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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26
한자 犯奸條約
영어의미역 Treaty on Sex Scandal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조약과 회담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손승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조약
조약/회담당사자 1711년 통신사와 대마도주
관련인물/단체 왜관|통신사
체결|제정 시기/일시 1711년연표보기 - 체결
발효|시행 시기/일시 1711년연표보기 - 시행
만료 시기/일시 1872년 - 만료
체결 장소 에도[현 도쿄] - 일본국 동경도(東京都)

[정의]

조선 숙종 때에 왜관에서 일어난 교간 사건의 일본인 관련자를 조선인과 같은 형벌로 처벌할 것을 규정한 조약.

[개설]

임진왜란 이후 왜관의 위치는 1609년(광해군 1)에 두모포에 신축하여 통교 업무를 보았고, 1678년(숙종 4)에는 초량으로 이전하여, 이후 1872년(고종 9) 메이지[明治] 정부에 의해 점령되기까지 195년간 존속하였다. 왜관의 기능이 부활되자 왜관에는 대마도 왜인의 거주가 허용되어, 관수(館守)를 비롯하여 재판(裁判)·대관(代官)·통사(通詞) 등 많은 왜인들이 상주하였다. 이들 왜인과 조선 여인 사이에 종종 교간(交奸) 사건이 일어났고, 유교를 국시로 하고 있는 조선 사회에는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왜인과는 이유를 불문하고 사적인 접촉을 일체 허용치 않았던 조선으로서는 왜인 교간 사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교간 사건이 발각이 되면, 그 해당자를 모두 왜관의 관문 밖에서 참수하여 효시를 하는 것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왜관 측에 대하여는 교간 왜인을 조선 측과 똑같이 처벌하도록 동률(同律)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왜관[대마도]에서는 교간에 대한 약조가 없음을 이유로 들어 처벌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체결 경위]

동률로 처벌하는 문제는 1690년(숙종 16)과 1697년(숙종 23)의 교간 사건을 계기로 하여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면서, 관수에 대한 철공·철시를 비롯하여 도서 발급의 중지 등 구체적인 제제 조치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마 측에서는 동률의 조항이 약조에 없다는 이유로 계속 거부하였고, 조선 측에서는 이 내용을 1711년(숙종 37) 신묘통신사(辛卯通信使) 때 에도[현 도쿄]에서 장군에게 탄원할 것을 대마 측에 사전 통보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대마 도주(對馬島主)는 에도에서 통신사의 삼사와 교섭하여 교간에 관한 세 가지 약조를 맺었다. 이로써 1661년(현종 2) 이래 50여 년간이나 문제가 되어 왔던 교간 왜인에 관한 동률 죄의 적용 문제가 타결을 보게 되었다.

[조약/회담 내용]

一. 마도의 사람으로서 초량관 밖에 나가 여인을 강간한 자는 율문에 의하여 사형에 처한다.

一. 여인을 유괴하여 화간한 자 및 미성년자를 강간한 자는 영원히 유배하여 가둔다.

一. 여인이 관중에 잠입하였을 때, 잡아 보내지 않고 간통한 자도 역시 그 다음의 율문을 적용한다.

[결과]

약조가 맺어졌다고 해서, 교간 사건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었고, 또 약조의 내용대로 양측의 범죄자들이 똑같이 처리된 것도 아니었다. 약조 후에도 왜관에서의 교간 사건은 계속되었고, 또한 처벌에 있어서도 조선 측의 경우는 교간 사건에 관여한 조선 남자는 모두 관문 밖에서 효시를 하였고, 여인의 경우는 먼 곳으로 유배[원지정배(遠地定配)]를 하였다. 그러나 왜관[대마] 측은 유찬지율(流竄之律)[유배율]에 의하여 박송(縛送)[죄인을 잡아서 묶어 보냄]한다고 하였지만, 일부만 적용되었고 또 대마도로 박송한 후에도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교간 사건은 조선 후기 한국·일본 관계사에 있어 관 중심의 접촉만을 다루는 정치·외교사적인 측면과는 달리 또 다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면 교간 사건의 발단이나 처리 과정을 통하여 당시 왜관 실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으며, 양국인의 사회적인 가치관은 물론 상호 인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재를 제시해준다. 뿐만 아니라 동률의 문제가 결국은 통신사의 파견을 통하여 에도에서 신정약조(新定約條)의 방식에 의하여 타결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라 외교 문제로 비화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는 상당히 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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