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53 |
---|---|
한자 | 影島-造船所-大平洞깡깡이아지매들-人生 |
영어의미역 | The shipbuilding years in Yeong Island and the life of the iron plate-hammering women in Yeongdo Daepyeong-dong |
이칭/별칭 | 선박 수리 노무자 |
분야 | 생활·민속/생활,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하 |
[깡깡이 아지매란?]
‘깡깡이 아지매’는 철로 만들어진 배의 노후를 방지하기 위해 2년여에 한 번씩 배 밑창이나 측면에 붙은 조개껍데기나 녹을 떨어내는 잡역부의 일을 하는 아낙들을 일컫는 말이다. “부산에 가서 깡깡이 질이나 하여 보세”란 노랫말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부산 영도에 나타난 것은 일제 강점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직업군을 이룬 것은 제3 공화국의 조선(造船) 장려 정책으로 신조된 철강선이 늘어난 1960년대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존재가 생활사 아카이브에 저장될 만한 가치를 갖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기능적 역할보다 단순 잡역부로 일하면서 가난을 이겨 낸 그들의 억척스런 삶이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 대다수는 피난민의 후예이거나 도시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거나 농어촌을 떠나온 실향민들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배의 녹을 떨어내는 단순한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노역의 대가로 받은 1960년대의 일당 1천 원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돈으로 가장을 대신해 간신히 가족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는 있었으나 살림을 일구거나 자식을 번듯하게 교육시키기에는 힘이 부족하였다. 결국 가난은 대물림되고 ‘깡깡이 아지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빈곤 2세대를 이루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해도 40여년 가까이 젊음을 바쳐 뱃전의 철판을 두드리는 일을 하다 청각마저 잃은 이가 적지 않은 깡깡이 아지매의 삶의 의지는 후대의 귀감이 되고 남을 것이다.
[영도조선소의 유래]
부산의 절영도는 일본의 조차지로 전락한 곳으로, 러시아가 이곳을 해군 기지로 설정한 1895년(고종 32) 이후부터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결국 일본에 의해 조선은 합방을 맞이하게 되면서 절영도는 점차 일본인의 주된 소유지로 변하게 되며, 일제의 정책에 의해 절영도는 동래부에서 부산부로 편입된다.
한일 합방이 된 이후인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한국의 전통적 조선소와 새로 침입한 일본인 조선업자의 조선소가 서로 병립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선박 건조의 실적 면에서는 한국의 업체들이 일본인을 압도했지만 전통적 조선 방식을 묵수하는 한국의 전근대적인 업체와 명치유신 이래로 새로운 기술을 체득한 일본의 근대적 업체는 그 역량차가 점차 커져 간다. 특히 1887년(고종 24) 다나카 조선소가 영도에 들어선 것을 비롯해 일본형선(日本型船)의 보급과 발동기선(發動機船)의 등장으로 머잖아 일본인 업체들이 조선업을 독점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이전, 영도 쪽의 영선동 2가와 그 대안(對岸)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남포동 4가[영선동 2가에서 약 1.5㎞ 떨어진 곳]인데 그 사이의 바다에는 좁다란 대풍포(待風浦)가 있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 남항동 1가, 2가, 3가와 대교동 1가에 해당되는 넓은 지역은 대부분 바다였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육지 사이에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설립되었던 조선소들은 거의가 영도의 영선동에 집중해 있었는데, 이곳이 소형 조선소의 단지로서 적합했던 것은 육지 깊숙이 파고 들어온 바다와 갯벌 지역으로 인해 풍랑의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지금의 남항동 1~3가와 대교동 1가 일대는 당시 영선동에 속했음]. 이러한 지형적 요인뿐 아니라도 일본인 조선 업체들이 조선 반도 각지로 진출하기 전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산에 먼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하였다.
