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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 왜관 일본인의 생활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79
한자 他鄕-倭館日本人-生活相
영어의미역 Living away from home: The life of the Japanese in Waegwan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83년 - 약조 제찰비 건립

[왜관-조선 안의 일본인 마을]

조선 후기 부산에는 일본인[엄격히 말하자면 모두 대마도인]이 거주하는 왜관(倭館)이 존재하였다. 조선은 외교와 무역을 위하여 대마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에게 거주지를 마련하여 주었고, 그곳은 작은 일본인 마을이 되었다. 조선 후기 왜관에는 500명이 넘는 일본인이 거주하였다. 1678년(숙종 4) 4월 두모포 왜관에서 초량 왜관으로 이사를 갈 때 총 489명[454명이라고 쓴 기록도 있다] 일본인이 움직였다고 한다.

왜관의 서관(西館)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단기간 왜관에 머물렀지만, 동관(東館)에는 왜관 내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와 상인, 그들의 생활 편의를 돕는 자들로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누구나가 왜관으로 와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처자식을 데리고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이 많았는데, 이들은 정해진 기한을 넘기거나 불법적으로 왜관 주변에서 살고 있어서 그것이 늘 문제가 되었다. 몇 차례의 송환 절차도 있었지만 장기 불법 체류는 근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왜관이 다시 설치되면서 왜관에 거주하려면 대마도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였다. 또한 왜관 안에서만 거주하는 것은 물론 가족을 동반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처와 딸을 데리고 오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마도 출신의 남자 성인만이 거주하는 공간이 왜관이었다. 이러한 거주 제한은 그동안 골칫거리였던 불법 체류를 막는 방안이었다. 왜관에서 업무를 마치면 가족이 있는 대마도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가를 받은 남자들만의 공간, 그곳에서 그들은 먹고, 입고, 자며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낯선 타국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일본인이 사는 집은?]

왜관 내의 건물들은 조일 양국에서 외교와 무역 등 공통으로 사용하는 건물이나 일본인만 사용하더라도 공적 업무에 필요한 건물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조선에서 지었다. 초량 왜관 동관 중 관수가·개시 대청·재판가, 서관 중 동대청·중대청·서대청은 조선 측에서 지었다. 그리고 일본인 자신들이 세운 건물은 당연히 일본 건축 양식이었다. 즉 왜관 안에는 조선과 일본 양국에서 세운 두 나라 건축물이 섞여 있는 상태였다. 또한 한 개의 건축물 안에도 조선식과 일본식 건축 양식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대마도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을 위하여 부지를 내어 주고 건물을 지어 주었다.

처음 조선에서 지어 준 왜관 건물은 조선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 건물에 살던 일본인이 자신의 생활 공간과는 달랐기 때문에 불편을 느꼈던 모양이다. 1646년(인조 24) 두모포 왜관의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질 때, 대마도는 조선 측에 일본인 목수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를 승인하여 일본식 자재, 일본의 기술이 들어간 건물로 재건축하는 것을 용인하였다. 이 수리로 다다미[疊], 후스마[襖], 쇼지[障子] 등을 갖춘 일본식 건축물이 왜관에 등장하였다.

1783년(정조 7)에 부산 사람 변박(卞璞)이 그린 「왜관도(倭館圖)」에는 다다미를 파는 다다미 가게[그림에 ‘다다미가(多多味家)’라고 적혀 있음]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왜관 내 건물에 다다미가 깔린 집들이 왜관 일본인의 보통의 거주 공간으로 세워졌던 모양이다. 다다미는 짚으로 만든 판에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돗자리를 붙인 것으로 방바닥에 까는 재료이다. 보통 무게는 17~30㎏이고, 두께는 4.5~6㎝, 크기는 180×90㎝이다. 다다미를 몇 장 깔았는지에 따라 방의 크기를 말하기도 한다.

일본 사극에 등장하는 것처럼 다다미방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가운데 화로를 설치하여 난방을 하였다. 다다미는 보온력과 탄력, 촉감이 우수하지만 오염도가 높아서 자주 갈아 주어야 하였다. 돗자리에 물이나 액체가 스며들면 자국이 생겨 지우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건조된 식물로 짠 것이므로 썩기도 쉽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를 두고 교체를 한다. 그러므로 왜관 안에 다다미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있었다.

