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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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漂人領來謄錄 |
영어의미역 | Record of Pyoinyeongn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규 2 |
[정의]
조선 후기 부산에서 이루어진 표류 조선인의 영래 차왜(領來差倭)에 관한 기록.
[편찬/간행 경위]
『표인영래 등록(漂人領來謄錄)』은 1641(인조 19)~1751년(영조 27)에 동래부, 부산진, 경상 좌수영 또는 경상 감영이 보고한 것을 전객사에서 편성한 것이다. 조선 정부가 대일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긴 각종 기록과 마찬가지로 해당 분야의 기록·참고를 목적으로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록의 하한 연대인 1751년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지 않으나, 표인영래 차왜가 받아가는 접대 물품으로 인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손해를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형태/서지]
모두 20책으로, 크기는 세로 41㎝, 가로 26.6㎝이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곽(半郭)의 크기는 31.7×20.9㎝이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행자 수는 10행 21~26자로 되어 있다. 판심(版心)은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구성/내용]
199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표인영래 등록』과 『표인영래차왜 등록(漂人領來差倭謄錄)』을 합철하여 간행하였다. 이 두 책은 별도의 책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같다. 쓰시마 번[對馬藩]의 선박이 출현할 경우 동래·부산진 관할의 황령(荒嶺)·간비오(干飛烏)·귀봉(龜峯)의 봉수대에서 후망(候望)하여 역관인 훈도·별차를 보내 쓰시마 사자가 인도해 온 조선인의 표류 경위를 조사하였다. 이어 동래 부사를 거쳐 중앙으로 보고하였다.
비변사에서 표류민 영래 차왜가 도해하면 동래부 인근 수령 가운데 향접위관을 지정하고 향접위관을 도와 외교적 업무를 중개할 차비 역관을 지정하여 동래부로 내려보냈다. 향접위관은 차왜에게 해당되는 하선연, 다례, 상선연 또는 별연에 출석해서 조선 정부의 외교적 의례를 주관하였다. 차비 역관은 사역원의 왜학 역관 가운데 1명이 지정되어 차왜에게 주는 서계·예단을 간수하면서 접위관과 차왜 간의 의사 중개를 담당하였다.
왜관에서 차왜로부터 조선 표류민을 인계받아 표류 경위 등을 조사한 다음 표류가 발생한 군현의 수령은 으레 문책을 받았다. 표류 빈도가 높았던 연안의 수령은 포폄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궁금해진다. 표류자의 가족들이 생사를 알아봐 달라고 관에 제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선박이 나타나는 것을 잘못 후망하여 황령·간비오·귀봉의 봉수군들이 자주 결곤 처분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표인영래 차왜 또는 다른 쓰시마 배가 가덕도를 넘어서서 경상우도에 닿는 행위는 조선 정부를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풍랑이나 일기불순으로 인한 경우가 아니고 고의로 가덕도 이상으로 떠내려가는 행위는 실상 쓰시마 번에서 접대 물품을 후하게 받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표착한 경상우도의 지방민들이 쓰시마 사자의 배를 수리하기 위해 역을 부담해야 했고 일본인과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으며 동래부의 역관·군관이 현지로 가서 인솔해 와야 하는 등 여파가 컸다. 반대로 일본 현지에 표착한 조선인들이 양찬이 적다고 불만을 표한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일본 측이 조선 표류인을 기록해 놓은 자료를 대조한다면 양면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표인영래 차왜는 조선 측의 논리로 보았을 때 규정 외의 도해례였다. 표착한 조선인을 치료하고 의식을 제공하며 부서진 배를 수리해서 연례 송사 편에 인도해 주기보다 쓰시마 번은 운명(殞命), 즉 표착인을 중태 이상으로 판단하여 별도의 사자를 보내서 인도하려고 하였고 그것도 조선 측에서 꺼리는 가덕도 너머 경상우도로 닿으려 했다. 이 때문에 쓰시마 선박의 고의적 표류가 잦았던 고을의 지방민들이 부담이 컸다는 사실은 「구조라리(舊助羅里)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종 표인영래 차왜가 정해진 접대 물품을 생략하는 대신 현물을 받아가는 예도 있었다. 차왜가 도해하면 하선연, 다례, 상선연, 별연 등 정해진 잔치가 있었고 체류하는 동안 식량과 잡물을 주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런 물품 모두를 합산하여 조일 간에 현물로 지급되었다. 예를 들어 1693~1698년에 지속적으로 왜관에 체류하는 인원을 조사하였는데, 이것은 연향 잡물(宴享雜物), 식비, 선박 수리에 소용되는 물자 등이 조선 측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격군을 늘여오는 수도 적발되었다.
조선 정부는 표인영래 차왜로 인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문위 역관[도해 역관]이 귀로에 조선 표류인을 데리고 오려고도 하였다. 1682년 통신사의 사명 중에 파선과 운명을 명확히 하는 것이 있었으나, 1720년대까지도 쓰시마 번은 이 문제에 대해 달리 해석하였다.
『표인영래 등록』은 표인영래 차왜에 관련되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조일 관계에 대한 내용도 곳곳에 드러난다. 쓰시마 번의 연례 송사, 차왜가 도해하는 내용, 쓰시마 사자가 왜관 건물 수리를 위해 도해한 내용, 또는 1696년(숙종 22) 안용복(安龍福) 사건이나 일본이 은의 순도를 낮춰 조선 측에도 유통하려 했던 신은(新銀) 기사도 나타난다. 쓰시마 번 사자가 자신들이 받아갈 서계 내용을 고쳐 줄 것을 항의한 기사도 보인다.
[의의와 평가]
『표인영래 등록』이 1641년부터 시작되는 것은 정묘·병자호란으로 관부 기록이 망실되어 현존 대일 관계 등록이 1637년 이후라는 점에서 이채로울 것은 없다. 다만 하한 연대가 1751년이 된 점은 충분한 해명이 따라야 할 것이다. 1세기 이상 조선 측에 고질병이었던 표인영래 차왜가 소멸되는 시점과 관련하여 검토해 봄 직하다. 그토록 부담이 컸던 표인영래 차왜가 조일 관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표인영래 등록』만으로 해명하기는 어렵다.
다른 등록과 마찬가지로 동래 부사와 같은 지방관의 수위에서 기록하였기 때문에, 동래 부사, 부산진 첨사 그 아래의 단계에서 벌어졌던 양국 관계의 세세한 사실이 누락되어 있고 맥락을 잡고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쉽지 않다. 여타 자료와 대조하여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특히 옛 쓰시마 번 문서와 함께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