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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1890
한자 音樂
영어의미역 Music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창욱

[정의]

광복 이후 부산광역시 일대에서 이루어진 음악 활동.

[개설]

부산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것은 광복 이후부터이다. 35년간의 일제 강점 시기가 끝나면서 새로운 체제와 제도의 토대 위에서 부산의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음악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부산의 서양 음악은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서서히 활기를 띠었고, 특히 1970년대 이후 음악 단체·공연장의 잇따른 설립으로 부산의 서양 음악 문화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었다. 전통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간과 관(官)의 상호 협력은 전통 음악 문화의 근대식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대중음악의 경우 상대적으로 토대가 빈약한 까닭에, 부산이 음악 생산지로서의 역할보다 오히려 음악 소비지 쪽에 더 가깝다. 인디 음악은 1990대 중반 이후 발달하였다.

[광복 이후 부산 음악]

1. 전통 음악

1945년의 광복은 그동안 단절되었던 전통문화를 복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하에서는 전통 음악이 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봉래권번, 동래구의 동래권번, 초량의 부산권번 등 권번(券番)[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조합]이라는 기생 집단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던 터였다.

광복 이후 부산 전통 음악은 동래권번 출신의 박난정을 비롯해서 최계량·정옥순이 가무에 능하였고, 전라남도 출신의 강태홍(姜太弘)은 「가야금 산조」의 명인으로 정악에도 뛰어나 가칭 부산정악회를 만들어 당시 혼미한 시절의 시름을 덜었다. 더구나 강태홍은 춤에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여 동래권번의 사범으로 있으면서 기방이 아닌 일반 가정의 자녀들에게 고전 무용을 가르쳤다. 이것이 새로운 부산 춤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48년 김동민(金棟旻)은 당시 토성동 3가 6번지 자택에 민속예술학원을 개원하였다. 강태홍을 사범으로 초빙하여 여기서 무용·가야금·창 등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부산 전통 음악 및 무용 학원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부터 부산 전통 음악이 생계 수단의 차원을 넘어서 순수 예술 활동을 지향하는 장(場)을 마련한 셈이다.

2. 서양 음악

1945년 광복이 되자, 부산의 서양 음악 문화는 과거 실기 교습 위주의 음악 활동에서 벗어나 기념 음악회, 음악 콩쿠르 및 음악 경연 대회, 학교 음악회, 음악 비평 등으로 영역이 점차 확대되었다.

3. 대중음악

광복 이후 부산 대중 음악계는 자생적인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로 서울에서 활약하는 음악단·악단·가극단 등의 악극단 공연이 매우 폭넓게 진행되었는데, 이들은 노래[대중가요]·춤·경음악·연극 등의 종합적 형태의 대중 예술을 목적으로 조직된 연예 단체였다. 백민가극단·조선극장악극단·백조가극단·현대악극단·김해송악단·태평양가극단·새별가극단·무궁화악극단·새나라가극단 등의 활동이 그것이다.

이 시기 대중음악계는 악극 공연 이외에 대중 가수 선발을 위한 콩쿠르도 즐겨 열렸다. 영남 가수 콩쿠르, 방송 가수 선발 콩쿠르 등이 그러하다. 대중음악은 부산에서 방송뿐 아니라 이미 레코드 산업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49년 여름에 열린 ‘납량 대연예의 밤’에 코로나레코드와 오리온레코드의 두 회사가 후원하였다.

[1950년대 부산의 음악]

1. 전통 음악

한국 전통 음악의 중추 기관이었던 ‘구 황궁아악부(舊皇宮雅樂部)’[국립국악원의 전신]가 용두산 자락의 목조 건물인 부산시립도서관 2층으로 옮겨 왔고, 1951년 구 황궁아악부는 국립국악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국립국악원은 토성동의 민속예술학원에서 수차례에 걸쳐 국악 강습회를 가졌고, 민속악 계열의 많은 국창과 명인·명창들이 부산에 피난 와서 부산에서 그들의 기예를 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3년 부산의 대형 화재로 말미암아 국립국악원 임시 사무실이 불타고 창고의 서류와 악기도 함께 소실되었다.