또 일본 건축에서는 나무틀을 짜서 양면에 두꺼운 헝겊이나 종이를 바른 후스마를 설치하여 습기와 통풍을 조절하고,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후스마는 다다미를 깐 공간을 구분하면서 방을 구분하는 구조물이 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후스마에 그려진 그림을 후스마에[襖絵]라고 한다. 후스마에에 금박, 다양한 색채와 무늬 등을 넣어 화려함을 강조한 후스마를 지금도 일본의 고택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집 안에는 허릿장이 있는 미닫이문[고시쇼지, 腰障子], 한쪽에 흰 종이를 바른 미닫이문[아카리쇼지, 明障子], 가로로 여닫는 미닫이문[히키도, 引戶], 비를 막기 위한 빈지문[아마도, 雨戶] 등 다양한 명칭의 일본식 문도 설치되었다. 방의 한편에는 도코노마[床の間]가 있었다. 바닥을 한 단 높여서 벽면에 족자를 걸고 그 아래에 꽃병을 놓거나 화분을 둘 수 있는 장치로 다다미와 함께 일본 주택을 상징한다.

그리고 조선의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목욕탕도 등장하였다. 습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목욕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왜관의 집집마다 목욕탕이 한 개씩, 드물게는 두 개씩 설치되어 있었다. 목욕탕은 물을 끓이는 시설 때문에 불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본채에서 떨어진 곳에 짓는 경우가 많았다. 초량 왜관을 건설할 때 일본 측에서 조선인 기술자들에게 목욕탕을 지어 달라는 요구를 하자 ‘목욕탕 같은 것은 지어본 적이 없다’고 거절한 일도 많았다. 그때마다 일본 측에서 ‘목욕탕은 어떻게 해서라도 꼭 지어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여 목욕탕 역시 짓게 되었다 한다.

동관·서관의 3대청과 동관의 일본식으로 지어진 집, 왜관의 모든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목재 등의 건축 자재는 조선에서 조달하였다. 기와도 조선에서 만든 것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일본식으로 짓는 경우에 필요한 건축 자재는 대마도에서 조선 측으로부터 값을 치르고 구입하는 것도 있었다. 그 외에 일본식 건물 구조에 필요한 일본식 건축 부자재는 대마도에서 따로 조달하였다.

두모포 왜관에서 시작된 일본식 건축 양식은 초량 왜관에도 계승되었다. 초량 왜관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일본식 건물들이 생겨나면서 왜관 외형은 일본 마을을 닮아 갔다. 그래서 부산에 온 외지 사람들은 이국(異國) 경관의 왜관을 구경삼아 가 보기도 하였다.

[일본인이 평상시 먹는 음식은?]

왜관의 일본인들은 동관의 수문(守門) 앞에서 매일 서는 아침 시장[朝市]에서 식재료를 구입하였다. 아침 시장은 일본인이 일용하는 생선, 채소, 과일, 쌀 기타 잡물을 취급하였다. 두모포 왜관 시절에는 조선인들이 왜관까지 가는 것이 귀찮아서 자신들의 마을 골목에 장을 세워 일본인을 불러들이기도 하였으나, 조선인 마을에 일본인이 드나들자 곧 금지시켰다. 그리고 왜관 수문 앞에 아침 시장을 열어 일본인 생활에 편의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왜관 인근 마을에 사는 조선인이 자신들이 수확한 채소와 생선 등을 가지고 왜관으로 팔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어 역관인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郞]가 18세기 말에 쓴 『초량 화집(草梁話集)』에는 아침 시장에 나오는 조선인은 초량 왜관 인근의 부산[부산진, 동구 범일동], 두모포[고관, 동구 수정동], 대치(大峙)[대티 고개 주변], 사도(沙道), 당동[당리인 듯하다] 등에서 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왜관 일본인들이 워낙 오리 고기를 좋아해서 겨울철 동지가 되기까지는 김해에서 오리를 잡아서 시장에 내다 판다고 하여 아침 시장에 오는 상인은 왜관 인근의 조선인만은 아니었다. 또 동지 이후에는 오리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겨울에는 가덕도 인근에서 대구나 청어를 잡아 와서 일본인에게 팔기도 하였다.

