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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47
한자 釜山鎭
영어의미역 Busanjin military bas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정의]

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부산포에 설치된 수군첨절제사의 진영.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이후 왜구(倭寇)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아울러 일본인의 거류지인 왜관(倭館)이 부산포(釜山浦)에 설치되자, 일본에 대한 방어와 견제를 하기 위해 부산포에 진성을 설치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경상도 동래현(東萊縣)조에 “부산포진은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본조(本朝) 성종 19년[1488]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약 5,356척[1,623m]이다. 수군첨절제사가 1명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중종실록(中宗實錄)』 29년 갑오조에 “한효원(韓效元)이 아뢰기를, ‘조윤손(曺閏孫)을 변방으로 보내 순찰하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신은 이미 경연에서 대략 아뢰었으나 아직 다 아뢰지는 못하였습니다.

양장곶(羊腸串)에 진(鎭)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전부터 있었으나 참으로 설치한다면 미조항(彌助項)의 고사에 따라 거진(巨鎭)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장곶에 진을 설치하면 부산포가 안에 있게 되니 내진(內鎭)으로 왜인과 상대함은 불편합니다. 부산진(釜山鎭)을 다대포(多大浦)로 옮기고 또 부산포를 경상 좌도의 수영(水營)으로 삼아 수사(水使)를 거기에 있게 하며, 진은 양장곶에 설치하고 다대포의 군졸을 거기로 옮겨 채운 뒤에 당상관을 그곳 첨사(僉使)로 삼는다면, 저절로 거진이 될 것입니다. 그 밖에 긴요하지 아니한 작은 진은 다 파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또 수영을 옮기거나 부산진을 옮기는 일 등은 멀리서 결정하면 폐단이 있을 듯도 하나, 부산포는 본시 왜인을 상대하는 곳이므로 객관(客館)도 커서 수사가 있을 만하며, 다대포의 관사도 굉장하므로 부산 첨사가 있을 만합니다. 객관만 더 확장하여 지으면 된다고 장순손(張順孫)이 재임할 적에 늘 아뢰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조윤손이 가게 되면 작은 진은 그대로 두어야 좋을지 혁파해야 좋을지 하는 문제와 군졸을 옮기는 문제 등의 일을 아울러 관찰하도록 하고 또 좌도의 병영과 수영이 다 울산군에 있어 거리가 서로 멀지 않으므로 수영을 옮긴다면 사체(事體)에도 맞고 실상에도 맞을 듯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을 조윤손이 감사, 병수사(兵水使)와 더불어 그 가부(可否)를 함께 관찰하여 아뢰라는 뜻으로 병조에 사목(事目)을 만들어 보내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말한 바가 지당하다. 아뢴 대로 하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내용]

부산진은 1488년(성종 19)에 성을 쌓았다. 성의 둘레가 약 547m[1,806척]이었다. 수장은 무관 정3품 당상관인 수군첨절제사이었다. 영내에는 군관 36명, 진리(鎭吏) 30명, 지인(知印) 17명, 사령(使令) 22명, 군뢰(軍牢) 15명이 있었다. 병선(兵船)은 전선 2척, 병선 2척, 거북선 1척, 사후선 4척이었다.

[변천]

조선 시대에 일본과 대치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인정되어, 1397년(태조 6) 부산포부산진을 설치하였다. 1394년(태조 3) 수군첨절제사를 두어 방어하였다. 1484년(성종 15)에 성보와 포성 축조 계획이 마련되었다. 1490년(성종 21)에는 부산진성이 완성되었다. 1544년(인종 1) 사량진 왜변 이후 진관 체제(鎭管體制)의 변화가 있었지만,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부산진은 경상 좌수영 아래의 진관으로 1895년(고종 32)까지 부산 지역 해안을 지키는 주요 군사적 거점이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진은 조선 시대에 부산 지역의 해안 방어의 중요성을 알려 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또한 이를 통하여 조선 시대 진관 체제의 편제와 변화상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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