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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정 새마을에 정착한 사람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11
한자 槐亭-定着-
영어의미역 People who settled in the new village of Goejeong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만일

[괴정의 역사와 노인정에서 만난 어르신들]

현재 부산 사하구 괴정동은 괴정 시장과 지하철 1호선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사하 지역에서 가장 인파가 많은 곳이며 사하구에 살면 이곳 근처를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괴정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이며, 인구가 많은 사하구의 중심 지역이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괴정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괴정동 주위는 조선 시대에 국마를 기르는 목장이었는데 이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크고 목장으로서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에는 목장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괴정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조선 시대 다대포 첨사가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이었는데, 어느 감독관 때 감목 행위가 너무 지나치게 가혹해서 마을 사람들이 팔정자나무 아래서 그 감목관을 성토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 팔정자나무의 하나인 회화나무가 있는 정자를 괴정이라 했고, 이후 괴정동이란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러한 명칭의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6·25 전쟁 이전까지 괴정은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현재 괴정 1동을 ‘고분들’ 또는 ‘본동’이라 불렀고, 괴정 4동 ‘희망촌’을 ‘말골’, ‘마하곡’, ‘소태미’라 하였다.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살던 보수천변 판자촌과 동광동 판자촌 화재 이재민들이 이사하여 새로 형성된 마을이 괴정 3동에 있는 ‘신촌’(新村)이다.

“여기 사하는 구개국[?]이거든 다대포, 장림, 신평, 부[?]평, 감천, 괴정, 대티, 당리, 하단 구개국이거든. 좀 많은 동네는 100가구 정도였고 사람은 거의 살지 않았어요. 여기는 원래 논, 밭이었어요.”[이덕술, 여, 1930년생, 부산 하단 출생]

그렇다 지금의 괴정, 아니 사하구는 피난민에 의해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난 지역이었다. 말 그대로 피난민에 의해서 형성된 동네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때문인지 아니면 나서기를 꺼려하는 것인지, 피난민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리는데 막상 피난민이었던 분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괴정 시장에 위치한 한 노인정에서 6·25 전쟁 당시 피난민이었던 분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괴정에는 이북 사람들이 많이 내려와서 살았어.”[노인정의 한 어르신]

이북 사람들이 생활력이 강해서 잘사는 사람이 많았지.”[노인정의 한 어르신]

주로 인터뷰는 한 분과 진행되었지만 인터뷰 장소가 노인정이었기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참견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 덕분에 괴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주된 이야기는 지화금[여, 1926년생, 함경북도 함흥 출생] 어르신을 중심으로 서술하겠지만 괴정이라는 마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른 어르신들의 이야기도 덧붙이고자 한다.

[부산의 피난민 유입]

6·25 전쟁은 남한 사회의 인구 구조 변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 기간 중 인구 이동은 남한 사회의 사회적 유동성이나 사회 변동을 촉진했다. 전쟁 기간 남북한 인구 이동은 무엇보다도 전란(戰亂)을 피하기 위해 강요된 비조직적인 집단 이동인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사상적 귀속 집단을 따라 이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 기간 남북한 주민들은 크게 두 차례의 피난을 경험하였다.

우선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38선 인근 주민과 서울·경기 지역의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대구, 부산 등을 향해 이동하였다. 이후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군, 유엔군이 수세에 몰리면서 북한의 민간인들은 군과 함께 남쪽으로 월남하게 되고, 또 1·4 후퇴 시기 서울과 이남 지역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피난하게 되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된 피난을 ‘1차 피난’이라 하고, 중국군 참전으로 인해 이북과 서울·경기·충청 지역 주민의 대규모 피난을 ‘2차 피난’이라 한다. 피난민의 수는 1차 피난 당시 약 150만 명, 2차 피난기에 약 480만 명에 이르렀다.

