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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58
한자 -大渚農事-自負心
영어의미역 From the spring Chinese cabbage to savoury tomatoes: The pride of farmers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정관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재배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2동 정관 마을

[대저동, 부산의 거대한 농장]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대저 2동은 본래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으로, 1978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면서 분동되었다. 낙동강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인 이곳은 토질이 비옥하고 기온의 연교차가 적으며, 강수량도 비교적 풍부하여 농업에 매우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이러한 까닭에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인에 의해 개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산업적인 의미의 농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때는 대저 1동 지역에 배가 집중적으로 재배되어, ‘구포 배’라는 전국적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도 주류 농산물인 쌀을 비롯하여 오이·호박·시금치 등 채소류가 재배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 이들 외에 봄배추, 토마토 등 시설 농업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소위 ‘짭짤이 토마토’가 이 지역 대표 농산물로 자리 잡으면서 부산의 토마토 생산량 거의 전부를 책임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에서 보듯 대저동은 ‘부산의 덴마크’라고도 불릴 만한 하나의 거대한 농장이다.

대저 2동 정관 마을은 대저 지역에서도 대표적 토마토 마을이다. ‘부산 대저 토마토’ 주산지로서, 2004년 11월에는 대저 토마토에 대한 정보 제공과 홍보를 위해 ‘대저 토마토 정보화 마을’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옛날 평강천이 범람하면서 형성된 섬인 까닭에 땅이 비옥하여 인근 타 동네보다 일찍 시설 재배가 활성화되었고, 현재의 토마토 이전에는 봄배추로도 전국적 명성을 날리던 곳이다. 그리고 봄배추에서 토마토로,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대저 농업의 산증인들이 산다. 우리가 만나게 될 50년 농사꾼 노부부와 귀농 10년의 젊은 부부가 바로 그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저 지역의 봄배추와 토마토는 물론, 고향과 부모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노부부를 아버님, 어머님이라 불렀다.

[정관 마을 김수일 노인회장의 인생유전]

우리의 아버님 김수일 정관 마을 노인회장은 1939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옛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 봉림리]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아버님은 1960년 전후 가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모 댁이 있는 대저 2동 정관 마을로 이주하였다. 이때 고향 봉림동에서 땅 서 마지기를 처분하여 가지고 왔다. 말하자면 종자돈인 셈이다.

정관 마을에 온 아버님은 삼광중학교 야간 과정을 졸업하고 고모 댁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 지냈다. 요즘은 비록 친인척이라도 인건비도 받지 않고 노동을 제공하였다면 당장 TV 고발 프로그램이 찾아올 일이지만, 당시는 쌀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 것이 최대의 소원이던 시절이었다.

대저에서 배추 농사를 시작한 것은 군 제대 후였다. 그리고 어머님을 만나 결혼할 때 가지고 있던 ‘세 구역’의 땅을 한창 배추 농사로 주가를 올리던 시절에는 ‘열다섯 구역’으로까지 늘였다. 한 구역이 2,975.21㎡[900평]이니, 열다섯 구역이면 4만 4628.10㎡[1만 3,500평]이다. 투기꾼이 아닌 농사꾼으로서는 실로 놀라운 인생 유전이 아닐 수 없다.

“논이 너무 많으니까 힘이 들어서, 농사지을 일손이 모자라서 평강 사람들 경운기로 데리고 와서, 모 심고 나면 데려다 주고 그랬어.”

한창 아버님의 성공담을 듣고 있는데, 어머님께서 토마토 주스를 내오신다. 짭짤이 토마토를 삶아 오디 액을 넣어 만든 주스인데 감칠맛이 난다. 어머님 성함은 이문순, 1941년 이곳 대저 2동 정관 마을에서 출생하여 아버님을 만나 ‘연애결혼’하셨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가락에서 건너오실 때부터 이웃에 살면서 집안 간 서로 형·동생처럼 지내다 자연스럽게 부부의 연을 맺었다.

아버님과 어머님, 아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연애’라…. 당연하고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어쩐지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나 노부부의 ‘연애’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 더욱 놀랍다. 아직 서로 존대를 하는 두 분. 며느리의 말에 의하면, 마을에서도 잉꼬부부로 소문났다고 한다. 소문의 진상에 쐐기를 박는 어머님의 아버님 자랑.

“나는 아직 ‘니’라 카는 소리 안 들어 봤어요. 꼭 ‘예’, ‘예’, ‘약 잡쉈어요?’ ‘밥 자셨어요?’ 이라지. 절대 그리 안 해. 결혼 딱 하면서부터 그라던데?”

