]가 복원되었다. 2006년 11월 요산문학관도서관[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662번지]이 개관하였고, 2008년 10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요산 문학관 뜰에 요산 김정한 선생 흉상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