1차 피난기의 특징이 비조직적이고 개별적인 피난인데 반해 2차 피난의 특징은 전선의 이동에 따라 계획적으로 민간인을 피난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1950년 11월 25일 중국군의 참전과 한국군과 유엔군이 전선에서 밀려나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2차 피난기 피난민 중에는 이북에서 내려온 주민도 존재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은 한국군과 유엔군의 강제적 소개로 남한으로 피난한 사람들이었다. 남한 정부는 월남 피난민들을 적극 포섭하였다. 남한 정보기관들은 이북 젊은이들이 남쪽으로 오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난민들 틈에 섞여서 침투할지 모르는 인민군의 간첩을 방지하기 위해 마을 단위의 단체 피난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당시 피난민들은 인민군과 중국군의 남하를 피한 것이기 보다는 미 공군의 무차별적 폭격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은 군사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은 이북의 주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또한 월남 피난민의 계층이 다양했다는 것을 볼 때 이 시기 피난은 생존을 위한 피난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시기 정부는 체계적으로 피난을 계획했지만, 모든 피난민이 소개 정책에 의해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한 차례 전쟁의 공포를 경험한 남한의 주민들은 정부의 통제 정책과 더불어 자발적으로 많은 수의 주민이 피난하였다.

1951년 1·4 후퇴 이후 부산과 거제의 인구는 전쟁 전보다 약 2배가량 늘어났다. 중국군 참전으로 야기된 2차 피난기에는 약 56만 명의 피난민이 경상남도로 들어왔고, 그 중 약 26만 명이 부산으로 유입되었다. 이 시기 부산으로 유입된 피난 인구 중 피난 전 거주 지역별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피난민은 서울, 경기 지역 출신의 피난민이었다. 2차 피난기에는 1차 피난기에 없었던 월남 피난민이 부산으로 유입되었다. 경상남도의 월남 피난민 유입은 2차 피난 초기 해상으로 철수 남하한 연합군과 함께 유입되었다.

부산으로 유입된 최초의 월남 피난민은 12월 11일 해상을 통해 8,000명이 들어오게 된다. 특히 1950년 12월 24일 흥남에서 피난한 월남 피난민은 거제도의 학교 등 공공건물과 영도의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그 수는 약 8만 7,000명이었다. 전쟁 당시 거제를 포함한 경상남도 지역의 월남 피난민은 약 19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약 45만 명의 월남 피난민은 육로를 통해 개성과 해주 지역에 집단 수용된 이후 전황에 따라 남하하면서 경기도, 충청도 등 중부 지역에 주로 정착하였다. 따라서 경상남도로 이동한 월남 피난민의 경우 대부분 해상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2차 피난 당시 약 19만 명의 월남 피난민이 경상남도 지역으로 흘러들어 왔고, 그 중 부산항을 통해 유입된 월남 피난민은 약 10만 명에 이른다. 특히 월남 피난민의 군·경에 의해서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특히 유엔민사원조사령부는 월남 피난민 처리에 관한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피난지의 중요 지역, 예를 들면 터미널, 항구, 기차역, 주요 도로의 중심지에 ‘난민 처리소[Processing station]’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난민 처리소를 중심으로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여 피난민을 관리하고자 하였다. 피난민들은 피난처에 도착하면 우선적으로 난민 처리소에서 피난민 신분증을 발급받고, 전염병 예방 접종, 주거지 알선의 과정을 거처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수용소 외곽 지역의 임시 주택에 수용되었다. 1차 피난기와는 다르게 피난민에 대한 심사도 엄격하게 진행되었고 모든 피난민에게 피난민 신분증을 발급하였다.

월남 피난민은 대부분 연합군의 소개 정책에 따라 이동하고 있었지만, 정부는 인민군의 간첩이 숨어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따라서 월남 피난민은 연합군과 이동을 같이 하였고, 38선 이남으로 내려와서는 경찰의 통제를 받았다. 그리고 정부는 월남 피난민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한정하여 수용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가능한 전략적 항구 도시이자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 수용하고자 하였다.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월남 피난민의 경우 피난민 심사가 매우 까다로웠다. 이들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어 피난민 성분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직업별로 분리 수용된 뒤 공산당에 동조 여부를 조사 받았다. 이들 중 공산주의 혐의자들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이송되었다가 반공 포로 석방 때 풀려난 사람도 다수 있었다. 나머지 피난민들은 통상 보름 정도 수용되었다가 피난민 증명서를 발급 받은 이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비록 월남 피난민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피난하게 되었지만, 이들은 신뢰 받지 못했다. 피난의 전 과정에서 군과 경찰의 보호를 받았지만 북한의 간첩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월남 피난민 모두는 감시의 대상이었다.