배추 농사로 인생유전을 이룬 이야기가 아니라, 천생의 인연을 무려 60년 동안 어떻게 갈고 닦았는지 그 비결을 들어 봐야 할 것 같다.

[봄배추의 전성기]

노부부가 봄배추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부터다. 당시 대저에는 토마토를 재배하는 사람도 약간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까지는 봄배추 농사가 중심이었다. 토마토는 그 이후, 1980년대 들어서 슬슬 시작되었다. 노부부가 봄배추 농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버님이 군 복무 중 얻은 작은 힌트였다.

“내가 군대 생활을 인천 부평 미군 부대에서 했는데,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청량리·용산에 가 보니까 배추 시래기를 주식으로 쌀 비슷하게 먹더라고. 배가 고프니까, 돈이 있으면 다른 걸 먹지만, 그 당시 없을 때는 배추하고 쌀만 있으면 사는 거지. 그래, 내려가면 배추, 이걸 해도 되겠다. 김해 평야에는 (배추를) 다 심어도 된다 이거야.”

제대 후 아버님은 생각하였던 봄배추 농사를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대규모 봄배추는 대저에서 처음으로, 일종의 모험이었다. 배추 재배 단지가 커야 상인들이 많이 오니까 주위에 함께 할 것을 많이 권하였으나 반응은 미지근하였다. 농한기는 그냥 화투나 치면서 보내는, 타성에 젖은 농촌 생활이었다.

“그런데 딴 사람들은 안 하더라고. 이 지역에서는 배추를 내가 제일 처음 하였고, 배추 해서 처음으로 돈을 마이 벌었고, 그래가 여러 사람들이 따라 하고…. 그런데 자꾸 하라 캐도 처음에는 안 해. 겁이 나니까. 비니루[비닐] 값도 비싸고 하니까. 돈을 이용을 못 해서도 못하고, 게을러서도 못 하고. 여기 사람들은 벼농사만 쪼깨[조금] 짓고 겨울 되면 만날 먹고 놀았는데 뭐.”

그러나 아버님이 봄배추 농사로 큰 성공을 거두자, 이제 그렇게 무리해서 하지 말라고 말려도 주위에서 빚을 내면서까지 자꾸 따라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마을 사람들이 “저 집에서 들에 뭐 심었다 하면 돈 번다.”고 하였을 정도였다. 들판에 펄럭거리는 비닐이 온통 부의 손짓처럼 보일 정도로 신나게 농사짓던 한 시절이었다.

봄배추는 겨울에 비닐하우스로 재배하여 보통 4월에 출하하는데, 대저 지역에서는 주로 서울의 용산·청량리 등에 판매하였다. 가까이 부산도 있지만, 90% 이상은 서울로 판매하였다. 워낙 대규모 농사다 보니, 시장이 큰 서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부산 지역 판매는 소량으로 농사짓는 사람들이 주로 하였다.

1970년 경부 고속 도로가 생기자 출하량이 더욱 늘었다. 거래처가 주로 서울이라,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수요가 훨씬 늘어난 것이다. 봄배추 수확철이 되면 서울에서 상인들이 대저까지 내려와서 현지 구매하려 하였지만, 아버님은 직접 서울까지 올라가서 거래처를 관리하였다. 노부부에게 그 시절 배추 출하 광경을 들어본다.

“봄 되면 서울 상회에서 배추 사러 택시 타고 막 온다. 출하 열흘이나 보름 정도 남았을 때 주재를 내려 보내서 아예 구포나 대저 여관, 여인숙에서 며칠씩 묵는다고. 그럼 주재한테 출하하기 전에 밭뙈기로 넘기는 사람도 있고, 나 같은 경우는 서울에 거래처가 잘 되어 있으니까, 여기서 달라는 대로 다 주는 게 아니고, 작업을 해 가지고 직접 올라가지. 예를 들어 내가 트럭 3대 정도 작업을 해 가지고 서울 올라가 보고, 한 군데만 가는 게 아니고 여러 군데를 가 본다고. 거기서 제일 잘 나가는 데로 거래처를 한 번 바꿔 보는 거지. 그래도 아는 데서 바꾸지 생판 모르는 데서 바꾸지는 않는다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씀하는 아버님과 이런저런 첨언을 해 주면서 가끔 아버님이 하실 말씀을 앞질러 하거나 막는 어머님. 여느 노부부 같으면 당장 ‘당신은 마 가만히 있거라’ 소리가 나왔겠지만, 아버님은 한 번도 어머님을 타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님의 개입으로 못 다한 말씀을 수습하면서 “그래, 그랬지.” 하고 슬그머니 대화에서 빠져 나오신다. 참으로 뵙기에 존경스러운 두 분이다.

