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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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市立交響樂團員-生活 |
영어의미역 | The life of the Busan Philharmonic Orchestra members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76번길 1[대연동 848-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지아 |
[외로움을 달래 준 한줄기 빛, 음악]
부산시립교향악단 비올라 단원 김상철씨는 큰 키에 활짝 웃는 모습이 멋진 청년이다. 밝은 목소리와 친절한 행동에서 그늘진 곳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김상철씨를 본 사람이라면 그가 흔하지 않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제가 부산시립교향악단 단원이긴 하지만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일반적인 삶이 아닐지도 몰라요.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일반적으로 자란 환경과 다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철씨는 소년의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생활했다. 소년의 집이라는 보육 시설 안에 학교가 있는데, 서울에는 초등학교가 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부산에 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부산으로 내려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설을 나가는 시스템이다.
소년의 집은 1969년에 마리아수녀회와 알로이시오 슈왈츠 신부가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세운 시설이다. 1979년에 미사 시간을 지루해 하는 아이들을 위해 반주를 목적으로 하는 현악 합주단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소년의 집 관현악단의 시작이다. 상철씨는 소년의 집에서 관현악단 활동을 하며 악기를 배워 전공자의 길까지 걷게 되었다.
초등학생이던 그에게 합주부는 너무나 멋져 보였다. 미사 시간에 현악 앙상블이 반주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악기 연주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으로 내려와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 그에게 마침 합주부를 뽑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악기를 연주해 보고 싶었던 그는 바로 손을 들어 합주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특별히 악기에 대해 감흥이 있다거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 안에서 뭔가를 해 보고 싶다, 오케스트라를 해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상철씨의 합주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삶의 외로움을 달래 준 한줄기 빛이 음악이었어요.”
상철씨가 비올라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 자리가 비어서였다. 합주부 신청자를 받으면 체격 조건 등을 봐서 선배들이 악기를 정해 줬다. 악기마다 체격 조건이 조금은 맞아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린은 작은 악기라 그나마 작은 손도 가능하지만, 비올라는 바이올린에 비해 악기가 무거워서 손이 크고 덩치가 있는 사람이 연주하기가 더 편하다고 한다. 그의 손은 첼로와 바이올린의 중간 영역을 담당하는 비올라에 적당하게 크고 길었다.
일반적으로 음악을 시작하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떤 악기가 하고 싶어서 그 악기를 배우는 것이 먼저였지만, 상철씨는 일단 합주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지원을 했고, 선배들이 정해 주는 악기를 연주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금처럼 음악을 업으로 하게 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상철씨는 악기 잡는 법, 활 쓰는 법부터 음정을 하나씩 맞춰 내는 아주 기초적인 부분들을 합주부 생활 속에서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음악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그의 생활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학교 수업이 마치는 오후 4시부터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교실에 남아서 공연대를 깔고 연습을 했다. 저녁밥을 먹으면 오후 7시부터 자기 전인 오후 9시 30분까지 또다시 학교에 와서 연습을 했다. 학과 수업 이외에는 대부분 합주부 연습과 공연의 연속이었다. 선배들에게 야단맞는 시간이 연습하는 시간보다 많을 정도로 내부 지도가 엄격했지만, 전학을 하지 않는 이상 합주부를 그만둘 수 없어 계속했다며 그는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커 온 친구들과 같은 시간표에 맞춰 함께 생활해서인지 질풍노도의 시기일 법도 한 사춘기 시절이 되려 그에게는 순하고 순수하게 기억된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출이 거의 없는 생활 속에서 시설 안에 모여 공부하고 연습만 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쁜 것도 덜 접한 것 같다고 한다. 당시에는 연습과 공부만 반복하는 일상생활이 많이도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이 잘 자랄 수 있었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철씨는 성취감이나 자존감, 이런 것들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연주회를 하면서 겪는 다양한 과정과 결과를 통해 스스로가 많이 자랄 수 있었다. 합주부 생활을 하며 겪은 다양한 경험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그가 좀 더 씩씩하게 어려운 일들도 결국은 해낼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학창 시절 상철씨는 운동을 참 많이 했다고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견딜 수 있는 그만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공부, 연습, 그 외에 남는 시간에는 농구공 하나를 들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거의 매일 이 세 가지를 계속 반복했다고 한다. 지난 시간을 생각해 보면 이만한 명문 사립 고등학교가 없었다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쁜 경험 하나 없이 어릴 적부터 오케스트라 활동까지 지원해 준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오케스트라의 중요함을 잘 몰랐지만, 같이 연주할 수 있는 앙상블에서는 일반인들에 비해 탁월할 수 있었던 것도 새삼 고마운 일이다.
