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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포 만호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592
한자 築山浦萬戶營
영어의미역 Chuksan-po Manhoyeong Garris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있던 수군만호영.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때 수군의 패배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경상 좌수영] 관할에 있던 영해 도호부(寧海都護府)의 축산포 만호영(築山浦萬戶營)을 동래부의 남촌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본영의 수장은 만호(萬戶)이었다. 만호 아래에 군관(軍官), 진리(鎭吏), 지인(知引), 사령(使令)이 있었다. 보유한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영해 도호부에 “축산포 부 동쪽 60리에 있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세조실록(世祖實錄)』 3년 정축조에는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제1조의 축산포·포이포(包伊浦)·칠포(漆浦)를 혁파(革罷)하고 선군(船軍)을 흥해진(興海鎭)으로 옮겨 소속시키는 일은 축산포의 선군 등이 모두 영해부(寧海府) 이상의 여러 고을에 거주하여 흥해진과는 동떨어지게 멀어 옮기어 정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영해진에 소속시켜야 되겠습니다. 다만 방어(防禦)가 가장 긴요한 수군은 모두 진(鎭)에만 소속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금 혁파된 포이포·개운포·해운포의 선군의 합계 1,502명 내에서 부산포·영포·가을망포(加乙望浦)에 각각 400명을, 다대포(多大浦)에 200명을, 서생포(西生浦)에 100명을 거주지의 멀고 가까운 것을 헤아려 옮겨서 소속시키게 하소서. 또 칠포는 비록 큰 배는 정박시킬 수 없지만, 작은 배는 정박할 수가 있는데 하물며 지금 흥해에 비록 새로운 진을 설치하더라도 지킬 군사가 없으면 칠포는 갑자기 혁파할 수가 없으니 작은 배를 고쳐 만들어 이전대로 방어하도록 할 것이며 흥해진의 군사는 가까운 곳은 한량인(閑良人)을 사용하여 점차로 충당해 정하게 하소서.”

『숙종실록(肅宗實錄)』 20년 갑술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이 일찍이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하였을 적에 좌도(左道)의 바닷가를 순찰해 보았는데, 축산포·포이포·율포(栗浦)의 구진(舊鎭)이 영해(寧海)·영덕(盈德)·흥해 등의 지경에 있었습니다. 고로(古老)들에게 물어보니, ‘그전에 일본의 침범이 더러 여기까지 미쳤기 때문에 진을 설치하여 방비하였었는데, 그 뒤에는 수종(水宗)이 달라졌기 때문에 점차 각 진을 동래(東萊) 이하로 옮기고 옛적의 터만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 말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고려 후기에 왜인(倭人)들의 환란이 영동(嶺東)에까지 미쳤고, 근년에는 영동과 영남의 어업(漁業)하는 민중들이 심상하게 울릉도를 갔다 왔다 하고 있으니, 수종이 달라졌다는 말은 혹은 맹랑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천하의 환란은 허다히 소홀히 여기는 데에서 발생하니, 다시 해도(海道)에 유의하여 엄중하게 방금(防禁)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며 받아들이고 무릇 의논해야 할 것들은 해조(該曹)에 계하(啓下)하였다.”

[변천]

축산포는 조선 전기에 경상북도 영해도호부에 있었다. 1457년(세조 3) 축산포 만호영은 혁파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 지역의 수군을 강화하면서 동래의 부산포로 옮겼다가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다. 1751년(영조 27)에 축산포 만호영은 다시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축산포 만호영은 임진왜란 이후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 관할 아래 수군 편제의 변화를 알려 주는 유적이자, 조선 후기 부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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