아무튼 이렇게 거래가 성사되면 배추를 서울 상회에서 내려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가 직접 가져다준다. 이때 현지에서의 배추 수확과 서울에서의 배송 작업이 부부가 역할을 분담하여 따로 이루어진다.

“(어머님) 우리는 인자 이짝서[대저에서] 자꾸 짐을 해다가 보내 주면, 아저씨는 중간에서 차로 받아서 서울로 간다고.”

“(아버님) 아니면 용산에서 투숙을 하고 있으면 대저에서 하루에 열 몇 대씩 올라오면, 내가 통제를 하지. 이 상회에 다 주면 안 되니까, 어느 상회 가라, 어느 상회 가라….”

이야기를 아버님이 먼저 시작하고 어머님이 보충하던 것에서, 어느새 순서가 바뀌어 어머님의 얘기를 아버님이 마무리하신다. 그래도 서로의 이야기를 바로잡고 살을 붙여 가면서 두 분이 함께 걸어오신 인생 이야기 한 편을 성공적으로 그려 나간다.

“배추가 기후나 강우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하지만, 크게 자연 현상으로 불황을 겪지는 않았어. 강이 인접해 있으니까 물이 잘 빠지고, 정관 마을이 채소하기가 지리적으로 참 좋아. 물이 자주 침수되는 곳에는 배추를 못 심지.”

한창 때인 1970년대 초에는 1년에 5만 포기를 심었다. 앞서 말하였듯 한 구역이 2,975.21㎡인데, 약 1만 포기에서 1만 1,000포기 정도 심을 수 있었다. 배추는 부대비용도 크게 들어가는 것이 없어 투자에 비해 소득이 매우 컸다. 지금과 달리 당시는 인건비도 쌌기 때문에 경비의 3분의 1을 인건비와 비료·비닐 값 등 재료값으로 지출하고 나면 나머지 약 3분의 2는 순수익이었다. 그 수익으로 자식도 교육시키고, 생활하고, 땅도 많이 샀다. 나중에는 넓은 땅에 다 농사짓기가 힘에 부칠 정도였다. 이즈음 대저 일대 땅값이 크게 올랐으나, 노부부는 크게 재미는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곁에 있던 며느리의 한 마디에 모두 공감한다.

“그러게 농사꾼은 농사를 지어야지, 땅 투기는 복부인들 몫이고.”

그런데 이렇게 호황이던 봄배추가 왜 대저 일대에서 사라졌을까? 그 이유는 인건비를 비롯해 투자 비용은 날로 높아지는데 배추 값은 40년째 제자리걸음인 데 있었다.

“40년 전 배추 한 패기[포기] 500원 하였는데, 40년 후 지금도 한 패기 500원밖에 안 한다 이기라. 지금 고랭지 배추 같이 좋은 거는 한 패기 1,000원도 넘어가지만, 40년 전에는 인건비도 쌌고….”

[천생 농사꾼, 그래도 자식에게는 물려주기 싫었다]

아버님이 봄배추 농사를 짓던 시절은 지금과 같이 자동화·기계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노지(露地)에 대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비닐을 덮는, 비닐하우스라 하지만 매우 유치한 수준의 농법이었다. 이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수작업이라 농사일이 그만큼 고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기계 없이 농사를 짓던 시절이라, 배추를 하기 위해 노지에다 대나무를 꽂고 비닐을 덮고 그 위에다 짚으로 짠 거적을 덮었는데, 낮에는 말아 올리고 밤에는 내려야 했다고, 보온을 위해서. 그걸 일일이 사람 손으로 전부 다 새끼를 꼬아 가지고, 그것도 굵게 꼬면 안 돼…. 밤에 그렇게 새끼를 꼬아 놓아야 낮에는 손으로 거적을 짠다고. 하루에 스무 남은 장씩 짰나? 그걸 몇 달 동안 한 600장 짜야 된다고.”

신혼 시절 거적을 짜는 데 쓸 새끼를 밤새워 꼬면서도, 당시는 새신랑이었을 아버님의 어머님에 대한 배려가 그렇게 기가 막힐 수가 없다.

“내가 결혼해서 오니까, 밤에는 옆에 앉아서 책 읽으라고 하고 새끼를 꼬더라고. 나는 10시까지 책 읽다 누워 자고, 자기는 1시, 2시까지 새끼 꼬고…. 그래도 소죽을 4시 반이나 되면 끓여 가 먹여 놓고, 새벽밥 먹고 아무도 들에 안 나왔을 때 일찍 나가는 기라.”

