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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7759
한자 避難學校
영어의미역 Refugee Middle School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경식

[정의]

6·25 전쟁기 부산 지역에 개설된 피난민들을 위한 초·중등학교.

[피난 학교의 개설]

피난 학교의 설립은 1951년 2월의 ‘전시하 교육 특별 조치 요강’의 발표에 의해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부산의 피난 학교는 주로 서울의 피난민을 위해 세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1951년 3월경부터 본격적으로 피난 학교가 세워졌으며, 중학교가 먼저 세워지고 다음으로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부산의 피난 초등학교 수는 시기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1951년 12월 17일자 『자유 신문』에 의하면, 부산에 있는 서울 피난 학교는 부산 시내 24개 학교에 2만 1,630명이 등록되어 있다. 이들 24개 학교는 피난 국민학교로 따로 간판을 붙이고 수업하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국민학교에 서울 피난 아동만을 수용하여 학급을 따로 편성하였다고 한다. 또 교사 수는 학급 수와 같은 279명이며, 피난 학교 학급만은 서울에서 온 교사가 맡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 온 피난민들을 위한 피난 학교도 개설되었는데, 당시 신문 기사[『동아 일보』 1952년 3월 30일자]에 따르면 황해도 피난민을 위한 피난 학교가 1952년 4월 7일에 개교될 것이라고 하였다. 부산의 피난 학교에서는 당시 학령기를 넘긴 아동들을 위해서 야간 특별 강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부산 지역 피난 학교 개설 상황]

당시의 초·중등학교 피난 학생의 수용 상황을 보면, 부산시의 75개 학교 4만 9,000여 명을 필두로 거제도·제주도·강원도·대구시·대전시·수원·안성·밀양 등지를 합하여 피난 학교가 118개 학교이고 분교장이 69장이며, 학생의 총수는 9만 310명이나 되었다. 당시의 피난 학생 수용 상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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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면 당시 부산에 개설된 초등 피난 학교는 모두 35개 학교였는데, 그 가운데 서울 피난 학교가 24개 학교였고, 그 밖의 다른 지방의 피난 학교가 11개 학교였다.

한편, 부산에 개설된 35개 초등 피난 학교의 명단과 개설 장소 등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단지 『부산 교육사』에서, 동광국민학교에는 서울 덕수국민학교와 서울 수송국민학교가 부설되었고, 초량국민학교에는 서울 이태원국민학교가, 남항국민학교에는 서울 청운국민학교가, 동항국민학교에는 서울 강서국민학교가 개설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중등 피난 학교의 개설 현황은 아래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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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정과 학교생활]

피난 학교의 교육 과정과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중구 보수동 31번지 보수산 기슭에 피난 학교를 개설한 서울 무학여자고등학교의 1951년과 1952년의 학사 일지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정규 수업 외에 가장 눈에 띄는 학생들의 활동은 위문 활동이었다. 또 당시 부산여자고등학교 기숙사에서는 학교 재봉틀을 이용하여 군복을 제조하거나 수선하는 일에 학생들을 동원하였고,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여러 가지 위문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경남여자고등학교의 당시 교무 일지 초(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7월의 행사로 비상시국 대책 궐기 대회 참가와 조병옥 박사 시국 대강연회 참석[4학년 이상], 신익희 국회 의장, 이범석 국무총리의 시국 대강연회 참석[4학년 이상], 학도 지원병 환송회 참가 등의 행사가 며칠 간격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9월 이후의 행사로도 인천 탈환 시민 축하 대회 참가, 서울 탈환 시민 축하 대회 참가와 UN 기념일 및 평양 점령 경축 행사 참가, 군함 압록강 두만강 명명식 참석, 중공 타도 도민 궐기 대회 참가 등 시국 행사 참여가 학생 활동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피난 학교의 종결]

전국의 피난 학교의 종결은 학교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곳은 9·28 서울 수복 때 일시적으로 종결되기도 하였고, 어떤 곳은 휴전 때까지 지속되기도 하였다. 정부 차원의 조치는 1954년 2월 각 시도 문교 행정관 회의에서 각 도의 피난 국민학교는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가 환도한 당시 실정으로 그 존속은 교육 행정의 질서 유지에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관리의 지도 감독에도 여러 장애가 크므로 3월에 피난 학교를 폐쇄하고 잔류 학생과 교사, 시설 일체를 피난 학교 소재교 교육구에 이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교부의 결정에 대해 부산 지역의 피난 학교 피난민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휴전 당시 부산에 남아 있는 서울 피난 학교는 총 22개 학교였고, 학생 수는 1만 6,000여 명이었다. 부산시 당국에서는 정부 환도와 더불어 환도한 학생이 반 수 정도이고 남은 학생이 반 수 정도인 상황에서, 남은 학생들은 본래의 국민학교에 편입시키고 서울 피난 학교제 자체를 종결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피난 학교 학부형들은 1년간 더 피난 학교 제도를 존속시켜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에 당국에서는 1년간 더 존속을 허락하되, 피난 분교장을 본교 교감으로 임명하고, 부족한 교사는 경상남도에서 보충 채용하기로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종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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