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700
한자 吳泰均
영어음역 Oh Taegyun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음악가
성별
대표경력 부산여자대학 총장
출생 시기/일시 1922년 4월 27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51년~1952년 - 일본 동경국제음악학교에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1월 -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부산에 정착
활동 시기/일시 1953년 9월 - 현악 4중주단 창단
활동 시기/일시 1953년~1973년 - 부산대학관현악단 창설 지휘
활동 시기/일시 1955년 1월 7일 - 배영식과 2인 음악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55년 5월 - 제2회 바이올린 독주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부산교향악단 창단 지휘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부산시립교향악단 창설 및 초대 지휘
활동 시기/일시 1958년 8월 - 문화 공로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2년 11월 - 부산시 문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0년 8월 - 문화 공로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2년~1992년 - 부산여자대학 음악과교수·교학처장·대학원장·음악대학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92년 3월~11월 - 부산여자대학 총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95년 4월 29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1년 6월 30일 - 음악비 건립
출생지 충청남도 공주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학교|수학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 503-15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동경국제음악학교 - 일본 도쿄
활동지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 63번길 2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여자대학 -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700번길 140지도보기
관련 유적 에덴 공원 -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786-1지도보기

[정의]

1950년대 이후 부산 음악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음악가이자 음악 교육자.

[개설]

오태균(吳泰均)[1922~1995]은 1922년 4월 27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아버지 오영세(吳寧世)와 어머니 이신덕(李信德)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보였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33년에 레코드 가게에서 우연히 흘러나와 듣게 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평생토록 사랑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오태균을 기리는 오태균 음악비에도 「운명」의 악보가 그려져 있다.

[활동 사항]

1947년경 부산제2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출하였는데, 그때 마침 고려교향악단이 해산되고 지휘자 임원식·김생려에 이어 미국인 로프 쟈코비가 이끄는 국립서울교향악단이 조직될 무렵이었다. 오태균은 당당히 오디션을 통해 국립서울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자리를 잡았다. 1948년에는 대전 공회당에서 첫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그 후로 6·25 전쟁 중에도 지휘자 김생려를 주축으로 하는 해군 정훈음악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4 후퇴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부산 피난 시절, 오태균의 재능을 인정한 해군 관계자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국제음악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일본 유학을 한 3년 동안 바이올린과 지휘법을 배우면서 폭넓게 클래식의 세계를 섭렵하여 내실을 다졌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오태균은 부산 음악 문화의 초창기였던 1950년대에 다양한 음악 활동을 통해 부산 음악 문화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1953년 부산의 첫 실내악단인 ‘현악 4중주단’을 창단하였는데, 이때 제1바이올린은 오태균, 제2바이올린은 홍선하, 비올라는 김진문, 첼로는 장규상이 맡았다.

1955년에는 전쟁 후 처음으로 오태균이 함께한 현악 4중주 연주회가 대청장 예식장에서 열렸다. 그 후로 오태균부산대학교 대강당, 남성여자고등학교 강당 등 미흡한 시설 조건 속에서도 다양한 연주회를 꾸준히 이끌어갔다. 같은 해 오태균과 클래식 기타의 중심적 인물인 배영식의 조인트 리사이틀이 남성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특히 여기서 연주된 그라리아니의 「소나타 1번 D장조」 전 3악장은 한국 최초의 공연이었다. 1955년 5월에는 부산 공회당에서 제2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오태균은 다양한 연주회와 함께 제자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4년에는 부산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음악 미학과 예술학을 강의하였는데, 당시 부산대학교에는 음악학과가 없었다. 오태균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악기를 다룰 수 있는 학생을 모아 1955년 10월 부산에서 규모가 갖추어진 첫 관현악단인 부산대학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이렇게 오태균은 부산의 초기 관현악 운동을 주도하였고,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1957년 8월 12일에 부산교향악단이 탄생하였다.

이어서 12월 4일과 5일에 제2회 정기 연주회를 가짐으로써 교향악 운동에 대한 강한 의욕을 나타내었다. 부산에서 발간되는 일간지에는 연일 부산교향악단의 창립과 연주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는 등 대서특필하였고, 평론가 유신(劉信)은 「결합하면 성과는 약속 된다」[『부산 일보』, 12월 15일자]라는 글을 통해 그 성과를 높이 평가하였다.