세 아이를 키우면서 손 많이 가는 대규모 농사를 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비가 오거나 할 때는 애들 재워 놓고 다시 밭으로 뛰어가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사고가 터졌다.

“어떤 때는 비가 오면 온 밭에 덮어 놓은 거를 모두 거둬서 모아 놓아야 되는 기라. 비를 맞으면 무거우니까. 밤에 비가 온다 싶으면 전부 몽땅몽땅 모아 놓는 기라. 그랄라꼬 아[아이] 서이[3명]를 재워 놓고 들에 나가고 나니까, 아~들이[애들이] 밤중에 깨어 보니까 엄마 아버지가 없거든? 그래 가꼬 서이가 손을 잡고 고모할매집에 간다고 동네가 빠지도록 울고 가는 기라. 그거를 밭에서 듣고 하나는 저리 가고 하나는 이리 가고…. 아~들이 어데로 가는가 싶어 가지고. 그때 우리 아~들이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 힘들었어.”

역시 농사일의 고됨이나 자식 키우던 시절의 이야기는 어머님이 하실 말씀이 많으시다. 그런데 노부부의 이야기를 듣자니, 아버님의 인생이 너무 교과서라, 필자가 살짝 객기를 부려 본다. 농촌 생활이란 농한기도 있고, 그럴 때면 아무리 가정과 농사밖에 모르고 사셨던 아버님이라도 조금의 일탈은 있지 않았을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 동네 60대 후반 70대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어. 노름 같은 것도 안 하고.”

조금도 서슴없이 돌아오는 반응이 마을 노인들이 전반적으로 열심히 농사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무언가 아버님의 약점을 잡아내 어머님에게서 이야기를 이어 갈 만한 실마리를 끄집어내려 했던 필자 계획이 보기 좋게 어그러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자의 얕은 수보다 더 기절초풍할 에피소드가 흘러나왔다. 바로 아버님 삭발 사건!

“일은 많은데 사람들이 자꾸 불러 가지고 놀러가자 카니까, 머리를 빡빡 깎아 가지고…. 머리를 밀어 버리면 못 나가니까.”

실로 놀라운 집념이요, 천생 농사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농사일 외에는 한 차례의 한눈도 팔지 않은 노부부였지만, 이 고된 일을 자식들에게는 차마 물려주기 싫었다. 그래서 아들 셋을 모두 시골에서 공부시키지 않으려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차례차례 내보내서 고등학교까지 모두 부산 시내에서 교육시켰다. 이러한 교육열의 근저에는 어려웠던 시절 학업은 그저 사치일 뿐이었던 부모 세대의 한풀이도 있었다.

“그때 당시로서는 교육열이 굉장히 큰 거지. 어짜든지 아버지 엄마는 공부를 많이 못하였으니까 자식들은 공부를 많이 시켜 갖고 인자 농사일 안 시킬라꼬, 농사일은 힘이 드니까네, 화이트칼라 해라꼬….”

처음에는 외삼촌댁 등 친척집에 보냈다가, 좀 커서 셋만 모여서 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하숙집을 구하였다. 또 과외 선생 댁에 하숙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부암동, 개금동, 하단동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어려서부터 형제 셋만 모여 살다 보니 다행히 우애가 좋았다.

“농사지어 가지고 하숙집에 많이 퍼줬지. 논 세 구역 지은 거는 하숙집에 다 갖다 줬지. 엄마 아버지가 나들어 댕기면서 밥도 해 주고. 한 번은 아버지가 가고, 한 번은 엄마가 가서 해 주고. 그라고 대저에 올라와서 또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 또 (시내 하숙집에) 내려가고.”

하숙집에서 식사를 제공받을 때는 농사지은 것을 많이 퍼다 날랐고, 그렇지 못할 때는 부부 둘이서 번갈아 가며 아침저녁으로 시내 나들이를 하였다. 그러면서도 낮 시간에는 또 농사일에 매진하였다. 1970년대 당시에는 교통편도 부실한 데다, 대저에서 부암동이나 개금동까지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이에 시대별로 온갖 교통수단이 동원된다.

“지금 같으면 차가 있으니까 대저에서 부암동 가는 게 별게 아닌데, 그때는 아버님께서 자전거 타고 가시다가, 오토바이 사서 타고 다니셨고, 한참 후에는 차로 다니셨죠.”

