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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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館移建謄錄 |
영어의미역 | Record of Relocation of Waegw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조선 후기 동래부 해안가에 있던 왜관을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옮기는 것과 초량 왜관의 수리에 관한 내용을 적은 기록.
[개설]
등록은 전례(前例)를 적어 놓은 기록으로, 조선 시대 관청과 관청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서를 옮겨 적고 수록[謄寫收錄]한 책자를 말한다. 『왜관 이건 등록(倭館移建謄錄)』은 왜관 이전과 관련한 일본 측의 요구, 이에 대응하는 조선 측 관리인 경상 감사, 동래 부사의 보고, 비변사의 회답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왜관을 옮기고 난 후에는 새 왜관의 수리와 관련한 인력 동원, 물자 확보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17세기 중엽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이 발전하자 두모포 왜관(豆毛浦倭館)은 협소해졌고, 무역에 필요한 선창 조건도 좋지 못하였다. 두모포 왜관을 만든 지 30년이 조금 지났는데 일본 측은 왜관을 옮겨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1640년(인조 18) 10월부터 시작된 왜관 이전 요구는 30여 년 동안 8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1640년 10월에 일본 사절이 와서 요구한 것은 왜관을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두모포에서 부산포, 즉 임진왜란 이전에 왜관이 있었던 곳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외부로부터의 방어가 어렵다는 군사적 차원이었다. 더욱이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시의 재난을 일본 측도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 왜관 터는 이미 부산 첨사영[부산진성]이 들어서 있는 군사 기지였기 때문에 다시 왜관을 세울 수는 없었다. 일본 측에서 왜관 이전을 요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왜관 이전이 처음 거론되고, 또한 왜관 이전은 국가 관방(關防)과 관련되자 뒤에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기 위해 예조 전객사(典客司)에서 등록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형태/서지]
『왜관 이건 등록』은 2책의 필사본으로, 1책은 1640년 10월 18일부터 1672년(현종 13) 12월 24일까지, 2책은 1673년(현종 14) 1월 4일부터 1723년(경종 3) 9월 9일까지의 기록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왜관 이건 등록』의 첫 기사는 1640년 10월 18일의 것이다. 이 기사에는 세운 지 30년이 막 지난 두모포 왜관을 일본 측에서 옮겨 달라고 하는 몇 가지 이유가 들어 있다. 재판차왜(裁判差倭) 등지승(藤智繩), 부특송사(副特送使) 평지우(平智友) 등 일본 사절 일행은 부산 첨사 정해(鄭楷)를 만난 다례(茶禮) 연회에서 왜관 이전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 왜관의 지세가 너무 낮고, 주변에 민가가 있어 막혀 있고, 외부로부터의 침공에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왜관 이건 등록』에는 이후 일본 측이 보낸 7차례의 이관차왜(移館差倭)의 구성, 교섭 내용, 조선 측의 교섭 내용과 보고, 비변사에서의 회답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왜관 이전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는 대신 두모포 왜관을 수리, 개축해 나가는 과정도 기록되어 있다. 2차 이관차왜는 1659년 4월에 도착하여 두모포 왜관의 불편함을 언급하면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3차 이관차왜는 1661년(현종 2) 윤7월에 도착하여 ‘두모포 왜관이 좁다, 선창이 불편하다’는 등의 근거를 되풀이하면서 여전히 부산진성으로 왜관을 옮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4차 이관차왜는 1668년(현종 9) 12월에 도착하여 ‘왜관을 이전하는 일은 대마도에서 독자적인 판단 아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막부(幕府)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분명히 하면서 조선 측을 압박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때에는 대마도에서도 조선으로의 출항 장소를 변경하기 때문에 이에 맞춰 조선에서도 왜관을 옮겨 달라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5차 이관차왜는 1670년(현종 11) 2월, 6차 이관차왜는 1671년(현종 12) 5월, 7차 이관차왜는 1671년 10월, 1672년(현종 13) 12월에 각각 도착하였다.
8차 교섭 과정에서 비변사를 중심으로 한 조정에서는 왜관을 옮길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일본 측에서 제시한 왜관 후보지 외 다른 지역을 선정해 주면서 30년 이상을 끌어왔던 긴 교섭을 타결시키고자 하였다. 1673년 9월 새 왜관 부지가 초량으로 결정되었고, 1675년 3월부터 착공, 1678년 4월에 초량 왜관이 완공되었다.
『왜관 이건 등록』의 1678년(숙종 4) 4월 23일 기사에는 4월 22일 구대관왜(舊代官倭) 5명을 비롯한 33명이 먼저 새 왜관으로 옮겼고, 23일에 관수(館守)를 포함하여 454명이 이사를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다음 기사는 20년 정도가 흐른 후인 1696년(숙종 22) 5월 24일부터 시작된다. 이 기사부터 마지막 기사까지는 새 왜관을 보존하고 수리하는 일에 대한 내용이다. 새 왜관이 지어졌기 때문에 왜관을 어떻게 보존하고 살필 것인가에 대한 절목(節目)도 만들어졌다.
『왜관 이건 등록』의 1701년(숙종 27) 7월 20일 기사에는 비변사에서 만든 「왜관 간검 절목(倭館看儉節目)」이 수록되어 있다. 절목의 내용은 ‘역관인 훈도(訓導)와 별차(別差)는 매월 두세 번씩 왜관에 들어가 손상되거나 훼손된 곳을 두루 살피고 보고 한다, 왜관 일을 주관하는 부산진에서는 공사 등의 일을 각 포에 나누어 일을 진행하고, 소소한 왜관 수리는 전처럼 부산진에서 주관한다’ 등의 모두 12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왜관 신축 공사에 막대한 재정을 사용한 조선 측 문서에는, 조선 측 관청에는 물론 왜관의 일본인에게도 왜관 손상과 수리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알리면서 보존에 힘쓰는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왜관 이건 등록』에는 왜관 이전 교섭의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이 성사될 때까지 두 국가의 외교술은 물론이고 교섭 이후 이끌어낸 많은 외교적 성과들도 기록되어 있어 조일 외교의 또 다른 단면을 찾을 수 있다. 1차 이전 교섭이 있을 때 왜관을 옮기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니라 다른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전이 동원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왜관 이건 등록』은 초량 왜관 수리를 담당할 감동왜(監董倭) 등이 왜관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하는 1723년 9월 9일 기사를 마지막으로 종결된다. 그런데 이 이후의 초량 왜관 수리 관련 기록은 별도의 『왜관 수리 등록(倭館修理謄錄)』으로 만들어지는데, 초량 왜관의 신설, 왜관 수리가 필요한 배경, 왜관 수리의 내용, 왜관 수리에 필요한 물자 조달 등의 전례(前例)를 『왜관 이건 등록』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왜관 이건 등록』은 부산포 왜관에서 두모포 왜관, 두모포 왜관에서 초량 왜관으로의 이전 과정과 초량 왜관의 수리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