[흥남 철수 작전과 피난의 기억]

6·25 전쟁기 가장 많이 수의 월남 피난민을 피난시킨 것은 흥남 철수 작전일 것이다.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 전선의 미군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 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1950년 11월 30일 동해안 깊숙이 북진해 있던 국군과 미군은 미10군단장 아먼드(Amond) 소장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때 국군 수도사단은 함경북도 청진까지, 미 7사단과 해병 1사단은 한중 국경선인 혜산진까지 진격해 있다가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작전상 후퇴를 개시했다. 중국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작전 기지인 흥남으로 후퇴했다. 12월 초까지만 해도 미군들도 이곳에서 철수하지 않고 흥남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만들어 재진격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12월 10일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서 미군과 국군은 24일 흥남에서 철수하였다.

이 작전의 공식적인 결과는 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의 병 10만 명과 차량 1만 7,000대, 피난민 약 10만 명과 35만 톤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피난선에 승선하려는 피난민은 약 30만 명이었고, 그들 중 15~20만 명이 피난선에 승선했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의 대규모 피난이었다. 이렇듯 흥남 철수 작전은 세계 전사상(世界戰史上)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해상 철수 작전이라는 명성과 대규모 민간인을 전쟁의 포화로부터 구했다는 설명이 들어간 책이나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흥남 철수 작전의 공식적인 설명과 달리 당시 이 작전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다르게 이야기를 한다. 우선 흥남에서 피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제적이었다는 것이다. 미군의 함포 사격이 피난의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민가에 무차별 함포 사격을 가했고, 따라서 흥남 사람 모두가 피난을 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증언자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민가에 함포 사격을 했거든. 그래서 흥남 사람은 다 나왔어. 거기에 살고 싶어도 재산이 많아서 안 나온 사람도 있고, 우리 친정 같은 경우 다 안 나왔어. 그럼 재산을 두고 왔지 머 입을 시간도 없고, 포탄 때문에 집이고 머고 모든 게 다 녹아, 집이고 머고, 땅이 다 페이고...”[지화금 어르신]

“피난 오기 전에는 농사짓고 살었어. 그때 공산주의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살았어. 부산에 오니까 공산주의, 공산주의 하니까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았지. 그 전까지는 몰랐어. 그냥 살다가 불떵거리 집어 때리고 하니까 살수 없었지. 집이 다 타고 미군들이 자꾸 불떵거리를 쏘니까 피난 나왔지. 흥남에 참 좋은 집이 많았는데 그것도 다 불탔지.”[지화금 어르신]

“그게 싸움을 오래 안 했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오래 했으면 살수가 없어.”[지화금 어르신]

이북에서 올 쩍에는 내가 머 피난 같이 가자고 말 할 시간도 없었어. 바다에서 계속 불떵거리가 떨어지니까.”[지화금 어르신]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흥남 사람들에게 피난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긴박한 상황은 이산가족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증언은 피난이 모두 완료된 이후 함대가 포격을 시작하였고, 폭격기가 폭격하였다는 공식적인 입장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이렇듯 흥남 철수 작전은 공식적인 설명과는 달리 흥남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흥남에서 피난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앞에서 지적하듯이 부산에 들어오기 전 거제도 수용소 시설에 수용되었다.

[부산으로 이주와 정착]

부산으로 유입된 대부분의 월남 피난민은 부산항으로 들어와 바로 정착했다기보다는 1차적으로 거제도, 포항, 울산 등지의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앞에서 지적하듯이 원산과 흥남에서 피난한 일부의 피난민은 영도에 수용되어 부산에 바로 정착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월남 피난민은 1952년 이후 부산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월남 피난민이 부산에 바로 들어올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피난민 지원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중국군 참전 이후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는 12월 20일경부터 준비되었다. 우면동의 적기, 영도구 봉래동, 청학동, 그리고 대연 고개, 남부민동, 당리 등 40여 개의 수용소가 마련되었고 약 7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산에는 약 26만 명의 피난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산의 모든 피난민을 구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정부는 부산의 피난민을 가능한 거제도, 제주도, 전라도로 분산 수용하고자 하였지만 이것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흥남에서 피난한 대부분의 피난민의 경우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월남 피난민의 경우 앞서 지적하듯이 유엔민사원조사령부의 매뉴얼에 따라 군·경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을 것 같지만 모든 월남 피난민이 경험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역별 분류는 있었지만 심문 등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았던 사람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배를 타고 흥남 부두에서 하루 자고 거제도읍[장승포]에서 며칠 있다가……한대[찬대]에서 잤어, 왜포라는 데로 왔어 일 년 살다가 부산으로 나왔지”[지화금 어르신]

