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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23
한자 倭館
영어의미역 Waegwan
이칭/별칭 화관,부산관,내관,동래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철

[정의]

조선 시대 부산에 있던 일본인이 상주하던 건물 또는 마을.

[임진왜란 이전-삼포 왜관]

우리나라에 왜관이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시대에는 김해[지금의 강서구 녹산동 일대]에 일본 사절이 머무는 객관(客館)이 있었다. 객관은 왜관의 기능을 일부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에 동래 부산포[현 동구 범일동, 좌천동 일대]와 웅천 제포[내이포,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일대]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부산 왜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426년(세종 8)에는 울산 염포[현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일대]에 왜관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 세 왜관을 삼포 왜관(三浦倭館)이라 부른다. 서울에는 상경한 일본 사절이 머무는 왜관인 동평관(東平館)이 있었다.

신숙주(申叔舟)가 편찬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추가로 들어간 제포, 부산포, 염포의 지도[1474]를 보면, 왜관 표시와 일본인 마을이 그려져 있다. 삼포에는 항거 왜인(恒居倭人)이 사는 마을인 왜리(倭里), 왜락(倭落)이 있었다. 항거 왜인의 집을 왜가, 왜막(倭幕)이라고 불렀다. 왜관은 일본 사절이 머무는 객관, 양국 상인이 교류하는 상관(商館), 포구의 일본인을 총괄하는 우두머리가 근무하는 공관(公館) 등 다양한 공적 건물의 기능을 하였다.

왜관은 일본 배가 도착하는 포구, 일본 사절을 접대하는 곳, 무역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관사, 창고, 취사 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1494년(성종 25)의 자료를 보면 항거 왜인의 수에서 제포가 80.5%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부산포가 14.6%, 염포가 4.9%로 삼포 가운데 제포가 가장 비중이 큰 항구였다.

조선 전기에는 왜관과 왜리가 분리되어 있는 이원적 공간인 데 비해, 조선 후기에는 왜관과 왜리가 합쳐진 일원적 공간이었다. 삼포 왜관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1547년(명종 2)부터 부산포 왜관만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부산포 왜관마저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이후-두모포 왜관]

임진왜란 후 국교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왜관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우선 육지와 약간 떨어진 부산 절영도[현 영도]에 간이 왜관을 지어 일본 사절이 묵을 수 있도록 하였다. 두모포(豆毛浦) 왜관은 지금의 영도구 대평동 2가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국교 재개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정식 왜관을 건립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1607년(선조 40) 지금의 동구 수정동 동구청 일대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이 왜관을 흔히 두모포 왜관이라 부른다.

왜관의 동문 밖에는 좌자천[자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육지 삼면에는 담장, 앞바다에는 수책(水柵)이 세워져 있어 사면이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전체 면적은 약 3만 3000㎡[1만 평], 중앙에는 일본 사절을 접대하는 연`향대청(宴享大廳)[연대청], 그 좌우에는 서관과 동관이 자리하였다. 연향대청은 곧 왜관 밖으로 옮겨졌다. 초가집이 많아 불이 났을 때 쉽게 주변으로 번져 피해가 컸다. 두모포 왜관을 그린 왜관도가 남아 있지 않아서 왜관의 구체적인 경관을 알 수는 없다. 서울의 동평관이 폐쇄되고 일본 사절이 상경할 수 없으므로, 부산에 있는 객사에서 일본 사절은 조선 국왕에게 숙배(肅拜)하였다. 부산 왜관의 외교적 기능이 그만큼 강화된 것이다.

두모포 왜관은 1678년(숙종 4) 초량으로 이전될 때까지 약 70년간 존속하였다. 조선 후기 외교·무역에 필요한 여러 규정과 왜관 운영 방침 등이 두모포 왜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지가 좁고 선창 수심이 얕으며, 남풍을 정면으로 받아 배가 정박하기에 부적당하다는 이유로 이관하려고 하였다. 1640년(인조 18)에서 1672년(현종 13)까지 30여 년 동안 여덟 차례나 이관 교섭이 있었다.

1671년에는 이관 교섭을 위해 파견된 쓰에효고[津江兵庫]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논의가 급진전되었다. 다대포·절영도·초량 등이 새 왜관 터로 물망에 올랐다. 일본 측이 선창의 위치가 좋은 초량을 선택함으로써 초량 왜관 시대가 열렸다. 새로 옮기는 초량 왜관을 신관, 두모포 왜관을 고관 또는 구관이라 불렀다. 고관이라는 지명은 부산에서 현재까지 전해져 사용되고 있다.

[초량 왜관 시대]

초량 왜관 신축 공사는 1675년(숙종 1)에 착공되었다. 목재·못·기와 등 건축 자재는 조선에서, 동관·서관 삼대청 건물 등 일본식 세공이 필요한 자재는 쓰시마 섬[對馬島]에서 조달되었다. 양국의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투자된 합작품인 왜관은 1678년 4월에 완공되었다. 4월 14일 관수를 비롯한 454명의 일본인이 신관으로 들어갔다.

초량 왜관은 약 33만㎡[10만 평] 규모로 두모포 왜관의 10배 정도였다. 일본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이나 중국인 거주지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왜관의 중앙인 용두산 기슭에는 왜관을 총괄하는 관수의 관저인 관수가(館守家)[관수옥(館守屋)]가 있었다. 왜관 내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졌다. 동관은 왜관에 상주하면서 외교·무역을 담당하는 행정, 생활, 무역 공간적 성격이 강하다.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재판의 재판가, 개시 무역을 하는 개시 대청, 조선 무역을 담당한 대관의 대관가(代官家), 동향사(東向寺) 등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서관에는 동대청·중대청·서대청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일본에서 온 사절이 머물던 곳이었다.

