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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홍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913
한자 姜太弘
영어음역 Gang Taehong
이칭/별칭 효산(曉山),강태평(姜太平)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홍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국악인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3년 3월 21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7년 - 경주권번·달성권번·울산권번에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9년 3월 29일~3월 30일 - 이동백의 은퇴 공연에 찬조 출연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부산 동래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40년대 - 동래권번에서 후학 양성
활동 시기/일시 1940년대 -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 완성
활동 시기/일시 1940년대 - 한국음악무용연구소·강태홍무용연구소 개소
몰년 시기/일시 1957년 2월 3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9년 - 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8호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로 지정
출생지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 664
활동지 경주권번 - 경상북도 경주시
활동지 달성권번 - 대구광역시
활동지 울산권번 - 울산광역시
활동지 동래권번 - 부산광역시 동래구
활동지 한국음악무용연구소 -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3가 6지도보기
활동지 강태홍무용연구소 - 부산광역시
묘소 안양사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2동 산48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

[개설]

호는 효산(曉山). 아버지는 강용안(姜用安)이고, 어머니는 정가매(鄭佳梅)이다. 별칭은 강태평(姜太平)이다.

[활동 사항]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893년 3월 21일 전라남도 무안군 외읍면 교촌리 664번지[현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 664]에서 4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용안은 어전 광대로 「판소리」를 창극화시킨 장본인이고, 큰아버지 강준한은 해금과 피리에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영향으로 강태홍은 어릴 적부터 전통 예술을 접하며 성장하였다. 19세 이전까지 광주의 신청(神廳)에 근무하다가 고향을 떠났다. 이후 주로 대구·서울에서 활동하였으며 부산에 정착하고는 죽을 때까지 부산에서 활동하였다.

대구에 정착하여 경주권번에서 최금란(崔錦蘭)·이소향(李素香)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최금란은 강태홍에게 사사한 후 어린 나이였으나 대구 달성권번의 강사로 나갔고, 이소향은 스승인 강태홍과 병창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이 무렵 경상남도 밀양에서 제자들과 풍류회를 조직하여 영제(嶺制) 풍류를 정리하였다. 34세가 되던 1926년에 「가야금 병창」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조선악협회 요곡부(謠曲部)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대구에서 박차에게 풍류와 산조를 전수하였으며, 달성권번의 박귀희(朴貴姬)에게 산조와 병창을 전수하였다.

1937년에는 명창 박동진(朴東鎭)과 경주권번, 대구의 달성권번과 울산권번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서울 부민관에서 명창 이동백(李東伯)의 은퇴 공연에 찬조 출연한 후에 강태홍은 서울 활동을 완전히 접었다. 같은 해 동래권번으로 자리를 옮기고 당시 동기(童妓)였던 원옥화(元玉花)와 강남월을 제자로 두었다. 부산 동래에서 강태홍은 자신의 예술 세계의 결정체인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 한바탕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음악무용연구소와 강태홍무용연구소를 열어 승무·입춤·수건춤 등을 전수하였으며, 가야금과 소리뿐만 아니라 양금·해금·피리 등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새로운 산조 가락을 만들기 위하여 몰두하였으며 꾸준히 제자를 양성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원옥화·강남월을 비롯하여 박차경(朴且更)·김춘지(金春枝)·구연우(具演祐)·신명숙(申明淑)·김온경(金昷慶)이 있었다.

늦어도 6·25 전쟁 때인 1951년 강태홍의 산조가 휘모리까지 완성되었으며, 동래 온천장에 주소를 둔 구연우·신명숙 두 제자만이 한바탕을 전수받았다. 강태홍은 음악적 재능 못지않게 인물도 뛰어난 편이었다. 강태홍의 성품은 강직하고 깔끔해서 평생을 한복만 즐겨 입었으며, 해학적이고 태평스러웠다. 상하 예의가 철저하여 권번에서 가야금 외에 예절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65세가 되던 1957년 2월 3일에 마지막 거처였던 부산시 서구 토성동 3가 6번지 김동민(金東旻)의 자택에서 구음 악보를 정리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작품으로는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와 강태홍제 향제 줄풍류가 있다.

[묘소]

유해는 평소 교분이 깊었던 승려 유담과 제자 신명숙에 의해 화장된 후 영도 다리 아래 바다에 뿌려졌으며, 위패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2동 산48번지 안양사(安養寺)에 모셔졌다.

[상훈 및 추모]

1989년에 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8호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로 지정되었으며, 부산온천장에 거주하는 강태홍의 제자 신명숙이 강태홍류가야금산조보존회 회장으로 강태홍류가야금산조보존회를 이끌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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