1962년에는 5년간 이끌어온 부산교향악단이 부산시립교향악단으로 거듭 나게 되었는데, 이때 초대 상임 지휘자를 맡아 9년 동안 연 평균 6회의 연주회를 갖는 등 모두 53회의 정기 연주회를 개최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여 주었다. 오태균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지휘자로 왕성한 음악 연주 활동을 하면서 날카로운 비평 활동도 하였다. 동시에 음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한 음악 감상회를 열고 해설을 맡기도 하였다. 1954년부터 1970년까지 중구 광복동에 주로 위치했던 음악실인 칸타빌레·망향·클래식·아폴로·백조 등에서 20년 가까이 300여 회의 정기 명곡 감상회를 열어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부산시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약 9년 간 활동한 후에 후배 한병함에게 길을 열어주고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 음악과 교수로서 후진 양성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부산여자대학 교학처장[1977년~1979년]과 대학원장[1985년~1987년], 학장[1988년~1992년]을 거쳐 초대 총장[1992년 3월~11월]을 맡아 대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오태균은 대학에서 실내악과 관현악 교육에 열정을 바쳤다. 정기 관현악 연주회를 갖는가 하면 직업 음악인으로 구성된 부산까메라타앙상블을 창단해 부산 악단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지칠 줄 모르고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62세에는 미국 유니온대학에서 철학 박사[1984년 5월] 학위를 취득하였고, 1992년에는 대학에서 총장직까지 맡아 교육 행정 일선에서도 적지 않은 공적을 쌓았다. 1995년 4월 29일 지병인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오페라의 사적 개관(史的槪觀)」[『국제 신보』, 1957. 5. 6]·「세기의 거성은 가다」[『국제 신보』, 1957. 7. 14]·「방송 음악의 갈 길」[『국제 신보』, 1959. 9. 29]·「교향악 운동의 방향-시민 생활의 정서 유지를 중심으로」[『부산 일보』, 1961. 3. 6]·「유현한 천사의 노래」[『국제 신보』, 1962. 5. 6]·「이상근 씨의 논평을 박(駁)함」[『국제 신보』, 1963. 2. 2]·「수식 없는 음악 어법」[『부산 일보』, 1963. 9. 21]·「광명에의 찬가」[『국제 신보』, 1967. 11. 25]·「열과 성의의 결정(結晶)」[『국제 신보』, 1967. 12. 2]·「매혹의 서정시」[『부산 일보』, 1967. 3. 16]·「미국의 현대 음악」[『부산 일보』, 1968. 6. 22]·「눈부신 교향악 운동」[『국제 신보』, 1968. 7. 6]·「명맥 이어온 활동」[『부산 일보』, 1969. 12. 19]·「잡음은 공해다[유신 씨의 망언에 답함]」[『국제 신보』, 1970. 7. 7]·「역성미(力性美) 무너뜨린 아쉬움」[『부산 일보』, 1971. 6. 2]·「뿌리내리는 음악 풍토-하루 새 부산에 세 음악회가 열렸다」[『부산 일보』, 1971. 6. 30]·「젊음이 과시한 서정미」[『부산 일보』, 1974. 4. 23]·「나이를 넘어선 열연」[『부산 일보』, 1974. 5. 21]·「성숙된 음악관, 악곡의 구석구석까지 관조」[『국제 신보』, 1974. 5. 25]·「명쾌한 가연(佳演)」[『부산 일보』, 1974. 7. 16]·「회심(會心)의 열연」[『부산 일보』, 1975. 4. 8]·「기적의 전주곡들」[『부산 일보』, 1975. 8. 23]·「의욕찬 새 예술관 정립」[『국제 신보』, 1976. 4. 30]·「울면서 부른 애국가」[『국제 신보』, 1976. 7. 8]·「우아하고 유현한 음율」[『국제 신보』, 1980. 11. 28]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58년 8월에 경남지사로부터 문화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4년 6월에는 부산시 문화상, 1970년 8월에는 내무부장관 문화 공로상, 1987년 8월에는 문화부장관 문화 공로상, 1990년 5월에는 대통령 수여 국민 포상을 받았다. 2001년 6월 30일에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 있는 에덴 공원오태균 음악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