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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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丑山浦 |
영어의미역 | Chuksan Por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명호 |
[정의]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던 조선 후기 부산진 관하의 만호영이 설치된 포구.
[개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축산포(丑山浦)는 두모포, 감포, 해운포, 칠포, 포이포, 오포, 서생포, 다대포, 염포와 함께 부산진(釜山鎭) 관하이었다. 부산진에는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가 사령관이었고, 축산포 만호영(築山浦萬戶營) 등에는 종4품의 수군만호가 사령관이었다.
[명칭 유래]
축산포 만호영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영해(寧海)의 축산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축산도는 형상이 소와 같아 ‘축산(丑山)’이라 하였고, 축산도의 남쪽에 높은 봉우리가 말과 같아 ‘마산(馬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영해 축산도의 지명을 따서 축산포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선조 25)에 축산포 만호영을 동래로 옮길 때 기존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축산포로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전기 축산포 만호영은 영해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선조 25)에 동래로 옮겼다. 위치는 부의 남쪽 12리이었다. 당시 경상 좌수영이 동래부의 남쪽 10리 지점이었으므로 축산포는 경상 좌수영의 약간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병자호란이 발발한 1636년(인조 14)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1652년(효종 3) 다시 옮겼다.
1751년(영조 27) 4월 경상 감사 김백상이 경상도의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경상 좌도의 축산포, 감포, 칠포의 만호영 및 경상 우도의 풍덕포, 상주포, 곡포, 영등포를 혁파하자고 요청하여 축산포 만호영은 혁파되었다. 그런데 1850년(철종 1) 작성된 『내영지(萊營誌)』에는 축산포와 칠포에 각각 진리(鎭吏) 6명, 지인(知印) 3명, 사령 2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축산포와 칠포의 수군만호는 혁파되었지만, 진보 자체가 완전히 혁파되지는 않고 단지 수군만호에서 진리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동래 축산포 만호영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관련 기록]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부의 남쪽 10리에 있으며, 수군만호가 있다[在府南十里 有水軍萬戶]”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