1920년대 이래 부산 시내 각처에서 대규모 매립 공사가 성행(盛行)하여 영도에서도 북부 봉래동 5가와 청학동 일부에 걸쳐 산지 개간과 임해 호안 공사(臨海護岸工事)가 시공됐다. 그리고 이는 석유 저장 기지와 뒷날 명실상부 한국 조선 근대화의 산실로서 큰 역할을 한 조선중공업[지금의 한진중공업의 전신]의 터전이 되었다. 이렇듯 영도는 조선소가 입지하기 좋은 자연 지형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형 어선의 보급이 더욱 고조되고 동력 어선도 일반화되었던 1930년대의 상황은 ‘한국 조선 업계의 1차 부흥기’였다. 선박 엔진 같은 핵심 부품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지만 주요 조선(造船) 시장의 품목인 어선은 동력선, 무동력선 모두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소는 이전보다 선박 건조의 기회가 많아지고 주요 조선소에는 동력선 건조, 나아가서는 소형 엔진의 자체 제작이 가능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게다가 화물선의 수적 증가와 대형화로 한국에서도 ‘강선(鋼船) 조선소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부문은 대형선 수리 능력의 확충이었다. 소형선의 경우 육지로 인양하여 선가(船架)[배를 땅 위로 끌어올리거나 끌어올려서 싣는 데 쓰는 설비]에서 수리하지만 대형선의 대수리나 배의 밑바닥 수리를 위한 선거(船渠)[선박 건조, 개조, 수리 및 검사 등을 위하여 선박을 도크 안에 넣고, 물을 빼거나 넣어서 선박을 바닥에 앉히거나 띄울 수 있도록 만든 설비] 시설이 필요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부산 영도 소재의 ‘니시죠우(西條)철공소’가 유일하게 1,500톤급 선박의 입거 수리(入渠修理)가 가능한 선거를 보유한 곳이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대륙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정 및 군수 물자 수송선의 수리 공장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1937년 강선 전문의 본격적인 근대 조선소가 나타난 것은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조선중공업’이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강선 건조 전문 업체로 1950년대까지도 1,000톤급 이상의 대형 강선을 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소였다.
해방 후 ‘조선중공업’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형 강선 건조 시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까지 단 한 척의 강선도 건조하지 못한 채 주로 수리 위주로 공장을 운영하였고, 그나마 자금난 등으로 휴업을 반복하였다. 정부는 1950년 「대한조선공사법」을 발효하여 ‘조선중공업’을 국책 회사로서 의욕적으로 운영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950년대 말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와 임금 체불로 인한 노사 분규 등으로 인해 가장 부실한 국영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거듭하여 1950년 1월에 일제 치하의 ‘조선중공업’이 보유하고 있던 시설을 기반으로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였으며, 1955년에는 ICA 자금 200만 달러와 대출 자금 3억 6,800만 환으로 각종 시설[20톤 기중기 7대 등] 등을 확장해 근대화된 조선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근의 부품 상점도 성시를 이루었다. 대평동 ‘항남마린’의 경우 1965년도에 문을 열고 1976년도부터 현재의 자리에서 선박용 디젤 엔진 부품 공업 기기들을 납품해 온 상점이다. 가게 명칭도 1997년 항남디젤에서 항남마린으로 바뀌었다. 현재 선박 용품점이 전반적으로 분산되어 장사가 되지 않으며, 취급 물품은 처음에는 일제를 사용하다 국산화가 진척되어 요즘은 스페인, 가나, 필리핀 등지에 수출도 한다.
1972년 1만 8,000톤급 ‘판코리아호’를 건립하면서 조선 국가로서의 서막을 알린 한국의 조선업은 다른 분야에 못지않은 비약을 거듭하였다. 1960년대 초반까지도 4천여 톤에 불과했던 연간 조선 실적이 1984년에는 약 230만 톤으로 발전하여 이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제1위의 조선국이 되었다.
