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28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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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洋音樂 |
영어의미역 | Western Musci |
이칭/별칭 | 양악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선우 |
[정의]
부산 지역의 서양 예술 음악[클래식 음악].
[해방 공간: 1945~1950]
부산은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관문, 해방 후 250만 동포의 귀국 항구, 6·25 전쟁기의 임시 수도로 근대화와 민주화를 앞서 살아온 역동적 삶터이었다. 이 역동성은 일제 강점기의 서양 음악 수용 과정에서도 발휘되었다. 서양 음악은 학교의 음악 교육과 음악 강습소의 실기 지도, 그리고 이들의 학예회 수준의 정기 연주회와 일본 연주가들의 20여 차례의 무대, 특히 1935년 개국한 부산방송국[JBAK]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부산 음악가들은 일본 유학을 마친 1940년대 초부터 독주회[독창회]를 개최하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김학성은 1943년 지금의 서구청 근처에 바이올린의 집이라는 부산 최초의 악기 교습소를 열어 임만규, 전성태, 김호현 등 현악계의 지도급 인사들을 배출하였다. 김동춘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대각사 안에 성악연구소를 개설하여 광복 이후까지 운영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수학한 한국인 음악가들의 현악·성악·피아노 교습소의 음악 실기 교육은 1948년 5월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에 부산사립음악전문학교[교장 김학성]가 세워지면서 제도권 안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부산의 성악 문화는 아주 미미하였다. 1947년 한국 가곡의 밤에서 김호민·정복갑·김점덕·김진안·강수범·한봉희·박지로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제1회 상록악회에서 변창근·조문자·김연희·박동숙·손동희·최미재의 반주에 맞추어 가곡을 열창하는 정도였다. 관현악은 1관 편성의 부산방송관현악단[1947년 창단]과 현악 합주단인 후생악단이 전부였다. 금수현은 가곡 부르기와 합창 운동을 전개하고 음악 주보(週報)를 발간하며 서양 음악의 교육과 보급에 앞장섰다.
[동란기 및 여명기: 1950~1980]
제2기는 1950년 6·25 전쟁부터 1980년까지이다. 부산은 전쟁 발발로 남하한 많은 피난민들의 수용지인 동시에 임시 수도로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 중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들이 부산에 모여 예술의 꽃을 피웠고 많은 음악가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아 부산의 자생적인 음악 문화를 살찌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부산의 대학들이 전쟁 직후부터 음악 교육의 장을 열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1955년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에 2년 과정의 음악과를, 1967년 동아대학교 인문대학에 4년 과정의 음악과를 설치하였다. 후자는 부산 경남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대학 음악 교육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어서 1969년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학교] 음악과, 1974년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1978년 고신대학교 종교음악과가 4년 과정으로 신설되었다.
연주 공간은 1973년 부산 시민 회관이 개관될 때까지 대청장, 제일 극장, 왕자 극장, 서부산 예식장, 몇몇 학교 강당이 고작일 정도로 매우 빈약하였다. 부산 시민 회관은 부산 최초의 본격적인 연주회장으로 부산 연주 문화의 질을 한 차원 높여 주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동란기 및 여명기의 음악 활동을 크게 성악, 기악 독주, 실내악, 관현악, 창작·평론 분야로 나누어 고찰한다.
1. 성악 분야
성악 분야는 드라마틱 테너로 알려진 김호민, 학구적인 리릭 테너였던 고태국을 비롯해 김진안·박용흡·하규한·김창배·이안드레아·오명룡·이은숙 등이 의욕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개인 독창회뿐만 아니라 합창과 오페라 공연에서도 활약을 보였으며 박용태는 부산학생연합합창단을, 김호민은 부산합창단을 각각 이끌었다.
부산 최초의 오페라 공연은 1951년 부산 극장에서 막을 올린 김대현의 「콩쥐 팥쥐」이다. 피난 시절의 어려운 상황을 감안할 때 분명 하나의 음악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1961년 10월 초량의 천보 극장에서 열린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무대 장치나 의상도 없이 김창배의 지휘에 피아노 반주[제갈삼]만으로 이루어진 연주회 형식의 공연이었으나, 오직 부산 음악인에 의해 기획되고 연주된 자생적 오페라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때 참가한 부산 음악인들로는 박용흡·박형태·김석준·팽승백·서일선·김봉임·서영숙·이은숙·이영자·김경애 등이 있다.