상철씨가 음악을 업으로 계속 하게 될 줄 몰랐다는 건 사실 너무 힘들어서 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어서 들어갔지만 그저 연습을 버텨 낸 것일 뿐, 배우고 연주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을 나가는 것이 공식 절차인 그곳에서 남학생들은 기계 공고로, 여학생들은 전자 공고로 진학을 한다. 방과 후 악기를 매만지는 그들이지만, 전자 기계 고등학교 재학생들이다 보니 학교에서는 컴퓨터와 각종 기계를 만진다. 그들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고, 소년의 집을 떠나면 스스로 ‘가장’이 되어야 하므로 자격증을 따고 기술을 익히는 것은 생계 수단이었다.
소년의 집 기계공고 로 진학을 하고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했던 상철씨에게 처음 찾아온 위기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였다. 자격증을 따고 그 자격증으로 회사에 취직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소년의 집을 나가게 된다. 학교 성적이 상위권에 있는 학생은 추천을 받아 대기업에서 오는 취업 원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상철씨가 학교에 다니던 때에는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에서 생각보다 많은 원서가 왔다. 상철씨는 그 원서를 받아 대기업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학창 시절을 보내며 딸 수 있는 자격증은 모두 다 준비했다. 이제 취업만 하면 되도록 준비를 마쳤을 때 IMF 위기가 온 것이었다.
“고3이 됐을 때 IMF가 터진 거예요. 대기업 원서는 끊기고 현장에 취업 나갔던 친구는 프레스에 손가락이 두 개 잘렸어요. 무서웠어요. 그래서 6월쯤 목표를 대학 진학으로 바꿨어요.”
대기업의 원서가 정말 하나도 오지 않았다. 취업문이 아예 얼어붙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취업을 나가야 하는 친구들은 3학년 1학기가 지나 모두 중소기업으로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항상 함께 농구 경기를 하던 친구 중 한 명이 중소기업에 먼저 실습을 하러 나갔다가 프레스에 손을 다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취업을 나갔던 친구들이 돌아와서 해 주는 이야기는 더 속상했다. 월급 60~70만 원을 받으며 12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면서 열악한 시설의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3학년 2학기부터 취업을 해서, 직장인이 되어서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상철씨는 합주부 활동 때문에 취업을 조금 늦게 나갈 생각이었는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점점 취업에 두려움이 생겼다. 사회에 나간다는 것이 겁나고 싫었다.
마침 그 즈음부터 한 학년에 한 명 꼴로 음대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전에는 특별 대우라 여겨지며 전혀 허용되지 않던 일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한 명씩은 지원해 주는 것으로 바뀐 것이었다. 상철씨는 음대 진학을 3학년 2학기에 결심하게 되었다.
오케스트라 생활이 전부였던 그에게 독주곡, 실내악 연주를 해야 하는 실기 시험과 준비하지 않았던 수능 시험은 쉽게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었다. 학업 성적은 좋았지만 수능 시험 준비는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라 그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근처 도서관에서 무작정 문제집을 가지고 수능을 준비했다. 실기 시험 준비는 입시 요강을 살펴보고 입시곡 CD를 사서 혼자 들으며 연습했다. 개인 레슨이라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연습은 그의 몫이었다. 6개월 동안 도서관을 숙소로 삼아 공부에 매달렸고, 손에 피멍이 들도록 연습에 몰두했다. 이제껏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악기를 연주해 왔을 뿐, 개인의 자격으로 솔로곡을 연주할 기회라곤 없었던 그가 생애 최초로 솔로 연주를 한 무대가 바로 대학 입시의 실기 시험장이었다.
