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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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僉使 |
영어의미역 | Military Officer in Busan |
이칭/별칭 | 부산 수군첨절제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지역에 있던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 아래 3품의 무관.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의 군사 조직은 1466년(세조 12)에 완성된 진관 체제(鎭管體制)로서 전국 행정 단위로서의 ‘읍(邑)’을 동시에 군사 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하여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거진(巨鎭)으로 구분하고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도 겸하게 하였다. 진관 체제 아래의 수군 지휘 체계는 주진·거진·제진(諸鎭)의 진관 편성에 따라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수군만호(水軍萬戶)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첨사(僉使)란 첨절제사의 준말로 수군절도사의 관할에 속하는 거진의 무관직을 말한다. 병마절도사 아래에는 병마첨절제사가, 수군절도사의 아래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병마첨절제사는 1409년(태종 9)에 설치하였으며, 수군첨절제사는 1466년(세조 12)에 도만호(都萬戶)를 개칭한 것인데 목(牧)·부(府)의 소재지에는 수령이 겸임하였다.
이들은 종3품관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경상도 다대포와 평안도 만포진에는 정3품 당상관을 임명하였고, 특히 수군으로 중요한 해안 지방의 독진(獨鎭)과 그 진관(鎭管), 육군으로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독진과 그 진관에는 수령이 겸하지 않고 전문 무관 첨절제사를 두었는데 이 경우에 한하여 첨사라고 약칭하였다.
부산진은 조선 전기에 반도 동남 끝 부분의 중요한 진(鎭)으로 동래현에 속하였고, 현의 남쪽 8㎞ 남짓한 곳에 경상 좌도 수군절제사영이 있었다. 첨절제사 진을 부산포에 설치한 까닭은 배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유사시 후퇴할 공간이 부족하고 원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기 쉽지 않아 각 연변에 성을 쌓아 유사시를 대비하자는 성종 대 조정의 축성론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종 대 부산포에도 첨절제사 진이 설치되어 1483년(성종 14)에 부산포 첨절제사가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당시 수군 조직은 수사-첨사-만호-권관으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를 보였다. 첨절제사는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일을 담당하였지만, 거진의 장으로서 품계상 종3품의 무관직에 해당하였다. 임기는 수사가 720일인 데 비해, 첨사는 수군만호와 함께 900일이었다. 또한 첨사는 각 포에서 실제로 오래 근무한 사람이 임용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해상에 익숙한 인물을 임용하여 해상 방위에 임하게 한 조처였다. 따라서 첨사는 수군 지휘 체계상 중견적인 일을 자임하는 위치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첨사영 내에는 군관(軍官) 36명, 진리(鎭吏) 30명, 지인(知印) 17명, 사령 22명, 군뢰(軍牢) 15명이 있어 첨사를 도와 영내의 사무를 집행하고 그 외의 잡무를 처리하였다. 첨사영은 둘레 약 512m[1,689척], 높이 약 4m[13척]의 돌로 쌓은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동서남북으로 성문이 있어 동문은 진동문, 서문은 금루관, 남문은 진남문, 북문은 구장루라 하였다. 소속 병선은 전선 2척, 병선 2척, 거북선 1척, 사후선 4척이 있었다. 여기에 따른 병원(兵員)은 감관 1명, 선장 1명, 지구관 4명, 도훈도 1명, 토사부 36명, 교사 10명, 포수 48명, 능로군 290명, 분방 사부 112명, 방군 1,640명이었다.
[관련 기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경상도 진관을 부산포 진관과 제포 진관으로 나누어 부산포 진관 휘하에 10개의 만호영(萬戶營)을 두었다고 적혀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1522년(중종 17), 1544년(중종 39)에 진관의 개편을 단행하여 경상도 진관은 부산포 진관, 미조항 진관, 가덕 진관 3개로 나누었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부산포 진관의 휘하에는 서생포·두모포·개운포·포이포·서생포·다대포 등 6개의 만호영이 관하에 있었다.
[변천]
세종 대에 경상도가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질 때 경상 좌도의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는 동래 부산포에 있었으며 그 휘하에 11개 포소 만호가 있었다. 부산포에는 33척의 병선과 1,799명의 선군을 갖고 다른 포영에 비해 위용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조 대에 진관 체제로 개편되어 수군안무처치사를 수군절도사로 개편하는 동시에 경상도에는 수군절도사 3명을 두고 둘은 좌도와 우도로 양분하고 하나는 경상도 관찰사가 이를 겸임하였다.
이때의 개편에서 경상 우도에는 제포 진관, 경상 좌도는 부산포 진관이 설치되었고 동평현 부산포에는 수군첨절제사[종3품]를 둔 거진이 만들어졌다. 부산 첨사(釜山僉使) 아래에는 10개의 만호[종4품] 영이 통솔을 받았다. 이와 같이 부산포 진관과 제포 진관 단위로 수군 방비를 편성한 것은 삼포 개항에 따른 왜인의 출입이 심하고 아울러 포소에 항상 거주하는 왜인까지 생기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삼포 개항 후에도 왜구의 침입이 두절되지 않고 왜인의 작폐도 빈번하였으므로 성종 대에 들어 한층 해방에 주력하였으며, 그 일의 하나로 남방 연변 제포에 성보와 포성 축조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484년(성종 15)에 비로소 성보의 축조가 계획되었다. 이에 따라 동래 지방에는 부산포가 1490년(성종 21) 8월에 완성되었다. 이로써 이때까지 부산포, 염포, 제포 등은 장책이 설치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방어 체제 강화에 획기적인 성과라고 보인다.
그리고 부산의 군사적인 위치는 더욱 중시되었는데, 1483년(성종 14)에 부산포 첨절제사는 제포 첨절제사와 함께 종래 종3품에서 정3품 당상관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에 이어 1544년(중종 39)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적어도 종래 진관 체제의 개편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재고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522년(중종 17)과 1544년에 진관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즉 『경국대전』에서는 경상도 진관을 부산포 진관과 제포 진관으로 나누어 부산포 진관의 휘하에 10개의 만호영을 두었으나, 이후 개편되어 경상도 진관은 부산포 진관·미조항 진관·가덕 진관의 3개 처로 나누었다. 따라서 부산포 진관 아래에는 6개의 만호영[서생포·두모포·개운포·포이포·서생포·다대포]이 있었다.
[평가와 의의]
부산 첨사는 조선 시대 수군 운영의 체제를 살필 수 있는 관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