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83
한자 東萊府誌
영어음역 Dongnae-buji
영어의미역 Outline of Dongnae-bu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용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편자 박사창
권책 1책[99장]
규격 37.4×26.4㎝
편찬 시기/일시 1740년연표보기 - 편찬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9년 - 『동래 사료』2에 포함되어 영인 간행
소장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599

[정의]

1740년 동래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편찬한 동래부의 지리지.

[저자]

박사창은 전 동래 부사 이서우(李瑞雨)가 찬술한 『장산후지(萇山後誌)』와 『동래승람서후지(東萊勝覽書後誌)』의 두 책을 참고하고 읍인(邑人)들을 방문하여 얻은 지식을 토대로 『동래부지(東萊府誌)』를 편찬하였다. 박사창은 한 해 전인 1739년 8월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동래부의 군사 시설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흑각궁·화약 등 많은 무기를 새로 만들고 보수하였으며, 군관청·수첩청·무사청·이노작대(吏奴作隊) 등의 군사 조직을 정비하였다. 왜관 내 왜인들이 난동, 풍기 문란, 밀수 등의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동래로 통하는 용두산 외곽 은산에 복병막(伏兵幕)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현재 복병산이라 불린다. 1741년 정월에 퇴임할 때까지 1년 6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편찬/간행 경위]

1740년(영조 16) 당시 동래 부사로 재임 중이던 박사창은 왜관 내 왜인의 난동을 엄정히 다스리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하여 관방의 방어 태세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동래부의 읍지(邑誌)를 편찬하였다. 1989년 『동래 사료(東萊史料)』2[여강출판사]에 포함되어 영인 간행되었다.

[형태/서지]

『동래부지』는 1책[99장] 필사본으로, 크기는 37.4×26.4㎝이다.

[구성/내용]

목차는 건치 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속현(屬縣)‚ 관원(官員)‚ 향임(鄕任)‚ 면명(面名)‚ 도리원근(道里遠近)‚ 성씨(姓氏)‚ 형승(形勝)‚ 산천(山川)‚ 고적(古蹟)‚ 풍속(風俗)‚ 관사(官舍)‚ 누정(樓亭)‚ 청사(廳舍)‚ 창고(倉庫)‚ 관해(官廨)‚ 초량공해(草梁公廨)‚ 성곽(城郭)‚ 관방(關防)‚ 봉수(烽燧)‚ 학교(學校)‚ 사묘(祠廟)‚ 역원(驛院)‚ 교량(橋梁)‚ 불우(佛宇)‚ 기우소(祈雨所)‚ 제언(堤堰)‚ 인물(人物)‚ 효자(孝子)‚ 효녀(孝女)‚ 열녀(烈女)‚ 별전 공신(別典功臣)‚ 과제(科第)‚ 총묘(塚墓)‚ 호구(戶口)‚ 전결(田結)‚ 토산(土産)‚ 곡물(穀物)‚ 각청 무부(各廳武夫)‚ 군총(軍摠)‚ 군기(軍器)‚ 기치(旗幟)‚ 의장(儀仗)‚ 부안(賦案)‚ 대동(大同)‚ 공물(貢物)‚ 잡봉(雜捧)‚ 연역(烟役)‚ 인리 관속 잡차(人吏官屬雜差)‚ 각색 장인(各色匠人)‚ 각사 각처 노비(各司各處奴婢)‚ 이문(異聞)‚ 관안(官案)‚ 선정비(善政碑)‚ 생사당(生祠堂)‚ 제영 잡저(題詠雜著)‚ 부산 자성비(釜山子城碑) 순으로 구성되었다.

『동래부지』는 동래부에서 간행된 후대의 동래부 읍지나, 다른 군현의 읍지에 비해 서술이 상세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목차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대일 관계의 접촉 창구이며 전초 기지이기도 한 동래부의 특성을 감안한 것이다. 서문에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산천의 험이(險吏)와 군량, 과갑(戈甲), 기치(旗幟) 등까지 상세히 기재한다고 되어 있어, 『동래부지』가 관방의 방어 태세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편찬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동래부의 행정·사회·경제·문화 및 대일 관계와 관련한 제반 사실을 이해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