1953년에는 시민 음악회, 교육 음악 감상회, 사라호 태풍 음악회 등이 열렸고, 1957년에 조직된 에올리안합창단은 일선 음악인들이 음악 문화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창단되었으며, 주요 단원은 최인찬·김창배·김진안·박용흡·고태국 등이었다. 에올리안합창단은 순수한 고전 음악에서부터 경음악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고, 편곡은 주로 이상근(李相根)과 유신이 담당하였다.
2. 기악 독주 분야
해방 전부터 10여 회의 독주회를 비롯해 음악인 교육, 초기 오케스트라 운동을 꾸준히 펼친 바이올리니스트 김학성, 음색이 고운 배도순, 아카데믹하고 섬세한 기교의 전희봉, 노력가 김호현, 시향 콘서트마스터로 활약한 김진문, 서정적인 소프트 톤의 임문규 외 임유직, 전명희, 유영희가 있고, 부산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로 많은 공연 곡목의 트레이너를 한 한병함의 플루트 독주회, 박성옥의 아쟁 독주회가 있었다.
피아노 독주로는 테크니션 김금희, 최정순, 재동으로 알려진 백건우, 주혜정, 유은숙, 김성수, 유영자, 김화자 등이 있었다. 특히 강수범은 초기부터 수많은 독주, 독창 등의 반주를 하였으며, 「불의 춤」 독주가 유명하다. 제갈삼은 소나타의 독주나 바이올린 소나타의 2중주, 오페라 전곡의 피아노 파트 협연, 수많은 독주 및 독창회의 반주를 하였다. 김신덕·석신행·정에스터·이금숙·배영란 등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부산 출신은 아니지만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아카데믹한 독주 독창 반주로 협연이 많았던 인물로 이경희·정우영·이득호·김삼룡·김준태·전인숙 등을 들 수 있다. 이춘근은 날카로운 청각에 의한 정확한 조율로 고물 피아노를 재생시키거나 음악회에서 헌신적인 조율을 협력하여 많은 공을 남겼다.
3. 실내악·관현악 분야
부산 최초의 실내악 공연은 1951년 미 공보원에서 가진 부산현악4중주단 창단 연주회였다. 부산현악4중주단은 배도순·김광수·백경준·윤이상(尹伊桑) 등에 의해 결성된 것으로 이후 실내악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 1954년에는 부산 최초의 피아노 트리오인 부산피아노트리오가 구성되어 부산 일보 프레스 홀에서 창단 연주회를 가졌다. 부산피아노트리오에는 제갈삼·김진문·배종구 등 중진 연주가들이 참가하였으며, 이들은 레퍼토리에 반드시 부산 작곡가들의 작품을 포함시켜 연주함으로써 부산 작곡계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킴은 물론 특히 지역 음악 문화를 선도하는 선구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어 1956년에는 현악 주자로 구성된 뮤직클럽이 연주 활동을 펼쳐 모두 7회의 공연 기록을 남겼다. 이외 부산실내악단, 프렌드실내악단, 아카데미현악4중주단이 활동하였다.
관현악 부분에는 1956년 부산대학교 학생 50여 명을 단원으로 부산대학 관현악단[지휘자 오태균]이 창단되었고 1958년 부산 연주가들과 해군 군악대원들로 구성된 부산관현악단[지휘 김준덕, 악장 전희봉]이 창설되었다. 1960년에는 KBS 부산방송국에 의해 부산방송교향악단[지휘 한병함, 악장 김진문]이 결성, 바야흐로 관현악단의 춘추전국 시대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인적 자원에 따른 부작용으로 부산대학 관현악단과 부산방송교향악단이 병합하여 부산교향악단[상임 지휘 오태균, 부지휘 한병함, 악장 김진문, 부악장 임문규]을 창단하였다. 이는 1962년 오늘의 부산시립교향악단을 탄생하게 하였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은 부산에 비로소 정규 교향악단 시대를 열고 이후 교향악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4. 작곡 분야
작곡 분야는 이상근·유신·김국진·최덕해·최인찬·함시순·안일웅·한병함·김동조·강순희 등이 활동하였다. 1960년대 전반까지 해외에서 활동하던 윤이상·우종갑과 국내에서 활동을 하던 이상근·최인찬이 중심이 되었다. 윤이상은 부산을 떠난 후 서울에서 가곡집 『달무리』, 「피아노 3중주」 「현악 4중주」 등을 발표·출간하였고, 동양적 철학 사조에 의한 작품들로 유수한 음악제에서 입선하여 호평을 받았다.