정신없이 입시철을 보내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부산대학교 음대 합격증. 상철씨는 그렇게 소년의 집 원생 최초로 부산대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되었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상철씨의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대학 생활은 그에게 또 다른 좌절이었다. 등록금은 로터리클럽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집세와 생활비는 그가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좌절은 다른 데 있었다. 이전까지 자신과 같은 상황의 친구들과 동고동락해 온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크게 느끼지 못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대학에 들어가 대학교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지금껏 그가 알지 못했던 그와 타인과의 차이점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연주회가 끝나면 가족들이 찾아와 꽃다발을 주는 거예요. 그리고 모이면 다들 가족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동안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과 ‘나만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심하게 앓았습니다.”
처음으로 맞닥뜨린 상황에서 대학 생활을 잘해 나가기란 무척이나 힘들었다. 말투부터 다른 그를 쳐다보는 시선에 지레 열등감이 들기도 했다. 외로움을 지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세상 전체를 따돌리며 다른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화성악이나 음악사 등 학과 공부는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어 따라가기 힘들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실기밖에 없었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밤늦게까지 연습에 매진했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농구를 했다.
“연습을 하고 농구를 하며 다른 것에 몰두해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결국 외로움을 결코 떨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친구처럼 함께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가 쓰는 악기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사용하던 연습용이었다. 하나에 천만 원이 넘는 악기를 가진 동기들과는 소리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는 학교에 남아서 죽어라고 연습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첼로, 바이올린 등 쟁쟁한 악기들 틈에 중간 영역을 책임지는 튀지 않는 악기인 비올라를 연주했지만 그의 연습량은 속일 수 없었다. 1학년 첫 실기에서 상철씨는 학년 1등을 했다.
“나가 놀 돈이 있어 뭐가 있어.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도 한 2학년 지나고 나서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랑 친해지게 됐어요. 제가 먼저 그렇게 선을 그은 것뿐이었지요. 그러면서 또 인간관계도 배워 나가고…….”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연습하는 상철씨는 그와 비슷한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어느 순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선배들이 생겼고, 그렇게 차츰 그의 힘들었던 ‘늦은 사춘기’는 지나갈 수 있었다.
[‘시향 단원’의 꿈]
음악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봤을 솔리스트의 삶을 상철씨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음악을 전공하는 것 자체가 특별할 수 있는 그에게 현실적인 조건들은 쉽게 무시될 수 없었다.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재능이 빛을 발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뒷받침이 엄청나다. 상철씨가 생각하기에 재능과 재력, 그 외에 다양한 여건들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솔리스트로 살아갈 수 있다. 평생 음악을 하며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상철씨도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이미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 버린 그는 안정적인 음악가를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다른 시련이 찾아온 것은 졸업을 앞두고서였다.
그는 열심히 한 만큼 잘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자만했는지도 모른다며 그는 얼굴을 붉혔다. 부산에서 꽤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또래에 경쟁자가 많이 없다 보니 자신이 생겼다. 그렇게 그는 시립 교향악단의 단원이 되겠다고 결정을 했다.
처음부터 부산시립교향악단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산시향은 원래부터 모집 인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졸업을 해도 못 간다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들어가기가 힘든 곳이었다. 당시 갓 새로 생긴 지방 교향악단이 신생팀으로 몇 년이 지나면서 인원을 조금씩 모집하는 분위기였다. 평소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을 하며 합격이 거의 확실시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철씨는 졸업하면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에 그는 오디션을 보러 갔고, 실패를 경험했다. 다른 지역의 시향에 있던 선배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오디션에 상철씨는 그저 막연히 그냥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갔다. 결과는 보기 좋게 상철씨의 낙방. 당연히 될 것이라는 자만심이 오디션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했다. 첫 오디션에서 낙방하자 주변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생각에 절망하게 되었다.
“첫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거의 절망에 빠졌었어요. 제 소홀 때문에 주변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당장 생활을 이어 가야 했기 때문에 부산시향 단원이 안 됐다면 저는 음악을 접고 다른 일을 했을 겁니다.”