“미군들이 관리 안했어. 우리나라 사람이 했어……집에서 살았지 수용소 집에서 살았지.……지역별로 다른 집에 살았지.”[지화금 어르신]

“당시 거제도는 완전히 촌이었거든 배에서 내려서 머 어떻하겠노? [군·경의 감시와 통제] 그런 거 없어 어디어디로 가라 해서……며칠 있다가 수용소 지어서 수용소에 살았어. 그러다가 장목면에 갔다가 학교생활[수용소] 하다가 왜포라는 데로 나왔어. 1년 살다가 그러다가 부산 나왔거든.”[지화금 어르신]

“배급으로 생활을 했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어, 땅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없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 부산으로 왔지.”[지화금 어르신]

다음의 증언대로 군·경의 큰 통제를 받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너무 많은 피난민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이들을 관리할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거제도에는 약 5만 명의 피난민을 수용할 시설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약 12만 명의 월남 피난민이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다. 주로 군용 텐트로 만든 수용 시설이 모자라 논두렁이나 산기슭에서 노숙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별다른 일터가 없어서 구호 양곡에만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을 모두 수용할 시설과 식량 마련이 급선무였고, 통제는 그 다음 문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1951년 중반 이후부터 시행된 정부의 피난민 구호 정책의 축소 때문이었다. 정부는 계속적으로 피난민을 구호하기에는 재정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이에 정부는 1951년 3월 10일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기로 결정하였다. 피난민은 현 거주지의 세무서에 세금을 납부하여야 했다. 결정적으로 1952년 4월 14일 정부는 피난민들의 적극적인 귀향의 장려와 더불어 피난민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기로 결정하였다. 1952년 7월에 정부는 또한 구호 양곡을 삭감하고 피난민 수용소로 활용되었던 가건물들을 철거하기로 발표하였다. 즉 전선이 고착화 된 상황에서 더 이상 군과 같이 이동한 월남 피난민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지 않았고, 피난민에 대한 구호의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정부의 태도가 피난민의 자유로운 부산 유입을 막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부의 피난민 지원 중단 선언은 피난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정부의 구호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피난민은 대거 유랑민화 하였다. 부산역과 부산진역 앞 광장 그리고 시청 부근을 비롯한 부산 시내에 갑자기 노숙하는 자들이 증가하였으며 그 중에는 환자까지 발생하여 이들에 대한 구호 대책이 요망되고 있었다. 피난민의 유랑민화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일손을 필요로 하였으나, 피난민들은 도시가 일자리를 얻기 쉽다고 판단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상당수의 월남 피난민은 이 시기 거제도를 벗어나 생계를 찾아 부산으로 향하였다. 결국 부산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적인 인구 유입으로 인해 1953년 9월 현재 91만 명이 부산에 상주하게 된다. 계속적인 인구 유입으로 부산 토성동, 중앙동, 남포동, 아미동 일대에 판자촌이 급속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1954년 1월 1일 부산시가 판잣집 철거 계획을 세웠을 때 그 수가 2만 2,800채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부의 피난민 지원 대책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부산의 피난민들은 정부의 피난민 구호책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살길을 마련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소중히 가지고 내려왔던 옷가지며 패물, 집기 등을 방매해야만 했다. 그리고 소위 도떼기시장이 성황을 이루게 되었고, 골목골목에 별의별 장사가 다 생겼었다. 많은 이들은 부두 노동자가 되는 등 험한 중노동에 투신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아바이가 미국 가서 알랑미 쌀을 타 와서 배급 타 와서 살았지. 하루 3홉씩 준 것으로 아는데 알랑미 쌀이니까 먹고살았지 쌀이 뿔어. 쌀이 많이 뿔어.……제때 잘 나왔어 일주일에 한 번씩.”[지화금 어르신]

흥남의 경우처럼 쫓기듯이 피난을 내려온 경우는 그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오직 정부에서 지원하는 구호 양식으로만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 1인당 1일 3홉이 다 배급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1일 2홉 남짓 배급되어 당시 피난민들의 큰 원성을 사고 있었다. 특히 관리들의 부패는 전쟁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피난민에게 배급되어야 할 구호 양곡이 관리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부족한 식량을 어떻게 해결하려 하였을까.

