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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세관 직원의 밀수꾼 탐색전 - 남해안 호랑이 남현우의 사건일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32
한자 釜山稅官職員-密輸-探索戰-남해안호랑이남현우-사건일지
영어의미역 Staff of the Busan Customhouse working hard to round up smugglers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수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 10월 22일 - 일본 특공대 밀수선 적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5년 6월 6일 - 영도경찰서 소속 순경 폭행 사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4년 - 천양호 사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6년 5월 17일 -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조사 개시

[최초의 밀수품은 성경 6,000권]

1887년 만주 땅 우장(牛莊),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사 존 로스의 손에는 조선인 세례 교인들이 한국어로 번역한 『예수 셩교 전셔』가 들려 있다. 일본에서 인쇄한 이 6,000권의 성경을 어떻게 조선으로 반입할 것인가를 고민한 로스 목사는 세관 책임자 묄렌도르프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하지만 이 소문은 조선 정부에 흘러들어갔고 관련자를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엄명이 떨어진다. 하지만 기독교인 묄렌도르프는 갯가에 자리 잡은 인천해관 창고에서 성경을 꺼내 자신이 기거하던 해관장 사택으로 옮겨놓았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적인 이 장면은 우리나라에 근대 세관이 들어선 후 벌어진 최초의 ‘밀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밀수, 사전적으로는 ‘관세를 회피하거나 금지 품목을 수입 또는 수출하기 위해 비밀리에 물건을 운반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밀수는 개항과 함께 항구를 통해 수많은 선박과 물품이 드나들고, 거기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본격화되었다. 밀수의 원인을 보면, 과거에는 국내 생산 물품이 빈곤했고 산업 자체가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외국 물품에 대한 동경이 컸다. 따라서 물건을 몰래 들여와 비싼 차익을 남기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지면서도 밀수가 끊이지 않는 것은 사치와 고도 소비 성향 때문이라고 세관 관계자들은 말한다.

우리나라의 밀수는 거의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부산에서 여수에 이르는 남해안 일대는 광복 이후 40년간 밀수 ‘황금 지대’였다. 1950~1960년대 밀수의 대명사 ‘특공대 밀수(特攻隊密輸)’, 1970년대 활어 선박과 부관 페리 보따리상, 그리고 미군 PX[군부대 매점]와 APO[군사우체국]를 통한 밀수, 1980년대 ‘워크맨’과 ‘코끼리 밥솥’으로 대표되는 여행자 밀수 등 기상천외한 밀수 백태들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1990년대는 통관 절차 간소화와 중국과의 수교로 참깨 등 한·중 여객선 보따리 상인들의 농산물 밀수가 성행했다. 간단한 일화 하나만 소개하고 넘어가자. 1989년 봄 다대포 앞바다는 한때 ‘참깨 잡이’를 나선 어선들로 때 아닌 활황을 누렸다. 참치가 아니고 분명히 참깨다. 감시선에 쫓기던 밀수선이 내버린 참깨 자루는 국산품과 10배의 시세차가 남는 현금 다발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발로 뛰던 밀수 수사가 과학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1970년 관세청 설치, 1974년 대통령 영부인 저격 사건과 19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다. 그 전만 해도 밀수에 대한 유일한 대응은 X-RAY나 금속 탐지기 같은 장비가 아니라 수사관의 땀과 직관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원초적 방식이었다. 당시 본명보다 닉네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명수사관이 있었다. 다음은 일명 ‘남해안 호랑이’로 불린 전 동래세관장 남현우 옹이 들려주는 부산세관 밀수 수사 40년의 이야기다.

[혈혈단신 그리고 세관직 약간 명 모집]

6·25 전쟁이 터지고 근 넉 달이 지나 돌아온 서울은 딴 세상이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괜스레 총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뿔 달린 공산당이라도 노인네와 어린 학생을 어떻게 했을까. 그네들이 아무리 지주 출신이라면 이를 간다지만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작하는 이들도 마음으로 고개 숙이던 어진 사람들이었다. 그해 거둔 나락을 두말없이 절반을 남겨주는 지주는 인근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경복궁 지나 저 골목을 돌아가면 그리운 고향집이건만 아무리 잰걸음 해봐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모퉁이를 돌아서자 집집마다 걸려있는 하얀 광목천의 행렬, 아마 저항의 의사가 없음을 알리는 백기리라.