우종갑은 일본에서 질 높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이상근이 1953년 부산 최초의 실내악 발표회를 개최하고 1958년 한국 최초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관현악 발표회를 갖는 등 한국 음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또한 부산의 뮤직클럽 발표 때 「소프라노와 현악 합주를 위한 세 폭의 그림」, 「피아노 3중주 제1번」을 선보였고, 그 후 서울에서 「한국 선율에 의한 서완조」,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등을 발표하였다. 최인찬은 12음 기법을 이용한 현대 감각의 점묘풍 작품을 잘 썼는데, 뮤직클럽 연주 때 이색적인 가곡 네 편과 「현악 4중주곡 제1번」을 발표하였고, 그 후 서울에서 「플루트 소나타」, 「목관 4중주곡 제1번」 등을 발표하였다.
이상근은 1974년 부산 최초의 작곡가 그룹인 향신회를 조직하여 문하생이던 하오주·김동조·김종태·최인식 등과 함께 민족 음악과 향토 음악의 전통을 수립하였고 제2세대 작곡가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평론 부분은 다른 분야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열악하였다. 오태균[지휘자]·유신[작곡가]·김점덕[성악가] 등 비전문가나 일간지의 기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부산 음악 평단 현상은 1980년대 말까지도 지속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괄목한 성장을 보인다. 1970년 10월 부산시립합창단, 1973년 3월 부산소년소녀합창단이 전문 합창단으로 조직되었고, 1973년 10월 부산 시민 회관 대강당의 개관으로 각종 연주 활동이 폭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설 오페라단인 부산오페라단과 나토얀오페라단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부산 음악계의 상황은 1980년대에 진입하면서 뚜렷한 성장을 예견하게 하였다.
[성장기: 1980년~1988년]
군사 정권에 의한 암울한 시대상을 극복하려는 민주적 열망이 드높았던 성장기의 음악 분야는 우선 1980년에 경성대학교 음악과, 1981년에 동의대학교 음악과, 부산대학교 국악과가 잇따라 신설되어 기존의 각 대학교 음악과들과 함께 부산의 본격적인 대학 음악 교육 시대가 열렸다. 정규 교육을 이수한 음악 전공자들이 대거 프로 집단에 진출하며 부산의 전문 악단 시대를 형성하였다. 이에 상응하여 1983년에 경성대학교 콘서트홀[600석], 1988년에 부산 문화 회관 대강당[1,716석], KBS 부산 홀[4,388석], 가톨릭 센터[234석], 가은 아트 홀[100석] 등 연주 공간의 다변화가 현실화되었다.
1. 한국 음악을 향한 움직임
1980년대의 부산은 서구에서 음악 공부를 마친 귀국 유학생들의 활동 무대였다. 세 개의 창작 그룹이 형성되었다. 1982년에 향천회(響泉會), 1983년에 부산작곡가협회와 영남작곡가협회가 그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향신회와 더불어 창작 음악계의 절정을 이루었다. 향천회의 주요 회원은 정원상·조희주·최삼화 등이었고, 한국작곡가협회 부산직할시지부라는 공식 명칭으로 창단된 부산작곡가회는 조희주·최삼화·김수정 등 47명에 이른다. 그리고 한국작곡가협회 대구직할시지부로 출발한 영남작곡가협회는 부산·마산·대구·창원·안동 지역의 작곡가들을 두루 포괄한 창작 조직체로 김희영·권태복·최인식 등 130명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80년대의 부산 창작계는 한국 음악계의 정체성 찾기로 요약된다. 부산 작곡가들은 먼저 서양 음악의 3대 요소인 선율·리듬·화성 가운데 화성이 한국의 전통 음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화성이 한국적 음악과 비한국적 음악을 구분 짓는 기준점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당연하게도 한국적 화성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점차 한국적 선율이나 음계 같은 음악적 재료들에도 깊이 천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돋보이는 부산 작곡가들은 이상근·김국진이었다.