며느리 입장에서도 참으로 존경스러울 만한 물심양면의 자식 사랑! 요즘처럼 소위 ‘잘난’ 부모들의 ‘극성스러운’ 교육열이 아니라, 자식이 가고자 하는 길을 결정해 줄 수는 없지만 어떤 길로 가든 최상의 조건을 갖추어 주고 싶은 진정 헌신적인 부모의 마음이다.

“여기 부근 사람들은 그리 한 사람 아무도 없어, 우리만 그랬지. 부산에 선생들 쌀 한 가마니씩 갖다 주면 얼마나 좋아라 해. 하여튼 우리는 농사짓고 해 가지고 자식들한테 투자 많이 했지.”

노부부의 인생에서 문득 필자의 과거를 돌아보게 만든다. 근동에 드문 두 분만큼의 투자는 아니어도 자식에 대한 헌신적 사랑은 한결 같았던 부모님, 그리고 너무 ‘잘난’ 우리들….

[봄배추에서 토마토로 작종 변경]

1980년대 대저에서 토마토가 봄배추를 대신하게 된 것은 배추 값 외에도 토마토의 약진이 계기가 되었다. 아니, 배추 값은 결과적으로 40년 동안 가격 변동이 없었다는 것이지, 1970년대 후반에도 가격 면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막 배추 농사를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 1포기 500원이라는 가격이 너무 높았던 것일까? 아무튼 문제는 토마토 값이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들어가면서 토마토 가격이 많이 올랐어. 그때는 우리가 조금 살기가 나아지니까 토마토가 활성화되는 기라. 그래서 배추를 그만두고 토마토를 하게 됐는데…. 내가 처음 한 것은 아니고, 그때 일부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 신덕 사람도 하고, 대저 1동 사람도 하고, 토마토를 조금씩 하는 집이 있었다.”

토마토로 바꾸고도 수익을 많이 올렸다.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는 농사를 잘 지어서 조합에서도 이름을 알리고 높은 가격에 팔기도 하였다. 특히 1995~1996년 무렵에는 경매 시 최고 단가를 기록하는 등 며느리 표현에 따르자면, ‘아버님이 최고’였다. 당시 10㎏에 3만 원을 받았는데, 값도 높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크고 야물고 양도 많아서 남들보다 훨씬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요즘이야 토마토 열매가 작은 것을 선호하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큰 것을 더 좋아하였다.

특별한 비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봄배추 때부터 지금까지 유일한 비법이라면 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우직한 농사꾼으로서의 자부심과 생명의 터전인 땅에 대한 애정, 그리고 신뢰다. 아버님은 자식들을 어루만지듯 땅을 고르고 또 골랐다.

“땅이 왜 좋은가 하면, 내가 공을 많이 들였어. 구포 대교 근처 유림 아파트 지으면서 그 터에 있던 소나무를 많이 벴어요. 내가 그때 우연히 가 보니 나무를 갈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살 수 없냐고 물으니, 살 수 있다고. 가격은 확실히 모르겠는데, 한 되에 15만 원인가 달라 카드만. 거기다 구청에서 약간 보조도 해 주는기라. 그 한 되를 풀면 얼마나 많은가 하면, 1톤짜리 트럭 10대에 다 못 실어. 그걸 회관하고 또 어디다 5대씩 풀어 놓고, 이놈들을 땅에 끌어다 넣은 기라. 또 1996년이든가, 매미 태풍 불던 때든가 김해축협 사료를, 그것도 사실 공짜로 얻고 운임만 5만 원인가 줬지…. 하여튼 사료를 근 100대 넘게 갖다 넣어서, 앞에 소나무 간 것하고 섞었지. 그래가 땅이 완전히 변하였다 이기라.”

[농사꾼 현역 은퇴, 아들이 대를 잇다]

인생이 마냥 승승장구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청장년 시절 내내 최고였던 아버님의 농사도 어느 순간 세태에 뒤처져 구식으로 여겨지는 때가 왔다. 농업에도 기계화가 시작된 것이다.

“돈을 못 벌었어.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니까, 비용은 많이 들고….”

크게 말씀이 없으신 아버님을 대신해 며느리가 상세히 보충 설명을 한다. 말하자면, 아버님이 농사꾼 현역 은퇴를 결심하신 그때가 대저 지역 농업에서는 일대 세대교체의 역사적 순간이었던 셈이다.

