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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21
한자 朝鮮時代-地方行政
영어의미역 Provincial Administration of the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정의]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행정 구역과 행정 기구.

[개설]

조선 건국 초부터 동래부(東萊府)는 동남부의 행정적 중심지일 뿐 아니라 군사적인 거점으로서, 나아가 대일 외교의 창구로서 중요한 위치가 부각되었다. 1547년(명종 2) 동래현(東萊縣)동래 도호부(東萊都護府)로 승격한 것이나, 1655년(효종 6) 동래부를 경상 좌병영 경주 거진(巨鎭)으로부터 분리해 독진(獨鎭)으로 승격시킨 것은 동래부의 위상을 다시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동래부는 대일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이면서 유사시에는 국방의 전초 기지로 활용되는 특성을 안고 있었다.

[조선 전기]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7년(태조 6) 부산진(釜山鎭)이 설치되면서 동래부는 행정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거점으로서의 위치도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405년(태종 5) 부산진을 관할하는 동래군(東萊郡)이 독립하면서 동평현(東平縣)이 그 속현으로 되었다. 성종(成宗) 대까지 동래는 동래현을 중심으로 한 행정 중심지와 경상 좌수영을 중심으로 한 군사 중심지로 이원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도 관찰사의 지휘 아래 편제되어 있었다. 1547년(명종 2) 동래현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방어 책임을 물어 한때 동래현으로 강등하는 조치가 따랐으나, 1599년(선조 32) 외교 거점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다시 동래부로 승격하였다.

동래현 시대에는 현령(縣令)[종5품]·훈도(訓導)[종9품]의 관원이 있었으며, 부산포(釜山浦)에는 일본과의 외교 업무를 전담하였던 종9품의 왜학훈도(倭學訓導) 1명이 배치되었다. 종9품의 역승(驛承)이 있어 역(驛)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도호부 시대에는 행정 기구가 확장되고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밑에 보좌관인 종5품의 판관(判官)이 있어 동래부의 수운(水運)·해운(海運)의 서무를 맡았으며, 향교를 관리하고 지방 양반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던 교수(敎授)가 있었다.

수령(守令)의 임기는 60개월[5년간]이었으며, 뒤에는 30개월[2년 반]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또 출신지에 부임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도 동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수령의 권력 남용과 토착화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교체되는 일이 많았다.

수령의 업무는 중앙 관제의 축소판으로 6조를 모방한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방(六房)으로 분장되고 그 사무는 토착의 향리(鄕吏)에 의해 관장되었다. 그 중에도 호방의 수석인 호장(戶長)은 수령의 부재 중에 그 직무를 대리 행사하는 수아전(首衙前)의 위치에 있었다. 그 외 이방(吏房)·형방(刑房)의 세력이 커서 이들 수리(首吏)를 삼공형(三公兄)이라 불렀다. 이들 아전(衙前)은 토착인으로 그 직역은 세습되었으며, 신분은 점차 중인(中人)으로 고착되어 갔다.

당시의 지방 행정은 수령과 그 예속 기관인 이청(吏廳)·무청(武廳) 등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외에 지방 양반들로서 구성되었던 민간 자치 기관인 향청(鄕廳)이 있었다. 향청의 임원은 향임(鄕任)이라 하여 부(府)에는 4~5명, 현(縣)에는 2명을 두는 것이 통례였으나 후대에 내려가면서 점차 증가하였다.

고을의 사인(士人) 가운데서 나이와 덕망이 높은 자를 좌수(座首)로, 그 다음에 별감(別監)을 각각 선발하여 추대하였다. 면리(面里)에는 각기 면임(面任)과 이임(里任)이 있었다. 이들의 주된 소임은 관의 정령(政令)을 주민에게 주지시키는 한편 부세를 독촉하는 일이었다. 민호(民戶) 조직은 국초에 인보법(隣保法)이 잠시 시행되었으나, 곧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마련되어 일종의 연대 책임제의 방식으로 농민을 통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조선 후기]