그러나 군화발로 성큼 올라선 대청에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순간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그의 몸은 땅으로 무너졌다. 집 앞에 걸려 있던 그 새하얀 천들은 항복의 표식이 아니라 몰살당한 가족들의 죽음을 알리는 만장이었다. 특이한 모양으로 백금을 입힌 앞니 덕에 찾은 어머니의 시신과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고도 한참 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꼭 복수하고 싶었다. 졸개들 말고 어머니와 동생에게 죽음을 명령한 책임자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총 한 자루가 전부인 학도병으로서는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군 특작 부대 모집 공고였다. 공중 폭격이나 함포가 닿을 수 없는 적의 전략 시설을 찾아내어 폭파하는, 말 그대로 혼자만의 전쟁을 하는 군인을 모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전 협정이 끝날 무렵까지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비정규전에 주로 투입되어 숱한 군사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부대는 종전과 함께 소리 소문 없이 해체되었다. 복무 기간 찍었던 사진 한 장, 군화 한 짝까지 벗어주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부산역에 짐 부리듯 내려진 그때의 처지는 꾸밀 필요도 없는 혈혈단신 그 자체였다. 전쟁이 끝나자 복수라는 목표는 사라지고 삶에 대한 집착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학도병으로 지원하는 바람에 졸업장이 없었던 그는 예상치도 않았던 학력의 벽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유독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 또다시 승부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끝내지 못한 공부를 일본으로 건너가 보란 듯이 마무리 짓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유일한 방법은 밀항이었다. 그러나 지금이나 그때나 돈이 문제였다. 전전긍긍 가로막힌 돌파구를 찾느라 온갖 궁리를 해봤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목재 전신주 한쪽에 반쯤 떨어진 모집 전단이 눈에 들어왔다. 세관직 약간 명 모집! 그래 바로 이거야. 밀항을 꿈꾸던 청년과 세관 직원 모집 공고라는 엉뚱한 만남의 전말은 이러했다. 세관 공무원이 되면 감시선을 탈 수 있을 것이고 당시 밀수의 거점, 대마도 인근에 감시선이 접근하는 순간 특수 부대에서 갈고 닦은 수영 실력으로 4.8㎞[3마일] 정도는 충분히 헤엄칠 자신이 있었다. 일본 본토로 건너가는 것은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약간 명 모집’이라는 공고와 달리 70명을 뽑는 1953년 공채 1기 세관직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청년은 물경 3,500명! 사람의 바다를 건너야 꿈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 고등학교 하나를 빌려 치르려 했던 시험장은 두 곳으로 늘어났다. 실력이야 보이지 않았지만 행색으로 단연 돋보인 것은 남현우 응시생이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궁색한 복장은 50보 100보였지만 제대로 된 필기구 하나 없이 까만 페인트 통을 옆에 끼고 촉만 남은 만년필 하나 달랑 들고 시험장으로 들어서는 응시생은 동료뿐 아니라 감독관에게도 재미난 볼거리였다. 어쨌든 그런 관심 덕분인지, 목표(?)가 뚜렷한 남다른 지원 동기 덕분인지 남현우는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좌충우돌, 수사관의 업무 일지]

세관으로의 출근 첫날, 그가 달려간 곳은 사무실이 아니라 감시선이 정박해 있는 연안 부두였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원래 일본 총독부가 사용하던 80톤급의 기선인 붕양호였다. 배수량 수백 톤은 거뜬히 넘는 듬직하고 재빠른 미군 함선에 익숙해 있던 그의 눈에는 한없이 실망스러운 외형과 속도를 가진 배였다. 그래도 붕양호는 당시 대한민국 세관이 보유하고 있던 감시선 가운데 양호한 축에 들던 강철선이었다.

우리나라가 감시선을 이용하여 해상 감시를 시도한 것은 구한말 개항 이후 중국·러시아·일본과 무역을 하면서부터였다. 1906년 당시 우리나라의 감시선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광제호[1,056톤], 앵정환(丸)[197톤], 진양환[82톤] 등 3척이었다. 1909년 밀무역 단속을 철저히 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부터 석유 발동기 6척[관 1호~관 6호]을 새로 도입하여 인천, 진남포 세관 등지에 배치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광복이 되어서도 열약한 조선 기술로 인해 감시선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도입되었다. 1930년 목선 은구호[7톤]는 일본에서, 청구호[10톤]는 미국에서 도입해 남해안 세관을 중심으로 배치했다. 1937년에 가서야 철강선인 서양호[50톤]를 일본에서 도입, 인천세관에서 감시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1948년 광복 이후 처음 세관에 배속된 감시선은 겨우 9톤의 백구호로 군산세관에 배속되었으니 부산세관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우리가 우리 기술로 감시선을 건조한 것은 이듬해인 1955년부터였다.

“이때 받은 충격 때문인지 목표가 하나 생겼어요. 세관 수사관들은 밀수꾼 잡으면 포상금이 나옵니다. 7년간 모아 보니 구화(舊貨)로 2,700만 원 정도였어요. 꽤 큰돈인데 그 돈을 몽땅 배 만드는 데 쏟아 부었어요. 배 이름이 춘은호[14톤]인데 설계를 직접 했어요. 위장막도 달고 뱃머리를 강철로 덧씌워 도망가는 밀수선을 들이받기도 했죠. 250마력 쌍발 엔진에 웬만하면 다 잡았어요 밀수꾼들은 내 감시선을 ‘해상 탱크’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감시선을 보며 느낀 실망감은 공무원 생활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절망으로 변해갔다. 애당초 감시선을 타고 출항하는 순간을 관복을 벗는 날로 계획했지만 일본이 남긴 구태에 빠져 있는 직장 상사들과 무기력한 밀수 대책을 현장에서 접하면서 그의 계획은 다소 수정되었다. 2년만 계획을 유보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길러줬던 이 땅과 이 나라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제사나 명절이 돌아와도 벌초의 손길이 닿지 않을 부모님 산소 걱정이었다. 결심이 굳어지자 그의 눈에는 세관 업무의 어두운 면이 속속 들어왔다. 다름 아닌 밀수 세력과 결탁한 세관원들이 알게 모르게 이들의 뒷배를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관세직 공무원 1기 전원이 참여한 자격시험 결과 남현우는 상위 10명에 들게 되었다. 원하는 업무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에게 열린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상위권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있던 그가 선택한 곳은 감시과였다. 밀수꾼들의 심문을 맡은 심리과와 함께 웬만한 세관 공무원은 피하고 싶어 하는 부서였다. 선상 근무와 야근으로 지새우는 날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미루어둔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을 단축시킬 수 있는 길은 가시적인 성과를 빨리 올린 다음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바다로 가야 했고 실적을 올려야 했다. 군인들의 비호를 받던 경찰이나 정치인, 심지어 폭력배의 지원을 등에 업고라도 일단 증거만 확보되면 그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에게 대한민국은 법치 국가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그의 의도를 감지한 몇몇 상관들은 그를 의심의 눈으로, 때로는 탐탁치 않은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적발 실적이 늘어가자 남현우는 본의 아니게 밀수 세력과 얽혀 있던 모 상관의 눈에 요주의 인물 1호로 지목되었다. 그가 영문도 모른 채 부산항 감시 업무에서 배제된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날이 잠복 끝에 자갈치 일대로 밀반입된 밀수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사무실로 복귀하던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갈치의 인간 땔감, 숨은 그림을 찾다]

