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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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上西面-機張縣- |
영어의미역 | Sangseo-myeon [Gijang-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동표 |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상서면(上西面)은 조선 후기 기장군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상서면은 원래 1413년(태종 13) 제정된 기장현 방위 면의 하나인 서면(西面)이었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후에 기장현이 폐현되면서 서면은 동래현에 합속되었고, 1617년(광해군 9) 기장현이 다시 복설되면서 기장현 서면으로 회복되었다.
[관련 기록]
기장현 서면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은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 기장현의 읍·면을 “하서면, 중북면, 하북면, 읍내면, 동면, 남면, 상서면”으로 나누어 호구 수를 기록한 자료와 19세기 전반에 간행된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의 방리(坊里)조에 “읍내면, 동면, 상서면, 남면, 하서면, 하미면”으로 편제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변천]
조선 후기 이래 서면이 상서면, 하서면으로 나뉘면서 처음 상서면이 나타난다. 상서면은 1914년 3월 1일 기장군이 폐군되면서 동래군 철마면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사라진다. 지금의 기장군 철마면에는 이곡리, 연구리, 구칠리, 장전리, 웅천리, 백길리, 와여리, 안평리, 고촌리, 송정리, 임기리의 11개 리가 있다. 상서면은 신묘식[1831]과 을묘식[1855] 호구 조사를 수록한 19세기에 간행된 『기장현 읍지』에서 보면 고촌방(古村坊), 운봉리(雲峰里), 신명리(新明里), 구칠리(仇柒里), 이곡리(耳谷里), 마지리(麻旨里), 웅천방(熊川坊), 박길리(朴吉里), 와여리(瓦余里), 연귀리(然貴里) 10개의 동리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 변천을 거듭하였다. 조선 시대의 상서면은 지금의 기장군 철마면에 해당한다.
고촌방은 지금은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이다. 고촌방은 1895년(고종 32) 기장군 상서면 고촌동으로 바뀐 후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동래군 철마면 고촌리가 되었다. 운봉리와 신명리는 지금의 어느 지역인지 불명확하다. 구칠리는 지금의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이다. 구칠리는 1895년 기장군 상서면 구칠동(仇七洞)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으로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九七里)가 되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피난 와서 정착하였으며, 옻이 많아 옻밭이라 하였다. 이곡리는 지금의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이다. 이곡리는 1895년 기장군 상서면 이곡동과 각암동(角岩洞)의 두 마을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으로 동래군 철마면 이곡리가 되었다.
마지리는 옛날 기장현 상서면의 만구 마을이다. 그 후에 연봉(蓮峰) 마을이었다가 연구리가 되었고, 1895년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성서면 연구동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으로 동래군 철마면 연구리로 바뀌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웅천방은 옛날 기장현 상서면 웅천방이었고, 1895년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상서면 웅천동이 되었다. 1914년에는 행정 구역 폐합으로 동래군 철마면 웅천리가 되었다. 박길리는 조선 시대 기장현 상서면 박길리이었고, 1895년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상서면 백길동이 되어 이때 박길(朴吉)이 백길리가 되었다. 덕곡 마을이 있다.
와여리는 1895년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상서면 와여동이 되었고, 1914년 지방 조직의 폐합으로 동래군 철마면 와여리가 되면서 지금까지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연귀리는 지금 구림(龜林) 마을과 마지(麻旨) 마을을 합한 법정동리이다. 옛날에는 기장현 상서면의 만구 마을이었고, 그 후에 연봉 마을이었다가 연구리가 되었으며, 1895년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상서면 연구동이 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으로 동래군 철마면 연구리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기장현 상서면을 통해 조선 시대 부산 지역 지방 제도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