매일 아침에 초량 왜관 정문에서 시장이 서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필요로 하는 식재료를 구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남자로만 구성된 왜관의 일본인들이기 때문에 조선인 여자에 관심이 많은 것이 문제시되었다. 일본인들이 시장에 나와서 물건을 살 때 젊은 조선인 여자가 파는 물건에만 관심을 두고 몰려들었다. 조선인 남자가 파는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젊은 여자가 파는 물건이 일본인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값을 두 배를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남자와 나이 든 여자가 아침 시장에 나와서 장사하는 것은 점차 줄어들고 젊은 여자가 시장에 나오는 것이 늘었다. 심지어 “어물과 채소를 파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딸을 파는 것이다”라고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아침 시장은 조선인 여자와 일본인 남자의 매춘 행위 즉, 교간(交奸) 사건의 온상으로 주목되었다.

식재료는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왜관의 일본인에게 주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명절 및 특별한 날에 식재료를 선물로 주고받았는데, 조선인과 친분이 있는 일본인은 조선인으로부터 명절 선물을 받았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재판 차왜(裁判差倭)로 임명되어 왜관에 온 1729년, 조선의 관리로부터 추석과 세밑에 받은 선물 중 식료품과 관련된 것을 보면 찹쌀, 흰쌀, 팥, 잣, 호도, 밤, 외, 곶감, 대추, 녹두가루, 꿀, 황소 고기, 쇠고기, 오리, 산 닭, 말린 꿩고기, 산 꿩, 문어, 대구어, 가자미, 청어, 붕어, 홍합, 해삼, 소주, 청주, 황주, 얼음, 기름, 흰떡, 오층 떡, 흰 사탕이 있다. 곡물부터 육류, 생선, 과일 등 매우 다양한 음식 재료가 왜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여성이 없던 왜관에서는 아침 시장에서 구입한 식재료를 가지고 거주하는 당사자가 요리를 하였다. 관수(館守)[왜관 일본인의 총 관리자]나 재판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은 전임 요리사를 고용하여 음식을 만들었다. 대마도의 요리사는 활잡이와 신분이 같았다. 요리사는 교토나 오사카 근방에서 고용하기도 하였고, 대마도의 요리사를 교토 근방으로 요리 수업을 보내기도 하였다. 왜관에서는 수시로 조선인과의 연회가 열렸고, 관수나 재판이 고용한 요리사는 일본의 정통 요리인 혼젠 요리[本膳料理]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프로 요리사들이었다.

왜관 밖에 아침 시장이 매일 서지만, 왜관 안에도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가게들이 있었다. 1705년(숙종 31)에는 두부 장수 12명이 왜관 내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곤약도 같이 판매하였다. 변박의 「왜관도」나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는 두부 가게가 ‘조포가(造泡家)’로 명시되어 있다. 두부는 일본인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두부는 동아시아에서 즐겨먹는 먹거리로 중국과 조선, 일본 삼국이 모두 만들었다.

그러나 각각 나라마다 두부의 단단한 정도가 달랐다. 중국의 두부가 가장 단단하고 일본의 두부가 가장 부드러웠다. 늘 부드러운 두부를 먹던 습성을 가진 일본인들은 조선 두부가 단단하였던 모양이다. 왜관 내의 두부 장사가 성행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부드러운 두부를 선호하는 일본인들은 왜관 내에 두부 가게를 두고 일본식 두부를 구해 먹었다. 그 외 왜관 안에는 면을 파는 ‘면가(麵家)’, 사탕을 파는 ‘당가(糖家)’와 떡집도 있었다. 또한 왜관에 매일 들어가 일본인을 상대로 떡과 엿 장사를 하는 조선인 아이들도 있었다고 하니 조선의 떡과 엿이 일본인의 간식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닐까?

[일본인이 내는 잔치 음식, 조선인이 차려 주는 잔치 음식]

왜관에서 일본인들끼리 식사를 할 때는 국 하나에 찬 세 가지, 술 세 종류 이상은 금지되었다. 중세 이후 무사들의 거주지로 형성된 조카마치[城下町]는 영주가 다스리는 영국(領國) 내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병농(兵農) 분리에 따른 무사 인구의 유입과 이들의 소비 활동을 통해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17세기 중반 이후 농촌을 떠난 이주민들이 조카마치로 몰려들면서 조카마치는 무사 거주지에서 무사와 상인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변화하였다. 도시의 발전은 소비 생활의 진전을 가져왔고, 막부는 소비에 대한 통제를 통해 도시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에도, 교토, 오사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검약령은 일본 모든 곳에서 시행되었다. 왜관의 일본인도 이 검약령을 지켜야 하지만 조선인과 함께하는 자리에는 예외 규정이 주어졌다. 조선인과 함께하는 향응 요리는 성대하게 차려지도록 하였다.