지금이야 자갈치의 터줏대감은 싱싱한 연근해 생선들이지만 당시에 자갈 마당을 주름잡은 것은 장작으로 쓰던 소나무 땔감이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자갈밭에 쌓여 있는 것은 솔가지와 솔방울만이 아니었다. 당시 밀수라는 말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었다. 전쟁으로 거의 모든 생산 시설이 파괴된 남한에서는 그 부족분을 일본에서 들여오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게다가 40년의 식민지 시절을 겪으면서 한일 간의 국경 개념은 희미해졌고 더군다나 역사적으로도 일본과의 문물 교류가 활발한 부산에서 밀수는 필요악으로 어느 정도 묵인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대마도를 경유한 밀수선이 거리낌 없이 연안 부두를 통과하거나 소형 어선들이 너무나 태연히 밀수선에 실린 밀수품을 자갈치 부두에 부려놓는 지경이었다. 그러다 법체계가 서고 단속이 심해지면서 점차 밀수가 범법 행위라는 인식들이 생기면서 밀수품은 은닉할 장소를 찾아야만 하는 장물이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장소가 바로 부산세관이 저 멀리 보이는 자갈치 바닷가였다.

그 시절 자갈 마당에서 벌어진 황당한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새벽에 밀수품을 자갈 마당에 부리면 약속이나 한 듯 한 무리의 나무꾼들이 장작에 지고 온 땔감으로 그 주위에 담을 두르고 지붕을 올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곳곳에 땔감들이 팔리기를 기다리는 풍경이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땔감들의 주인들은 한저녁이 되어가도록 애써 팔려는 기색이 없다. 그런데 그런 땔감들이 새벽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땔감들은 밀수품의 임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땔감들 중에는 밀수품이 아닌 사람을 품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자갈치에서 벌어지는 밀수 행위를 단속하기 위해 24시간 꼼짝없이 몸을 파묻고 있는 세관 직원들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쥐가 난 팔다리를 펴지 못하고,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숨죽이면서 이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직원들의 인내의 시간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빛을 보게 된다. 밀수품의 거래가 성사됐는지 지프차와 달구지가 모여들기 시작하고 화주인 듯한 자와 운반책, 밀수품의 새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현장 적발을 피한 밀수품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밀수품 가득 실은 힘 좋고 날쌘 지프차가 세관 직원을 조롱하듯이 복잡한 재래시장 뒷골목이나 달동네 비탈길을 활보하던 실정이었다. 부산 시내에는 개조된 미군 지프차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일일이 검문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단서는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직원의 푸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데 요금은 택시마다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당시만 해도 택시 기사들이 기계식 미터계를 더 돌리기 위해 뒷바퀴의 바람을 빼거나 작은 사이즈의 타이어로 교체하는 편법을 부린 것이다. 순간 번쩍 무언가 머리를 때리는 느낌, 무거운 밀수품을 가득 실은 차량이 표 나지 않고 시내를 활보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법했다. 그날부터 광복동 대로변에서 잠복 아닌 잠복이 시작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숨은그림찾기라고나 할까. 외견상 드러나는 지프차의 특징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하나 적발의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용의자들의 거주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5만 분의 1 지도를 펴고 용의자의 거주지와 해안가로 연결되는 도로를 표시한 다음 본격적인 잠복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갈고 닦은 숨은그림찾기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밀수품을 가득 실은 지프차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일명 ‘쇼바’라고 부르는 완충 철제빔을 두 개씩 더 달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운행 경로와 용의자의 거주지를 지도상에서 연결시켜 보면 단속은 백발백중의 확률을 자랑했다. 당시를 추억하는 후배들은 과학 수사의 원조라고 추겨 세우지만 남 전 세관장은 그건 요즘말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었던 단순 무식한 수사 방법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며 허탈해 한다.

[특공대 밀수와 조우하다]

자갈치에서의 공공연한 암거래가 번번이 무산되자 거기에서 큰 손해를 본 밀수계의 큰손들이 공무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날도 연안 부두 감시 임무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남현우의 책상 위에는 해운대 출장 명령서가 올려져 있었다. 말이 출장이지 기약할 수 없는 잠복근무였는데 그 장소가 해운대 일대였다. 지금이야 매축으로 바닷가 대부분이 원래 모습을 잃었지만 당시만 해도 급경사와 암초로 밀수선의 접안이 거의 불가능한 곳이 해운대 바닷가였다. 그런 곳에 무기한 잠복근무를 지시한 모 과장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잠복은 날을 꼬박 세우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10월이라고는 하지만 바람막이 하나 없는 해운대 절벽 위에서 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잠복근무는 견디기 힘들었다. 무덤 사이에 엎드린 남현우와 두 명의 수사관은 전날 밤부터 교대로 간간이 눈을 붙이긴 했지만 모두 추위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애애앵’ 통금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멈추자 공동묘지에 엎드려 있던 수사관들은 홍콩 영화의 ‘강시’처럼 바닥에서 튀어 올라 허겁지겁 담배를 빼물거나 마땅한 용변 장소를 찾아 황급히 흩어졌다. 담배를 피우지 않던 남 과장이 절벽 쪽에 자리를 잡고 긴장을 끈을 놓으려는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일렁이는 파도가 멈추는 해안가, 그것도 돌투성이 가운데서 삐죽이 머리를 내미는 뱃머리였다. 포구도 아닌 벼랑가 바위에서 출항하는 20톤급 어선이라.

