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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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萬戶營 |
영어의미역 | Manhoyeong Garris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정의]
조선 시대 진관 체제에 입각해 부산 지역에 있던 수군만호 진보(鎭堡).
[개설]
조선 시대의 진관 체제(鎭管體制)는 1457년(세조 3)에 성립되었고, 그 후 약간의 변화를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경기도에는 1명의 전임 수군절도사, 1명의 수군첨절제사, 5명의 수군만호가 있었다. 충청도에는 1명의 전임 수군절도사, 2명의 수군첨절제사, 3명의 수군만호가 있었으며, 경상도에는 2명의 전임 수군절도사, 2명의 수군첨절제사, 19명의 수군만호가 있었다.
수군절도사는 육군의 병마절도사와 마찬가지로 주진(主鎭)이 되고, 그 휘하의 종3품의 첨절제사는 거진(巨鎭)이 되었다. 거진 휘하의 종4품 만호는 제진(諸鎭)이 되었다. 이에 따라 수군의 지휘권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주진의 수군절도사로부터 거진의 첨절제사로, 또 그로부터 제진의 만호 등으로 연결되는 일원적 계통이 확립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의 수군은 고려 말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수군이 강화, 확대되면서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수군절도사를 정점으로 수군첨절제사, 수군만호로 이어지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경상 우도에는 거제에 4곳, 고성에 2곳, 기타 남해·진주·웅천에 각각 1곳 등 주로 거제와 고성에 수군 만호영(萬戶營)이 설치되었다. 이는 경상도의 수군 만호영이 기본적으로 부산포, 염포, 제포의 삼포 방어와 관련되었기에 나타난 결과이었다. 즉, 동래의 두모포 만호영·해운포 만호영·포이포 만호영·다대포 만호영은 부산포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고, 울산의 서생포와 염포는 염포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제의 옥포·지세포·영등포·조라포 및 고성의 사량·당포는 제포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수군 만호영에는 최고 지휘관인 종4품의 수군만호 1명을 위시하여 그 휘하에 군관(軍官), 진리(鎭吏), 지인(知印), 사령(使令) 및 수군 등이 배속되었다. 예컨대 『내영지(萊營誌)』에 의하면 부산 첨사 휘하의 두모포 만호영에는 종4품의 수군만호 1명, 군관 8명, 진리 11명, 지인 10명, 사령 5명이 있었고, 수군으로는 포수 24명, 능로군(能櫓軍) 120명 등이 있었다. 또한 해양 방어를 위해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군량 등이 있었다. 두포모 만호영의 경우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으며 군량은 선상미(船上米)가 18섬 11말, 찐쌀 3섬, 미숫가루 1섬이 있었다. 만호영의 수군과 병선, 군량은 근본적으로 해양 방어를 위해 존재하였다.
[관련 기록]
『경국대전』에 “경상도에는 수군만호가 19명이 있는데, 종4품 부산포 진관에 두모포, 감포, 해운포, 칠포, 구이포, 오포, 서생포, 다대포, 염포, 축산포가 있다[慶尙道 水軍萬戶 十九員 從四品 釜山浦鎭管 豆毛浦 甘浦 海雲浦 漆浦 包伊浦 烏浦 西生浦 多大浦 鹽浦 丑山浦]”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 시대의 수군 만호영은 왜구 및 일본과의 관계에 따라 위치나 기능에서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 수군이 강화되고 제해권을 확보하면서 수군 만호영은 점차 연해에서 섬으로 전진 배치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484년(성종 15) 이전 부산 지역이 속한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경상 좌수영] 관내에는 원래 1개의 첨사영(僉使營)인 부산진(釜山鎭)과 10여 개의 만호영인 동래의 다대포영(多大浦營)·해운포영(海雲浦營)·서평포영(西平浦營), 기장의 두모포영(豆毛浦營), 울산의 개운포영(開雲浦營)·서생포영(西生浦營)·염포영(鹽浦營), 장기의 포이포영(包伊浦營), 경주의 감포영(甘浦營), 영덕의 오포진(烏浦鎭), 영해의 축산포영(丑山浦營), 흥해의 칠포영(漆浦營)이 있었다.
그러나 1544년(중종 39) 다대포영이 첨사영으로 승격되고, 해운포영·염포영·오포영이 폐지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에는 2개의 첨사영과 8개의 만호영이 있었다. 그 후 경상 좌도의 만호영은 임진왜란 같은 전쟁 중에는 전황에 따라 수군 만호영이 통폐합되기도 하고 위치가 바뀌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해상 방어의 요충지인 부산으로 두모포영, 개운포영, 포이포영, 감포영, 축산포영, 칠포영이 옮겨 와 10진 체제가 갖추어졌다.
1751년(영조 27) 감포, 축산포, 칠포가 혁파됨으로써 경상 좌수영에는 7진 체제가 확립되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의 「경상 좌수영령 지도(慶尙左水營領地圖)」에 보면, 칠포·감포·축산포를 ‘혁파된 3진 터[罷三鎭址]’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 7월 군제 개편으로 전통 수군이 모두 혁파되면서 수군 만호영도 함께 혁파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의 수군 만호영은 수군절도사를 정점으로 수군첨절제사, 수군만호로 이어지는 수군 체제의 최전방 진보로서 해양 방어의 제일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