2. 서양 음악

6·25 전쟁 시기였던 1950년대는 임시 수도 부산이 서양 음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군가 및 가사 현상 모집, 육군교향악단·해군정훈악대·국립경찰취주악대·미군악대 등의 각종 군악 연주회는 물론, 김순애·김동진·윤용하·이상근의 작곡 발표회, 유경손·오일석의 독창회, 김학성의 바이올린 독주회, 김대현의 「콩쥐 팥쥐」와 현제명의 「춘향전」 등의 오페라 공연이 잇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50년대 정부 공보처는 국민의 전의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중공 격멸의 노래」·「통일 행진곡」을 제정하여 라디오를 통해 널리 보급하였고, 김순애의 「물레」·「4월의 노래」, 변훈의 「명태」, 윤용하의 「보리밭」과 같은 가곡이 부산에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1950년 배도순의 주도로 부산현악4중주단이 창단되었고, 이후 후렌드실내악단[1958] 등 각종 민간 악단들이 만들어졌다.

3. 대중음악

1950년대에는 1·4 후퇴 이후 임시 수도가 된 부산에서 가수 한복남이 도미도레코드를 설립하였다. 도미도레코드는 「페르시아 왕자」[손로원 작사·한복남 작곡·허민 노래]를 내놓았고, 부산방송국[HLKB]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슈샤인 보이」[이서구 작사·손목인 작곡·박단마 노래]가 나왔다. 부산방송국 스튜디오에서는 많은 가수들이 야간작업을 통해 테이프에 노래를 취입하였는데, 이 테이프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SP 레코드를 제작하고 수입 형식으로 반입하여 시중에 판매하였다. 황금심·박단마 등의 가수가 이렇게 취입하였고 히트한 노래로 「삼다도 소식」이 있다.

무엇보다 195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최대 히트곡이라면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 작사·박시춘 작곡·현인 노래]와 「이별의 부산 정거장」[호동아 작사·박시춘 작곡·남인수 노래]이다. 「굳세어라 금순아」[1953]는 1·4 후퇴 피난길에 흥남 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를 잃어버린 화자가 부산으로 피난 와서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금순이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눈에 선하도록 묘사한 절창(絶唱)이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3]은 피난민들이 서울로 환도하면서 부산을 떠나는 애절한 마음을 담았다. 이런 노래들은 전쟁이라는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하였던 서민 대중들의 고통을 절절하게 읊고 있으며, 신파적인 트로트 양식은 다시 한 번 대중의 고통스러운 삶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부산에서는 레코드 산업의 확대에 발맞춰 신인 가수를 모집하기 위한 콩쿠르가 잇따라 열렸다. 행사 주최는 악극단·법인체·레코드사 등과 같이 다양하였지만, 여기서 배출된 가수는 자연스럽게 레코드 업계로 진출하였다. 가령 신태평레코드 문예부 주최의 전속 가수 모집 콩쿠르가 1953년 11월 24일부터 은영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당선자에게는 상장과 부상을 수여함은 물론, 부산방송국 및 신태평레코드의 전속 가수로 채용되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남자부와 여자부의 두 부문으로 나눠 치러진 신태평레코드 전속 가수 모집 콩쿠르에는 「물방아 도는 내력」·「굳세어라 금순아」·「무영탑 사랑」·「마음의 고향」·「전선 야곡」·「인도의 향불」·「추야장 향수」[이상 남자부]와 「임 계신 전선」·「여인 애가」·「청춘 부루스」·「안해의 노래」[이상 여자부] 등의 지정곡이 주어졌으며, 심사 위원은 이재호·손로현이었다.

또한 문화 극장 옆에 있던 코로나레코드의 간이 취입소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레코드 취입을 대행해 주기도 하였는데, 녹음 대상은 성악·기악·유언(遺言)·훈화(訓話)·말 편지·연설 등이었고, 양면 각 3분 30초의 한 매에 2만원을 받았다. 또 오리엔트레코드는 자사 음반 「전선 야곡」[박시춘 작곡 및 편곡·유호 작사·신세영 노래], 「감격의 뉴스」[손목인 작곡 및 편곡·손로현 작사·강준희 노래], 「아내의 노래」[손목인 작곡 및 편곡·유호 작사·심연옥 노래]를 제작하여, 각 악기점을 통해 판매하였다.