머릿속은 하얗게 됐지만 몸은 이미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동료들 역시 눈치를 채고 그를 따라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십 미터를 헤엄쳐 목선에 기어올랐다. 머리 앞쪽으로 수건을 질끈 동여 맨 선원들은 분명 한국인이 아니었다. 당황해하는 일본인 선장에 비해 두 명의 운반책은 처음 겪은 일이 아닌 듯 의외로 침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창에는 고급 직물 양단이 가득했다. 그믐밤을 노려 일본에서 싣고 온 밀수품을 한국 조직에 인도하려 했지만 웬일인지 육상 접선책이 보이지 않아 우왕자왕 하던 중에 이곳까지 떠내려 온 배가 암초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물이 들어오는 만조를 기다려 다시 뱃머리를 돌려 바닷가를 벗어나려는 그 찰나의 순간 하필이면 남현우 일행과 조우한 것이었다. 1957년 10월 22일 일본 이즈하라[嚴原町]를 출발한 한 척의 특공대 밀수선이 세관에 적발된 순간이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대마도 이즈하라 항을 모항으로 우리나라 부산, 마산, 통영, 여수 일대를 오가며 이루어진 조직적인 밀수를 소위 ‘해상 특공대 밀수’ 줄여서 ‘특공대 밀수’라 한다. 당시 이즈하라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밀수 왕이 은거하는 거점으로, 대마도 지방 정부는 ‘변칙 무역’이란 형태로 암암리에 이들의 밀수를 묵인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의 배에는 일본의 세관·해운국·검역소 등의 용지와 공인(公印) 등을 비치해 놓고 자유자재로 선원 수첩, 선박 증서, 출입항 관계 서류 등이 버젓이 비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10톤 남짓의 낮은 선체를 가진 이들의 밀수선인 특공선은 소형 목선으로 탱크에서 나온 엔진이나 그레이마린[GM] 엔진을 설치, 30노트 이상을 달렸다. 서글픈 이야기지만 10노트 정도인 세관 감시선이 밀수선을 포획하려면 밀수선 엔진이 과열되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보니 당시만 해도 부유식 목재 갑판이 설치된 부산항에는 이 작은 밀수선들이 종횡무진 그 밑을 돌아다니고 덩치 큰 감시선은 발만 동동 구르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부산항뿐만 아니라 영도는 밀수 특공대가 가장 빈번히 출몰하는 요주의 거점이었다. 동삼동 해안가에 출몰한 특공선을 쫒기 위해 감시선이 영도로 출동할 때 이미 이들의 배는 아치섬을 돌아 물거품만 남기고 있었다. 혹여나 추적망에 걸린 밀수선에서 던진 수십 가닥 로프가 감시선의 스크루를 정지시켰고 심지어 다이너마이트가 날아오기도 했다. 세관원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감시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녹두나 팥을 장전한 엽총 사격뿐이었다.

[드라마 「야인 시대」, 실화 부산 시대]

1961년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공포 이후 특공대 밀수는 한차례 된서리를 맞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고 부산 시민들 역시 학용품, 직물 등 일상 잡화를 실어 나르는 특공선을 범죄시하지 않았다. 특공선이 들어온 영도 앞바다에 수십 대의 전마선(傳馬船)이 모여들고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감시선에서 위협사격이 가해지는 일은 하루걸러 볼 수 있는 진풍경 아닌 진풍경이었다.

