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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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野遊 |
영어의미역 | Field Play in Dongrae |
이칭/별칭 | 「동래 들놀음」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작품/무용과 민속극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195-46[온천동] |
집필자 | 김국희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속 연희.
[개설]
동래야류는 온천동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하던 탈놀음이다. 이를 「동래 들놀음」이라고도 한다. 야류는 한자로 야유(野遊)로 표기하지만 속음화하여 야류라고 부른다. 야류는 우리말로 들놀음이다. 들놀음의 들은 농경의 장소를 뜻하며, 따라서 동래야류의 연원은 농경의례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동래야류와 같은 시기 연행되었던 지신밟기나 줄다리기가 농사의 풍요를 바라는 의식임을 볼 때 동래야류도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동래 지역에서 옛일을 잘 알고 있는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래야류는 130여 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초기 민속학자였던 송석하는 초계 밤마리[현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의 전문 광대패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말에 수영 야류가 형성되고, 동래야류는 비슷한 시기 수영의 것을 본받아 형성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설을 정리하면 동래야류는 대체로 187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우리나라 가면극의 역사가 삼국 시대부터임을 볼 때, 동래야류의 형성 시기도 더 소급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조선 시대 중앙의 산대도감이 나례 등의 공의(公儀)를 관장하여 여러 잡희(雜戱)를 벌렸듯이, 지방의 관아에도 관나[지방 관청에서 행했던 나례]를 연행했던 재인(才人) 집단이 있어 이들이 전문 광대패의 영향을 받아 동래야류와 같은 지방 가면극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동래야류는 관리 출신을 주축으로 한 친목 단체인 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의 후원으로 전승되다가 1937년 무렵 일제의 탄압으로 줄다리기와 함께 중단되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학자들과 지방 유지들의 노력으로 원형에 대한 조사와 정리를 거쳐 재현되었고, 1967년 12월 21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재지정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구성 및 형식]
동래야류는 크게 길놀이와 본격적인 가면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길놀이는 야류를 하는 날 저녁 무렵부터 농악대와 탈놀음패 등이 풍물에 맞추어 놀이 장소로 가는 것을 말한다. 놀이 장소에 이르러 집단 난무를 한 후 본격적으로 가면극을 하는데 문둥이, 양반, 영노, 할미의 순으로 한다. 음악과 춤은 굿거리장단에 경상남도 지역의 토속적인 춤인 덧배기이며, 사용되는 악기는 꽹과리, 북, 징, 장고 등이다. 놀이판은 특별한 무대 장치가 필요 없고, 다만 중앙에 긴 장대를 세우고 길놀이 때 사용했던 용등, 봉등, 거북등 등을 매달아 원추형으로 늘어뜨린다.
[내용]
1. 길놀이
연희 당일 저녁이 되면 놀이판에서 약 1㎞ 떨어진 곳인 세병교[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나 만년대[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또는 염창 마당[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서 길놀이가 시작되어 놀이판인 동래 시장의 폐문루까지 행진한다. 순서는 풍악대를 필두로 하여 중군(中軍), 길군악대, 팔선녀(八仙女), 탈놀음패, 가마 탄 할미, 한량패, 다섯 개 동의 풍악대, 일반 군중 등이 뒤를 따르며 행진한다. 이때 수백 개의 등불을 앞세워 화려한 행렬을 한다.
2. 집단 난무
길놀이 군중이 놀이판에 이르면 일반 관중들과 함께 집단 난무를 한다. 이후 탈놀음패가 등장하는데 꽹과리를 선두로 징, 장구, 북의 순서로 들어와 굿거리장단을 울리면 원양반을 비롯한 양반들과 말뚝이, 영감과 제대각시, 문둥이 등이 들어와 놀이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한바탕 어울려 춤춘다. 장단이 자진가락으로 바뀌면 모든 배역의 가면은 춤을 추면서 퇴장하고, 첫 과장의 문둥이만 남아 본격적인 가면극이 시작된다.
3. 문둥이
문둥이 둘이 소고를 들고 등장하여 대사가 없이 연희하는 무언극이다. 이 과장은 문둥이의 한보다는 그 형태를 웃기게 표현하고 있다. 경상남도 지역에는 기후가 온난하여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문둥이가 걸식하러 다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문둥이 과장은 그러한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4. 양반
무능하고 허례허식에 가득 찬 다섯 양반들이 말뚝이에게 온갖 모욕과 신랄한 풍자를 당하는 내용이다. 말뚝이가 대부인 마누라와 상간(相姦)하는 것으로 나와 양반 풍자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탈의 모습에서도 양반과 말뚝이는 대조를 보이는데, 양반탈들이 황색 개털로 되어 있거나 ‘모양반’, ‘개잘량’이라는 별명이 있어 무능한 인간을 묘사하는데 반해, 말뚝이 탈은 크고 험악한 귀면형(鬼面形)으로 양반을 압도하고 있다. 양반 과장은 말뚝이의 대사를 통해 양반가의 타락상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주제로 되어 있다.
5. 영노
양반 과장 다음은 비비양반과 영노가 만나 대적하는 과장이다. 영노는 천상(天上)의 동물로 양반을 100명 잡아먹으면 등천(登天)할 수 있다며 비비양반에게 덤빈다. 영노에게 쫓기던 양반은 부채도 떨어뜨리고 잡아먹힐 뻔 하지만, 결국 부채도 되찾고 영노와 화해의 춤을 추게 된다. 이 과장은 양반에 대한 민중의 저항 의식을 영노라는 환상적인 동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6. 할미
동래야류의 마지막 과장이면서 우리나라 가면극에 공통으로 분포된 과장 중 하나이다. 이 과장은 할미와 영감 사이에 첩인 제대각시가 등장하면서 처첩 간의 갈등과 할미의 비극적 삶을 보여 준다. 내용을 보면, 할미와 영감이 오랜만에 만났으나 영감이 제대각시를 데리고 오자 부부간·처첩 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영감은 할미에게서 자식들이 다 죽은 것을 듣고는 화가 나서 할미를 발로 차서 쓰러뜨린다. 의원을 불러 진맥하고, 봉사를 불러 독경을 하지만 결국 할미는 죽게 된다. 할미 과장은 서민 스스로의 생활상에 대한 현실 인식과 자기반성을 희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행 시기 및 관련 의례]
동래 지역에서는 정초가 되면 지신밟기를 하는데, 이때 걸립한 전곡으로 야류의 경비를 충당한다. 동래야류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줄다리기를 한 후 승리한 편이 주관하여 놀았던 가면극이다.
[현황]
현재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전승과 보존에 힘쓰고 있으며 김경화, 이도근 등이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래야류는 파계승에 대한 풍자가 일체 없고, 양반에 대한 조롱과 모욕으로 지배층에 대한 저항 의식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놀이 과장의 앞과 뒤에 탈놀이 패와 관중이 함께 추는 군무(群舞)가 있어 마을 공동체의 일체감을 조성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춤사위와 장단에서 지방적 특색이 뛰어난 민속 가면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