[깡깡이 아지매의 등장과 일과]
영도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게 눌려 살던 원주민 외에 해방 후 돌아온 귀환 동포, 특히 6·25 피난 시절 피난민이 몰려 살기 시작한 지역이다. 지금도 당시의 피난민 주택이 남아 있는 영선동과 남항동, 대평동 일대에서는 13.2㎡에서 16.5㎡밖에 안 되는 집의 한 지붕 아래 여러 개의 방이 붙어 있는 주택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방마다 별도의 가구가 살아가는 상황이고, 거주민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는데 최근에야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집이 워낙 작은 터라 부엌이 없어 도로 건너 부엌에서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집을 보수하려면 한 지붕에 살고 있는 다른 가구에서 반대를 하기에 집을 보수하지 못하고 살다가 집을 떠나는 경우마저 있다.
특히 STX조선 사무실 동네[이북 동네]의 경우도 많은 가구가 이사를 갔으며, 지금은 주민[부모]들이 많이 죽고 빈집이 많다. 이렇듯 대평동은 우리나라의 6·25 전쟁과 맞물린 역사의 아픔을 설명해 주는 가옥 형태가 남아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영도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조선소와 철공소들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자연히 주민들의 자랑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선박 수리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라는 자부심이었고, 지금도 많은 선박들이 수리를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1980년대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소련 배들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입항 허가를 받고 들어와 수리를 받고 떠나곤 하였다.
일반적으로 선박은 5월 전후로 수리를 하는데, 이때 고친 배를 가지고 일 년 동안 계속 운항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5월이면 항상 선박들이 배를 고치기 위해서 북새통을 이루곤 하였다. 특히 원양 어선처럼 먼 곳으로 바다를 나가는 배들은 이 기회에 최선을 다해 배를 고쳐 놔야 탈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였다. 선박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남항동에서 선박 수리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남항동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전국 어디를 가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은 그런 자부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간판도 없는 작은 슈퍼 앞에서 만난 한 노인과의 대화에도 그런 자부가 묻어난다. 80세가 넘었다는 그는 6·25 전쟁기 영도로 피난을 와서 정착한 사람으로 예전 조선소에서 근무하였다. ‘대양조선, 구일조선, 남양조선…….’ 등 그가 옮긴 조선소 이름이 모두 다나카 조선소에서 시작하여 이름만 바뀐 곳이며, 요즘 명함을 내미는 ‘에스엔케이라인’도 결국 그 갈래라 본다. 그들이 이렇게 내력을 꿰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였다.
“여기서 배 수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좀 더 대우받고, 사회의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받은 대우와 자신들의 뒤를 잇는 후배들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만은 아닌 듯하다. 조선업은 실제로 영도의 정체성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조선소 수리 중에서도 수리를 위해 배가 들어오면 배에 들러붙은 녹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기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찾기 쉬운 일자리였다. 예전에는 요즘처럼 그라인더가 없었기 때문에 녹 부분을 직접 망치로 내려쳐서 없애는 수작업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였다.
무작정 도시로 나와 벌이를 하거나 6·25 전쟁으로 과수댁이 된 젊은 여성들로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마다하기 어려웠다. 영도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배와 관련된 일밖에 달리 일거리가 없었다. 특히 여성의 몸으로는 힘든 작업을 시켜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권이란 없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보통 남자라면 절대 응하지 않을 저임금에 중노동을 하는 이른바 ‘깡깡이 아지매’가 탄생하였다.
조선 수리업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 중반에는 영도에 배를 대는 독이 12개였다. 한 독마다 15명이 일했으니, 어림잡아 180여 명의 깡깡이 아지매가 영도에서 일을 했던 셈이다. 몇 년 가지는 못했지만 1965년 무렵에는 ‘깡깡이 아지매 조합’이란 것도 생겼다. 당시 조합 부위원장을 했던 이가 늦게까지 부산 구평의 ‘대평조선소’에서 반장으로 근무하던 서형자 할머니[75세]이다. 조합이 있을 때는 단체로 신체검사도 받고 직장이 보장을 받았으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데모도 하였다.