[1960년대 이후 부산의 음악]

1. 전통 음악

부산 전통 음악계는 196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196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창설되었고 1963년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한국국악협회 부산지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공연과 강습회는 부산 전통 음악의 저변 확대와 토착화를 가져왔으며, 1976년 한국국악관현악단의 출범, 1978년 부산 국악 회관의 개관은 전통 음악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이 무렵 구포여자상업고등학교와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의 국악 발표회는 전통 음악이 학교 교육의 장으로 확대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음악인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1982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에 국악과가 개설되었고, 그것은 1984년 5월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창단과 더불어 부산 전통 음악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이와 함께 전통 예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져 향토 민속의 계승·발전과 무형 문화재의 보존 및 육성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1991년 7월 구덕 민속 예술관이 개관됨으로써 부산 민속 예술관·수영 고적 민속 예술관과 더불어 부산은 세 개의 민속 전수관을 확보하고 향토 민속 예술 발전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한 해마다 향토 민속 예술에 대한 경연과 평가를 통해 전통 예술의 계승·발전과 시민 생활 문화 정착을 위해 부산 민속 예술제를 열고 있다. 부산 민속 예술제에서는 「수영 능청놀이」·「동래 학춤」·「동래 지신밟기」·「부산 농악」·「다대포 후리 소리」·「동래 야류」·「수영 야류」·「좌수영 어방놀이」 등과 농악·민속극·민속놀이·민속 무용·민요 등이 재현·발표된다.

한편 2008년에 부산 전통 음악계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국립 부산 국악원을 개원하였다. 국립 부산 국악원은 전라북도 남원시의 국립 민속 국악원[1992]과 전라남도 진도군의 국립 남도 국악원[2004]에 이어 세 번째로 건립된 지역 국악원이다. 이와 더불어 2011년에는 국립 부산 국악원 내에 국악방송국이 개국되었다. 국악방송국은 전통 음악 감상 프로그램인 ‘흐르는 음악처럼’[매일 오전 3~5시]을 자체 제작해서 전국으로 송출하고, 문화 예술 정보 프로그램인 ‘꿈꾸는 아리랑’[매일 오후 4시~5시 40분]에서는 매주 월요일 부산·경상남도 권역 전통 음악계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2. 서양 음악

1955년에 부산대학 관현악단, 1960년에 부산방송관현악단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다시 부산교향악단으로 통합되었다. 부산교향악단은 이후 1962년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창단을 앞당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부산관현악단[1981]·청소년관현악단[1986]·크리스찬필하모닉관현악단[1988]·뉴필하모닉오케스트라[1996]·아트심포니오케스트라[1998]·라메르필하모닉오케스트라[1999]·신세기오케스트라[2000]·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2000]·을숙도교향악단[2005]·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2006] 등이 잇따라 창단됨으로써 부산 관현악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부산의 합창 음악은 1956년에 창단된 부산합창단 이래 콜에오리안합창단[1957], 성모합창단[1958], 갈릴리합창단·노엘합창단[1960], 부산무반주합창단·교사합창단[1964], 아가피모브라더즈합창단·부산연합합창단[1965] 등의 잇따른 창단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1973년 부산시립합창단이 창단됨으로써 더욱 본격화되었다.

이후 멜로매니아·진하모니·부산시립소년소녀합창단·부산솔리스트앙상블·한울림합창단·수정합창단·부일여성합창단·원음합창단·부산여성합창단·부산가톨릭합창단·부산코러스·부산쌍투스합창단·부산콘서트콰이어·사랑의 부부합창단·뉴코리아합창단·동아챔버콰이어합창단·글로리콰이어 등 다양한 아마추어 합창단이 잇따라 생겨나 합창 음악 문화의 저변 확대를 가져왔다.

부산의 오페라 문화는 1970년대 영남오페라단·부산오페라단·나토얀오페라단을 시작으로, 1980년대 로얄오페라단·부산시민오페라단, 1990년대 21세기오페라단·부산소극장오페라단·그랜드오페라단 등의 활동을 통해 오늘로 이어진다. 이후 아지무스오페라단·솔오페라단·가야오페라단·꼬레아오페라단 등의 활동으로 지속되었다.

