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2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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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棟旻 |
영어음역 | Gim Dongmin |
이칭/별칭 | 추강(秋剛)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영미 |
[정의]
1940년대 이후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민속 무용가.
[활동 사항]
김동민(金棟旻)[1910~1999]은 1910년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 석산리[현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석산리]에서 대지주의 외아들로 태어나 일본 도쿄[東京]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찍이 1940년대에 부산시 서구 토성동 3가 6번지에 있는 자택에 부산 최초의 민속무용연구소[후에 민속예술학원으로 개칭]를 개설한 것은 부산 무용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부산의 춤은 전통의 고장 동래 온천장과 초량 일대 권번에서 가무악 형태로 미미하게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김동민의 민속무용연구소 개설은 전통 춤의 전승을 기방에서 끌어내 그 전승 공간을 확대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동시에 부산 지역 순수 예술 활동을 기반으로 한국 무용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였다.
민속무용연구소에서는 사범인 효산 강태홍(姜太弘)과 김동민이 함께 우리 전통 춤의 기본이자 부산 춤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굿거리 춤」과 「입춤」, 산조춤 등을 가야금, 창과 함께 교습하였다. 당시 신무용이 들어와 전통 춤이 상대적으로 주춤하던 시기였지만, 전통 춤에 대한 철저한 원칙 주의로 교습을 진행해 나갔다. 또 1951년을 시작으로 5차례 발표회를 가졌다.
1958년부터 김동민은 경상남도 일원의 탈놀음과 야류, 오광대에 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에 「동래 야류」의 박덕업(朴德業), 「수영 야류」의 최한복(崔漢福), 「통영 오광대」의 장재봉(張在奉) 등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 결과 부산과 경상남도만의 토속 춤을 복원해서 집대성하여 무대에 올리고 육성할 수 있었다. 실기 학습은 장녀인 김온경에게 전수하였다.
김동민은 대체로 무대에서 직접 춤을 추기보다는 춤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순수 무용극과 극무용 등의 다양한 작품을 안무하였다. 이들 작품은 전통 춤의 무대화뿐만 아니라 춤의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서도 상당히 앞서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통 춤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한 김동민은 1999년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대표 작품으로 「춘향전」·「견우직녀」·「황창랑」·「보함의 비밀」·「단심의 곡」·「청춘애사」·「서광」 등이 있다.
[묘소]
묘지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서중동 산56번지에 있는 천자봉 공원묘지에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