왜관 건물은 대체로 조선 측에서 지어 주었다. 건물이 낡거나 훼손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거 공간과 각종 상점, 절 등은 자재와 목수들을 데리고 와서 일본인이 지었다. 배를 대는 항구에는 출입하는 배를 관할하던 빈번소(濱番所), 쌀 창고를 비롯한 창고들이 열 지어 있었다. 왜관의 건물은 약 2m 높이의 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처음에는 토담을 쌓았는데, 1709년(숙종 35)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 때 돌담으로 바뀌었다.

왜관 문을 나서면 왜관 주위로 여섯 개의 복병소(伏兵所)가 있었다. 처음에는 세 곳만 있었으나, 1739년(영조 15) 여섯 곳으로 늘어났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불법으로 왜관을 출입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하였다. 1709년에는 초량 왜관 설문이 세워졌다. 문 안에 있던 조선인 마을인 초량촌이 문밖으로 옮겨져 신초량촌이 생겼다. 초량 왜관 설문은 조선인 사회와 일본인 사회를 구분 짓는 중요한 경계였다.

왜관 담장 밖에는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조선 측 건물인 연향대청이 있었다. 그리고 왜관의 산 너머 설문과의 사이에는 조선인 역관들이 거주하는 성신당(誠信堂), 빈일헌(賓日軒) 등의 건물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곳을 임소(任所), 사카노시타[坂ノ下]라고 불렀다. 그 위쪽에는 일본 사절이 조선 국왕에게 숙배를 드리는 초량 객사가 있었다.

왜관에는 400∼500명의 쓰시마 섬에서 온 성인 남자가 살고 있었고, 그들은 가족을 동반할 수 없었다. 왜관은 통행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어 장기간 상주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성인 남자만 있기 때문에 매매춘의 폐단이 나타났다. 일본인 남성과 조선 여성 사이에 매매춘이 일어났는데, 이를 교간(交奸) 사건이라고 하였다. 교간이 적발되면 조선인은 왜관 밖에서 효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일본인은 쓰시마 섬으로 소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선에서는 조선인과 같은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잘 이행되지 않다가 1711년에 범간 조약(犯奸條約) 체결로 시행하게 되었다.

왜관의 일본인은 쌀·채소·생선 등 식료품은 수문(守門) 밖에서 매일 열리는 아침 시장[朝市]에서 구입하였다. 일본인 입맛에 맞지 않거나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쓰시마 섬에서 직접 조달하였다. 왜관 안에는 떡집이나 도자기 만드는 요(窯)도 있었다.

연향대청·개시 대청 등 주된 공공건물은 조선 측이 건립하였다. 일본인들이 주거 공간이나 상점으로 지은 것은 대개 일본식 건물이었다. 조선식 온돌은 없고 다다미가 깔렸으며 일본식 미닫이문과 툇마루가 갖추어진 건물이었다. 종교 생활을 위해 동향사라는 절과 용두산용두산 신사(神社)가 있었다.

조선과 쓰시마는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을 위해 많은 편의를 제공하였지만, 왜관 밖으로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하였다. 일본 사절이 왔을 때, 초량 객사에서 조선 국왕에게 숙배드릴 때, 연향대청에서 잔치를 베풀 때, 공식 업무로 조선 측 역관을 만날 때는 출입이 가능하였다. 또 봄가을 명절 때 두모포 왜관 뒷산에 성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공식적인 허락을 받지 않고 함부로 왜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난출(闌出)이라고 하였다.

1683년에 세워진 약조 제찰비(約條制札碑)에 규정된 것처럼 난출은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왜관의 경계를 멀리 벗어나 자유롭게 등산을 하거나 부산의 모습을 시로 읊으면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오가와 지로우에몽[小川次郞右衛門]이 지은 『우진토상(愚塵吐想)』이란 책에는 1806년(순조 6) 고왜관에 성묘 갔다가 산에서 본 고왜관의 주변 모습을 묘사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왜관 안에는 쌀이나 값비싼 수출품과 수입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많이 있었다. 이 보물 창고를 노리는 도난 사건이 밤에 많이 일어났다. 왜관의 야간 순찰은 요코메[橫目], 메스케[目付] 등 하급 관리가 담당하였다. 1688년(숙종 14)에는 사설 야경단을 만들어 밤마다 순찰을 돌았다.

이 무렵 곤도 야헤에[近藤弥兵衛]라는 사람이 휴대용 지갑에 있는 은을 도둑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사 과정에서 지갑에 동전, 족집게, 머리끈, 족자, 붓, 종이, 벼루, 책 등 20여 종이 들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물품은 왜관 주민의 일상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왜관이 오랫동안 부산에 있으면서 일본 문화가 왜관을 통해 부산, 김해 등 주변 지역으로 퍼져갔다. 이처럼 왜관은 한일 양국의 외교, 무역, 문화 교류의 중요한 통로 구실을 하였다.

[개항 후-전관 거류지]

1876년 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항장이 되었다. 일본은 초량 왜관이 있던 곳에 일본 전관 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를 마련하였다. 중세의 왜관 자리가 근대의 일본 전관 거류지가 된 것이다. 왜관의 관수 자리에 일본 영사관이 자리하였다. 명분과 실리의 틈새 속에서 200년 동안 존속한 초량 왜관 자리는 개항 후 이식된 번화한 시가지로 변하여 갔다. 일본인의 의해, 일본인을 위해 발전되어 간 식민지형 근대 도시 부산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다. 오늘날 부산은 전통적인 중심지인 동래를 기반으로 발달한 도시가 아니라, 동래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포구인 부산포를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곳에 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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