자신이 시향에 못 들어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상철씨는 충격이 꽤 컸다. 시향과 협연할 기회도 제법 있었던 그는 당연히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떨어지자 막상 할 일이 없었다. 졸업을 앞둔 2002년 12월, 그의 인생에서 엄청난 고민의 계절이 시작됐다. 무엇을 해야 할지. 단원을 모집하는 곳도 없어 갈 데도 없는 상황에 눈앞이 캄캄했다.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졸업식이 다가올 즈음 부산시립교향악단 비올라 수석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왔다. 단원 오디션에서 낙방한 그가 수석 오디션에 응시하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하고 낙심해 다른 진로를 고민하던 그때, 부산시향의 비올라 수석 모집은 그에게 내려진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냥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좌절과 시련을 이기려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다시 자신을 가다듬은 그는 2003년 2월 대학 졸업식이 열리던 날 졸업식 대신 오디션을 보러 갔다. 그 시험에서 수석 단원은 뽑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부산시향의 단원으로 활동할 생각이 있느냐며. 그는 그렇게 졸업을 하자마자 바로 부산시향에 들어가게 됐다. 상철씨에게는 학사모 사진이 없다. 오디션 날에 졸업식이 열려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대학 졸업식 날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멋진 하루로 기억된다.
[단원으로서의 일상]
교향악단 내에서 상철씨 선임과 후임의 나이는 그와 각각 10살씩 차이가 난다. 거의 10년에 한 번 단원 모집이 있었다는 뜻이다. 기악을 전공하는 학생의 상당수가 시향 입단을 목표에 두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예다. 대학 졸업 후 취업까지의 공백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 절박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이런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첫 오디션에 낙방하고 한창 힘들어 하던 때 상철씨는 부산시향 10년 기념 음악회의 객원으로 참여하게 됐었다. 졸업을 앞두고 갈 곳은 정해져 있지 않아 막연한 상황 속에서 옆에 앉아 있는 연주자에게 시향 단원이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부럽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정말 딱 2개월 만인 그해 3월에 바로 그 시향 단원의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다.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고 음악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행복했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초기에는 실수도 많았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자취를 하면서 오전에 늦잠을 자는 일이 많았는데, 시향에 들어가서도 늦잠 때문에 실수가 있었다. 늦잠 때문에 무단결근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오전 9시 30분까지 출근을 해서 12시 30분까지 연습을 하는 것이 일상인데, 눈을 뜨니 11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는 급하게 전화를 해서 결근한 이유를 설명했다. 당연히 다음 날 출근하면서 크게 혼이 날 것이라 예상하고 연습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문책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행동은 모두 자기 책임일 뿐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던 거예요. 왜 늦었어, 신입인데 니가 이러면 돼? 아무도 이런 얘기를 안 해. 내가 알아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사회라는 걸 느꼈죠.”
어차피 근무 평점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받게 되어 있다. 각 단원마다 근무 평점을 작성하고 정기 오디션에 따른 점수까지 더해 등급을 나눈다. 결국 어느 누구도 혼내지 않지만 자신의 등급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생활의 철저함을 접하게 되자,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 무섭기도 했다.
처음에 파트 연습을 하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다. 비올라 파트 전원이 함께 연습을 하는데, 정말 어려운 곡이었다. 첫 연습에서 상철씨는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단원들은 처음 받은 악보임에도 바로 연주회만큼의 실력으로 연습을 했지만, 그는 처음해 보는 곡 앞에서 손도 못 댄 채 연습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입 단원의 기를 죽이려고 선배들끼리 미리 곡을 연습해 두고 일부러 그런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첫 연습에서 상철씨가 받은 충격은 꽤 컸다. 이제 정말 모든 부분에서 자신이 책임을 지고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대학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처럼, 대학 생활과는 또 다른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많이 어려웠다. 비슷한 또래들과의 생활이 대부분이었던 상철씨에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들을 상대해야 하는 직장 생활은 고려해야 할 것이 더 늘어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시향은 단원들이 거의 바뀌지 않고 변화가 없기 때문에 9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매일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야만 했다.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어려움, 갈등 같은 것들이 그와 맞지 않다는 생각에 3년을 겉돌았다. 이곳이 내 직장인가, 아니면 객원으로 나와 있는가 의문이 들 정도로 적응하는 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 결국 여기가 자신의 자리다라는 결론을 내는 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시향 안에는 동문 선배들도 있었고, 함께 대학 생활을 했던 선배들도 있었다. 함께 카풀을 하며 젊은 단원들끼리 친하게 지내기도 했는데, 투닥투닥 싸우기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 상철씨는 말한다.
“그때는 서로 내가 잘났네 하는 게 있었나 봐요. 다들 어쨌든 잘한다는 이야기 들었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거든. 다 앞자리에 있었던 사람이고 앞에서 연주해 봤던 사람들이고. 그 세계에서 끼어서 살아남아야 하는 거야. 프로가 되는 거죠. 그렇게.”