1671년(현종 12) 왜관 벽에 붙여진 지침서 어벽서공(御壁書控)에 “조선인이 참석하는 모임에는 각별히 할 것. 일본인들끼리 하는 잔치 요리에는 1즙 3채, 술 3색 이상은 절대 금지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즉 조선인이 참석하는 모임, 연회는 검약령에서 예외였다. 왜관의 관수와 재판의 요리사들은 온갖 솜씨를 뽐내어 혼젠 요리를 조선인에게 대접하였다.

왜관에 업무차 드나들던 조선인들은 일본의 요리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조선인들은 특히 일본의 아귀 요리와 스키야키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스키야키는 조선인을 접대하는 향응 요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삼나무 상자에 일본 된장을 풀고 생선을 비롯한 온갖 해산물과 채소를 넣고 끓였다. 스키야키 한 번에 사용되는 재료는 9~12종류였다. 일본 국내에서 3~4종류가 들어가는 데 비해 3~4배나 되었다.

풍성한 재료를 사용한 왜관식 스키야키는 일본 요리가 조선 식문화를 만나 변형한 것이다. 일본 요리가 적은 양으로 다양한 종류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내어 놓는 반면, 조선 요리는 한 그릇에 많은 양을 담아 풍성하게 보이도록 내어 놓는다. 스키야키가 조선인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 하면 19세기 김해 지역에는 부호들을 상대로 스키야키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가 등장하였을 정도였다.

왜관의 본격적인 향응 요리는 전형적인 일본 요리의 잔칫상이었다. 혼젠[本膳], 니노젠[二の膳], 히키데[引て], 고단[後段]으로 이루어져 있다. 혼젠은 주 요리로 밥·국·생선회·일본식 김치·조림이 나오고, 니노젠은 국·넓적한 접시·큼직한 대접으로 구성되는 국 두 가지와 반찬 다섯 가지의 곁들인 요리이다. 히키데는 한쪽에 따로 마련한 상에 요리를 올려놓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 손님에게 권하며 돌리는 요리이다. 고단은 후식으로 일본식 떡국이나 수제비, 우동 같은 가벼운 면 종류이다.

화려하게 차려진 향응 요리는 조선인에게는 싱거운 음식이었지만, 일본의 과자는 조선인들의 칭찬을 거듭 받았다. 일본인이 내놓은 과자는 구즈마키[葛卷]·시키사토[敷砂糖]·양갱·다식[大落雁]·오화당(五花糖)·얼음사탕[氷砂糖] 등 건과자(乾菓子), 증과자(蒸菓子), 사탕 과자 같은 부류와 과실류 등이었다. 일본의 과자는 남방에서 나는 사탕 중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백사탕을 사용하였다. 엿에 익숙하고, 사탕이 매우 귀한 조선에서 일본 과자는 매우 호평을 받았다.

왜관의 일본인은 조선에서 베푸는 연회 때마다 조선의 요리를 접할 수 있었다. 조선의 향응 요리는 왜관에서는 젠부[膳部]라고 한다. 조선 요리는 하나의 큰 상에 여러 종류의 요리를 수북하게 담아서 내놓는다.

1736년(영조 12) 2월 2일의 한 연회에서 조선이 차린 향응 요리는 모두 15접시였다. 대구나 상어 말린 것을 수북이 쌓고 그 위에 꿩·소·가자미의 살 말린 것을 놓고 말린 문어와 전복을 꽃처럼 장식하여 놓았다. 돼지고기 편육, 돼지곱창 등 육류와 삶은 달걀, 전복, 해삼, 메밀국수, 김치, 식초, 톳나물 등의 요리와 유과, 강정, 호두, 잣, 대추, 감, 생밤 등 후식류가 상에 올려졌다. 당시 일본에서는 육류를 먹지 않았다. 멧돼지나 사슴고기를 먹는 일본인들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짐승의 고기는 기피하였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같은 육류 요리는 왜관에서만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육고기를 자주 접하게 된 왜관의 일본인들은 육고기를 즐기게 되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통역관으로 왜관에 온 오다 이쿠고로는 육식을 즐겼으며, 조선인들이 독한 술을 잘 마시는 이유로 육식으로 비장과 위가 튼튼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쇠고기를 즐겨 먹던 오다 이쿠고로는 당시 왜관 안에 들어선 호랑이를 잡아 고기를 나눠 먹던 현장에 있었고, 호랑이 고기를 맛본 감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고기를 말려서 먹는 조리법이 많았다. 쇠고기를 편을 떠서 참기름과 간장으로 양념하여 바른 다음 말린 육포와 같은 말린 고기를 왜관에서는 ‘히모노’라고 불렀다. 왜관의 일본인들은 이를 불에 슬쩍 구워서 즐겨 먹었다.

