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사량진 왜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68
한자 蛇梁鎭倭變
영어의미역 Japanese Uprising in Saryangjin
이칭/별칭 사량왜변(蛇梁倭變)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한문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왜인의 침입
관련인물/단체 대마도 왜인|사량진 만호(萬戶) 유택(柳澤)
발생|시작 시기/일시 1544년 4월연표보기 - 대마도 왜인 200여 명이 사량진 앞바다에 침입
종결 시기/일시 1544년 4월연표보기 - 종결
발생|시작 장소 사량진 -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종결 장소 사량진 -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정의]

1544년 4월 대마도 왜인들이 사량진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

[역사적 배경]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을 계기로 부산포 등 삼포(三浦)를 폐지하였으나, 왜인의 요청으로 1512년에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다시 통교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임신약조로 세견선이 210여 척에서 60여 척으로 줄어드는 등 왜인에 대한 통제가 엄격해지고 교역의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세견선을 늘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5척을 증선하여 30척으로 해주었을 뿐 나머지의 요구는 임신약조에 의거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대마도 왜인의 불만이 쌓여갔다.

[경과]

1544년(중종 39) 4월에 대마도 왜인 200여 명이 왜선 20여 척을 타고 고성군 앞바다의 사량진[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의 동쪽에 침입하여 사량진성 주위를 포위하였다. 갑옷과 궁시로 무장한 왜인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사량진 만호(萬戶) 유택(柳澤)이 힘써 왜구의 공격을 저지하자, 왜구들은 성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퇴각하였다.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20여 명의 왜구를 사살한 반면, 조선군은 수군(水軍) 1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의 통교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찬반양론으로 맞섰고 절왜론(絶倭論)까지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544년 5월에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대마도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내이포에 거주하고 있는 왜인들을 돌려보내는 등 왜인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결과]

그 후 다시 일본과의 통교 재개 여부를 놓고 찬반양론이 대립하였다. 논의 결과 일본국왕사와 대내전·소이전사는 구례(舊例)대로 접대를 허용하였으나, 대마도는 접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새로운 형태의 무역인 영봉선(迎逢船)의 왕래가 허용되었다. 영봉선이란 원래 조선에 온 일본국왕사가 돌아갈 때 이를 마중하러 오는 선박을 지칭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7월에 일본국왕사와 소이전사가 도항하여 통교 재개를 요청하였으나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 후 1546년(명종 1) 5월에 대마도에서 적왜를 참수하여 옴에 따라 다시 통교 재개를 논의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 일본국왕사 안심동당(安心東堂)과 소이전사 춘강(春江) 들이 중중·인종의 치제(致祭)를 이유로 도항하여 통교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하였다.

그 이듬해 인 1547년 2월에 중종은 국왕 사신을 인견하면서 대마도의 죄가 매우 크지만, 일본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왔고, 서계의 내용도 매우 간절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정미약조(丁未約條)를 체결하고 대마도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이로써 3년 동안 중단되었던 대마도와의 통교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으며, 사량진 왜변 이후 나타났던 영봉선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 정미약조임신약조의 내용보다 더 엄격하게 대마도주의 통교를 제한하고, 수직인·수도서인의 통교를 정리하였으며, 세견선의 선형과 급료, 위반 시의 벌칙까지 규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사량진 왜변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삼포 왜란(三浦倭亂)과는 매우 달랐지만 대일 관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임신약조가 파기되고, 일본국왕사와 대내전·소이전의 사신을 제외하고 대마도로부터의 통교는 일체 금지되었다. 이때부터 정미약조로 다시 대마도와의 통교가 재개되기까지 약 4년 동안 새로운 형태의 무역선인 영봉선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대마도에서 일본국왕사 안심을 통해 통교의 재개를 요청함에 따라 정미약조를 체결하여 부산포만을 개항함으로써 임진왜란 전까지 부산포 단일 왜관이 유지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류* 사량진왜변의 사량진은 지금의 사량도가 아닌 욕지도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http://www.ya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0544 2019.07.26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