[드라마와는 다른 현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와 방황하는 시절까지 거치며 어느덧 시향 단원 생활 11년차. 백여만 원이던 첫 봉급은 고마운 분들에 대한 선물과 식사 대접으로 모두 사라졌다. 친구들 중 유일하게 취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그 ‘불쌍한 영혼들’을 먹여 살리는 임무도 톡톡히 수행했다.
시향에 들어온 후 2년 동안 11평 원룸에서 남자 세 명이 함께 살았다. 한 명은 피아노 하는 친구였고, 한 명은 오보에를 하는 친구였는데 그렇게 세 명이서 2년 동안 생활했다.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외로움도 많이 사라지고 전세금 모으는 일도 훨씬 쉬웠다.
상철씨가 취업한 초기에는 오전 9시 30분에 출근해서 12시 반에 연습이 끝나는 생활을 했다. 지금은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1시까지 연습을 한다. 물론 연주회의 성격에 따라 오후 연습을 4시까지 할 때도 있다. 예술단이라는 특성에 맞게 단원이 함께 최대한 집중해서 연습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어차피 개인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 각자 연습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라, 단원 전체의 연습 시간은 효율성을 중시한다. 일주일 정도 연주회를 준비하고 보통 목요일이나 금요일 저녁에 공연을 하는 식이다.
시향 단원의 대우는 어느 정도일까. 시향 단원은 위촉직 공무원으로, 3년마다 오디션을 거쳐 그것을 통과해야 위촉장을 받고 계약을 연장할 수 있다. 정규직이라고는 하지만 평생을 보장받으며 마냥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상철씨의 말을 빌린다면 “살 떨리는 오디션”을 3년에 한 번씩 해야 한다. 실제로 오디션에서 탈락한 사례도 다른 지역 시향에서는 꽤 많이 있다. 상철씨는 자신들의 현실이 마냥 평화롭고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만은 아니라며, 오히려 살벌한 현실에 긴장의 연속일 때가 더 많다고 웃는다.
시향 단원이라고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지휘자 아래 악장, 수석, 부수석, 단원으로 나누어진다. 오랫동안 단원으로 있었다고 해서 바로 수석이나 악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석과 악장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오디션을 거쳐야 한다. 수석은 보통 솔리스트 수준의 연주자로, 각 파트의 리더다. 악장은 전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고 현의 보잉[활의 운용]을 결정한다. 지휘자가 연주 전 악수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악장이다.
출퇴근이 일반인들에 비해 자유로운 대신 단원의 급여는 대기업의 절반 정도의 수준이다. 시향의 공연 횟수가 연간 100회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급여가 많은 편은 아니다. 강의나 레슨 등으로 경제생활을 보충하는 경우도 있지만, 유명한 연주자가 아닌 이상 이런 일도 일반적이지 않다.
교향악단에서 지휘자라는 존재는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까. 몇 해 전 교향악단을 무대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서 지휘자는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현실에서도 과연 그럴까?
“지휘자는 절대적이에요. 평가를 하거든, 지휘자가. 오디션에서…….”
현재 부산시향의 지휘자는 중국 사람이다. 관현악단에서는 무엇보다 좋은 지휘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음악적으로나 단원을 이끌어 가는 리더십에서나 뛰어나야 하는 것이 지휘자의 요건이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은 최근 몇 년 동안 계속 외국인 지휘자를 임용하고 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을 수 있지만 한국인 지휘자보다 좋은 점도 많다. 한국인 지휘자와는 의사소통이 쉬운 만큼 단원들이 음악 이외의 사회생활을 해야 되는 경우도 있지만, 외국인은 철저히 공적인 관계여서 그런 점에서 자유롭다.
외국인 지휘자는 언어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외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단원들도 있기 때문에 간단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문제도 생길 수 있어 악장이나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정보 전달을 해 줘야 한다.
지휘자의 영향력이 막강하다고는 하지만 드라마처럼 독단적으로 단원들을 대할 수는 없다. 수석, 부수석, 악장들도 자신들의 영역에서 전문가라는 인정을 받을 뿐 단원들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상하 관계는 아니다. 모두 전문가로서의 자기 역할을 할 뿐이다. 오히려 교향악단의 중간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맨 앞에서 연주하게 되면 이목이 더 집중되어 부담스럽기도 하다.