[남자들이 사는 왜관, 술이 빠지랴]

왜관 안에는 ‘신주가(新酒家)’, ‘구주가(舊酒家)’ 등 술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 ‘소주가(燒酒家)’라고 적힌 집도 있었다. 별다른 여흥거리가 없었던 왜관에서는 술판이 벌어지는 일이 잦았다. 술판이 잦다 보니 과음에 따른 소동과 건강 문제도 일어났다. 왜관 일본인의 수장인 관수가 남긴 일기에는 과음으로 발생한 사소한 다툼까지도 기록하고 있다. 음주는 왜관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술이 입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어 학습서인 『인어대방(隣語大方)』에는 술과 관련된 회화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일본]의 술과 귀국[조선]의 술은 특성이 다릅니다만, 우리나라의 술은 귀국의 소주처럼 독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양을] 드시더라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라고 해서 양국 술의 도수가 많이 차이 났던 모양이다. 연회에 온 조선인들이 술에 취할까 봐 염려하는 것을 일본인이 양국 술의 차이를 말하면서 달래는 장면이다.

오다 이쿠고로가 쓴 『통역수작(通譯酬酉+作)』과 그의 아들 오다 간사쿠[小田管作]가 쓴 『상서기문습유(象胥紀聞拾遺)』에도 “탁주를 마시면 허리에 좋지 않아 잘 걷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조선인은] 일상적으로 독한 것을 즐긴다고 한다”라며 조선의 술이 일본인에게 독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조선의 술은 밀을 거칠게 갈아서 물로 반죽한 다음 발효시킨 떡 누룩을 사용한다. 일본의 대표 술인 청주는 찹쌀과 멥쌀을 재료로 한다. 여기에 다른 부재료를 추가하여 술을 담근다. 또 조선의 남부 지방에서는 막걸리를 즐겨하였다. 이렇게 술맛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왜관 안에는 그들의 입맛을 충족시키는 술집들이 들어선 것이었다.

대마도는 대일 외교와 무역 업무를 보는 관원 외에도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 왜관 내 소용 물건을 공급하는 상인들에게도 왜관으로 가는 도항증을 발급하였다. 도항증을 청부찰(請負札)이라고 한다. 청부찰을 가진 왜관 내 가게 중에 술 가게와 누룩 가게가 있다. 주옥찰(酒屋札)은 늘 3~4장이 발행되었다. 이들 가게에서는 조선 쌀을 원료로 하여 왜관 내에서 일본 술을 주조하여 판매하였다. 또 누룩 가게는 조선의 콩을 구입하여 된장과 간장을 담그기도 하였다. 왜관에서 생산된 술은 왜관 내 일본인들이 소비하기에는 맛이 괜찮았지만 손님을 접대하는 고급술은 아니었다. 그래서 향응 요리와 함께 올리는 술은 따로 일본 본토에서 들여오기도 하였다.

[일본인은 어떻게 입고 다녔을까]

왜관 내 일본인의 생활은 일본에서와 별 차이가 없었다. 무사 신분의 대마도인이 왜관 업무를 위해 파견되었기 때문에 옷에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조선에서 신분에 따라 복식에 규제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신분에 따른 복식 규제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내려진 검약령으로 상하 신분을 막론하고 옷차림이 규제되었다. 그러나 조선인을 접대하는 향응 요리에서 일본 검약령의 예외 규정이 적용된 것처럼 왜관 사람들은 조선인을 늘 접하는 탓에 외관에 꽤나 신경을 썼다. 일본의 화려함을 보여 주는 복식도 성행하였다. 왜관에 내려진 복식 규례인 「왜관 복식제」에는 “지난번에 법령이 개정되어 모든 일을 각별히 검소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대마도에서는 귀천의 차별 없이 면복(綿服)을 입도록 규제하고 있다”라고 하면서도 왜관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서로 만나는 것 때문에 관내 사람들의 복장이 달라야 한다고 하였다.