하지만 특공대 밀수의 본질은 권력을 등에 업은 조직적 범죄였다. 우선 일본 정부가 이들 특공대 밀수를 ‘변칙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방관하고 심지어 조장하기까지 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1959년 2월경 부산세관의 심리과 직원이 원양 감시차 감시정에 승선하고 대마도 근해에 이르자 일본의 해상보안청 경비선 9척이 원양 감시를 방해하기 위하여 감시선을 포위하는 등 위협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일본 해상보안청의 밀수 비호 행위는 노골적이었다. 1960년 1월 초 밀수 소굴인 부산항 앞 아치섬에서 밀수품 2,000여 만 원 상당을 적발 압수 중이던 부산세관의 심리과 직원들이 폭행을 당하는가 하면, 같은 해 2월경에는 원양 감시 중이던 부산세관 직원 2명을 대마도 해상보안청경비정이 나포해 해상 강도 밀입국의 누명을 씌워 1개월 동안 억류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특공대 밀수를 비호한 것은 힘깨나 쓰던 주먹 패에서 권력 기관이나 헌병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타노모시 오야’로 불리던 계주들이 곗돈을 불리던 가장 확실한 투자처로 삼은 것도 밀수품 거래였다. 5·16 쿠데타 직후 열린 군사 재판에서 특공대 밀수의 대부 한필국이 사형을 당하자 ‘죽을 놈은 죽지 않았다’고 공분하던 당시 여론이 겨냥한 것은 바로 무능한 국가 권력과 부정부패를 일삼던 권력 기관, 정치인 그리고 고위 공무원이었다.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정권은 부산역 광장에서 밀수품 소각 행사를 펼치고 250명에 달하는 밀수꾼을 잡아들였다. 하지만 민정 이양을 선언한 1963년 12월 16일 이들을 가두었던 부산교도소 문은 다시 활짝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해인 1965년 6월 6일 현충일 새벽 4시 30분. 부산항 해군 정보기관의 전용 부두 인근[현재 중구 중앙동 수미르 공원] 도로에서 수상한 짐 꾸러미를 옮기던 청년을 검문하던 영도경찰서 소속 순경이 폭행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다음날 신문지상에 당시 트럭이 세워진 도로변에 있던 월광 카바레를 내세워 ‘월광 카바레 앞 밀수 사건’으로 대서특필된다. 수사 결과 일본산 주름치마 등 당시 시가 500만 원 상당의 물건 주인은 대사면으로 풀려난 왕년의 밀수꾼 한 모 씨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밀수 깡패는 자신의 부하들을 양륙책, 현역 군인을 운반책, 전·현직 경찰을 보관책으로 하고 조직 결성에 권력 기관을 개입시켜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당일 운반책으로 나섰던 운전사 3명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권력 기관의 요원이었다.

어둠이 밤과 낮을 지배하던 시절 벌어졌던 드라마 같은 활극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밀수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특별 지시로 대검찰청 검사를 반장으로 하는 전국 22개 처에 군·경·검찰·세관 수사관으로 편성된 합동 수사반이 꾸려졌다. 대통령 자필 신임장 덕분인지 힘을 얻은 수사반이 해군 함정까지 동원해 특공선을 침몰시키면서 밀수 만연 풍조의 위세는 한풀 꺾이게 되었지만 본의 아니게 상호를 도용당한 월광 카바레는 연일 만원사례를 이루는 진풍경이 벌어졌다는 후문.

[남해안 호랑이의 날개, 밀수 감시선단]

남현우 전 세관장이 남해안 호랑이로 불리게 된 것은 1957년 마산세관 수사계장으로 재직하던 때였다. 워낙 복마전 같은 정보들로 얽힌 세관 수사에서 그가 의지하는 것은 그의 직감과 추리력이었다. 하지만 독불장군 같은 수사 방식은 때로는 주변의 오해와 질투를 받기도 했다. 여러 차례 상관의 오해를 받아 좌천 아닌 좌천을 거치면서 남해안 곳곳의 세관을 섭렵한 그는 애초의 계획과 달리 해상 밀수 수사에 일가견을 가진 베테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특공대 밀수가 종식된 1970대에 들어서도 밀수는 사회 5대악으로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이 해 8월 발족한 관세청 출범의 가장 큰 배경은 바로 밀수였던 만큼 이전과는 다른 고강도의 밀수 단속이 실시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해안 밀수감시선단으로 본부장에 충무출장소장을 임명하고, 부산세관, 여수세관, 묵호세관, 울산세관 소속의 감시선 9척을 본부 선단으로 27척의 감시선을 예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초대 본부장 남현우의 두 어깨는 절로 무거워졌다. 굳이 비교하자면 조선 시대 삼도 수군통제사 정도의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 하지만 한 달에 20여 일을 바다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달픔, 그리고 안개가 끼거나 파도가 있는 날 심지어 태풍이 부는 날을 노리는 밀수선을 적발하기 위한 감시선단원의 삶은 말 그대로 태풍의 눈 속 같은 피 말리는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어디 징용으로 끌려간 것도 아닌데 남편 얼굴, 아빠 얼굴 보기가 전방 군부대 면회하기보다 어려웠으니 말이다.

한번은 태풍이 몹시 불던 날 선박들이 피항할 만한 곳에 미리 잠복하고 있는데 마침 배 한 척이 감시선인 줄 모르고 접안하면서 도와달라며 밧줄을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줄을 잡아주고 선실 문을 여는 순간 화장품 내가 진하게 풍겨왔다. 자수인지 적발인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아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야간 항해 중 정치망 어장에 스크루가 걸려 밤을 샌 것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 휴식 시간이었지만 잠복근무 중 해군 함정에게 간첩선으로 오인 받아 순직할 뻔했던 적은 누구를 탓하기도,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는 업무상 고충이었다.

이런 노력에도 남해안의 밀수는 단절되지 않았다. 그래서 1979년 2차로 거제세관[장승포출장소]에 남해안 밀수감시선단을 확대 재편하였다. 이전의 단속이 적발에 주력했다면 2차 선단은 밀수 방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일 활어선이 일본을 떠나는 순간부터 일본 해상보안청의 협조를 받아 수하물 목록을 전달받고 귀국 시 항로도 출항지에서 입항지로 직행하도록 규제해 불법 행위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선원들은 월급이란 게 없었다. 선주나 물주는 출항하는 배에 값싼 활어나 어패류 등을 싣고 출항시키고는 일본에서 고가의 물품을 밀수하도록 종용해 그 차액의 일부를 급여 명목으로 지급했다. 큰돈보다 식솔들 생계가 걸린 이상 밀수 선원들도 감시선단원 만큼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거제세관 시절 천양호 사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1974년 태풍 주의보를 무릅쓰고 일본을 출발한 천양호가 우리 세관 레이더에서 사라진 것이다. 당시는 밀수를 ‘변칙 무역’이라며 옹호하던 일본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고 대일 활어선의 선적 화물을 통보해 주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선박 엔진 15개를 싣고 목포로 향하던 배가 본청과 거제세관의 무선을 도청했는지 항로를 이탈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감시선을 이끌고 목포항에 도착했지만 역시나 천양호 어창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밀수꾼들 표현대로 ‘설사[밀수품을 수중 투하한 후 입항 신고가 끝나면 건져내는 수법]’가 끝난 다음이었다.