조선 후기 동래 도호부사[동래 부사]는 다른 지방과 달리 문관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 가운데서 임명되었다. 그 임기는 900일[2년 6개월]이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이안눌(李安訥)이 부임한 뒤부터 1863년(철종 14) 3월에 엄석정(嚴錫鼎)이 이임할 때까지 255년 사이에 193명의 부사가 교체되었다. 대부분의 동래 부사는 주어진 임기가 차기도 전에 교체되고 말았다. 동래 부사는 경상 감사의 지휘 감독을 받으면서 동래부의 행정·사법·군사권까지도 행사할 수 있는 방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후기 동래 부사가 다스리던 동래읍은 동래부아(東萊府衙)의 소재지로서 둘레 1만 7291척, 높이 17척의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성안에는 충신당(忠信堂)·봉래관(蓬萊官) 등 관사와 별관(別官)·향청 등 청사, 군기고(軍器庫)·사창(司倉) 등 창고, 정원루(靖遠樓)·식파루(息波樓) 등 누정을 비롯해서 690여 칸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충신당은 부사가 공무를 집행하는 동헌으로서 모든 관사의 중심이 되었으며, 봉래관은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매월 1일과 15일에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는 동시에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관원들을 접대하고 유숙하던 객사였다.

동래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편찬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따르면, 읍내면(邑內面)은 동래부의 중심에 위치했으며,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있었다. 동부는 충렬사리(忠烈祠里)·안락리(安樂里)·염창동(廉倉洞) 등 10동 3리로 되어 있었고, 서부는 남문 서변리(西邊里) 등 7동 5리로 되어 있었다. 동면(東面)명장리(鳴莊里)·반여리(盤如里)·재송리(栽松里)·해운대리(海雲臺里)·중동(中洞) 등 3동 9리로 되어 있었다.

남촌면(南村面)은 축산동(丑山洞)·남천리(南川里)·대연리(大淵里) 등 1동 15리로 되어 있었다. 이 중에는 경상 좌수영이 있어서, 둘레 9,198척, 높이 13척의 수영성이 있었으며, 인근에 각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평면(東平面)부산 성내리(城內里), 두모포리(豆毛浦里) 등 13리로 되어 있었다. 부산 성내리에는 부산 첨사영(釜山僉使營)이 있었으며, 두모포리에는 수군만호영이 있었다. 1607년(선조 40)부터 1678년(숙종 4)까지 71년 동안 왜관(倭館)이 여기에 설치되어 있었다.

사천면(沙川面)은 상단과 하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상단은 주례리(周禮里)·모라리(毛羅里) 등 6리로 되어 있고, 하단은 신초량리(新草梁里)·감천리(甘川里) 등 9리로 되어 있어 도합 15리였다. 하단의 신초량리에는 1678년(숙종 4) 이후부터 왜관이 설치되었고, 서평리에는 수군만호영, 다대리에는 다대포 첨사영이 있었다. 서면(西面)초읍리(草邑里)·양정리(羊亭里)·만덕리(萬德里) 등 11리로 되어 있었다. 북면(北面)부곡리(釜谷里)·선동(仙洞)·장전리(長箭里)·산성리(山城里) 등 1동 8리로 되어 있었다.

기장현(機張縣)에는 고려 말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조선 시기 이후 현감으로 고쳤다. 1599년(선조 32) 동래에 합해졌다가 1617년(광해군 9) 다시 현으로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동래부 기장군, 1896년 경상남도 기장군이 되었고,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1831년(순조 31) 당시의 사정을 보여주는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에 따르면, 조선 후기 기장현의 행정 구역 안에 읍내면(邑內面)·동면(東面)·남면(南面)·상서면(上西面)·하서면(下西面)·하미면(下味面)의 6면 34개 방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래현(縣)이 목(牧)의 과정도 없이 바로 도호부(都護府)로의 승격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하신 내용과 관련된 사료들을 확인하였으나 동래현이 곧바로 도호부로 승격된 원인에 대한 자료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로서는 동래현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일본과의 교역 중심지 및 군사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한 데 따른 결과로 추정됩니다.
201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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