즉 대마도 내에는 일본 내와 동일하게 귀천의 차별 없이 무명옷을 입도록 법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왜관에는 조선인과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 따로 복식 규제를 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마마와리[馬廻, 말 탄 장수의 주위 사람]와 오고쇼[大小姓, 심부름꾼]는 옷의 안감이 달려 있는 상·하의에 용문을 사용하며, 가타기누[肩衣, 소매가 없는 옷, 무사의 예복]에 모지리[捩り, 남자용 외투]까지 걸치고 여름에는 얇은 견직물, 하오리[羽織, 겉옷으로 동복에서 연유되어 무사의 예장용 복식이 됨]는 축면·용문·사릉이라고 되어 있다. 여름철에는 얇은 견직물을 착용하라는 식인데, 비단의 종류까지 지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또 회합 장소가 아니더라도 “왜관은 매일 조선인들이 들어오는 곳이며, 업무의 성격에 따라서는 도중에 역관이나 상인들과 마주칠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 옷차림이 볼품없으면 몹시 어색해지게 된다. 그러니 왜관 안을 거닐 때에는 격에 맞게 가벼운 견직물이나 명주를 착용하도록 한다”라는 규정이 있었다. 항상 비단옷을 입고 다녀서 조선인을 마주치더라도 옷맵시가 나도록 하였다.

음식을 차려 내는 일은 약속을 정하고 만나는 일이라 만날 때에만 풍성하게 대접하면 되지만, 옷차림의 경우는 왜관 안에 언제나 조선인들이 있으므로 언제 마주칠지 모르기 때문에 매일같이 옷차림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옷차림에 격식을 차리는 일은 여름에는 매우 괴로운 것이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왜관의 일본인들이 술에 취해 옷을 벗고 훈도시[褌, 속옷] 차림으로 다니곤 하였다. 관수는 이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제발 훈도시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훈계해도 남자들만 있는 왜관에서는 잘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왜관 바깥 구경에 나선 일본인들]

1683년(숙종 9)에 세워진 약조 제찰비(約條制札碑)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꼭 지켜야 할 5가지 조항이 적혀 있다. 그중에 제1조항은 “크고 작은 일에 상관없이 왜관 경계 밖으로 뛰쳐나와 함부로 침범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이다. 왜관 담장 밖에는 잡인을 접근을 금지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고, 이 경계를 넘어 몰래 왜관에 들어가는 조선인, 이 경계를 넘어 몰래 왜관을 빠져나가는 일본인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조선 조정에서는 왜관이라는 곳을 엄격히 관리하고자 하였는데, 관리 감독을 눈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비석에 새겨 넣은 것이다.

초량 왜관은 약 33만 578.51㎡[10만 평]로 500여 명의 일본인이 살기에 넓은 부지라고 생각되지만, 중앙에 용두산이 있고 서관은 대마도에서 오는 사절단이 묵는 숙소였으므로 동관의 일본인 인구 밀도가 높았다. 한정된 공간 내에서 생활하는 것에 갑갑증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몇 년을 조선에서 살다 보면 조선을 구경하고 싶었던 생각도 많았다. 갑갑한 마음에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왜관을 벗어나기도 하고, 문밖 바닷가에 잠시 나가기도 하였다. 왜관 인근에 고찰(古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절 구경에 나가기도 하였다.

또 동래부와 협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외교, 무역에서 마찰이 빚어졌을 때 항의의 표시로 일본인들은 무리를 지어 왜관을 나섰다. 조선 조정에서 보면 모두 ‘불법’이었고, 불법적으로 왜관 밖을 나오는 것을 난출(闌出)이라고 불렀다.