하지만 망치로 녹을 떨어내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굉장한 소음을 일으키게 되고, 이는 청각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깡깡이 아지매로 오랫동안 일해 온 여성들 중에는 대부분 청각을 잃었거나 난청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선박 수리소가 20여 군데 남아 있는 지금도 이 분들은 활동을 하고는 있으나 작업이 배당됐을 때만 직장에 나오고, 일이 끝나면 바로 귀가하기 때문에 사실상 직접 대면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이곳의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민원까지 넣고 있는 사정이라서 깡깡이 아지매가 “내가 그 일을 합니다.”라고 나서기는 어렵다.
[끝나지 않는 고단한 생애]
1. 영도의 산증인 깡깡이 아지매들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가셔진 1960년대 영도의 모습을 보자. 거리에는 여전히 실업자와 상이군인들이 넘쳐 났으며, 부둣가 한편에서는 약장수가 사람을 모아 놓고 차력 시범을 보여 주거나 북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약을 팔았다. 그보다 더 영도를 영도답게 만드는 것은 깡깡이질이었다. 대평동과 남항동 해안가에 자리 잡은 조선소에서는 낡은 배의 녹을 털어내는 깡깡이 아줌마들의 망치 소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이지 않았다.
수리해야 할 배가 들어오면 방 3칸의 기와집 두 채를 이어 놓은 듯한 360톤 정도의 배 한 척의 작업에 대략 10명에서 40명에 이르는 깡깡이 아지매가 투입되었다. 배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한 도쿠’라 부르는 15명씩이 한 조가 되어 이틀에 걸쳐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업 도구는 모두 네 가지로, 그라인더를 제외한 간단한 공구 세 가지는 각자 집에서 준비해 가야 하였다. ‘주함마’는 녹을 떨어내기 위해 두드리는 무거운 망치로 무게는 대략 3㎏ 정도이고, ‘깡깡이’는 쇠를 쪼아 내기 위한 망치로 보통 집에서 쓰는 장도리보다 조금 큰 정도의 망치다. 그밖에 ‘그라인더’는 빙빙 돌아가는 전기 톱날을 이용해 표면을 다듬는 공구, ‘씨가레프’는 대나무로 만든 등 긁개 모양의 도구로 배 밑창에서 조개를 뜯어낼 때 쓰는 도구다.
일거리는 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한 달에 5일도 하고, 10일도 하고 대중이 없었다. 깡깡이 작업은 오전 8시부터 시작해 중간에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이 있고 오후 5시면 끝이 났다. 중간에 오전 10시에 10분, 오후 3시에 10분 두 번의 휴식 시간이 있었다.
아침에 일터에 나가면 고용한 회사 측에서 작업복과 안전화, 화이바, 마스크, 안경 등을 제공하였다. 그러면 각자 준비해 온 비닐로 얼굴을 감싸고 다시 수건으로 덮고 안경과 마스크 4겹을 덮어쓰고 일하였다. 추운 날에는 그나마 괜찮지만 무더운 여름에는 얼굴이 짓무르고 불이 나는 느낌이었으며, 저녁에 마스크를 벗고 나면 온통 피부가 빨갛게 변해 있곤 하였다.
1970년대 당시 임금 역시 하루에 1,000원도 되고 1,500원도 되고 정해진 액수가 없었다. 임금은 일당제지만 회사 자금 사정에 맞춰 월 중 하루를 잡아 한꺼번에 지급하는 월급제였다. 점심은 제공되지 않았고, 대신에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목에 붙은 쇠 찌꺼기를 씻어 낸다면서 돼지고기를 포식하게 하는 회식이 베풀어졌다. 1970년대 중반 깡깡이 아지매가 받은 하루 1,500원의 일당으로는 쌀과 연탄, 반찬 몇 가지를 사면 한 푼도 남는 게 없었다. 전표를 팔 경우에는 수입이 더 박해져 살 반 되와 보리쌀 반 되, 연탄 한 장이 고작이었다.
