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두모포 왜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87
한자 豆毛浦倭館
영어의미역 Dumo-po Waegw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구청로 1[수정2동 864-7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동구 구청로에 있던 왜관.

[개설]

두모포 왜관(豆毛浦倭館)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에 이은 세 번째 왜관으로, 규모는 약 3만 3058㎡[1만 평]이었다. 조선 후기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되던 곳으로 대마도에서 온 500여 명의 성인 남성이 거주하였다. 전체 왜관의 경관은 왜관 동문(東門) 밖에는 큰 하천인 좌자천(佐自川)[좌천(佐川)]이 흐르고 있었다. 왜관 앞쪽은 바다이고, 뒤쪽은 구릉으로 연결되어 있어 왜관 앞쪽의 지세는 편편하였다. 육지에는 담으로 둘러싸고, 바다에는 수책(水柵)이 세워져 조선인 및 조선인 마을과 경계를 이루었다.

왜관 안은 동관(東館)과 서관(西館)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관과 서관은 대청(大廳)과 행랑(行廊)을 갖춘 구조이었다. 또한 일본 사절을 접대하는 연향청(宴享廳)[연향대청, 일본 사절이 조선에 오면 이들을 접대하고 위로하는 연향을 베푸는 건물]이 있었다. 일본 사절이 왔을 때 조선 국왕에게 숙배례(肅拜禮)를 거행하는 객사(客舍)는 부산진성 내에 있었다. 객사를 왕래하면서 일본인이 조선인 마을에 출입한다는 기록이 많은데, 당시에는 불법적인 접촉 및 폐단으로 간주되었다. 두모포 왜관 이후 조성된 초량 왜관에는 일본 사절을 위한 초량 객사(草梁客舍)가 별도로 조성되어 차이를 보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06년(선조 39) 조선에 온 일본 사절은 절영도 왜관 건물이 낡아 불편하다고 호소하였다. 그즈음 조선 조정에서도 곧 일본과의 국교가 재개될 텐데, 절영도에 일본 사절을 머물게 하는 것은 사절을 섬에 유폐한다는 오해를 받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므로 국교가 재개된 이후 사용할 새 왜관의 조성 준비에 들어갔다. 일본은 조선 전기에 사용하던 부산포 왜관을 그대로 사용하기를 원하였지만, 왜관 터는 이미 부산진성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허락할 수 없었다.

조선과 일본 측은 서로 협의하여 부지를 정하였다. 부산진과 서쪽 2㎞[5리]에 있는 곳이었다. 절영도에서 육지로 왜관을 이전하되 부산진 근처에 왜관을 조성하였다. 군진(軍鎭)인 부산진 가까이에 두고 왜관의 일본인을 통제, 감시하려던 목적도 있었다. 1607년(선조 40) 봄부터 왜관 건립 공사에 들어가 6월에는 일본인들이 머물 공간이 완공되었고, 연향청 건물을 세웠다. 1607년 후반에는 왜관이 완공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왜관은 대마 도주의 임명을 받은 일본 사절, 관리와 상인 등이 상주하는 공간이었다. 왜관의 일본인 중 중요 역할을 담당한 사람을 왜관 사역(四役)이라고 부르는데, 관수(館守)·재판(裁判)·대관(代官)·동향사 승(東向寺僧)이었다. 왜관의 일본인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관수는 1637년(인조 15)부터 파견되었다. 임기는 2년으로 왜관 업무를 주재함과 동시에 왜관 체류 일본인을 통솔하였다. 재판은 조일(朝日) 양국 간의 외교 업무나 교섭을 주관하여 ‘양국 간사 차왜(兩國幹事差倭)’, ‘양국 공간 차지 차왜(兩國公幹次知差倭)’라고도 하였다.

또한 한문(漢文)을 익힌 지식인으로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려가 있었다. 이들은 왜관 내 동향사(東向寺)에 거주하였는데, 동향사의 창설은 적어도 1634년(인조 12) 이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관은 조일 무역의 교섭과 결제 등을 담당하였다. 그 외 조선어를 통역하는 역관, 정기적·부정기적으로 파견되는 외교 사절 등이 있었다. 관수가 파견되면서 왜관 내 조직이 정비되고, 조일 관계의 각 분야에 업무를 담당한 일본인 관리들이 파견되었을 것이나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왜관 안에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왜관 업무와 관련된 조선인이 있었다. 일본 사절 접대, 조정에 왜관 정황 보고, 외교 교섭 진행, 대일 무역 감독 및 총괄 보고 등 왜관과 관련된 행정의 책임자인 동래 부사가 있었다. 부산 첨사는 동래 부사와 함께 일본 사절을 접대하고 왜관을 출입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통제, 일본에서 들어오는 선박 조사, 왜관에 지급할 물품 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별도로 파견된 접위관(接慰官),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 왜관 주변에 있는 초소[복병소(伏兵所)]에서 왜관 출입을 통제하는 조선 군인 등이 있었다.