왜관의 일본인들은 왜관 밖으로 나가서 등산을 즐겼다. 왜관의 일본인들은 특히 나무가 아름다운 봄철과 가을철에 구덕산에 오르는 것을 즐겼다. 산을 타고 멀리 나아가 단풍을 즐기며 기분 전환을 하였다. 오가와 지로우에몽[小川次郞右衛門]은 1806년(순조 6) 일 특송사(特送使)의 정관으로 와서 8개월을 체재하면서 왜관의 풍경을 『우진토상(愚塵吐想)』이란 책에 남겼다. 오가와 지로우에몽은 구덕산을 올라 낙동강을 보고 금정산에서 동래부를 보고 와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왜관의 일본인들은 동평현[현 부산진구 당감동 일대]에 소재한 선암사에 몇 차례 다녀가기도 하였다. 왜관 안에도 동향사(東向寺)란 절이 있어 신사(神社)와 더불어 일본인의 신앙 장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래된 사찰인 선암사에 갔던 것이다. 1665년(현종 5)에는 선암사에 가서 법당의 모습을 그리고 돌아왔다. 1675년(숙종 1)에 일본인 6명이 또 선암사에 가서 예불을 드리고 온 일이 있어 관련자가 처벌받았다. 1697년(숙종 23) 8월에는 많은 인원이 선암사를 찾았다. 왜관의 일본인 18명이 구초량을 거쳐 선암사에 갔다가 왔고, 다시 94명이 구덕산을 경유하여 선암사로 가다가 돌아왔다. 또 26명이 선암사에 가서 얼마간 머물다 돌아왔다.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둘러싼 영토 문제, 이와 관련한 서계 개찬 문제와 공작미(公作米) 문제 등 여러 현안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였고, 재판 차왜 등이 주도하여 집단적 난출을 시도하였다. 그중 일부가 왜관을 벗어나서 선암사로 간 것이다. 그리고 선암사에서는 김해 평야가 훤히 바라보이기 때문에 부산 주변 지역을 두루 살피기 위해서라도 선암사를 자주 찾았다.

일본인이 시간이 나면, 조선에 와서 꼭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온천욕이었다. 동래 온천은 이미 조선 전기부터 일본인 사이에서 유명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는 제포[내이포]에 정박한 일본인이 서울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모두 동래 온천에서 목욕하는 까닭에 다시 내이포로 가기 위해서는 길을 돌아갔고, 이 때문에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1438년(세종 20) 이후로는 제포에 정박하는 일본인은 영산 온천[창녕]을 이용하게 하고, 부산포에 정박하는 일본인은 동래 온천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온천욕을 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자 해당 지역의 만호(萬戶)에게 일본인의 병의 경중을 따지게 하였다. 병이 중한 자는 5일간 머무르게 하고, 병이 경미한 자는 3일간 머무르게 하였다. 치료차 온천욕을 하러 간다고 속이고 서계를 받아 오는 자도 있었다. 그런 자의 서계와 예물을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단종 때에는 광평 대군[세종의 아들]의 부인이 동래 온천에 와서 여러 달 동안 목욕한다고 머문 일이 있었다. 왕자의 부인이 와서 목욕을 하는 통에 일본인은 온천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온천욕을 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왜관으로 돌아가지도 않아서 동래에 체류하는 일본인이 많았을 정도였다. 그만큼 일본인 사이에서 동래 온천은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왜관 밖을 나와 온천에 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왜관 경계를 넘어 조선인 마을을 경유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병과 갑갑함을 핑계 삼아 허락받지 않고 왜관을 빠져나와 가는 일이 있었다. 1671년에 차왜 평성태(平成太) 등 50여 명이 무단으로 동래 온천에 갔다. 차왜 응접 일을 맡은 접위관 신후재(申厚載)와 동래 부사 정석(鄭晳)이 역관을 시켜 말렸지만, 병을 치료한다면서 행패를 부렸다.

그 이듬해에는 차왜 일행이 온천은 물론이고 동래 향교, 냇가, 야외 등 왜관을 벗어나 마음대로 부산 지역을 돌아다녔다. 역관 등이 말렸지만 칼을 휘두르면서 막지 못하게 하였다. 이들은 온천을 마치고 언덕에 올라가 낙동강감동창(甘同倉)을 살펴보았다. 온천행을 핑계로 부산 안을 마음껏 헤집고 부산 인근을 조망하고 돌아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왜관을 나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일본인들의 행패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일본 사람들에게 맞는 일까지 생겼다.

왜관 일본인이 왜관 밖을 나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매[鷹] 때문이었다. 매는 조선에서 선물로 막부 장군 등 일본 최고위층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매가 일본으로 보내지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잡아서 왜관에 보내고, 왜관에서 잠시 관리하다가 일본으로 보내는 과정을 밟아야 하였다. 매는 고가인데다가, 막부 장군이 선호하는 조선산 선물이었기 때문에 관리를 철저히 하고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였다. 잠시라도 소홀히 하여 폐사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매가 왜관에 들어오면 응방(鷹房)에서 보관하였다. 그래서 왜관의 서쪽으로 펼쳐진 벌판에서는 대마도로 가기 전 잠시 관리하고 있던 매의 먹이를 잡기 위해 메추리 사냥이 이루어졌다. 매 먹이용 사냥은 왜관 서쪽 밖 출입을 허가받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메추리 사냥을 핑계로 무단으로 왜관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1875년(고종 12) 일본인 격군(格軍)[노 젓는 사람] 7명이 무단으로 왜관을 벗어나 메추리 사냥을 하려고 왜관에 인접한 사하면 구초량에 난입하였다. 그들을 막아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격군들은 칼을 빼어들어 위협하며 대치하였고, 결국 왜관으로 돌아갔다. 이튿날에는 일본인이 70여 명이 마을로 몰려와 무기로 위협하며 집을 뒤지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달래어 돌려보냈다.

