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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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捕虜收容所 |
영어의미역 | Prisoner of War camp in Busan |
이칭/별칭 | Encloser 1,Encloser 10,Camp 2,거제리 임시포로수용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연제구 중앙대로 999[연산동 100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만일 |
[정의]
6·25 전쟁 당시 부산 지역에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건설한 시설.
[개설]
1950년 6·25 전쟁이 반발한 이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포로 수용소는 7월 8일 대전형무소 내에 설치된 ‘대전 포로 수용소’이다. 그 후 전세가 국군에 불리해지고 전선이 밀리게 되자 대전 포로 수용소는 7월 14일 대구로 이동하여 효성국민학교[현 효성초등학교]에 ‘제100 포로 수용소’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한국군 지휘부에서는 전세의 변동에 따라 계속해서 포로 수용소를 이동시키는 일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8월 1일 부산 영도에 있는 해동중학교에 포로 수용소를 설치하여 ‘포로 수용소 본소’로 하였고, 대구에 있던 수용소는 포로 집결소로 운영하였다.
[설립 경위]
부산 지역에 포로 수용소를 설치하고자 한 것은 국군보다 미군이 먼저였다. 미군 역시 전쟁 상황에 따라 수용소를 옮기는 불편함에서 벗어나고자 포로 수용소를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짓고자 했는데, 그 적합한 장소가 부산이었던 것이다. 이에 7월 10일 부산 미군기지 헌병대에서 포로 수용소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여 7월 18일 부산에 500명 규모의 수용소를 완성했으며 이후 1만 5,000명 규모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늘어나는 포로들을 감당할 수 없어, 7월 30일 미군 제8군 사령부[EUSAK: Eighth U.S Army in Korea]는 5만 명 수용 규모의 새로운 수용소를 동래[거제리 임시 포로 수용소]에 건설하기로 결정하였고, 8월 5일부터 15일까지 이전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8월 12일에는 한국군이 관리하던 부산 영도 수용소를 폐쇄하고, 부산 거제리 포로 수용소에 통합되었다.
[변천]
한·미 양군 포로 수용소의 단일화 이후 다른 포로 수집소 및 임시 포로 수용소에서 수집·분류된 모든 포로들이 여러 경로를 거쳐 부산으로 후송·집결되면서 부산 거제리 포로 수용소는 명실상부한 국군과 유엔군이 획득한 포로를 수용·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미 간의 포로 관리에 대한 업무 논의를 통해 한국군은 포로의 급양 및 경비를 맡고, 미군은 시설, 보급 및 포로 관리를 맡았다.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이후 급증하는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미8군은 10월 말 7만 5,000명 규모로 수용소를 확대·건설 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약 11만 명의 포로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10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포로의 숫자는 중공군을 포함하여 14만 6,000명으로 늘어났다. 따라서 인천, 평양에 따로 포로 수용소를 건설함으로써 부산으로의 포로의 유입을 막으려 하였다. 그리고 부산 거제리 포로 수용소를 제6포로 수용소까지 확장하는 등 공간 확보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12월 중순경에는 ‘수영 대밭 제1 포로 수용소, 제2포로 수용소, 제3포로 수용소’와 ‘가야 제1포로 수용소, 제2포로 수용소, 제3포로 수용소’를 증설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은 경상남도 거제시 신현읍·연초면·남부면 일대 1,200만㎡ 부지에 포로 수용소를 설치키로 결정하였다.
1951년 2월말 거제도 포로 수용소 건설이 마무리 되면서 부산 거제리 포로 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을 이송하기 시작하여 5만여 명이 옮겨졌다. 3월 1일에는 주요 본부 및 경비 대대 등 관련 부대가 거제도로 이동되었으며, 나머지 포로의 이동이 계속되어 3월말까지 이송된 포로의 숫자는 약 10만 명에 이르렀다. 6월말 경에는 육지 포로들의 이송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수용 인원이 14만 명이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부산 거제리 포로 수용소는 1만 명 이하를 수용하는 작은 수용소가 되었다. 이후 부산의 포로 수용소는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인되고 8월 5일부터 포로 송환이 개시되면서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