이상근은 윤이상·나운영과 함께 한국 양악 2세대를 주도하여 양악 1세대의 진부한 창작 태도와 양식에서 탈피하려고 애썼다. 이상근은 새로운 서구의 음악 언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전통 음악과의 접목도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동서양 악기의 만남을 의도한 「조우(遭遇)」 시리즈를 비롯하여 가곡·피아노곡·합창곡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부드럽게 혹은 진지하게 한국적인 것으로 모색하였다.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은 전통 음악적 소재를 바탕으로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을 표출하였다.
김국진은 대학이라는 제도권 밖에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한국 음악 창출을 고민하는 부산의 재야 작곡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나 6·25 전쟁 이후 부산에 정착하여 모든 장르에 걸쳐 2,000여 곡이 넘는 방대한 작품과 무려 30여 권의 작곡집을 남기고 있다.
2. 연주 단체의 용트림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들은 부산 연주 문화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부산대학교 김영희 교수[바이올린]가 한 예이다. 김영희는 실내악 활동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였던 1985년에 부산신포니에타를 창단하여, 1996년 창단 10주년 기념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경성대학교 임병원 교수[바이올린]는 1988년 결성된 뮤즈앙상블을 만들었다. 오충근[바이올린], 조현선[피아노], 이유미[첼로], 홍성택[클라리넷], 김정은[비이올린], 김동조[바순], 박찬엽[플루트], 박종관[오보에] 등이 주요 멤버였다. 부산관현악단은 신라대학교의 유호석 교수[바이올린, 지휘]가 1981년에 창단한 오케스트라이다. 부산관현악단의 탄생은 부산시립교향악단을 제외하면 오케스트라 활동이 전무한 상황이었던 당시를 고려할 때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도약기와 침체기: 1988년~현재]
통일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움트는 동시에 한국 음악의 국제화·세계화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는 시기이다. 구미(歐美)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제3 세대 음악가들이 스승들과 함께 부산실내악협회[1992]를 창립하고 실내악 축제[1995]를 개최하였다. 부산피아노연주가클럽[1996], 부산피아노듀오협회, 독우회는 개인 혹은 공동 연주회로 피아노 음악의 진수를 선보였다. 그랜드오페라단, 윈드앙상블, 민간 직업 오케스트라, 직업 합창단과 부산 국제 합창제[2005~현재], 부산 현대 음악제[1992~1997]의 작곡 콩쿠르와 수상자 연주회, 부산 국제 음악제[1990~1995]와 부산 이바하 페스티벌[1996~현재]의 국내외 유명 연주가들의 무대는 신생 민간 공연 기획들과 협력하며 모든 장르의 음악을 세계적 차원으로 높여 소개하였다.
비평 활동도 활발하고 능동적 청중도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음악학자들이 민족음악학회를 발족하고[1991] 연 2회 학술지 『음악과 민족』[등재지]을 발간하며[2012년 현재 43호] 부산 서양 음악의 교육, 연주, 비평, 창작의 역사와 현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부산 음악가를 조명하였다. 동아대학교 대학원 협동 과정 음악 문화학과[2000년 개설]는 국내 처음으로 음악을 문화 이론, 문화 인류학, 동서양 지성사, 예술 기획 및 경영의 차원까지 넓혀 가며 학제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확대된 음악 지평과 이론과 실제의 균형 잡힌 발전이 서양 음악의 첫 절정기를 맞이하게 하였다.
2000년대 후반 서양 음악은 급속하게 위축되었다. 이것은 입학생의 절대 수 감소에 의한 대학 음악 교육 기관들의 침체와 위기, 연주가[단체]들의 매너리즘, 무엇보다 달라진 부산 청중의 음악 취향 때문이겠다. 그리고 음악의 역동성을 선호하는 이 새로운 청중은 부산을 콘서트, 뮤지컬, 오페라 같은 대형 공연 시장으로 탈바꿈하게 한다.
부산 국립 영화의 전당 하늘 연극장[2011], 벡스코 오디토리움[2012] 등 첨단 대형 공연장과 소향 뮤지컬 센터[2012] 같은 뮤지컬 전문 공연장의 개관, 부산 문화 회관과 부산 시민 회관 대극장의 리모델링을 통한 문화 시설의 인프라 확충과 상응하는 수준 높은 공연 기획이 이러한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한 것도 분명하다. 머지않아 완공될 부산 국립 아트 센터와 오페라 하우스가 청중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서양 음악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데 기여하길 기대한다.