이틀 동안 봉변을 당한 마을 사람들이 관수에게 가서 따졌으나 관수는 뱃사공이 해군성(海軍省) 소속이기 때문에 외무성(外務省) 소속인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였다. 이처럼 근대 개항 직전까지 메추리 사냥은 계속되었고, 또 이를 기회삼아 왜관 바깥 구경에 나서는 일본인이 있었다.

왜관 내 일본인이 허락을 받고 당당하게 왜관 밖을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때다. 왜관에서 사망한 자는 대마도로 시신을 옮겨 가기도 하고 왜관 뒷산에 묻기도 하였다. 두모포 왜관의 뒷산에는 1612년(광해군 4) 왜관에 온 격군이 죽어 묻힌 이후 많은 사람의 무덤이 생겼다. 그곳에는 일본인 무덤을 알리는 왜총비(倭塚碑)도 서 있었다.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 가자 성묘를 가려면 왜관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으나 경계를 벗어나는 일이라 동래부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초량 왜관에 체류하는 왜인들은 조선에 묻힌 조상의 산소에 참배하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1683년 동래 부사 소두산(蘇斗山)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이들의 사연을 전하였다. 그래서 봄가을 사일(社日)[춘분 및 추분에서 가장 가까운 앞뒤의 무일(戊日)]과 백중일에 왜관 출입이 허락되었다. 19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두모포 왜관 뒷산에 남은 묘소가 24개소, 다른 곳에 3개가 더 있다고 하였다. 그 이전에는 더 많은 무덤이 있었을 것이다. 초량 왜관에서 사망한 일본인은 왜관의 남쪽 문인 수문(水門)을 통해 대마도로 보내졌는데, 왜관 북쪽에 있는 복병산(伏兵山)에 묻히기도 하였다.

이처럼 왜관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던 왜관 내 일본인의 행동은 등산, 선암사 나들이, 온천 나들이, 사냥 등으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행동은 왜관과의 경계를 엄중히 하려는 조선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돌발적인 왜관 벗어나기가 왜관 내 생활의 갑갑함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겠지만, 양국의 현안에 대한 거센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은 더욱 그들의 왜관 벗어나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500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을 관리하던 동래부로서는 왜관과의 경계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 가장 쉬운 관리 방법이었을 것이다.

왜관에는 수많은 일본인이 다녀갔다. 관수처럼 2년을 임기로 다녀가는 관리, 해마다 대마도에서 파견하는 연례 송사(年例送使)와 특송사[이들은 최대 110일까지 머물 수 있다], 각종 이름의 차왜 등의 관리자 계층이 있고, 관리자 아래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관수는 자신의 비서로 정관 1명, 반종 3명을 둘 수 있었다. 또 서기, 의사, 통역관 외에 허드렛일을 하는 종왜(從倭) 8명도 두었다.

이들을 비롯하여 왜관에는 조선과 무역을 하기 위해 온 상인이 있었고, 왜관의 일본인에게 생활용품이나 음식물을 파는 상인도 상주하였다. 끊임없이 무역선과 사절이 탄 배가 왜관 선창에 입항하였으므로 그 뱃사공들도 왜관에 함께 거주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일본인이 왜관에 머물렀고, 그 신분과 계층만큼이나 이들은 다양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조선인을 만나 조선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선을 구경하고 싶어 왜관 문을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또 늘 조선인을 만나는 왜관 안에서 살기 때문에 옷맵시를 갖추는 것은 물론 공손한 태도를 취하라는 지시도 자주 받았다. 왜관의 일본인은 그들이 가진 고유한 문화를 견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맛과 멋을 수용하면서 타국을 이해해 나갔을 것이다.

이용자 의견
푸*** 난왜관에 살고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여러곳에 왜관이 있엇다는데 칠곡군에 있는 왜관은 아짇개명을
안하고 그대로 쓰로 있는데 일제에 잔재물인왜관을 석전 고유에 이름으로 하루빨리 개명돼엇어면 합니다
201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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