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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모포 만호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02
한자 豆毛浦萬戶營
영어의미역 Dumo-po Manhoy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신명호

[정의]

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 있던 수군 만호영.

[설립 경위 및 목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건국 직후 두모포 만호영(豆毛浦萬戶營)은 기장현의 동쪽 2.8㎞[7리]에 있었다고 한다. 두모포 만호영은 왜구로부터 기장 지역의 해안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1510년(중종 5) 기장현의 두모포 만호영에 처음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약 378m[1,250척]이었고, 높이는 약 3m[10척]이었다. 1592년(선조 25) 기장의 두모포 만호영부산포 주변으로 이전하였는데, 위치는 오늘날 초량 왜관이었다.

그런데 1678년(숙종 4) 현재의 자성대(子城臺) 부근에 있던 왜관이 초량, 즉 두모포 만호영이 있는 곳으로 옮겨 가면서 그 대신 두모포 만호영자성대 부근의 왜관 자리로 옮겨졌다. 결국 두모포 만호영과 왜관이 서로 자리를 맞바꾼 셈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때의 두모포진은 동래의 남쪽 10㎞[25리]에 있었고, 부산포진은 동래의 남쪽 8㎞[20리]에 있었다고 한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내영지(萊營誌)』에 의하면 조선 후기 두모포에는 종4품의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 군관(軍官) 8명, 진리(鎭吏) 11명, 지인(知印) 10명, 사령(使令) 5명이 배속되었다. 또한 수군으로는 포수 24명, 능로군(能櫓軍) 120명 등이 있었다. 아울러 두모포 만호영에는 병선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있었으며 군량은 선상미(船上米) 18섬 11말, 찐쌀 3섬, 미숫가루 1섬이었다. 두모포 만호는 부산 첨사의 지휘를 받으며 부산만의 해양 방어를 담당하였다.

특히 1678년 이후로는 두모포 만호영부산포에 가장 가까이 위치하였기 때문에 대마도 또는 일본에서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오는 배가 있을 경우, 부산 첨사는 두모포 만호에게 명령하여 대응 출동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 이에 따라 두모포 만호영은 조선 후기 대일 외교 관계에서 제일선의 해상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관련 기록]

『내영지』에 “두모포에는 종4품의 무관직 수군만호와 군관 8명, 진리 11명, 지인 18명, 사령 5명이 있었다[豆毛浦 水軍萬戶 武從四品 軍官八人 鎭吏十一人 知印十人 使令五名]”라고 적혀 있다.

[변천]

1895년(고종 32) 7월 군제 개편으로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경상 좌수영]이 혁파되면서 경상 좌수영 관하의 부산 첨사영, 두모포 만호영 등도 함께 혁파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의 두모포 만호영은 진관 체제(鎭管體制)에 입각해 조직된 부산 지역의 해양 방어 체제를 알려 주는 수군 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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