문제는 하루 여덟 시간의 중노동으로 인한 산재였다. 허술한 작업대에 서서 맨손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먼저 손이 아프고 다음엔 허리가 아프고 내쳐 다리가 아파오는 작업이 ‘깡깡이질’이었다. 개중에는 ‘아시바’라 부르는 작업대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거나 불구가 되는 일도 왕왕 있었다. 독에 올린 360톤의 선박은 지상에서 뱃전까지의 높이가 5m 가량이 되는데, 그 중간쯤에서 떨어져도 치명상을 입게 마련이다. 체험담을 들려준 이상희 할머니[78세]도 작업대에서 떨어져 일주일간이나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난청(難聽)이었다. 하루 종일 쇠 두드리는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깡, 깡, 깡-’ 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고, 그 소리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어졌다. 계속 일을 하다보면 3년쯤 지나 차차 청력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지고, 늘그막에는 종당에 보청기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2. 깡깡이 아지매들의 애환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동 1가 103번지 ‘대평경로당’에서 만난 이상희[78세], 박석순[75], 김광이[81] 세 할머니 모두 ‘삼화조선’을 비롯한 선박 수리 업체에서 얼추 36년간 깡깡이 일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상희 할머니는 대구에서 태어나 1960년 22세의 나이로 미장일을 하는 남편에게 시집온 것이 영도와 인연을 맺은 계기였다. 그러나 남편은 일 년에 반 이상을 놀았으므로 깡깡이 일을 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슬하 3남 중 장남이 전문대를 나온 덕에 제 앞가림을 한다.
박석순 할머니는 포항의 시골에서 살다 39세에 영도로 왔는데, 이미 28세 무렵 어선을 타던 남편은 전쟁 통에 행방불명이 된 뒤였다. 중년의 과수댁이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살아가는 방법이란 깡깡이 일을 하며 올해 51세가 된 장남을 부지런히 길러 아래 두 동생을 기르는 길 밖에 없었다. 다행히 장남은 초등학교만 나온 뒤 그 몫을 마다하지 않아 그나마 아이들을 길러 냈다.
부산 인근 가덕도에서 태어나 영도로 온 김광이 할머니는 26세 되던 해에 선원으로 일하던 남편이 2남 1녀를 남긴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 후에 장성한 장남 역시 행방불명이 됐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과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있지만 살림은 여전히 곤궁하다.
세 사람은 함께 36년 가까운 세월을 ‘선진’이란 회사에서 깡깡이 아지매의 이력을 쌓아 왔다. 그나마 이들이 일을 시작할 무렵 ‘선진’의 사장은 나이는 젊어도 아버지로부터 훈육을 잘 받은 덕에 노무자들을 잘 대해 줬다. 근로 기준법을 지키려고 애썼고, 한 달에 한 번은 회식을 시켜 줬으며, 생일도 챙겨 주고, 봄가을에 한 번씩은 하룻밤 자는 코스를 잡아 관광 여행도 시켜 줬다. 일당제로 일을 했지만 월급은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입금시켜 줬으며, 회사를 그만 둘 무렵에는 퇴직금도 지급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평생 ‘건강 보험’이란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고, 더구나 ‘국민 연금’이란 꿈도 못 꿨다. 진작 월급제로 할 바에야 국민 연금에 가입을 해줬으면 하는 게 이들의 뒤늦은 한인데, 반장을 비롯한 소수의 동료는 연금으로 매달 35만 원 정도를 받고 있음도 나중에 알았다.