“경상도 사람들이 순해 좋아 부산은 인심이 좋아서. 그런데 거제도에서는 대문밖에도 오지도 못하게 해. 서울 사람들이 분탕을 많이 쳐서. 그 사람들은 인정사정없이 밭에 가서 아무꺼나 막 뜯어 먹어서. 그런데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죽으면 죽었지. 얻으러도 안 나가 얻어도 안 먹고 굶고 살다가 배급은 주면 배급 먹고 살고 그다음 또 얻어먹더라도 일해주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야 했어. 이북 사람들이 추운데서 나서 강해.”[지화금 어르신]

“무슨 돈벌이가 있어. 그냥 배급만 받아서 살았어. 촌집에서 소금도 얻어먹고 풀 잎사귀도 얻어서 먹고”[지화금 어르신]

당시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지 못한 이들의 실정은 정부의 정책 부재로 인해 더욱 궁색해졌다. 이에 부산 지역의 피난민들은 정부의 피난민 구호책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살길을 마련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소중히 가지고 내려왔던 옷가지며 패물, 집기 등을 방매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렇게도 못하는 사람들, 특히 남편을 제2 국민병이나 혹은 먼 피난길에 떠나낸 부녀자층은 인육을 파는 경우도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또한 당시에 나타난 특기할 현상으로는 이들 피난 부녀자층들 가운데에는 부득이한 생활고로 인하여 남편과 자녀들을 두고 현지 부유층의 첩으로 또는 양부인 등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점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부산으로 무작정 피난 오거나 생계를 찾아 이동한 사람들의 생활은 하루를 간신히 버티는 정도였다.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부산의 민심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좋았고, 이북 사람들 특유의 정신력을 들 수 있다. 당시의 배급 상황이 열악하여 부산의 상당수 피난민들은 소금을 얻지 못해 인근 바다에서 건져온 파래나 미역 따위로 간을 맞추어 먹었다는 이야기에 비추어 볼 때 지역민과의 협력을 통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계속 살아왔던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월남 사람들 특유의 생존력과 정신력에 대해서 많이 언급한다. ‘이북 사람은 독하다’, ‘장사를 잘했다’, ‘성실한 사람이 많았다.’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월남 피난민은 생존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이 그러했든 월남 피난민 역시 부산의 주택 부족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부산의 주택 부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위 ‘하꼬방’이라고 하는 판잣집을 짓고 살아야 했다. 이러한 판잣집도 형편이 좋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돈도 없는데다 자재도 품귀 상태라 주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소위 ‘볼박스’를 이용하여 볼품도 없이 집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도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가마니를 엮어 다리 밑에 움집을 만들어 생활하기 도하였다.

“또랑가[개울가]에 지금은 또랑물이 안내려간다. 움막 이렇게 치고 살았어.……토성동 또랑 복판에 가마니 이렇게 뛰어 넣고 살았어.……하꼬방은 사정이 좋은거야. 그냥 가마니 덮어 넣고 사는 거야. 나중에 하꼬방집에 살고, 집을 짓고 살았지.[지화금 어르신]

[괴정에 정착]

“땅을 따로 빼앗긴 사람은 없어, 이 동네[괴정] 땅 주인이 없었어. 빈 땅이었지…… 신평 시장 있는 쪽하고 여기하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그렇게 많이 들어오지 않고, 국제 시장, 부산역 쪽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노인정의 한 어르신]

“다 논밭이었지. 모든 피난민을 다 여기에 배치 시켰지. 일본집도 있긴 있었는데 소수였다.”[이덕술 어르신]

괴정으로 피난민을 정확하게 언제 이주 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추측해 보자면 피난민의 괴정 이주가 부산시 주도하에서 이루어졌고, 1954년 부산시에서 불량 주택 조사를 하면서 철거도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1954년에서 1955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지적하듯이 6·25 전쟁 이전까지 괴정은 거의 논, 밭이었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증언 중 괴정의 땅은 부산시의 소유였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따라서 비어 있었고 부산시가 소유한 괴정에 피난민을 이주시켜 도심지의 불량 주택을 철거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에 지화금 어르신도 토성동에서 괴정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괴정에는 언제 들어오시게 됩니까?] 57년에 들어왔어.”

