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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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平縣 |
영어의미역 | Dongpyeong-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영도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정희 |
[정의]
통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과 영도구 일대에 있던 지방 통치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지방 제도를 개편하였다. 특히 경덕왕은 전제 왕권 강화를 위해 종래의 중앙 관제와 지방 제도 명칭을 한자로 고쳤다. 이때 동래군의 영현(領縣)이던 대증현도 한자로 개명되어 동평현(東平縣)이 되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1 동평현조에 “동평현은 본래 대증현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그대로 쓰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 “동평현은 [동래]현의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신라의 대증현인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동래군에 속하게 하였고, 고려 현종이 양주(梁州)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3 동래군조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지만, 동평현이 동래군의 영현이었음을 알려 준다.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군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 지금도 이에 따른다. 영현이 둘이다. 동평현은 본래 대증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 지금까지 그대로 부르고 있다. 기장현은 본래 갑화량곡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 지금까지 그대로 부르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2 양주조에 “동평현은 현종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절영도가 있다”라고 하여 영도가 동평현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동래현 산천(山川)조에 “절영도는 동평현의 남쪽 8리 지점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동평현은 삼한 시대에는 부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소국인 거칠산국에 편입되어 있었다. 부산 지역이 신라에 편입되면서 대증현이 되었다. 대증현의 치소(治所)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었는데, 당감동 고분군(堂甘洞古墳群)에서 발견된 5~6세기의 유물이 신라 유물의 영향을 받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대증현이 동평현으로 바뀐 경덕왕 대부터 동평현은 동래군의 속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는 동평현의 읍세(邑勢) 규모가 동래현에 비해 작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기록이지만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의 내용을 참고하면, 당시 동평현의 호구 수는 108호로 290호인 동래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건국 이후 동래현과 동평현은 각기 울산과 양산의 속현이 되었지만, 동래현이 11세기 중엽 속현의 지위에서 벗어난 데 비해 동평현은 고려 말까지 계속 속현의 위치에 있었다.
[변천]
동평현은 1405년(태종 4) 동래현에 소속되었다가, 1409년(태종 9) 다시 양산의 속현이 되었다. 1410년(태종 10) 다시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다. 여말 선초 왜구의 침략 과정에서 군사적 요새지로 부각되어 1428년(세종 10)에는 동래현에 두었던 진(鎭)을 일시 동평현에 옮긴 적도 있었다. 1547년(명종 2) 동래현이 동래부로 승격되자 동평현은 동평면으로 개칭되어 동래부에 속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평현의 변천은 남북국 시대 이래 부산 지역의 지방 제도 편제 양상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