그런데 태풍의 영향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뱃전 뒤 기관실 기름 탱크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청진기를 통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선원들이 격벽이나 빈 공간에 밀수품을 은닉하기 시작하면서 혹여나 해서 감시선에 비치한 청진기가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탱크 속에는 시계와 전기면도기 2,000개가 들어 있었다. 이런 것을 과잉 친절이라고 해야 될지, 일본의 판매 업체가 스위치만 켜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면도기에 건전지를 끼운 채 선원들에게 넘긴 것이다. 바로 그 면도기들 중 몇 개가 태풍 치는 바다를 건너오는 도중 서로 부딪쳐 작동된 것이었다.

1억 원대에 밀수품을 목포세관에 인계했지만 여전히 엔진의 행방의 묘연했다. 어창 바닥에 묻은 엔진 오일이나 운반용 크레인이 장착된 것을 보면 무거운 엔진도 충분히 싣고 내릴 수 있는 배였다. 문제는 과거 전력이 화려한 선원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난감한 순간 압수한 선원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과정에서 선원 대부분이 전라남도 여천군 추도 출신이었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감시선을 추도 앞바다로 몰아 자그마한 목선을 띄웠다. 영문을 모르는 직원들은 헛기침만 해댔지만 확신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지개 빛깔이 이보다 선명할까 방울방울지어 떠오르는 기름띠가 우리 배 쪽으로 흘려오는 것이 아닌가. 뻘과 모래가 대부분인 전라도 앞바다에서 신기하게도 추도 인근 바다는 자갈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해도를 통해 미리 확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주일가량 잠수부들이 수색하면서 엔진 15대를 모두 찾아냈고 예기치 않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인양 작업 가운데 추도를 둘러보던 중 해안가에서 산중턱으로 이어지는 의심스러운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 끝나는 곳에는 TV 등 가전제품을 품고 있는 동굴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밀수품 적발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온 마을이 범죄에 연루되어 수많은 가장들이 법의 제재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산, 통영으로 밀수가 어렵게 되자 여수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해안에서 밀수가 성행하기도 했다. 밀수의 명분도 다행해졌다. 특히 합법을 가장한 경우도 빈번해졌다. 한번은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TV 수십 대가 일본을 건너온 것을 의심 화물로 적발하자 원성과 비난이 들끓기도 했다. 인도적 목적의 원조 물자까지도 걸고넘어진다는 내부의 비아냥거림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만 해도 소록도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뒷주머니에 들어갈 검은 돈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와 사라진 실탄 40발]

1984년 5월 부산본부세관 근무 시절 모 공안 기관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수영세관으로 급히 와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달려간 곳에는 부산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온 소위 ‘검정 양복’들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오직 그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기서 전해들은 말은 수영세관을 통해 통관된 사격용 실탄 한 박스가 분실되었는데 비록 군용은 아니지만 인마 살상이 가능한 44구경 탄이었다. 사흘 뒤 인근 수영 비행장에는 한국을 방문 중인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와 미사를 보기 위해 30만 신자가 운집하기로 되어 있었다.

10년 전 광복절 기념식 단상에서 육영수 여사가 저격된 장면과 3년 전 생중계된 현 교황 성하의 저격 장면이 오버랩 되기 시작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실탄 40발, 바로 세관 직원들을 모두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 도난 사건 이후 퇴근하지 못한 직원 10명이 남 과장 앞에 일렬로 도열했다. 같은 세관은 아니지만 동료들을 심문한다는 것은 서로가 무척 불편한 일이었다. 그것도 아무런 단서도 없이 불러 모았으니 얼굴들에 불편한 심기들이 절로 묻어났다. 그 순간 남 과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돌아서는 한 직원의 신발 밑창이었다. 조용히 그 직원만 따로 불러 세운 남 과장의 질문은 아주 간단하고도 확신에 차 있었다. “왜 그렇지?” 순간 직원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지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남 과장이 본 것은 신발 밑창에 묻은 재 가루였다. 그 직원은 얼마 전 상사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후 앙갚음할 기회를 찾고 있다가 마침 교황의 부산 방문 며칠 전에 실탄을 훔쳐 그 상사를 골탕 먹이려 했던 것이다. 실탄은 감추기 쉬웠지만 박스는 부피가 있어 불에 태웠던 것이다. 그 직원이 일선 현장에 근무하던 수사관이었다면 아마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남현우 옹은 회고한다.

밀수범의 검거는 증거 확보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물증으로 밀수품만큼 확실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한 일이 결코 아니다. 부산을 드나드는 수많은 선박 가운데 밀수 근거지 대마도를 출입한 배를 꼭 집어내는 일은 말 그대로 백사장에서 모래 찾기보다 어려웠다. 밀수품 은닉 방법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교묘해져갔다. 특공대 밀수가 사라진 자리를 메운 것은 평범한 고기잡이배들과 그 선원들의 밀수였다.

