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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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七鎭體制 |
영어의미역 | Chiljin Syste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지역의 해안 방어를 위해 경상 좌수영 아래 칠진을 집결시킨 체제.
[개설]
조선은 일본군의 첫 침략을 받았던 부산 지역에 임진왜란 초기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상도 동해안에 있던 두모포영 등을 옮겨 와서 상당한 군비를 갖추었다. 이후 좌수영 관할 아래의 감포, 축산포, 칠포가 혁파되었다. 이에 조선 후기 좌수영에는 칠진 체제(七鎭體制)가 확립되었다. 이로써 부산에 경상 좌수영 관할의 모든 병력이 총집결되어 부산은 국내 최대의 수군 기지가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때 부산 지역의 수군이 일찍 무너져 일본군이 해안 지역을 쉽게 차지함으로써 일본군은 일찌감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에 다시 있을지도 모를 일본군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경상 좌수영 휘하의 수군 진영을 부산에 결집시켰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부족한 수군으로 해안 방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수군의 편성을 집중시킨 조치이었다.
[관련 기록]
『영조실록(英祖實錄)』 권73 27년 신축 을묘조 기사에 칠진 체제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내용]
조선 전기에 경상 좌수영의 수군 편제는 원래 1개의 첨사영[부산진]과 10여 개의 만호영[동래 다대포영·해운포영·서평포영, 기장 두모포영, 울산 개운포영·서생포영·염포영, 장기 포이포영, 경주 감포영, 영덕 오포영, 영해 축산포영, 흥해 칠포영]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다대포영이 첨사영으로 승격되었고, 해운포영·염포영·오포영 등이 폐지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에는 2개의 첨사영과 8개의 만호영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해상 방어의 요충지인 부산 지역에 두모포영, 개운포영, 포이포영, 감포영, 축산포영, 칠포영을 옮겨 각기 상당한 군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심이 얕아 이설 문제가 자주 논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좌수영 관할의 감포·축산포·칠포가 혁파되었다. 이렇게 조선 후기 좌수영에는 칠진 체제가 확립되었다.
[변천]
두모포영은 1629년(인조 7)에 부산포로 옮겼다가, 1680년(숙종 6)에 왜관[두모포] 자리로 옮겼다. 개운포영은 임진왜란 이후에 부산포로 이전하였다. 포이포영은 임진왜란 이후 동래 남촌으로 옮겼다. 감포영은 임진왜란 이후 부산포로 이전하였다가 동래 남촌으로 옮겼다. 축산포영은 임진왜란 이후 부산포로 이전하였다가 감만이포로 옮겼다. 칠포영은 임진왜란 이후 부산포로 이전하였다가 동래 남촌으로 옮겼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좌수영에 칠진 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 좌수영 관할의 모든 병력은 부산에 총집결되었으며, 부산은 국내 최대의 수군 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군사 기관의 집결은 수백 년 동안 부산 지역민들을 괴롭히고 수탈하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