나이가 들고 보니 세 사람 모두 공통점은 몸이 아프다는 것인데, 증상도 관절염부터 난청까지 똑같다. 그들은 젊은 시절만 해도 방진 마스크를 쓰거나 귀마개를 하는 작업 지침이 아예 없었고, 있다 해도 지키려 들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몸에 무리가 가고, 그 후유증이 병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도병원에 10여 년째 다니는 이들을 본 의사의 첫마디는 “젊어서 힘든 일 하셨군요.”라 하더란다.
그런 깡깡이 아지매들은 대개 학력이 낮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권익을 지키지 못하는 예도 허다하다. 특히 앞의 세 할머니들처럼 같은 독에서 일을 하지 않고, 약간 더 많은 임금에 팔려 이리저리 단독으로 작업장을 옮기는 “댕기는[다니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런 예가 많았다.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동 대평남로 35[대평동 1가 160-1]에 사는 박양단 할머니는 2013년 올해 87세로, 28세부터 68세까지 40년간 깡깡이 아지매로 일해 온 사람이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목수로 일하는 남편을 따라 아이 둘을 데리고 영도로 왔다. 그 후 아들 둘을 더 낳고 딸 하나를 두었으나 아깝게 아들 둘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박 할머니는 ‘도둑년’ 소리를 듣고 산 지가 벌써 이십 년이나 되었다. 막판에 10년 가까이 일했던 ‘한봉호’ 등 배 4척을 거느린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외환은행에 배가 압류를 당하였고, 150만 원의 임금을 떼인 것이다. 나 몰라라,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회사 대표를 수소문해 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자무식인 박 할머니는 부도가 난 회사나 대표의 이름이나 연락처, 무엇 하나 기억하는 게 없었다. 지금 기억에 남은 것이라곤 1954년 무렵 처음 4~5년간 일을 한 회사가 ‘한성회사’라는 정도였다. 사람 좋던 그 회사 서기가 형의 회사에 소속된 한봉호에서 일을 해달라기에 자리를 옮겼다. 녹을 떨어낼 뿐 아니라 기름 탱크에 들어가 남은 기름을 퍼내는 위험한 일까지 하면 보통 일당에 500원을 더 얹어 2천 원을 준다는 조건이었으니 마다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회사는 성실하지 않았다. 일을 시작한지 3년 후인 1957년 태풍 사라호가 들이치는 바람에 회사가 물에 잠긴 일이 있었다. 그러자 서랍에 담긴 서류가 모두 없어져 일 한 기록을 담은 장부가 없어졌다며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남편은 이미 몇 십 년 전에 사망하였고, 아들딸도 장성했지만 간신히 중·고둥학교를 졸업시켰을 뿐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모두 어렵게 산다. 박 할머니의 유일한 낙은 자신이 일하던 수리업체가 있던 그 골목에 나와 동네 노인들과 오가는 조선소 근로자들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3. 고철을 닮은 고단한 일생
영도에는 유난히 고철상이 많아, 보통의 시나 군 전체에 있을 고철상이 골목 블록마다에서 나타날 정도다. 깡깡이 아지매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고철소가 많은 이유는 이곳이 배를 수리하는 곳이기 때문에 수리를 하고 남은 부품들을 처리할 시설이 필요하게 되고, 그 결과 고철상이 이곳저곳 생겨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곳 고철상이 다루는 물품은 ‘선박의 폐부품’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한데, 고철상은 공업용 기름때가 땅과 건물에 묻어 있는 이곳 풍경과 더없이 어울리는 상징과도 같다. 폐자재의 리싸이클링을 담당해 온 고철상이야말로 이 지역이 오랫동안 선박 수리업을 지탱해 온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깡깡이 아지매들 자신이 이제 늙고 병든 자신의 몸을 그 고철에 비유하면서도, 고철과 달리 자신들은 쓸모도 없는 몸뚱이일 뿐이라 자탄한다는 점이다.