당시 선원 밀수 수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특정 물품의 가격을 정해 구해 오도록 하는 선금제, 이익을 같이 나누는 공동 분배제, 단순히 운반비만 주는 운반 도급제 등이 그것인데 성공하면 10배 이상의 이익이 보장됐기 때문에 선원이면 누구나 눈독을 들였다. 일반 선원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치열한 심리전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밀수꾼들의 기선을 제압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밀수꾼 탐색은 용의자가 취조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남 수사관이 유독 신경 써서 살펴보는 것은 신발과 시계다. 피칭이 심한 소형 선박의 선원들은 그 힘을 견디기 위해 신발의 양쪽 끝이 먼저 닳는 반면에 아래위로 흔들리는 중형 선박의 선원들은 무의식으로 발뒤꿈치에 온 힘을 싣기 때문에 닳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용의자의 활동 무대가 어느 정도 가려진 다음 용의자와 일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진다. 날씨 이야기, 정치 이야기, 일 이야기. 그러다 남 과장은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평범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아 근데 지금 몇 시나 됐지, 출출하네?” 위압적인 심문 없이 계속된 대화에 용의자는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의 시계를 들여다본다. “그러네요. 지금 몇 시가 넘었네요.” 당시만 해도 서머 타임을 적용하던 일본과 우리의 시차는 1시간 30분 정도. 아차 싶은 용의자의 분한 듯 당황한 듯 묘한 눈빛과 이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얼굴빛.

사실 지금이야 매물도나 지심도에 설치된 세관 레이더로 선박의 항적을 빠짐없이 추적할 수 있지만 마음먹고 출항지와 향해 일지 등을 조작하던 당시로는 상당히 치명적인 수사 기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심리적으로 위축된 용의자 입에서는 고해성사 같은 자백이 술술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대우조선의 골리앗 크레인도 밀수품이다?]

1981년 7월 30자 일간지 국제면에는 백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려진 세기의 결혼식 장면이 소개되었다. 거기에는 평민 출신으로 영국 황태자비가 된 다이애나와 신부보다 더 쑥스러운 표정을 한 찰스 황태자의 사진이 실렸다. 그리고 그 옆 경제면에는 세기의 결혼을 다룬 기사에 비해 초라할 정도의 분량이지만, 그 또한 세계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는 기사가 실렸다. 대우 옥포조선소가 세계 최대 크레인을 설치 완료했다는 기사였다. 『구약 성경』의 거인 골리앗의 이름을 빌려온 이 크레인은 높이 104m, 폭 206m로, 7.5톤 트럭 125대를 동시에 90m 높이까지 들어 올리는 조선소의 핵심 시설이다. 한때 이 세상의 미혼 여성들에게 신데렐라의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떠난 황태자비 다이애나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세계를 누비던 샐러리맨 출신의 한 회장님은 지금 우리 곁에 없지만, 골리앗 크레인은 1980년대 경제 성장과 노동 운동의 상징으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충무세관으로 근무지를 옮긴 남현우의 눈에 이 골리앗 크레인이 말 그대로 딱 걸린 것이다. 처음 남현우의 눈에 하루하루 높이를 더해 가는 크레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하루 일과 중 재밌는 소일거리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남현우의 머릿속에 드는 의문은 이러했다. 저 정도 크레인은 아직 우리 기술로 만들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서독에서 기술자를 불러와 2년째 조립중이다? 그럼 저 커다란 철 구조물은 어디서 가져온 걸까? 그저 단순한 직업적 호기심을 그냥 넘기는 성격이 아닌 남현우 세관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조선소 홍 이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런데 인사도 건네기 전 수화기 너머 홍 이사의 입에서 의외의 질문이 나온 것이다 “그것 때문이지요? 제가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된 홍 이사가 실토한 사정은 이러했다. 당시 세계 최대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서는 지름 200m가 넘는 대들보를 장착한 크레인이 필요한데 그 하나의 무게만도 1,600톤에 달한다는 것이다. 자연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지탱해 줄 갤리우스프레임이란 지지대가 필요한데 아무나 아무 곳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전긍긍 속병만 깊어지던 때 해결책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NASA[미국항공우주국]가 중계하던 우주 왕복선 발사 장면을 보던 회장님이 한마디 하셨기 때문이다. “저거 한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데…….” 지시 아닌 지시를 하달 받은 담당자들이 NASA와 협상한 결과 재활용이 불가능한 물건이므로 고철 비용만 받고 넘겨받기로 계약을 하였다. 그것도 톤당 5달러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에. 아무리 고철이라고 해도 이름도 어려운 갤리우스프레임을 설치하는 데만 150억 원이 들었으니 그 재료의 가치는 최소 설치비보다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고철 값에 사서 들여온 물건이지만 대우조선 관계자들도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본의 아니게 지인을 취조하게 된 남 세관장 역시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는 직업적 호기심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껌 좀 씹던 그 남자, 검사 울린 그 여자]