교향악단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솔리스트로 혼자 연주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음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마음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어차피 사람이 모여 이루어 내는 일이다 보니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
[예술 단원과 노조]
상철씨는 하루하루가 참 바쁘다. 그가 벌여 놓은 많은 일 중에는 부산시향에서 노조 업무를 맡은 것도 포함된다.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이게 음악만 하던 사람들이 할 짓이 아니에요. 음악만 하기도 벅찬데……. 예술단은 여자들이 대부분이고 궂은일은 할 만한 젊은 남자들이 별로 없어요.”
그가 노조 일을 맡게 된 이유이다. 2012년 부산 지역 신문에서 자주 보였던 부산시립예술단원의 노조 결성 소식. 지난 수십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물론 시립 예술단 노조가 부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창원과 울산, 대구 등 노조가 결성된 시립 교향악단은 전국적으로 꽤 많이 있다. 장르의 특성상 하나로 의견이 모아지기가 쉽지 않았지만, 예상을 깨고 어느 순간 사람들의 의견이 모이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권리에 대해 합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에 대한 예술 단원들의 바람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다.
부산광역시에 소속된 다섯 개의 단이 모두 노조에 가입했다. 다른 단에 비해 가입률이 낮은 교향악단은 애초에 하나로 뭉치기가 힘든 단체라고 한다. 워낙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많이 속해 있어서 현재의 가입률 정도도 충분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단원들이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결성부터 협의 대상을 결정하는 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2년 3월부터 그해 12월까지 한 해 동안 부산광역시를 상대로 부단한 노력을 한 결과 단체 협약을 맺게 되었다. 임금이나 연금 수당, 처우 개선 등 다양한 부분에서 협약이 이루어졌고, 이제는 부산광역시에서 이를 시행하는 일만 남았다. 오디션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단원의 등급에 따라 지급되는 수당의 경우, 이미 노조의 요구대로 개선이 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이루었다. 마냥 우아할 수만은 없는, 뼈를 깎는 노력이 우선 되어야 하는 자신들에게 시립 예술단 단원으로서의 자존심은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2013년부터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소속되어 있는 부산 문화 회관에 민선 관장이 취임했다. 이제껏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있던 자리에 예술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왔다는 사실은 단원 입장에서 반길 만한 일이다.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사람들의 기대 또한 높아져 있다. 서로 이해하며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은 개선하되, 시민들에게 예술을 알리고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자신들의 임무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것이 상철씨의 솔직한 마음이다. 이를 위해 그는 오늘도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새로운 도전과 꿈]
교향악단 내에서 단원들끼리 서로 부끄럽지 않도록 연주하는 기량을 키워 나가는 것이 상철씨의 바람이라고 한다. 음악적인 부분에서 서로 자기 것을 좀 더 책임지며, 진짜 프로가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고 덧붙인다.
연주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 팬들과의 교류도 중요하다. 상철씨는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연주를 즐기는 정기 회원들이 많이 있어서 항상 든든하다. 연주회가 있을 때면 매번 찾아와 평가와 모니터를 해 준다. 연주가도 아닌 즐기는 입장의 팬들이지만 그 지적들은 제법 정확하다. 상철씨는 ‘듣는 귀’의 무서움을 느낄 때가 꽤 많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 항상 자신을 일깨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을 잃지 않아야 조금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주를 듣는 사람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음악가가 되어, 사람들이 자신의 연주를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나도 내가 좋아해야지만 찾아가지, 안 좋아하는 것을 의무감으로 가지는 않아요. 관심이 없는 것은 하지 않으니까. 내가 좋아해야지 가지. 다른 데서 들을 수 없는 정말 멋진 음악, 정말 진짜 잘하는 프로 같은 음악을 시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보여 줘야지. 그게 우리 사명이에요.”