올해 여든을 바라보는 황순자 할머니 역시 소위 ‘깡깡이 아지매’라고 불리며 배에 낀 녹을 떼어내는 일을 하느라 대풍포에서 평생을 바쳐 살아온 사람이다. 그녀의 젊은 시절, 대풍포는 수백 척의 어선과 그에 딸린 인파가 시장과 조선소를 거느리고 북적대던 마을이었다. 1980년대 초반,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기잡이배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드나들고, 각지에서 몰린 상인들이 전을 벌였다. 지나가는 누구나 그 번화함 속에 발을 담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하던 지역이었다. 특히 지금은 조용해진 공장들이지만 끝없이 쇠를 깎고 망치로 두드려 무언가를 만들어내던 곳이었다. 그게 황순자가 기억하는 대풍포다.
황순자는 본래 울산 사람으로 6·25 전쟁 통에 경제적 위기로 남편과 헤어진 후 피난민들 틈에 끼어 이 마을로 흘러들었다. 대풍포 마을에서 어부와 결혼한 후 아이를 낳고 한때나마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가 싶었지만 그마저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아이가 10살 되던 해 남편이 사고로 다치면서 배를 타기 어렵게 되었고, 하나 뿐인 아이에게는 난치병이 발생하였다. 결국 황순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의 녹을 벗기는 깡깡이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생활고에 찌든 생활은 계속되었다.
깡깡이 아지매로 일을 하던 중, 황순자는 약장수가 되어 마을을 찾은 전남편을 만났다. 다시 만나 과거를 돌아보니 애정이 되살아났고 전남편은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가자고 권하였다. 하지만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린 피붙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차마 그 아이를 외면하고 떠나기는 어려웠다. 그러자 황순자의 집 주위에 터를 잡고 기다리던 전남편도 차츰 그녀를 찾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황순자는 자식을 잃었고, 몇 해 전에는 남편과도 사별하였다. 소일거리가 없는 노인들이 그늘에 모여 옛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황순자는 자신의 내력에 대해서만은 입을 다물고, 다른 누구도 그녀의 가정사를 상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황순자가 조선소에서 깡깡이 아지매를 하였다는 사실만은 그녀나 동네 사람이나 훈장처럼 여기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 동네, 그리고 이 동네 사람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음을 서로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겨진 과제와 비전]
영도는 명실상부 한국 조선 산업 부흥의 시발점이자 견인차 역할을 한 옥토였다. 그 후 한국의 조선 산업은 연간 4천여 톤의 목선이나 건조했던 1950년대의 여명기를 지나 근대 조선 공업의 확립을 위하여 강선 건조 기술의 확립을 서둘렀던 1960년대의 근대화기, 대단위 조선소를 신설하여 선진 조선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 1970년대 이후의 비약기로 그 추이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은 세계 제1의 조선 강국이 되었으며, 조선 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의 하나가 되어 외화 확보의 효자로 한국의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영도구에서도 특히 대평동은 ‘조선소 지대’로 알려진 곳이다. 이 지역에는 어선들이 정박하는 부두가 있어 엔진 등 부품들을 제작하거나 수리하는 업체가 많다. 대개의 공장이 영세하여 건물 하나 안에 공장이 2개 이상 있는 경우도 많은데, 그 업체의 종사자 대부분은 50~60대를 넘겼다. 그런 광경은 공장들이 입주한 건물의 모습만큼이나 낡았다. 그들이 말하는 ‘왕년’의 영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모습이다.
과연 이 지역은 과거에 제법 부를 누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영도에서조차 가장 낙후한 지역 중 하나이다. 부근에는 약국도 파출소도 없는데, 모두 위쪽 남항동으로 옮겨 갔다. 게다가 최근에는 STX조선의 부도로 일자리가 줄어 한때는 줄을 서서 식사를 해야 했던 식당이 파리를 날릴 지경이다. 주민들에게 물으면 공통적으로 “예전에는 참 잘 살았던 곳인데,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발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민들 다수는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잘라 말하는 대평동이야말로 영도가 ‘떠나는 지역’임을 웅변으로 보여 준다.
