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801 |
---|---|
한자 | 蓬萊館 |
영어의미역 | Bongnae-gwan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장로107번길 32[온천동 137]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개항기의 숙박 휴양 시설.
[개설]
봉래관(蓬萊館)의 소유자였던 도요다 후쿠타로[豊田福太郞]는 1869년(고종 6) 쓰시마의 이즈하라[嚴原]에서 태어나 1889년(고종 26) 부산으로 건너왔다. 부산의 하마다[濱田] 상점 지배인으로 다년간 무역업에 근무하며 부를 축적하였으며, 1902년(고종 39)에 자신의 도요다[豊田] 상점을 경영하여 많은 자본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도요다 후쿠타로는 동래의 수전(水田) 개발에 뛰어들었고, 동래 온천장 일대의 토지도 매입하였다.
봉래관이 위치한 동래 지역은 조선인의 전통 도시이다. 일본인들이 이른 시기부터 동래 온천에 진출하여 숙박 휴양 지구로 개발한 것은 일본인 중심의 도시 개발이 조선인의 전통적 삶의 기반을 해체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봉래관의 개설과 성업은 일본인의 소위 ‘조선 개발’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사례이다.
[형성 및 변천]
일본인들이 동래 온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부터였으며, 개항과 더불어 부산에 진출한 일본인들도 줄곧 동래 온천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 1883년(고종 20) 부산 영사 마에다[前田]가 동래 부사와 교섭하여 공중 욕탕 중 여탕의 일부를 빌린 후, 부산 거류민역소의 관리로 일본인들도 잠깐이지만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다 1897년(고종 34)에 다시 일본 영사가 한국 궁내부(宮內府)와 교섭해 온천 일부와 부속 가옥을 10년간 임대 경영할 수 있도록 하여,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에 의한 동래 온천 유입과 개발이 시작되었다. 특히 숙박 휴양 시설인 여관과 더불어 일본인 자본가들의 별장이 속속 들어섰는데, 그 시작이 바로 도요다 후쿠타로의 봉래관이었다.
어느 날 동래 온천장을 방문한 한 기사가 도요다 후쿠타로의 수전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온천의 존재를 확인한 후, 1907년(순종 1) 봉래관이라고 하는 별장 겸 숙박 휴양 시설을 건설하였다. 최초 9,917.36㎡[3,000평]의 대지에 조성되었으나 이후 면적이 2만 5123.97㎡[7,600평]로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에는 정원을 설치하였다. 욕조는 3개소를 설치하여 1개소는 매년 10월 육군 전지 요양소로 사용되었다.
1931년부터 온천천변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후 정원 가운데 인공 연못을 조성하여 봉래관을 찾는 손님들이 쉴 수 있도록 하였다. 1934년 기준 봉래관은 객실 35실, 셋방 30실, 욕탕 3개 6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가족탕, 오락 시설, 옥돌탕을 비롯하여 6,611.57㎡[2,000평] 정도의 대규모 정원을 갖춘 종합 숙박 휴양 시설이었다. 봉래관은 해방 후 멸실되었고, 현재 봉래관 자리에는 호텔 농심이 들어서 있다. 호텔 농심은 인근에 허심청이라는 대형 욕탕을 경영하고 있다. 경영주와 외관의 변화는 겪었지만 봉래관 이래의 숙박 휴양 시설은 현재도 성업 중이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봉래관은 개항기에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설립되었다. 현재의 호텔 농심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