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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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四後退 |
영어의미역 | January 4th Retreat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25[부민동 2가 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1951년 1월 4일 중국 인민 지원군의 총공세로 유엔군이 대규모로 퇴각하고, 수도를 다시 부산으로 옮긴 사건.
[역사적 배경]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였다. 유엔군이 삼십팔도선 이북으로 진격하면 참전할 것이라는 중국 측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은 북진하였다. 중국 인민 지원군은 유엔군과 국군이 압록강변까지 이르자 10월 2일 참전을 결정하고, 10월 19일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직접 대결로 변모하였다.
[경과]
유엔군과 국군은 12월 4일 평양, 12월 24일 흥남에서 철수했고, 12월 말에는 삼십팔도선 이북을 중국 인민 지원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중국 인민 지원군의 계속적인 남하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은 중국 인민 지원군에게 장악되었고,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정부는 1차 임시 수도 시절과 마찬가지로 다시 부산의 옛 경상남도청을 임시 수도 정부 청사로 사용하였다. 1951년 3월 18일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나, 곧 전선은 삼팔선 부근에 고착되었다.
1·4 후퇴 이후 부산에는 본격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었다. 피난민의 수가 거의 70만 명에 이르렀다. 부산 부두와 자갈치 시장, 국제 시장 일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대거 몰리다 보니 주택난, 식량난, 물 부족, 전력난, 대형 화재 등과 같은 사회 문제들이 분출되었다. 부산으로 몰려온 피난민 속에는 문화 예술인들도 많았다. 이들은 참담한 생활 속에서도 예술의 열정을 불태웠다.
[결과]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6·25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국방부, 법무부, 외무부, 교통부, 총무처 등 대부분의 중앙 부처는 휴전 협정 체결전인 6월 중에 환도하였고, 문교부와 사회부는 7월 말경에 가장 늦게 환도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8·15 기념식을 서울에서 주관하였다. 국회는 9월 1일에 환도하였다. 이로써 1·4 후퇴로 인한 부산에서의 2차 임시 수도 시절은 종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1·4 후퇴는 전쟁이 장기화되는 계기였고, 한국 전체로서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부산의 입장에서 1·4 후퇴는 부정적인 측면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부산은 그때까지 한국의 역사에서 항상 변방이었다. 1·4 후퇴 후 부산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더구나 부산은 문학, 음악, 미술, 건축 등 온갖 장르의 예술가들이 집결하여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사랑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희망의 공간이 되었다. 부산이 자랑하는 부산 사람들의 억척스럽고 열정적인 삶의 태도와 끈끈한 의지, 타 지역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개방적인 정서는 이 시기에 마련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