“[부산]시에서 강제적으로 보냈지. 오르막에 집을 지을 땅을 주었어. 평수를 한 5~6평 정도 주었어. [집을 지을 자재는 시에서 지원해 주었나?]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돈 벌어서 다시 집짓고 한거지”

“상수도 시설은 없었고, 하수도 시설은 작은 또랑을 내서 했어.”

부산시는 피난민들을 도심지에서 몰아내면서 일정 부분 땅을 분배하는 형식으로 피난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주에 저항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피난민의 대부분의 생활의 터전은 국제 시장이었는데 괴정에서 국제 시장으로 가려면 대티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피난민이 부산시의 이러한 조치에 대응할 만한 힘이 없었다. 부산시의 의도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괴정에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낙동강 전투 시 미군들이] 적교[?] 다리, 남지 철교 끊어져서 피난민이 많이 못 들어왔지.”

“거창에 빨갱이가 많다. 빨갱이들은 거의 배운 사람들이었지.……독하다 하드라. ……함안에도 빨갱이가 많았다. 누가 빨갱인지도 알 수 없었어.”

“그 왜 어린애들이 총 들고 다닌다고 하드라.”

국민보도연맹 그 엄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괴정에는 지화금 어르신처럼 월남 피난민도 있지만, 서부 경남에서 거주하다 피난오신 분들도 많았다. 전쟁에 대한 여러 정보가 공유되고 있었고, 부산 사람들과 달리 전쟁을 직접 경험하신 분들이 많아 전쟁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특히 거창 양민 학살, 국민보도연맹, 낙동강 전투 시 피난민 강제 소거 등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괴정이 피난민들에 의해서 조성된 마을이기 때문일 것이다.

[6·25 전쟁 이후의 생활]

“[괴정 시장은] 60 몇 년도 지었어……이 땅이 누구꺼고 그 일본 재일 교포 박삼세라고 하는 분의 땅이었는데 그걸 우리 영감이 진정서를 2년을 내가지고 이 시장을 사 건물을 지은다고 사람 두 사람이 그래서 지은거야”[이덕술 어르신 증언]

“옛날에 [지화금 어르신이] 반찬 아지매로 유명했다 아닌교”[노인정의 한 어르신 증언]

“머 장사는 이것저것 많이 했지. 반찬 가게도 오래했고……”[지화금 어르신 증언]

괴정 시장은 언 듯 피난민에 의해서 형성된 시장인 것 같지만 위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1960년도 들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괴정이 피난민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인 만큼 초기 다수의 피난민들이 이 시장에서 행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정 3동에 위치한 이 재래시장은 도심 속에선 제법 큰 시장에 속하지만 아직 시설이나 환경은 썩 좋은 곳은 못된다.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전쟁 이후 괴정 시장이 생기면서 지화금 어르신의 주요 생활 터전은 괴정 시장이었다. 1953년 이후 피난민의 유랑화를 막기 위해 임시 거처로 마련된 괴정을 비롯한 사하구 일대는 이제 피난민의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특히 괴정에 생활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주로 괴정 시장에서 장사를 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지화금 어르신뿐만 아니라 많은 월남 피난민들에게 괴정 시장이 새로운 생활 터전이었다.

지화금 어르신의 거의 모든 시절을 괴정 시장과 함께 하였다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르신께서 6·25 전쟁 피난민으로서의 삶 이후를 증언하기를 꺼려하셨다.그러나 어르신께서는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어르신께서 후에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신은 피난민이라는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을 것이다. 노인정의 다른 분들은 ‘반찬 가게 아지매’로 몇 해 전까지 일하셨다는 증언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어르신께서 피난민으로서 오랜 기간 괴정에서 고생을 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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