“옛날에 아버님 하실 때는 거적으로 보온을 하였는데, 이제는 기름으로 보온을 하니까 돈이 많이 들지요. 작대기 가지고 거적을 밀어 올려서 벗기고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받고, 그렇게 보온을 할 때는 나만 힘들면 되고 나만 고생하면 돈이 됐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거든예.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자꾸 새로운 게 들어오니까. 너무 갑자기 여기도 변했거든예.”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하던 시절의 전통적 농법으로는 대량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한계치가 있었는데, 요즘은 만사가 그렇듯 돈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장 크기에도 한계가 없고, 그만큼 투자액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걸 따라가다가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판이다. 가장 인간적인 영역인 줄 알았던 농업에서도 기계와 자본이 인간을 구축하는 현상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거적으로 할 때는 농사 면적을 많이 늘리지 못하였지. 최고 많이 한 사람이 5,950.41㎡[1,800평], 그 이상 할 수가 없으니까. 자기가 시간이 없단 말이야. 아무리 아침에 일찍 나와서 하더라도 9시 이전에는 다 벗겨야 되고 저녁에 덮는 시간이 있으니까. 보통 많이 하는 집이 두 구역 정도. 그러니까 양은 적어도 괜찮았는데, 그 뒤로 전기가 보급되고 보일러가 보급되고 하니까, 면적이 한 사람당 네 구역, 여섯 구역, 양이 급속도로 늘어났지. (그래서 우리는 자식들한테 미뤄 주고, 논농사나 짓게 된 거지.)”

마지막에 자식들한테 물려주었다는 것은 어머님 말씀이다. 정황상 농사를 물려준 것이 맞는데도 아버님은 자식들이 본격적으로 농사짓기 시작한 지가 몇 년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물려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말하자면, 아들의 농사에 ‘고문’ 정도 지위에 계시면서, 언제든 일선에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걸까? 아버님의 말씀에 반박하기 위해 어머님과 며느리가 아들이 농사를 물려받은 시기를 따져 본다.

“아범이 아버님 밑에서 일하던 때부터 치면 14~15년 됐습니더. (그래 됐나?) 아범하고 제가 들어온 지가 6~7년 됐는데예, (쟈~는 또 당신 밑에 와 가지고 일로 하였다 아이가. 한 3년 일하였다.) 그라믄 못 해도 10년이네.”

아버님의 KO패. 결국 아들에게 농사를 완전히 넘긴 것으로 결론 났다. 그렇다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대권은 순조롭게 이양되었는가?

“아들한테 넘긴 게 아니라 아들이 내놔라 캤지.”

며느리의 재치 있는 일갈에 시부모와 며느리 간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무심한 척 곁에서 신문만 보고 있는 대권 승계 당사자인 아들뿐이다.

“(어르신은 그럼 논농사만 하시고?) 논농사 하시고…. 아버님 밭이 많으시니까, 거기도 소일거리 삼아서 지금도 여러 가지 하세요. 토마토도 하고 고추도 하고…. 하시고 싶으신 거, 재미나겠다 싶으신 거… 양배추도 하고.”

아버님에게서 농사를 물려받은 김광웅[46] 씨는 3형제 중 둘째다. 광웅씨가 아버님을 이어 농사를 짓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한 차례 병원 신세를 졌다. 아버님의 이야기를 어머님이 대변하신 것처럼, 광웅씨의 내력을 부인 강현숙씨가 이야기한다. 더없이 잘 어울리는 부자지간이요, 고부지간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있으니까, 성격이 좋으면 늦었더라도 하숙집에 밥 좀 주이소 하면 되는데, 성격이 어찌나 찬찬한지 엄마가 아니면 밥 달라 소리를 못하는 기라. 그래 굶어뿌고 굶어뿌고 이라면서 위가 탈이 나서 학교를 1년 쉬었다 아입니까.”

거기다 졸업 후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다가 차사고도 겪었다. 이런저런 세파를 겪으면서 광웅씨는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였다.

“아버지가 마 들어오라 캤지. 힘들게 일하지 말고, 클 때 일도 안 하고 컸는데 힘들게 직장 생활하지 말고 들어온나. 아버지 농사 많으니까 같이 살살 짓자.”

광웅씨 내외는 요즘 부산 시내에서 고향으로 출퇴근을 한다. 아버님은 고된 농사일을 물려주기 싫어 아들이 화이트칼라가 되길 원하셨지만, 강산이 다섯 번 변할 50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하였다. 농사도 아버님이 예전에 지으시던 그 농사가 아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은 5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옛날에는 어머님 아버님이 시내로 애들 유학을 보냈고, 요즘에는 거꾸로 우리 젊은 사람들이 시내에 집을 두고 애들은 시내에서 학교 다니면서 출퇴근을 하는 거죠. 농사짓는 젊은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짭짤이 토마토, 맛의 비결]

광웅씨 부부가 귀농하여 토마토 농사를 시작할 때는 이미 토마토가 대세였다. 현재 토마토 농사만 1만 1900.83㎡[3,600평] 짓고 있는데, 올해 4,958.68㎡[1,500평]을 더 늘릴 예정이다. 수확은 약 50톤 정도 예상한다. 그러나 예전 아버님의 봄배추 농사 시절에 비해 수입은 신통치 못한 모양이다.

