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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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甘同倉 |
영어음역 | Gamdongchang |
이칭/별칭 | 남창(南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낙동강 변에 위치한 조선 후기의 조창.
[관련 기록]
『숙종실록(肅宗實錄)』 권54 숙종 39년 8월 11일 기사에 “또한 금정산성의 서문(西門) 밖은 바로 양산 땅인데 감동창(甘同倉)이 그곳에 있고, 창 밑에 사는 사람이 300여 호(戶)나 되게 많으니[且城之西門外 卽梁山地也 甘同倉在於其處 而倉底居民 多至三百餘戶]”라고 기록되어 있고,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6 제창 감동창에 “감동창은 양산에 있으니 본래 통·수영과 각 진포의 사포 지방(射砲支放)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처음에는 연읍(沿邑)의 신미(新米)로 구획하다가 영조 기묘년[1759]에 본 읍의 대동미를 해마다 전부 그 창고에 그대로 두게 하였다[甘同倉在梁山 本爲統水營及各鎭浦射砲支放而設也 初則以沿邑新米區劃 至英宗己卯 以本邑大同米 每年全數仍留該倉]”라고 하였다.
[내용]
감동창은 조선 시대에 나라에 바치는 삼세(三稅) 중에 전세(田稅)와 공물세(貢物稅)인 대동미(大同米) 등을 저장하여 한양으로 조운(漕運)하는 일을 맡아 보는 낙동강의 감동포(甘同浦)에 위치한 조창(漕倉)이었다. 특히 경상도 각 읍에서 수송된 수천 석의 미곡과 사인(射人)·포수(砲手) 등의 급료미(給料米)를 보관하여 부산 지역 군사 진영에 군수미와 포목 등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당시 감동창 일대에는 수백, 수천 호의 부민(富民)·호상(豪商)이 거주하였다고 할 정도로 포구 상업이 번성한 곳이었다.
1878년(고종 15) 편찬한 『양산군 읍지(梁山郡邑誌)』에 따르면, “감동창은 일명 남창(南倉)이라 하는데 남고(南庫) 3칸[間], 서고(西庫) 3칸, 좌기청 3칸이 설치되어 있었다”라고 한다. 감동창의 위치는 지금의 경부선 구포역 앞 낙동강 둑인 도시 철도 3호선 구포역 부근으로 추정된다. 당시 양산군의 제일 남쪽에 있는 창고란 뜻이 담겨 있다. 오늘날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1동 307~328번지, 1060번지 일대의 남창리 마을의 조선 시대 지명은 양산군 좌이면 남창리이었다.
1809년(순조 9) 이유하(李遊夏) 양산 군수가 감영(監營)에 올린 글에서 “감동창은 선박들의 요충지요, 전곡(錢穀)이 모이는 곳이며 생리(生利)가 조금 넉넉한 고로 사방에서 이익을 찾는 생민(生民)들이 해를 거듭하여 모여드니 …… 단연 동남의 도회”라고 밝혔다. 당시 남창은 300여 호의 가옥이 운집하고 장날이면 100여 척의 배와 사방에서 교역하는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이처럼 번창하던 남창리 마을은 삼세 조창과 장터, 나루터 등을 거느린 강변 촌락이었다. 남창이라는 지명은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다. 구포 사람들은 남창을 남창(南滄)으로 쓰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구포에서 자랐던 민속 사학자 손진태(孫晋泰)[1900~?]의 아호(雅號)가 남창이었다.
[변천]
감동창의 존재가 1620년(광해군 12)에도 확인되고 있는 만큼, 설치 시기는 조선 중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19세기부터는 남창으로 불렸다. 1899년(고종 36) 편찬된 『양산군지(梁山郡誌)』에는 “감동포, 즉 구포에는 창(倉)이 설치되었는데 남창(南倉)으로 부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창이 설치되면서 감동포에는 조운 선박과 역부(役夫)들이 들끓었다.
[의의와 평가]
감동창은 조선 후기 낙동강 수운을 이용한 조운 시스템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소재로, 앞으로 문화 콘텐츠로도 활용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