[관련 기록]

왜관을 연구하는 데는 조선 측 사료와 일본 측 사료가 있다. 조선 측 사료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같은 연대기 자료 외에 외교를 담당한 예조(禮曹)와 그 소속 관청인 전객사(典客司)에서 펴낸 『춘관지(春官志)』·『변례 집요(邊例集要)』·『동문휘고(同文彙考)』 등 외교 자료집이 있다. 그리고 경상도 관찰사가 조정에 올린 장계를 모은 『계본 등록(啓本謄錄)』, 역관이 편찬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통문관지(通文館志)』 등 외교 자료집이 있다.

무엇보다 각 관청에서 전례(前例)를 적거나, 공문서를 등사(謄寫)하여 모아 놓은 등록류(謄錄類)가 30여 종 남아 있다. 등록류는 대부분 1637년 이후 기록으로 두모포 왜관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 준다. 차왜(差倭)[일본 사절], 표류민(漂流民), 세견선(歲遣船)[일본 선박], 일본인 구청(求請), 왜관 이건(移建) 및 수리(修理), 외교 문서 서식 등의 주제로 나누어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왜관 상황은 물론 조선 후기 대일 관계를 조망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로 『전객사 별등록(典客司別謄錄)』, 『조위 차왜 등록(弔慰差倭謄錄)』, 『표인 영래 등록(漂人倭領來謄錄)』, 『왜인 구청 등록(倭人求請謄錄)』, 『왜관 이건 등록(倭館移建謄錄)』 등이다. 그 외 통신사나 동래 부사를 지낸 사람들의 문집(文集)이 다수 있다.

일본 측 사료는 대마도에서 발간된 종가 문서(宗家文書)가 대부분으로, 관수가 남긴 『관수 매일기(館守每日記)』, 왜관을 수리한 『동관 수리 기록(東館修理記錄)』, 재판 차왜가 남긴 『재판 기록(裁判記錄)』, 각 사안별로 분류한 『분류 기사 대강(分類紀事大綱)』 등 왜관의 상황과 외교 현안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그 외 대마도의 유학자인 마츠우라 기에몬마사타다[松浦儀右衛門允任]가 쓴 『조선 통교 대기(朝鮮通交大紀)』 등 개인이 남긴 자료집과 문집류가 있다.

[변천]

17세기 중엽 이후 외교가 안정되고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왜관에 들어오는 일본 사절 및 상인도 증가하였다. 따라서 왜관은 좁고 불편하게 여겨졌고, 안정적인 무역을 위해 선박 관리가 쉬운 양항(良港)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었다. 왜관 내부에 작은 하천이 많이 흘러 습하다는 문제도 자주 거론되었다. 일본 측에서는 1640년(인조 18)부터 왜관의 이관(移館)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여덟 차례에 거친 논의 끝에 1673년(현종 14) 초량으로 왜관을 옮기는 일이 결정되었다. 이관이 결정된 배경에는 이관 차왜(移館差倭)로서 왜관에 파견되어 온 평성태(平成太)[츠에효고(津江兵庫)]의 죽음이 있었다.

평성태는 이관 교섭이 길어지자 왜관을 불법적으로 나와 동래부에 체류하면서 시위를 하다 동래부에서 급사하였다. 교섭 중에 외교 사절이 죽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일은 양국의 큰 이슈가 되었고 이후 이관이 결정되었다. 1678년(숙종 4) 4월 새 왜관이 완공되었고, 489명의 일본인이 초량 왜관으로 이주함으로써 두모포 왜관은 그 기능을 잃었다. 초량으로 왜관이 이전될 때까지 70여 년간 존속하면서 17세기 조일 관계를 이끌어 나간 공간이었다.

특이한 점은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일본 거류민들은 조선 후기 존속한 왜관을 자신들의 고토(古土)로 기억하는 전승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그 작업이 평성태의 현창 작업이었다. 1879년(고종 16) 두모포 왜관 자리에 평성태의 묘와 초혼비(招魂碑)를 세우고 그의 공적을 찬양하였다. 이후 이곳은 고관 공원(古館公園)으로 조성되어 관광 명소로 변하였다.

[의의와 평가]

두모포 왜관은 이보다 앞선 시기의 왜관인 절영도 왜관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조일 관계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공간이었다면, 두모포 왜관은 조선 후기 조일 관계를 규정하는 제도가 정비되고 17세기 중엽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조일 외교와 무역 등 본격적인 조일 관계를 이끌고 나가는 데 기여한 공간이었다. 조일 관계의 발전에 따라 왜관의 건물 조성, 문화, 생활 관련 시설도 늘어갔다. 왜관의 결함은 보완하고 기능은 유지하면서 초량 왜관이 조성되는 데 필요한 선례(先例)가 된 왜관이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1.09 오류 수정 [변천] 연도 수정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