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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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多大浦僉使營 |
영어의미역 | Dadae-po Cheomsa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일원에 있던 수군첨절제사의 진영.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 다대포에 설치된 수군 만호영을 목도[영도]에 침입한 왜구를 무찌른 공로로 1544년(중종 39) 수군첨절제사의 진영으로 승격시켜 다대포 첨사영(多大浦僉使營)을 설치하였다. 다대포의 수군첨절제사는 무관 정3품의 당상관이었다. 이는 다른 첨사들이 종3품인 점을 감안하면 다대포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수군첨절제사 밑에 군관(軍官) 14명, 진리(鎭吏) 24명, 지인(知引) 13명, 사령(使令) 10명, 군뢰(軍牢) 8명이 있었다. 병선은 전선 2척, 병선 2척, 거북선 1척, 사후선 4척이 있었다. 다대포 첨사영은 돌로 쌓은 성으로 동서남북에 성문과 문루가 있었는데, 현재는 성터 일부만 남아 있다.
[관련 기록]
『다대진지(多大鎭誌)』에 의하면, 임진왜란을 겪은 후 경군문(京軍門)에서 다대진지는 오래 근무하도록 임명하는 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다대진지』에 보면, 1751년(영조 27) 이후 다대진을 왜적이 침입하는 첫 길목이라 하여 다대포 첨절제사를 변방의 요충을 지키는 자리로 중시하였다고 한다.
[변천]
1544년 만호영에서 첨사영으로 승격하여 정3품 첨절제사가 임명되었다. 1654년(효종 5) 첨절제사가 국마장의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을 겸하였다. 1676년(숙종 2) 겸임이 폐지되었다가 다시 겸임하였다. 1751년 왜적이 침입하는 길목이라 하여 다대포 첨절제사를 중시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다대포 첨사영은 조선 후기 부산 해안의 수군 운영과 조직 변화를 알려 주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