클래식에도 마니아층이 많이 생기면서 부산시향의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상철 씨는 책임감이 깊어진다. 상철 씨 스스로도 연주하는 즐거움이 가장 중요한 요건인 것처럼, 공연을 보러 오는 시민들 또한 즐거워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상철 씨의 앞으로의 계획은 올해 말에 있게 될 오디션에서 좋은 결과가 있도록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으로는 대학원에 진학하며 시작한 지휘 공부를 좀 더 깊이 해 보고 싶다고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고 한다. 그는 청년 시절을 시향 단원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자신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주고 싶다고 말한다. 꾸준히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겪으면서 연륜이 쌓이게 되면, 언젠가 지휘자라는 직함에 한번 도전해 보리라 결심한다.
“가 보는 거죠.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거예요. 나중에 같이 팬이 되어 주세요. 나이가 들었을 때.”
그의 눈빛에서는 결의가 보인다. 밝고 경쾌하게 말하고 있지만 가벼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철씨는 문화의 불모지라고 일컬어지는 부산에서 계속 자신의 터를 닦아 볼 생각이다. 사실 부산 사람들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여유가 별로 없다. 소비 도시에 가까운 부산 사람들은 인근 지역으로 출퇴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저녁 시간에 공연을 보기란 현실적으로 힘든 경우가 많다. 상철씨는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함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이끄는 동력이 되고 싶다. 힘들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무언가를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그는 이 시기만 잘 보낸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기회가 찾아올 것만 같다. 그렇게 그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간다.
상철씨는 언젠가는 부산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 부산에서 성공하면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들은 자기 영역에서 인정받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그는 더욱 그것을 이루고 싶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보다 조금 더 열린, 서로 섞일 수 있는 시대에서 그에 맞는 연주자, 음악가가 되고 싶다.
[마음으로 이어진 가족]
상철씨는 관현악단에서 부인을 만났다. 동갑의 음악가 부부. 갓 돌을 지난 귀여운 아들의 사진을 보여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버지다. 우연이지만 아들의 이름도 유명 피아니스트와 같다고 한다.
“저는 가족이 많아요. 멀리서 늘 지켜봐 주시는 박 불케리아 수녀님, 원장 수녀님, 지휘자 안유경 선생님, 대학 시절 생일에 미역국까지 끓여 주신 박을미 교수님, 그리고 소년의 집 선후배 등 모두가 저의 가족입니다. 이들 덕분에 제가 힘들 때마다 일어설 수 있었어요.”
가족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관현악단 친구들의 이야기로 옮겨 갔다. 모집 인원도 적고 자주 선발하지도 않지만, 시향 안에는 나이가 같은 단원이 다섯 명이나 된다고 한다. 시향 안에서 1980년생들이 모여 실내악을 해 보기도 했으며, 심지어 부산대학교 음악학과 99학번이 3명이나 된다. 이쯤 되면 타이밍이 좋았다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찌 됐든 든든하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상철씨의 진심은 그가 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펠리체, 크로노스, 마레 등 앙상블에서 활동하며, 베노스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와 부산의치대 관현악단에서는 지휘를 맡고 있다. 최근에는 quartet Amici라는 현악 4중주 악단을 결성해 창단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나름 학구적인 이유가 있다. 오케스트라에서만 연주하게 되면서 자칫 묻히게 되는 혼자만의 소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의 음역이 망가지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한다. 그는 연주가이기 때문에 혼자 소리 내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대학원에서는 부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휘자 오충근씨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상철씨에게 선생님은 인생의 어른이자 스승이다. 음악적으로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버팀목이다. 부산월드필하모닉의 단원을 모집하는 등의 업무도 상철씨가 맡아서 한다. 그는 오충근씨가 상임 지휘자로 있는 민간 관현악단인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의 단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철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고 있다. 지금도 매주 한 번씩은 소년의 집을 찾아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지휘자 정명훈과의 인연으로도 유명한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오케스트라’는 그에게도 각별한 곳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면서 이제 소년의 집엔 아이들이 많이 없어요. 학생이 없어요, 이제. 학생을 배출하는 제단으로 거의 마지막에 왔어요. 제가 학생 때 첫 연주가 4회였어요. 올해가 23회인데 제가 지휘자로 올해 11월에 공연을 해요.”
소년의 집에 들어오는 중학교 신입생이 더 이상 없어서 알로이시오오케스트라의 단원을 모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온전한 오케스트라의 구성이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연주회에 상철씨가 지휘자로 나선다며, 기회가 되면 꼭 보러 오라는 초대의 말을 건넨다. 자신의 꿈을 이룬 그는 오늘도 새로운 희망을 가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