“그냥 먹고살 만한 정도. 아버님 때는 농사짓는 사람이 열심히만 하면 되었지만 지금 농사는 전부 다 자동화니까, ‘아이고 올해는 이제 괜찮겠다’ 하면 또 투자가 들어가고…. 아니면 뒤처지니까, 자꾸 그러고 있는 거죠. 먹고살고는 있는데, 옛날 아버님 때처럼 대박 터지고 ‘와 돈 마이 벌었다’ 뭐, 이 정도는…. 지금 같은 경우는 실농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부대비용 빼고 나면 거의 본전치기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아내 현숙씨는 현재에 대해 낙관적이다. 아파트에 갇혀 살면서 농사지으면 피부 나빠진다고 걱정하던 예전에 비해 놀랄 만큼 긍정적인 변화다.

“그래도 우리 정도만 되어도 잘하고 있구나 합니다. 땅이 비싸기 때문에 넓히고 싶어도 더 넓히기 힘들고, 옛날 아버님 배추 농사지으실 때나 짭짤이 처음 확 뜰 때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윗 지방에서도 짭짤이 비스무리한 것이 마이 나오거든예. 보기에는 짭짤이지만 먹어 보면 못 따라오는데….”

대저 토마토는 2012년 9월 ‘부산 대저 토마토(Busan Daejeo Tomato)’라는 이름으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지리적 표시품’이 되었다. 이로써 대저 토마토의 품질과 특성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토마토에만 고유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대저는 토마토 농사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평야 대부분이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 형성된 비옥한 퇴적층으로, 염분이 높고 풍부한 미네랄 성분을 가지고 있으며, 기온 또한 온난하여 겨울철에도 토마토 생육에 알맞다. 이는 여타 토마토 주산지에 비할 수 없는 호조건이다. 대저 토마토의 품질은 이러한 지리적 요인에 기인한 바가 크며, 그 대표적인 상품이 짭짤이 토마토라 하겠다.

짭짤이 토마토는 당도가 높고, 짭짤하고, 야문 것이 특징이다. 이상의 필수적인 지리적 요인 외에 농부의 정성이 어우러져야 짭짤이 토마토를 만들 수 있다. 즉 짭짤이 토마토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오랜 노하우로 재배 과정에서 짭짤이 토마토로 만드는 것이다.

“온도가 제일 중요하지요. 조금만 춥게 하면 병이 오고, 조금 더 따뜻하게 하면 퍽퍽 커 버려서 짭짤이가 안 되고. 일정 정도 성장시킨 뒤에 세균을 죽여서 더 이상 열매 발육을 억제시켜서 단단하게 하고, 색깔이 좋아지게 하는 거죠.”

짭짤이 토마토는 9월 초 파종하여 10월에 옮겨 심으며[정식], 이듬해 2월 중순이나 말경 수확한다. 그리고 3월 말이나 4월 초, 늦어도 5월이면 철거한다. 그 후 그 땅을 갈아 벼농사를 시작하고 10월에 추수하면, 9월 초에 파종한 토마토 모종을 다시 옮겨 심는다. 이렇게 1년 농사 일정이 빡빡하게 돌아가고, 그동안 땅 역시 쉴 틈이 없다.

“땅이 노는 게 아니에요. 지금 나락을 심어 놓는 게 땅을 쉬게 하는 거예요. 토마토 재배하면서 퇴비 같은 걸로 비료를 하잖아예? 그런 게 축적되면 땅에 안 좋거든예. 그래서 이모작을 하는 거예요. 벼를 해서 꼭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니라 땅에 휴식을 주는 거죠. 나락이 들어가서 뿌리를 내리면서 비료 하였던 것들을 싹 빨아먹는 거죠.”

땅은 이모작을 통해서 지력을 회복한다고 하지만, 빡빡한 농사 일정에 농사짓는 사람은 한 숨 돌리며 쉴 시간이 있을까?

“10월 초 추수하고 나서 10월 말에 토마토 모종을 옮겨심기까지 불과 30일의 여유밖에 없어. 그 사이에 추수한 논을 갈고 두드려 가지고 땅을 만들어서, 거름 다 주고 비닐 다 입힐라고 하면 그 준비 과정이 엄청 빡빡해.”