1990년 40년 수사 현장에서 물러난 남현우 옹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다. 그리고 어린 시절 만석꾼 집 외손자로 자라서인지 말투와 자세에서 묻어나는 자존심도 상당해 보인다. 아마 탁월한 직관력과 함께 그의 자존심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그의 수사 방식을 완숙시킨 한 부분이리라. 때는 1966년 5월 17일 부산지검 관세 담당 검사실. 수사 지휘를 받기 위해 검사실에 들어갔던 남 계장에게 엉뚱하게도 OTSA 관련한 재수사 지시가 떨어졌다. OTSA는 흔히 ‘사카린’이라고 불리는 감미료의 원료로 누가 봐도 건설 자재와 무관한 물품이었다. 하지만 실재 사카린을 수입한 당사자는 당시에도 힘깨나 쓰던 재벌 회사인 삼성이었다. 수사 협조차 담당자들을 소환했으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어렵게 세관으로 모셔온 상무님들은 소환장을 발부한 남 계장이 아닌 세관장에게 달려가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현장 조사를 위해 울산에 도착해서 야적장으로 향하는 차편을 부탁했지만 이 또한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겨우겨우 자전거 한 대를 얻어 타고 도착한 야적장의 면적은 무려 92만 5,620㎡[28만 평]. 밀수품을 아무 곳에나 풀어놓아도 찾을 수 없는 막막한 상황, 하지만 남현우의 남다른 오기는 다시 시동을 걸고 있었다.

수입 원장과 물품 목록을 대조한 결과 방문 손잡이, 표백제, 전화기, 수세식 변기, 욕조 등 1만 가지 물품이 정당한 관세를 치루지 않고 들여온 밀수품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품고 다시 야적장으로 향하는 남 계장이 가슴에 품은 비장의 무기 그것은 다름 아닌 껌 10통이었다. 실제 적발 물품에서 수입 원장에 적힌 생산지와 생산 연도를 확인할 수 없으면 국내에서 재구매한 것이라고 발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 계장이 주목한 것은 일제 변기였다. 턱이 얼얼해지도록 씹어 손바닥만 해진 껌을 변기 안쪽 공간으로 손을 비집고 들이밀어 붙이자 붕어빵처럼 찍혀 나오는 당해 생산 연도와 제조 일자. 일명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그리고 이어지는 ‘국회 똥물 투척 사건’ 등 대한민국을 뒤흔든 희대의 재벌 밀수 사건, 그 서막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업무상 세관 수사관들이 정보 교류도 많지만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검찰청 사람들이다. 현직에 있던 시절 남 전 세관장에 강한 인상을 준 사람은 부산지검 이 모 검사로, 투철한 직업의식과 탁월한 수사 능력 그리고 시원시원한 일처리로 촉망받던 인재였다. 수사를 지휘하고 받는 관계였지만 자기 분야를 대표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모 검사의 부름을 받은 남 과장의 커피 잔 옆에 이 검사는 대수롭지 않게 감청용 녹음테이프 2통을 툭 던져놓는다. “그냥 한번 들어보시오.” 지나치듯 무심한 한마디였지만 며칠 밤 녹음기와 사투를 치른 얼굴빛이 역력하다.

사무실로 돌아와 돌려본 테이프에는 국제 전화인지 감도가 좋지 않은 전화선 넘어 두 남자의 뜻 모를 선문답이 오가고 있다. “그 여자 나이가 지난달에 몇 살이었고 이번 달에는 몇 살이라던데.” 그리고 들려오는 대답 “그리고 그 남자가 어제 두 살 더 줄었어요. 그렇게 아시고 가게 문 여세요.” 나이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그 여자와 그 남자, 열혈 이 검사를 울린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의 상징,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었다[만약 달러와 엔화라면 지폐 크기에 빗대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부른다]. 두 사람은 모두 달러화와 파운드화의 초상 인물이고 이들의 나이는 일명 ‘큰손’이라 불리는 도매상의 매집 가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명 ‘나카마 데도리[중간 수취]’라 불리는 이 방식은 ‘달러 아줌마’가 사들인 100달러를 기준으로 1살이면 어제 가격에서 100원 더 쳐 주고 사들인다는 뜻이었다. 암달러 거래는 실명도 밝히지 않고 조직원끼리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수사 자체가 어렵다고 하는데 남 전 세관장은 그때도 지독히 운이 좋았다고 한다. 그가 가진 취미 생활 가운데 하나가 화폐 수집이었기에 남들이 보지 못했던 그 여자, 그 남자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현우 옹은 말한다. “밀수를 하는 것도 사람이고 잡는 것도 사람이다.” 악연이던 우연이던 우리는 사람을 통해 더 큰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전쟁과 이데올로기와의 악연과 밀항 결심 그러나 평소 여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할아버지 덕에 우연히 가볼 수 있었던 서해안 마지막 섬 덕적도, 살아보지 않고서야 한번 밟아보지 않고서야 누가 그 이름을 그 의미를 알 수나 있을까. 놀랍게도 이 섬은 제1회 관세직 공채 논술 문제로 출제되어 청년 남현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게 되었다.

금주, 금색(禁色), 압력 배재, 보상금의 철저 분배 등을 생활신조로 삼아 수많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당신과 달리 가족들, 특히 아내의 마음고생, 몸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앙심을 품은 밀수꾼이 집으로 찾아와 혼자 있던 아내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다. 그 후로 파출소 옆으로만 이사를 다녔다는 남현우 옹은 40년 수사관으로 얼마나 많은 실적을 올렸냐는 질문에 빠져나간 밀수꾼이 더 많다고 껄껄 웃으신다.

국경과 바다가 있고 거기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인간의 욕심이 있는 한 밀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박보다 쪽박 차는 일이 다반사였던 밀수꾼의 말로를 보며 “적발은 하책이고 예방이 상책”이라는 그의 말이 귀에 맴돈다. 그래도 혹여 명심하시라 뛰는 밀수꾼 위에 나는 수사관이 있다는 것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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