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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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館監董譯官 |
영어의미역 | Interpreter at Waegw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왜관 내에서 이루어지는 공사인 대감동과 소감동을 관장하던 왜학 역관.
[제정 경위 및 목적]
1607년(선조 40)에 설치된 두모포 왜관은 입지 조건상 결함이 많아 대마번은 일찍부터 조선 측에 개축과 증축을 요구하였다. 대마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는 1644년(인조 22) 관수 후루카와이메몽[古川伊右衛門]을 통하여 노후하여 보수가 필요하다는 뜻을 조선 예조에 전하였고, 예조는 이듬해에 수리하도록 하였다. 왜관의 전체 수리는 1646년(인조 24)에서 1648년(인조 26)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당시 대마번은 왜관 보청 봉행, 왜관 성조 감동 차왜를 위시하여 총 70여 명의 수리 관계자를 왜관에 파견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대마번의 수리 관계자에게 소정의 급료와 공궤미(供饋米)를 지급하였고, 수리 자가업에 조선 측 인력도 동원되었다. 왜관 수리와 관련하여 임은(任銀), 요미(料米), 건축 자재의 조달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용을 조선이 부담하는 관례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왜관 공사에서 감동 역관이 언제부터 임명되고 활동하였는지는 기록에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17세기 중반 일본 측의 요구로 왜관 수리를 하면서 조선 측에서 왜관 건물의 수리를 감독하는 감동 역관이 임명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담당 직무]
1678년(숙종 4)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왜관을 이전하면서 조선 정부는 이관에 필요한 인력과 모든 비용을 일본 측에 제공하였다. 그 이후에도 왜관 건물이 불타거나 훼손되었을 때 수리에 필요한 모든 물자와 비용을 조선 측이 조달하였다. 물론 이러한 비용과 인력의 조달은 조선 측이 조영한 건물에 한정한 것이었다.
초량 왜관은 습기가 많은 해변에 위치하여 연중 바닷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건물의 손상이 심하였다. 그래서 왜관에서는 25년마다 동관과 서관 전체를 수리하는 대감동(大監董)과 화재로 소실된 가옥을 재건하거나 부분적인 보수를 하는 소감동(小監董)이 시행되었다. 대감동에는 당상 역관 3명과 당하 역관 3명, 소감동에는 당상 역관·당하 역관 각 1명이 공사의 전 과정을 총괄하여 감독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감동 역관이라고 한다.
왜관의 개수 과정을 살펴보면, 매달 초하루가 되면 동래 부사는 훈도와 별차 및 감동 역관으로 하여금 왜관을 순시하게 하였다. 건물이 썩거나 무너진 곳이 있으면 훈도와 별차는 그 상황을 문서로 작성하여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에게 보고하였고, 일본 측의 요청에 따라 수리해 주었다. 또한 대마도 측[관수 또는 재판]이 왜관 건물의 수리를 요청해 올 경우에도 경상도 감영의 군관과 다대포 첨사, 부산진 군관이나 감동 역관 및 훈도와 별차 등을 파견하여 그 실태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사의 필요성을 확인한 후 중앙 정부에 허가를 요청하였다. 허가가 내려오면 감동 역관이 작성한 소요 물품 및 비용에 대한 견적서를 경상도 감영을 거쳐 조정에 올리고, 일본 측[대마도]에도 알려 훈도 및 별차와 일본 측의 통사가 협의하여 수리에 필요한 비용과 시기를 결정하였다.
감동 역관들은 조선이 부담해야 하는 왜관의 개축·증축, 이관 비용 등을 고리대[殖利]를 통해 조달하기도 하였다. 이 고리대의 자본으로는 공무역으로 수출하기 위해 비축된 공목(公木), 공작미(公作米), 대출한 관화(官貨) 등이 이용되었으며,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사전(私錢)을 대출하기도 하였다. 1728년(영조 4) 동관 3대청 중수 당시 감동 역관인 최대제(崔岱齊)는 수표로 공목 100통을 작미(作米)하여 고리대를 통해 왜관 수리의 경비를 마련하였으며, 이것으로도 경비 조달이 어렵자 개인 돈 4,000냥을 이용해 역가를 지급하였다. 이러한 수리 비용의 조달 방식은 왜관 수리를 이행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동시에 역관의 사재(私財)를 증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왜관 건물의 수리할 곳을 살피고 공사에 필요한 비용의 책정, 공사비 소요 정도의 일차적인 결정권을 가진 만큼 임무 수행 정도가 왜관 조영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컸다. 따라서 왜관 건물의 수리가 제대로 시행되는지의 여부는 감동 역관의 활동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련 기록]
감동 역관이 주도한 왜관 수리에 관한 기록은 『왜관 수리 등록(倭館修理謄錄)』[규(奎) 12923]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외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권3 감동(監董), 『춘관지(春官志)』 권3 관수리(館修理), 『변례 집요(邊例集要)』 권11 관우(館宇)가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왜관 내 건물의 조영과 수리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왜관 감동 역관(倭館監董譯官)의 존재는 왜관 건물 조영의 감독과 소유권이 전적으로 조선에 달려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