영도, 그중에서도 대평동이 이렇게 된 것은 선박 수리업이 사양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주민들은 그 이유를 공단 유입과 어업 협정으로 꼽는다. 공단의 유입이란 토지의 가치를 올리기에만 급급해 공장을 유치하느라 환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원래 살던 주민들이 내쫓긴 일을 말한다. 또 어업 협정은 일본과 맺은 조약으로 어로 구역 상당 부분을 양보하였고, 그 여파로 큰 배들이 줄어들어 수리업도 쇠락하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로 인해 대평동 주민들도 서서히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원래 월명기에 고등어가 산란할 수 있도록 어획을 하지 않고 다른 시기에도 새끼 고등어[갈고등어]가 성장할 기간을 주는 게 상례인데, 큰 배들이 ‘쓸어오는 식’의 마구잡이 어획을 한 탓에 어자원이 줄고 배가 줄어 조선소도 줄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대평동 노후 주택의 대문 앞에는 청구서가 가득 쌓여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골목은 대낮에도 조용하다. 젊은 사람은 보기 어렵고 대체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인데, 자식들이 취직해 나가 살겠다고 하면 잡을 방법이 없다. 소음과 먼지가 많은 공장 지대라 거주에 쾌적한 환경이 아니며, 지금도 비어 있는 집이 늘어 가는 중이다.
그러면 이곳을 부활시킬 방안은 무엇인가. 깡깡이 아지매의 전설을 곁들여 ‘이야기를 품은 조선소 테마 거리’로서의 부활을 꿈꾸어 봄직하다. 일본은 막부 말기에 나가사키에 건너온 영국 조선 기사 ‘토마스 그라바’가 설립한 소형 조선소인 ‘그라바 조선소’를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이 관리하다 최근 나가사키 시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이 문화재는 역사적 가치로 각국 조선 애호가들의 눈길을 끌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반류회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현 ‘대평초등학교’ 자리를 기점으로 그 인근이 ‘근대 조선 산업의 발상지’임을 알리고 ‘조선(造船)박물관’을 세운다면 조선 발상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마일 포스트(MILE POST)’가 영도에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박물관이 형성되어야 할 당위성은 영도에 있다.
현재도 대평동 거주민은 조선 수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 기술자가 많다. 이름을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54세 포장마차 주인은 집안 형편 때문에 17세에 포장마차를 시작해 지금까지 일궈 왔다고 말한다. 지금은 사업이 번창해 가게도 늘리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손을 놓지 않는 이유는 몸에 밴 근면함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 자체가 시대의 웅변이자 살아 있는 박물관의 일부이다. 그처럼 대평동은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족애의 감동과 휴머니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주민들이 외지인의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는 적극적이고 친절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역이 조선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테마 거리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던져 주는 것이 그런 주민들의 태도에서 엿보인다.
특히 깡깡이 아지매에게 대평동이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삶의 터전이고 기억의 공간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관광 상품화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멀쩡한 사람을 동물원의 원숭이 다루듯 해서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기보다 벽화로 형상화하거나 동상을 세우는 방식 등으로 그 치열하고도 숭고한 삶의 이력을 기리는 것이 좋겠다. 아울러 선박 수리하는 모습을 일반인들이 보기 쉽게 만들면 가족이나 학생들이 와서 견학하는 장소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나아가 체험 활동도 고려해 봄직하다. ‘부모 세대의 애환’이라는 테마와 연계하여 조선소를 직접 견학하며 체험하게 하면 이 지역의 관광 자원화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직접 체험하면 위험한 일들이 많다. 깡깡이질을 하느라 ‘아시바’라 부르는 작업 난간을 잘못 걸으면 아래로 떨어지게 마련이고, 미싱기를 잘못 돌리면 손이 상할 수도 있고, 페인트칠로 머리가 어지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안전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체험을 통해 우리 조선 산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부모 세대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는지를 깨닫게 할 수 있고,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