창작 음악은 연주 문화에 비해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개인 작곡 발표가 중심이었던 부산의 창작 음악계는 1974년 향신회(響新會), 1982년 향천회(響泉會), 1983년 부산작곡가협회·영남작곡가협회, 1990년대 부산전자음악연구회·우리시대음악·작악회(作樂會) 등이 잇따라 창립됨으로써 한층 비약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1990년대에 이르러 특기할 만한 것은 창작·연주 중심의 음악 문화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1991년 부산을 근거로 한 민족음악학회의 조직과 전국 규모의 학술지 『음악과 민족』[발행인 조선우]이 창간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연구재단 음악학 분야 등재 학술지로 선정된 『음악과 민족』은 2012년 현재 통권 44호를 냈다. 『음악과 민족』에는 부산 지역 음악 관련의 연구 논문은 물론, 부산 음악사 서술의 기초 사료가 게재됨으로써 그동안 서울 중심의 부분적 한국 음악학을 전체적 한국 음악학으로 수정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부산 서양 음악 문화의 변화에는 공공 공연장의 개관도 한몫을 차지한다. 이전에는 공공 기관·학교 강당·극장·예식장 등이 주된 공연장으로 활용되었지만, 1973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부산 시민 회관이 개관됨으로써 전문 공연장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후 부산 공연 문화의 센터로 자리 잡은 부산 문화 회관 대극장[1988], 중극장·소극장[1993]을 비롯하여 동래 문화 회관[1999], 금정 문화 회관[2000], 을숙도 문화 회관[2002], 해운대 문화 회관[2007], 영도 문화 예술 회관[2009] 등 각 지역 문화 회관들이 연이어 개관되었다.

3. 대중음악

1960년대는 대중음악 종사자들의 이익 집단이 결성되는 시기로 대한가수협회·대중음악협회·대한레코드작가협회·전국공연단체협회·한국연예예술인협회 등이 만들어졌다. 부산의 경우는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남지부로 출발해서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과 함께 부산지부로 분리되었다.

1970년대는 트로트의 황금시대에 발맞춰 부산 출신의 나훈아·현철·설운도 등이 비약적인 활동을 벌였고, 그룹사운드로 부산과 인연을 맺은 경기도 화성시 출신의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으며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서 조용필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가왕(歌王)으로 등극하였다.

1990년대 초 문성재가 불렀던 「부산 갈매기」는 프로 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상징하는 노래로 각인되었고, 1991년부터 부산가요작곡가협회[초대 회장 허영철]에 의해 제1회 오륙도 창작 가요제가 열린 후 지금까지 부산 창작 가요의 산실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1994~2002년까지는 열리지 않음]. 특히 주목할 점은 그동안 대중음악이 언제나 제도권 밖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1994년 부산예술대학교[부산예술학교의 후신]와 1999년 동아대학교에 실용음악과가 개설되면서 대중음악 교육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4. 인디 음악

1980년대부터 부산은 배재범, 임덕규 등으로 대표되는 기타리스트들과 이들이 속하였던 밴드인 디오니소스, 스트레인저, 아마게돈, 프라즈마 등으로 인해 한국 헤비메탈계의 메카로 인정받기도 하며 언더그라운드계라는 측면에서도 가장 전성기를 누렸던 지역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부산 지역에서도 쉬바, 몽크, 툼스톤, 너바나 등 주로 부산대학교 앞에 밀집해 있던 일단의 클럽들과 이후 문을 연 서면의 문화 공간 반(反) 등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밴드가 있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밴드 활동을 하던 이들은 물론, 동래의 드래곤 볼(Dragon ball)을 비롯한 학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밴드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수차례의 서울 공연을 통해 인디 록계 내에 존재하는 지역적 차별의 극복과 밴드 간의 우의를 다지기 위해 ‘갈매기공화국’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함께 공연을 기획하거나 팬진(fanzine)을 발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은 여전히 하나의 집단적 일체감을 이끌어 내기에는 공동체적 기반이나 공간, 정서적 분위기에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한편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관계자들이나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 역시 이들에게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이들 중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거나 인지도를 갖게 된 밴드들의 대부분은 인디 씬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과 홍대 앞에 조성된 공동체적 조류에 이끌려 아예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갔으며 새로 생긴 밴드들 역시 우선 서울로 가서 활동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결국 열악한 부산 지역의 인디 음악계는 더욱 열악해지는 악순환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열악한 환경과 지역민들의 무관심 등으로 침체되어 있던 부산의 인디 음악계는 2006년 이후 조금씩 자체적 인프라들을 갖추면서 보다 적극적인 행보에 나서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부산대학교 앞 인터플레이가 대표적인 클럽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고 서울에 가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음반을 제작할 수 있는 레이블들을 밴드 스스로 만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0년 넘게 활동하며 부산의 대표적인 인디 밴드로 주목받는 언체인드가 설립한 진저레코드를 들 수 있다.

또한 최근 활발히 활동 중인 스카웨이커스는 클럽에서 벗어나 다양한 행사와 사회 참여 활동들을 벌이고 있으며 많은 인디 밴드들이 길거리로 나가 소위 버스킹(busking)이라는 공연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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