추수하고 토마토 재배로 넘어갈 때뿐만 아니다. 반대로 토마토를 수확하고 모심기를 준비할 때도 시간이 촉박하기는 마찬가지다.

“5월 초 토마토 수확이 끝나면, 늦어도 5월 말, 6월 5일경까지는 모를 또 심어야 되니까, 그것도 불과 한 달밖에 시간이 없어. 그 사이 빨리 토마토 철거하고, 안에 있는 지지대 다 들내고, 비닐 벗기고 (땅을) 갈고 두드리고….”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한창 농번기에 광웅씨 부부가 매일 시내의 집에서 농장으로 출퇴근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요즘 비닐하우스는 시설이 좋아서 165.29~330.58㎡[50~100평]나 되는 온실 내에 화장실과 샤워장, 잠자는 곳까지 다 갖추어져 있다. 또 밤에 비라도 오면 보온 덮개가 저절로 내려올 정도로 자동화 시스템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출퇴근해도 괜찮다고 한다.

광웅씨 부부는 짭짤이 토마토의 전망이 당분간은 밝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도 5~7년 정도는 충분히 갈 것 같다고 한다. 물론 그 후는 더욱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그래도 광웅 씨는 아버지의 땅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배운 대로 실천해 나갈 뿐이라고 다짐한다.

[대저 농사꾼의 자부심]

아버님은 올해도 농사는 다시는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도 토마토 6,611.57㎡[2,000평]를 지으셨다. 작황도 괜찮았다. 작년에는 고추, 재작년에는 양배추… 매번 재미있었다 하신다. 1년 중 가장 여유가 있는 여름철에는 두 분이 해외여행도 다니시고, 정관 마을 노인회장으로서 마을 노인들과 여행도 하신다. 그런데도 농사짓던 분이라 일에서 손을 놓았을 때의 심심함은 누가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우리 아버님은 여행 다니시고 노시는 것보다 일하는 걸 더 좋아하세요. 아버님 손 떼시고 나서 쉬신 거는 한 해인가? 못 쉬겠는가 봐예. 몸이 편찮으신 것도 아니고 하니까 은퇴를 하셔도 현역 생활을 계속하셔야지, 누가 계속 놀아 줍니까? 조금씩은 소일거리를 하셔야지 몸에 병이 안 나지. 그런데 아버님은 조금 과하게 하시니까, 조금씩만 하시면 더 젊어지실 텐데….”

아버님께 한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았던 것에 대한 감회를 여쭈었더니, 역시 거창한 말씀보다 간결한 삶의 교훈을 하나 전해 주신다.

“농사꾼으로 살았던 거에 대해 후회는 없어예.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제각기 운이 있겠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면 실패를 한다.”

이번에는 광웅씨 부부에게 소감을 물었다. 역시 남편은 말이 없고, 아내인 현숙씨가 활달하게 답한다.

“우리가 짓고 있는 토마토가 전국 최고다, 하는 자부심이 있지. 대저에서 최고의 토마토를 지어 보고 싶다 하는 꿈은 항상 가지고 있죠. 남들 명예 퇴직할 때 10년 먼저 들어와서 자리 잡았고, 노후 걱정도 안 해도 되고, 이렇게 좋은 직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직이라 생각하며 삽니다. 우리도 아버님 연세만큼은 농사짓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광웅씨 부부도 농사꾼으로서의 자부심도 느끼고 삶의 행복을 발견했지만, 귀농 후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많았다고 한다. 한때는 현숙씨가 진지하게 남편에게 차라리 전세금을 빼서 장사라도 하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때 광웅씨는 결연한 눈빛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농사가 짓고 싶다. 처음에는 진짜로 아무 생각 없이 어짜든둥 묵고 살 생각으로만 시작했는데, 6년을 이 일을 하고 나니까 이 일만큼 정직해야 되고, 이 일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노 하는 생각이 들더라. 요즘에 먹는 거 갖고 장난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노? 나만이라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 우리 애들한테 걱정 없이 먹일 수 있는 먹거리를 짓는 농사꾼이고 싶다. 내는 그래서 이 일이 하고 싶고, 이 일을 하다가 죽고 싶다.”

그날의 대화 이후 광웅씨 부부는 정말 완벽한 농사꾼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제 아버님이 믿고 맡길 만큼 어엿한 농부가 되었다. 아이들을 재워 놓고 나서도 들로 나가 일해야 했던 노부부의 젊은 시절이 광웅씨 부부에게도 겹쳐 보인다. 아버님이 대저에서 배추 농사를 시작하신 지 50년 세월이 지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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